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2020. 12. 1. 18:29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  이병률 시집  | 2020. 9. 1.

 

 

문학동네시인선 145번째 시집

이병률 시인의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로 우리에게 찾아와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등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한편,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병률 시인이 3년 만에 내놓는 신작 시집이다.

이 시집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시화한 시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별과 슬픔을 다룬 그 시어들은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시인은 슬픔이 가진 폭넓은 스펙트럼을 우리에게 펼쳐내 보인다.

그것은 발문을 쓴 서효인 시인의 말처럼

그가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감정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그 감정을 긴 시간 들여다봤다는 뜻도 된다.

바로 그 일, 사물과 사람을 사려 깊게 살피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일,

그리하여 감정을 감각하는 일은 이병률 시인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일은 좋은 시를 쓰는 일과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병률 시인, 방송작가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산문집 '끌림' 등이 있다.

아베르 피에르 신부의 어록 '피에르 신부의 고백'의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는 일


눈물이 온다/ 슬픔이라는 구석/ 사라지자/ 겹쳐서/ 아무도 모르게/ 지나가는 바람/ 얼굴/ 나는 하루 한 번 북극 항로를 지난다/ 방향의 감각/ 한 사람이 남기는 것은, 오로라/ 서로/ 사랑/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단추가 느슨해지다/ 오시는 마을/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

2부 나무상자 하나를 구해야 한다


적당한 속도, 서행/ 숨/ 사람의 금/ 끝/ 틀/ 셋이서 사는 게 좋겠다/ 경유지 방콕/ 옥탑방/ 글씨들/ 칠 일/ 꽃비/ 쓸쓸한 날에는 바람만 불어라/ 바닷가에서/ 한 장의 사람/ 다시 태어나면/ 상해식당/ 눈이 부셔라

3부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리라


빈집 식물에 물 주는 사람/ 형은/ 새/ 나의 장례식에 가서/ 가을날/ 여행/ 눈물이 핑 도는 아주 조용한 박자/ 풀리다/ 시(詩)칼/ 자유의 언덕/ 문장/ 집/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의문/ 갈급에게


4부 좋은 일을 가져다주는 종이


달에 갈 때는 인생을 데리고 가지 말자/ 애인/ 미용사가 자른 것/ 제주 바다 문어/ 잘 쓴 글씨/ 좋은 일/ 정물/ 비밀이 없으면 우리들은 쓰러진다지/ 셔츠 주머니/ 풍경을 앓다/ 부산역/ 세상의 끝/ 실/ 그럼

발문| 이별 여행 | 서효인(시인)

 

 

책 속으로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슬픔이라는 구석」에서

 


함부로 내일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무서워할 것들을 수군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여전히 둥글게 좁혀 앉은 자리에 자루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자루를 뒤집어쓰고
오래 사랑할 것입니다
신이 그들을 따를 것입니다

소개의 순서가 다 끝났지만
처음 자기소개를 시작한 사람이 다시 자기소개를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자기소개를 하느라 밤이 포개집니다


-「오시는 마을」에서

 



사람은 자신의 비밀을 상세하게 닮아간다지

그 씨 한 톨마저 없으면 우리는 쓰러지지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지


-「비밀이 없으면 우리들은 쓰러진다지」에서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에서

 

 

 

 

어느 미용사가요
할머니 머리를 자른 다음 머리를 감겨드리려는데요
구부정한 허리가 영 뒤로 눕혀지질 않아
잠시 중단하고 커튼 뒤로 가서 엄청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 미용사에게 머리를 자르는 중년의 사내도 있는데요
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오는데
머리 감길 때 작은 수건으로 사내의 눈을 가리면 개가 그렇게 울어요
얼굴을 가리고
혼자 우는 사내의 모습을 본 이후로 개가 그렇대요


-「미용사가 자른 것」에서



시인이 지켜보는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은 없는”(「바닷가에서」) 사람이기도 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애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사처럼 잠시 스쳐지나가는 인연이기도 하다.

“당신을 보려는데 당신이 보이지 않”(「눈물이 핑 도는 아주 조용한 박자」)을 때

슬픔을 느끼는 그가 보고자 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나를 마주치기 위해/ 아주 다르게 하고 오기로 한다”(「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고 말하듯이,

그는 때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기도 한다.

어디에도 글씨 쓰는 사람들은 있지
일을 하다 철판 위에 못으로도 쓰고
창문에 서린 물기에다 쓰기도 하고
그 한 줄이 하루를 받치지


-「글씨들」에서



낯선 ‘누군가’로서의 당신,

혹은 ‘나’를 만나기 위해 그가 하는 일은 바로 ‘쓰기’다.

다르게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쓰기’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특히 낯선 것들을 만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날 수 없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떠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말하는 그의 시는 ...더욱 적절하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떠나고 싶을 때 우리는 낯선 곳을 상상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그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해 쓰기도 한다.

「글씨들」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글씨를 써놓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말하지 말기를”.

그것은 밀가루로 “가지 마요,/ 안 가면 안 되나요”(「상해식당」)라고 쓰는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곧 ‘쓰기’라는 인식에서 발로한 것이기도 하다.

낯선 것들과의 우연한 조우가 빚어내는 감정은 사랑의 격정적인 발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병률은 절절하고 치열한 사랑을 다짐하면서도 이전에 사라진 사랑을 의식하고 있다.

“칠 일만” “완전히 산산이 사랑”한 뒤 “문드러져 뼈마디만 남기고 소멸하겠다”고 말하는

「칠 일」의 마지막 문장이

“다시 시작을 한다고 해서/ 다시 그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인에게 이별의 아픔은 ‘나’를 성숙하게 하는 지점일뿐더러

사랑이야말로 이별의 아픔이 전제되었을 때 보다 깊은 의미를 자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다가올 이별의 아픔을 알면서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냐가 중요해진다.



우리는 어찌어찌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태어난 게 아니라
좋아하는 자리를 골라
그 자리에 잠시 다녀가는 것

그러니 그 자리에 좋은 사람 데려가기를
이번 생에서는 그리 애쓰지 말기를

다만 다음 생에
다시 찾아오고 싶을 때를 대비해
꼭꼭 눌러 그 자리를 새기고 돌아가기를


-「여행」에서



시인은 떠나지 못하고 사랑을 그리워하며 쓰는 우리에게 막연한 낙관을 말하지 않는다.

이번 생에 사랑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쓰기’는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좌절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다음 생을 대비해서 준비하자.

물론 그것은 체념과 동의어는 아니다.

‘다만’이라는 역접이 전제된 준비는 당신과 반드시 만나게 될 미래를 철저히 준비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좌절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고자 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자세다.

슬픔을 요약하지 않고 계속해서 쓰겠다는 의지는 오늘 만나자고 하는 슬픔을 물리치지 않는 태도로 현현한다.

섬세한 마음들은 날카롭게 벼린 ‘시(詩)칼’을 통해 무뎌지지 않게 된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의 마지막 문장이 “그럼, 십이월에 찾아뵙겠습니다”(「그럼」)인 것은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믿음과 연관되어 있다.

그 흔듦의 과정이 이번의 온 생을 점철한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서로가 찾아뵐 ‘누군가’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믿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나’와 당신 사이에 놓인 ‘유리창’(「의문」)과 ‘벼랑’(「미용사가 자른 것」)을 기꺼이 넘어

당신을 찾아가겠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의 시집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기쁨보다 슬픔이 많은 시기, 만남보다 이별이 많은 시기,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안전을 체감하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의 목소리임은 분명하다.

이병률의 시 속에 등장하는 ‘나’들이 모인 공간은

「오시는 마을」의 우리들이 모여 자기소개를 나누는 마을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 서로를 만나는 연습을 하고, 정말로 만난다.

“맨손으로 꾹꾹 눌러 선명히 새”(「한 장의 사람」)긴 글씨에 담긴 각자의 비밀을 들고 서로에게 자기소개를 한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하는 동안에는 슬픔이 잠시나마 분명히 물러날 것이다.

편재한 이별의 슬픔 앞에서 한 권의 책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확실한 행동을

우리는 바로 이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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