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2007. 7. 13. 07:54음악/영화. 영화음악

  


       2007년 상반기에 꼭 봐야 할 영화....

 

 
 

    조용히..
    
    숨소리마저 멎은 곳에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회색톤의 벽과 차가운 공기
    유럽인 특유의 동굴같은 눈..
    그 안을 가득 채우는 공허한 그림자..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서로 갈라진 동독의 현실 속에
    영화는 줄곧 어두웠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진실로 이해하는 순간이
    그리고 이해받는 순간이

    아주 느리게
    느리게 전개되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감동의 물결.....

    조용하고 진지한 영화지만
    137분이 결코 지루하지 않는 영화
    플로리안 헨켈 본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

    2007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상을 수상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이 영화는

    냉혈한이던 비밀경찰 비즐러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를 지켜보게 되면서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선한 관음증
    을 모티브로 한 영화 {타인의 삶}

    차갑고 어두운 공간에 홀로 앉아
    도청하려고 낀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OST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타나}

    하늘의 별보다도 더 고운 선율을 타고
    암울한 삶 속에 내재된 슬픔은, 눈물젖은 글자처럼 번져오고..

    우리가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등장인물을 응원하는 것처럼

    비즐러도 '타인의 삶'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처지에 부드럽게 굽이치며 이심전심으로 동화되어 가지요.

    이념까지도 뛰어 넘는 인간애는
    우리 관객들에게 따스한 위안을 주며
    사람이 왜 꽃보다 아름다운지를..
    버들가지 흔드는 산들바람처럼 가만가만 알려줍니다.


    /


    감독은 1980년대의 동독을 재현하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고
    그 시대의 비밀경찰과 피해자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4년이라는 준비기간을 거쳤다고 합니다.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배우들의 눈부신 열연과
    신인감독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탁월한 연출력이 더해져
    독일 아카데미 최다 부문 수상에, 최우수 외국영화상에까지 오른 이유를
    달리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아주 훌륭한 영화였어요.

    주인공 울리히 뮈흐
    군더더기 하나없이 절제된 카리스마는
    그의 강렬한 눈빛과 어우러져, 숨막히는 긴장감과 함께
    무한한 감동을 주면서 영화를 넘치도록 세련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


    어릴 적 저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에 관한 글을 읽으면
    아.. 나도 이담에 커면 이렇게 살아야지... 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만큼 살아보니
    신념을 지킨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더구나 남을 위해 내 삶을 포기한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절감하기에..
    더더욱 이 영화가 더 길게, 더 깊이 각인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런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런 실수를 하고도 외면하진 않았는지...
    나는 내 중심에 잘 서 있는지...
    나는 ...
    나는 ...


    /


    시대의 공허감,
    인생에 대한 공허감,
    예술과 시대에 대한 공허감,
    시대와 타협하며 예술을 해야만 하는 공허감,
    정세변화에 따라 꿈틀거리는 동독사람들의 삶의 공허감,

    그러나
    공허감보다는 인간 본연의 자유를 향한 휴머니즘을 담아내며

    살아가는 동안, 진정으로 내가 지켜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기대 이상의 큰 울림을 가져다 준 타인의 삶

    이런 것이 바로 명화다!

    외칠 수 있을 만큼
    별 다섯개의 최고 평점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참 신기한 일이지요?
    영화 한 편으로 지구의 모든 사람들과 이렇게 소통이 가능한 일이라니...

    갑자기
    세상엔 참으로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일들과
    쓸데없이 소모되는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계절이 떠나가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로
    저는 이 영화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
    제동생..아이시떼의 작품입니다~~~*^^*
    좋은 영화니..꼭봐야겠죠???

    2007/5/26 아이시스





    스비리도프♬Old Romance 





 




.










- 아래는 네이버에서 퍼옴.-

 

 

Das Leben der Anderen

 

 

2003년 개봉된 영화 <굿바이, 레닌!> 이후로 가장 인상깊었던 독일 영화였다.

흥미롭게도 <굿바이, 레닌!>과 <타인의 삶> 두 영화는 모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후의 역사적 시점을 배경으로

동베를린에 살던 구동독의 사람들을 삶을 다루고 있다.

독일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하여 7개 수상 부문 모두 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가장 주목했던 적재적소의 부분들이었다. 

영화 감상을 마친 후 수상 내역을 보니, 적확하게 골라내어 정당하게 치하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해졌다.

인터테인먼트 아닌 드라마로서 영화의 본령을 상기시켜준 이 작품은 최우수 작품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연기'라는 말을 쓰기 미안할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화신 같았던 뛰어난 배우들,

특히 웬만한 연기파 헐리우드 배우들은 실상 인터테이너였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칠만큼

내면적 완성도에 충실하고 절제된 존경할만한 연기를 보여준 게르트 비즐러 역의 울리히 뮈에는 남우 주연상을,

게오르크 드라이만 역의 세바스티안 코흐는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그 자체로 문학적 짜임새를 획득하고 있는 독일어 시나리오는 각본상 수상으로 치하되었고,
그 시나리오를 탄탄하고 짜임새있게 엮어낸 편집에는 마땅히 편집상이 주어졌다.
시나리오와 편집의 응집력은 역시 절제된 긴장감을 잃지 않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더욱 빛났다.
응당 촬영상이 돌아왔다.

 

 


* * *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고 들었다.
구동독 지역에 위치한 도시인 이곳 라이프치히의 영화관,

내가 이 영화를 관람한 영화관으로부터 걸어서 불과 10여분 거리에는 구동독 국가안보부인 슈타지(Stasi) 박물관이 있다.

전 독일에 단 한 군데, 이곳 라이프치히에 구동독 비밀경찰의 현장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다.

영화에서 본 디테일 하나하나가 바로 이곳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2001년 보수를 전면적으로 다시 해서 말끔한 모습으로 거듭 났지만 1966년에 건축된 사회주의식 건물이다.

비즐러가 살았던 아파트처럼 전형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벽면 전체가 트인 창문 등 내부 구조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비슷한 구석이 있어 낯이 익다.

나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한 평생 중 구동독의 시절을 더 오래 살아오셨던 나이드신 동독의 옛주민들을 대한다.

그런 내게 <굿바이, 레닌!>과 <타인의 삶>을 보는 공감대와 감회는 남달랐다.
배우들의 말투와 표정, 태도 구석구석에서 이곳의 낯익은 얼굴들이 끝없이 오버랩되곤 했다.

그런 개인적인 감상은 차치하고라도,

이 두 영화 모두 무엇보다 주옥같은 구성과 문장을 가진 문학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다른 차원이 실린 관람의 묘를 주었다.

독일의 영화관에서 물론 자막없는 독일어로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후, 문득 한국어로는 번역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국문 자막이 삽입된 동영상을 구해서 보았다.

응집력과 뉘앙스를 살리기는커녕 내용 전달의 기본적 임무마저도 부실한 오역으로 가득한 자막,

도대체 왜 그렇게 건드려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던 가위질,

이런 자막과 가위질이 국내 영화관 상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문 자막이 삽입된 동영상을 보고 난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내게는 유난히 장면 장면 하고 싶은 얘기들이 끝이 없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는 글은 기약없는 훗날으로 미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가장 심했다고 생각된 오역과 가위질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하려 한다.


 


 

우선 한국에서 전면 뜯어고친 포스터.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카피를 쓰고 새로 디자인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포스터 디자인을 공공 '시각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때, 이 포스터는 이미 '시각적인' 차원의 오역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따위의 진부한 카피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언급하기조차 진력이 난다.
그들의 삶을 '훔쳤다'는 과도한 표현은 도발성만을 의도했는지 영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5년간 내 삶이었던'에서 '5년'은 대체 어디서 나온 기간인지 모르겠다.
비즐러가 심문을 하는 첫 장면은 1984년 11월이 배경이다.

즉 그 이후에 비즐러가 드라이만을 도청하고 감시하기 시작한 시점은 최소한 1984년 11월 이후가 된다.

비즐러가 도청과 감시를 그만두고 좌천되는 날은 1985년 3월 11일이다.
그의 상관 그루비츠는 국가안보대학의 교수이자 중대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던 비즐러의 경력은 이로써 끝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비즐러가 은퇴할 때까지 25년이나 검열할 편지의 겉봉을 증기로 여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그루비츠는 말한다.

그루비츠가 그 말을 하고 비즐러의 차에서 내리는 순간 비즐러는 그루비츠가 깜빡 놓고간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게된다.

1985년 3월 11일자인 그 신문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소비예트 공산당 신임 당서기장에 미하일 S. 고르바초프 선출

 (Neuer Generalsekretär der KPdSU gewählt : Michail S. Gorbatschow)"


소련 공산독제체제의 종말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다시 국문 영화 포스터의 카피로 되돌아가서,

드라이만과 그의 동거녀인 여자친구 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의 삶에 비즐러가 실질적으로 그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하고 기록하며

함께 했던 시기는 5년이 아니라 불과 4개월도 채 못 되는 것이다.
기본적인 조형적 판단력조차 의심되는 포스터의 디자인은 카피보다 한층 이미지적인 곡해가 심하다.
우선 독일의 포스터를 보면 비즐러와 드라이만 커플은 각각 분명 다른 공간에 위치해 있지만 전적으로 단절되어 있지는 않다.
대본에는 Schutzengel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굳이 번역하자면 조금은 진부하게 들리지만

 '수호천사' 정도의 의미로, 독일어에서는 보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 포스터에서 비즐러의 모습에는 '감시자'인 동시에 그들을 보호하는 '수호천사'의 얼굴이 담겨있다.

울리히 뮈에의 표정은 그 아이러니컬한 중의성을 모두 함축한다.

반면 국문 포스터에서는 하얀 라인까지 동원해서 이들을 완전히 격리시키고 말았다.

타이포그래피의 문법 역시 조금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독일의 포스터에서는 어두운 배경, 그들의 암울한 상황으로부터 하얀 글자들이 빛나고 있다.

제목을 비롯해서 주연과 조연 배우들의 이름, 비즐러의 국가안보부 요원명 HGW XX/7은 모두 타자체로 쳐져있다.

타자기는 이 영화에서 드라이만과 비즐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자기의 글자체로 타자된 내용과 드라이만의 삶이 오버랩되는 뛰어난 장면을 상기하면

이 타자체가 영화와 포스터를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엮어내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독문 포스터는 강렬한 빨간 지문을 포인트로 마무리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현재 라이프치히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에리히 뢰스트의 예를 언급하고싶다.

에리히 뢰스트 역시 동독 국가안보부에 의해 본의 아닌 전대미문의 개인기록을 남겨받았다.

에리히 뢰스트는 자신에 관한 슈타지 문서를 추려서 책으로 출간하기까지 했다.
책의 제목은 <슈타지는 나의 에커만이었다 혹은 도청장치와 함께 한 나의 인생>

여기서, 에커만은 <괴테와의 대화>라는 저서를 남겨, 자기자신보다는 괴테의 기록을 충실히 전한 인물로 문학사에 남은 작가이다.

비즐러 역시 짧은 시간이나마 드라이만의 에커만이었다.
조금은 맥락을 달리하는 에커만.

그는 드라이만의 삶을 함께 살며 그 극작가와 함께 본의 아니게도 자신의 '작품'을 썼다.

빨간 글씨의 HGW XX/7과 지장은 그 '작품'을 끝맺으며 남긴 그의 서명이기도 했다.
이 빨간 잉크는 드라이만에게 진실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고,

비즐러의 '작품'은 극작가 드라이만에 의해 완성되어 다시 비즐러에게 바쳐졌다.

드라이만이 출간한 저서의 제목은 '착한 사람의 소나타 (Die Sonate vom Guten Menschen)'

이 모든 함축적인 내연들이 국문 포스터에는 안타깝게도 전면 삭제되어 있다.




# 장면 하나




'착한 사람의 소나타 (Die Sonate vom Guten Menschen)'
드라이만의 생일에, 연출가 예르스카가 선물한 피아노 악보이다.

예르스카가 구동독 체제의 정신적 육체적 속박에 괴로워한 나머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드라이만은

이 악보를 다시 상기한다.
이 곡의 제목 '착한 사람의 소나타'는 훗날 드라이만이 저술하는 책의 제목이 된다.

드라이만이 예르스카의 자살 소식을 듣기 바로 직전의 장면에서,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가져온 노란 표지의 브레히트 시집을 읽는다.

비즐러가 브레히트의 시 한편을 읽는 장면은 드라이만의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드라이만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감화를 받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브레히트의 시집은 예르스카가 드라이만의 생일날 읽고 있던 책이기도 했다.
브레히트의 이 책은 이렇게 예르스카-드라이만-비즐러를 엮어내고 있다.




이 장면의 배경으로는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착한 사람의 소나타'의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브레히트의 희곡 한 편의 제목이 떠오른다.
'사천의 착한 사람 (Der gute Mensch von Sezuan)'
착한 사람을 더이상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하는, 그런 사회를 다룬 희곡이다.




그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체제에 묵묵히 충직했던 비즐러였다.

착한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하는 그런 사회 속에서, 그래서 예르스카를 자살으로 이끌었던 사회 속에서,

비즐러는 나쁜 사람이었던 것일까?




도청장치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은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음악의 감정과 작가의 정신, 그 모두에 완전히 융화된 비즐러의 눈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비즐러는 외부적 체제에 구속되지 않은 자기 내면의 '착한 사람'을 자각한다.
영화 한 중간의 전환점인 동시에 마지막 장면을 향한 이정이 되는 중요한 장면이다.




바로 이 중요한 장면의 오역이 참담하게 가관이다.

오역과 가위질에 대해서는 영화 전편을 걸쳐 조목조목 집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가장 심했던 장면 중에 특별히 이 장면 하나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자막]

드라이만 :
지난번에 예르스카랑 나눴던 대화에 대해 생각해 봤어
그분 말씀을 듣고나서 뭔가 변화를 시도해야 했어
그분이 내가 연주하는 이 곡을 들을 수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내가 뭘 할지 아실거야

이게 무슨 소리고?!

드라이만의 입에서는 자막과 전혀 다른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DREYMAN :
Ich muß immer daran denken, was Lenin von der Appassionata gesagt hat :»Ich kann sie nicht hören,

sonst bringe ich die Revolution nicht zu Ende«
Kann jemand, der diese Musik gehört hat, wirklich gehört hat, noch ein schlechter Mensch sein?

나는 레닌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두고 한 말을 
늘 곱씹어야 했어.
"나는 '열정'을 들을 수가 없다. 그 곡을 들으면 나는 혁명을 끝까지 완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음악을 들은 사람이라면, 제대로(wirklich에 힘을 주어 말한다) 들은 사람이라면,
여전히 나쁜 사람일 수가 있을까?

비즐러는 여전히 나쁜 사람일 수가 있을까?

 


 

도청 장치를 통해 '착한 사람의 소나타'를 듣던 날 늦은 저녁 귀가하는 비즐러.

전형적인 사회주의식 아파트에 앞에 구동독의 국민차 '트라반트'가 주차되어 있다.

구동독 지역인 이곳에서는 2007년에도 여전히 이 차를 '트라비'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향수어린 마음으로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집으로 올라가는 이 엘레베이터 안에서 나누는 꼬마와의 대화는

 비즐러가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의 양 갈래길 중 확실한 궤도를 택하는 계기가 된다.






(원문과 자막은 생략하고, 내가 새로 번역한 국문 대사만 인용해본다.)

꼬마 : 아저씨 정말 국가안보부(슈타지)에 있어요?
비즐러 : 네가 슈타지가 대체 뭔지나 아니?
꼬마 :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두는 나쁜 사람들이예요. 아빠가 그랬어요.
비즐러 : 그래? 이름이 뭐지? 너의... (비즐러 내면의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이 최후의 갈등으로 멈칫한다.)

꼬마 : 나의... 뭐요?
비즐러 : ...공 말이다. (꼬마는 영문을 모른다.)

비즐러 : 네 공의 이름이 뭐냐니까?
(비즐러의 내면적 노선은 여기서 확정되었다.)
꼬마 : 아저씨 웃겨요. 공한테 이름이 어딨어요. (비즐러가 사는 층에 먼저 도달해서 그는 내린다.)


중요한 것은,

비즐러가 내리면서 멈칫 꼬마를 되돌아보는 장면과 꼬마가 비즐러에게 한 마지막 말이 가위질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적어도 편집상을 받은 영화란 말이다.
이 장면 뿐 아니라 군데군데 영문을 알 수 없이 삭제된 부분이 짧건 길건 자주 보이는데 이건 도대체가 가위질이 난도질 수준이다.







이 장면 바로 다음의 짧은 순간이 국문 자막으로 본 동영상에서는 삭제되어 있다.
엘레베이터에 남은 꼬마는 뒤돌아보는 비즐러에게 말한다.

Du bist aber kein schlimmer Mann.
근데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네요.

이 영화 한 가운데의 전환점에서, 이 대사에 맞물려 마지막 대사를 다시한번 상기해보자.

동독과 서독의 통일 후, 한때 구동독 대학의 교수이자 국가안보부의 중대장급 직책이었던 비즐러는

우편배달으로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동요하지 않는다.
이 '착한 사람' 장면을 계기로 겪은 내면적 변화에, 이전 공산독재체제에 그랬던만큼이나 충직함을 보인다.

영화가 마지막을 향해 치달아가면서,

우편배달을 하던 비즐러가 어느 서점 앞에서 드라이만의 신간 서적 광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부터는

결국 내게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착한 사람의 소나타(Die Sonate vom Guten Menschen)'
비즐러는 서점에 들어가 드라이만의 책을 들추어본다.
헌사 페이지에는 비즐러의 옛 요원명이 써있다.
HGW XX/7 gewidmet, in Dankbarkeit
감사를 담아, HGW XX/7에게 바침


더 눈물이 나는 것을 참으려고 눈에 간신히 힘을 주고 있는데, 마지막 직격탄을 날리며 영화가 끝나고 말았다.
책을 구입하려는 비즐러에게 점원이 29.90 마르크(자막에는 유로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며 선물용으로 포장할 건지 물어본다.


비즐러의 마지막 대사.
Nein... es ist für mich 아니요... 이 책은 나를 위한 겁니다.
(어떻게도 이 원문의 다층적인 의미를 모두 포괄할만한 좋은 번역이 잘 안 나온다.)

'나(mich)'라는 한 단어 속에는 '착한 사람 (Der gute Mensch) 비즐러'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니 비즐러는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다.
비즐러에게 바치는 드라이만의 헌정을.
'착한 사람의 소나타 (Die Sonate vom Guten Menschen)'란 이름의 책에 담겨진 헌정을.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Deutsche Parn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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