2007. 8. 5. 15:11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 고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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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들어갈수록
빗줄기와 바람 사이를 떠도는 진한 소나무향이 코끝에 감겨온다.
제법 굵은 소나무 한 그루를 끌어안고
수액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려 애써 보지만
흐려진 내 귀에는 소나무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나무의 숨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아직 세상을 다 잊지 못한 거라고
한 시인이 말했던데,
도대체 이 세상을 다 잊는다는 일이 잠시라도 가능한 걸까.
물소리와 빗소리가 경계를 지우며 뒤섞여
귓전으로 걸어들어 온다.
대청마루에 ?아 있자니 문득 찾아온 지나간 얼굴 하나.
이곳으로 오는 길 내내, 비를 맞으며 숲길을 걷는 동안에도 떠나지 않던 얼굴.
함께 걸었던 무수한 길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앞에 펼쳐지고, 함께 보았던 것,
나누었던 모든 기억들이 아우성치며 달려들어,
소나무 숲길을 걷는 내내 어지럽고 슬프고 아련했었다.
이 아름다운 숲길을,
예전에 그랬듯이 누군가와 말없는 공감을나누며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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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 뱃사공아 날 좀 건네주오 /
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
잠시 잠깐 님 ?워서 나는 못 살겠네
슬픈 이야기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우스운 대목에서는 듣는 이의 반응에 따라
속도와 완급을 조절하며
자유자재로 이어지는 어머님의 이야기 솜씨는
거의 인간문화재급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고개가 시작된다.
이제 계곡은 멀어지고 산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맵고 맑아진 공기와 소름이 돋을 만큼의 추위가
산속 깊이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길은 점점 높아지고, 높아지는 만큼 가파르게 굽어진다.
저 멀리 올라온 길과 내려가야 할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다.
이렇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쯤이면
걷는 동안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수많은 생각의 갈피들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머릿속이 말갛게 비워진다.
아무런 상념도 없이 무심하고 담백한 눈으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이 찰나의 비워짐을 잊지 않는 한,
걷는 행복을 포기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나의 부재를 견디고 기다려주는 이들 중에
이제 익숙했던 한 사람의 얼굴은 없다.
얼마나 더 멀리, 혼자 걸어가야
그 한 사람의 부재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오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나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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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
아직 세상의 정면만을 바라보던 시절,
청평을 지나 춘천으로 가는 경춘선 열차에는
청춘이 버겁던 우리들.
우리들 웃음이 알밤처럼 툭툭 터지곤 했었다.
"살기 팍팍하면 담배나 한 보루 사들고 내려와
우리 어머니 곁에서 하룻밤 쉬었다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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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하다.
반짝이며 날아오르는 반딧불이 몇 마리가 빛을 보탠다.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밤이다.
어머님 등을 주물러드리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살은 없고, 뼈마디만 아프게 잡혀온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이렇게 자신의 몸까지 자식들을 위해 다 바친 후,
먼지 날 것처럼 푸석푸석해진 몸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는 걸까.
이 강변에 꽃 피고 잎 지고,
눈 내리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새벽 강가에 혼자 나온 이들이 흘렀을 눈물과
아픔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강물 위로 내쉬어졌을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눈이 아프고 귀가 먹먹해진다.
나라는 사람은 어째서 자신이 잃고 난 후에야
다른 이의 아픔을 보이는 걸까?
세상에 나와 내가 아프게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고픈 새벽이다.
"고건 며느리밑씻개여. 고마리하고 비슷헌디.
까실까실한 놈이 며느리밑씻개여.
이름도 얄긋제?"
언젠가 책에서 며느리밑씨개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어느 봄날, 밭에서 김을 매던 시어머니가
밭두렁에 주저앉아 급한 볼일을 보게 되었다.
밑 닦을 요량으로 뒷전에서 아무 풀이나 쓱 뽑는다는게
그만 이 까실까실한 잎이 걸렸던 게다.
"에그머니, 따갑기도 해라. 요런 건 며느리 미 닦을 때나 걸릴 일이지 .... 쯧쯧"
봄볕은 며느리 쪼이고, 가을볕을 딸내미 쪼인다는 바로 그 가을볕이다.
지도책을 펼쳐 길을 찾는 즐거움이 내 생활에 배어들고 있다.
도로 교통지도 책을 펴 놓고 색이 칠해지지 않은 길,
가장 좁고 휘어진 길을 찾아가는 즐거움.
거리를 가늠해 보고, 길 모양을 상상해 보고, 고도를 짐작해 보며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는 순간, 여행은 이미 시작된다.
살면서 이렇게 배낭 하나 꾸릴 수 있을 만큼의 짐만을 소유하며 산다면
삶이 조금은 가벼워질까 상상해 보기도 하고,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들,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해 가는 과정은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한때는 꽃을 사모도 했으나 이제는 잎들이 더 가슴에 사무친다."
곰배령에서 강선리로 내려오는 길은 '환상의 단풍길'이다.
무성한 햇빛이 숲 사이를 골고루 비추고,
바람의 손길에 몸을 맡긴 잎 넓은 나무들은
곧 다가올 북풍한설의 날들을 아는지
제 몸을 사르며 타오르고 있다.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아룸다운 단풍을 본 적이 있었는지.
이 길을 이렇게 우리만 걸어도 되는 건지.
앞으로 남은 내 삶에서 이런 장관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누구에게인지 모를 고마움이 자꾸 솟아오른다.
"너무 예쁘다."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언어가 표현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깊이는 얼마나 얕고 가벼운가.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부서지고 쪼개져 파편화된 풍경의 '흔적'일 뿐이다.
쉽게 다가가 쉽게 얻어지는 풍경들에는 감동이 없다.
"저 나무 참 예쁘지요?" 라고 묻던 아이들.
나무를 보고 "예쁘지요?" 라고 물을 줄 아는 그 마음이 더 예뻐
내 마음은 젖어들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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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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