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9. 18:43ㆍ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서울대 암 병원 18년차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가 만난 암 환자와 그 곁의 사람들, 의사로서의 솔직한 속내를 담은 에세이. (....) 돌아가신 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에게는 기억되는 죽음이라는 것, 나아가 누군가의 죽음이 어떤 이에게는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목차
이야기를 시작하며
1부. 예정된 죽음 앞에서
너무 열심히 산 자의 분노 / 내 돈 2억 갚아라 /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 /
혈연이라는 굴레 / 사후 뇌 기증 / 저는 항암치료 안 받을래요 /
10년은 더 살아야 / 대화가 필요해 / 믿을 수 없는 죽음 / 임종의 지연
2부. 그럼에도 산다는 것은
인생 리셋 / 기적 / 학교에서 잘렸어요 / 잔인한 생 / 아이의 신발 /
오늘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합니다 / 요구트르 아저씨 /
말기 암 환자의 결혼 /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
3부. 의사라는 업
별과 별 사이: 600대 1의 관계 /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 / 파비우스 막시무스 /
너무 늦게 이야기해주는 것 아닌가요 / 3월의 신부 /
윤리적인 인간 / 이기심과 이타심
4부. 생사의 경계에서
각자도생, 아는 사람을 찾아라 /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 : 연명의료 결정법에 대하여 /
울 수 있는 권리 /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 마지막 뒷모습
이야기를 마치며
.
.
1
의사 면허를 딴 지 딱 18년이 되었다.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는 종양내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탓에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봐왔다.
의학의 발전 속도는 눈부셔서 새로운 항암제가 많이 나오고 그 덕에 암환자의 수명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연된 죽음과 늘어난 삶의 시간을 지켜보며 좀처럼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삶의 시간은 더 주어지는데 이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우리는 잘 사용하고 있는 걸까?
..........
그러나 가끔은 환자들의 가르침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
어떤 죽음은 나를 무겁게 짓눌렸고, 어떤 죽음은 몹시 가슴 아프게 했으며, 어떤 삶은 나를 겸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것을 복기하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틈틈이 기록을 남겨 왔다.
라틴어 名句 중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 있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은 내일의 내가 닿을 시간이고, 어떤 죽음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한다.
뜻하지 않게 자신이 떠나갈 때를 알게 된 사람들과 여전히 떠날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
누군가의 어제는 우리의 오늘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오늘은 또 다른 이의 내일에 영향을 미친다.
삶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는 이어져 있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 다른 이의 삶에 작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진 빚을 비로소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전하는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아서 강신에게 바친다.
2021년 1월, 김범석
2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있게 살아 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자신이 안아드는 것이다.
기대여명(餘命)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머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남은 날은 ○○일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3
나는 간혹 환자 곁에 있는 보호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한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가요?"
"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4
잴코리라는 표적항암제가 악성림프종에 그렇게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 못했다.
잴코리는 의학교과서를 바꿔놓는 치료법이 되었고 논문도 출판되었으며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5
PET / CT : 암세포의 위치나 활동 정도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양전자 단층촬영검사.
6
'극단적 장기 생존자' : 암 환자임에도 극단적으로 오래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컨디션이 좋기 때문에 입원하지 않는다. 이런 환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관리도 잘한다. "내일 죽어도 여한 없어요. 치료는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받으면 되고 즐겁게 살다가 때 되면 가면 돼요."
7
"제가 기다려 보니 한 시간 동안 선생님 외래로 들어오는 환자가 10명 정도 되더라고요. 외래가 월 수 금이던데, 일주일에 외래 보는 시간이 20시간 정도라고 할 때 그러면 일주일에 200명 보시는 게 되더군요. 이분들이 대략 3주 간격으로 온다고 하면 선생님이 보시는 전체 환자 숫자가 한 달에 600명 정도 되나요?"
"600명 환자 다 기억할 수 있으세요? 선생님에게는 제가 600명 중의 한 명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선생님 한 분뿐이거든요."
모든 환자에게 부모자식에게 하듯이 정신과 마음을 쏟아버리면 의사는 온전히 버틸 수 없다. 그래서 의사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으로 환자와 적절한 거리를 찾는다. 그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가족 같은 의사'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8
'No more chemo, supportive care only, end of life care planning.'
(항암치료가 더는 어렵고 이제는 호스피스 완화 의료로 넘어가야 한다.)
미국사람들은 보통 항암치료를 사망 6개월 전까지 받는다. 즉 그들은 삶을 정리하는 데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에 반해 서울대병원 통계상에서 환자들은 사망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항암치료를 제일 빡세게 하는 나라이고, 여기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충번한 시간을 갖고 삶을 정리할 준비를 한다고 봐야 한다.
"항암치료의 of the chemo, 항암치료에 의한, 항암치료를 위한!"
9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것, 이 삶을 느끼지 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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