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19:59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 딩보체에서 페리체 가는 고갯길. 뒷산은 탐셸꾸.
ⓒ2004 김남희
트레킹 여섯째 날
날씨 : 오늘도 쾌청
걸은 구간:딩보체(Dingboche 4350)-추쿵(Chukhung 4743m)-딩보체-페리체(Pheriche 4280m)
소요 시간 : 4시간 반
복장 및 위생 상태 : 점차 불량해지고 있음.
7시 기상. 오늘도 쾌청하다.
수프와 오믈렛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딩보체에서 추쿵으로 출발한다.
벌써 9시 10분 전이다. 큰 배낭은 이곳에 두고, 작은 배낭만을 챙겨 나선다.
얼음장 밑으로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수영 언니가 힘이 드는지 기얀드라에게 가방을 맡긴다.
그 모습을 보니‘웬만하면 오늘 하루는 기얀드라가 짐 없이 걷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서운한 생각이 든다.
고산병 증세 중의 하나가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판단력이 흐려진다더니….
나도 고산병인지, 언니가 맡긴 가방에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내 가방이 훨씬 무거운데, 나는 힘들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과 함께 가방없이 걸어가는 언니의 모습이 자꾸 걸린다.
그러고 보니 산악회 성기형이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원정을 갔을 때 한번은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지.
고소에 걸린 한 후배가 누룽지 마지막 남은 국물을 선배가 먹었다고 ‘저 자식이 누룽지 한 숟가락 더 먹었지!’하며
그 선배 뒤꽁무니만 노려보며 하루 종일 누룽지 생각만 했다더니 내가 지금 그 꼴이잖아?”
머리를 흔들며, 가방 생각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럴수록 가방은 집요하게 내 머릿속을 파고든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도 오늘따라 엄청나고….‘아, 치졸하고 유치한 인간 김남희.’
11시 10분 추쿵에 도착했다.
밀크티 한 잔 마신 후, 기얀드라와 뒷산에 오르기로 했다.
추쿵 리(Chukhung Ri)까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뒷산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가방을 메고 나서는 내게 언니는 달거리(월경)로 허리와 배가 너무 아파 기얀드라에게 가방을 맡겼다고 말한다.
‘아, 할 수만 있다면 땅 속으로 푹 꺼지고 싶다.’
뒷산은 거의 45도로 경사졌다. 치고 올라가는데, 몹시 숨이 차오른다.
헉헉거리는 내게 기얀드라가 “가방을 메겠다”며 달라고 한다.
오전의 내 모습이 용서가 되지 않아 나는 가방을 메겠다며 가방을 들었다.
다섯 발 걷고, 헉헉거리며 쉬고. 다시 서너 발 떼는 내게 기얀드라가 말했다.
“칼라파타르 새임 새임 히얼”
‘음, 다음에 오를 칼라파타르도 여기처럼 힘들다구?’
이젠 기얀드라의 영어가 완벽하게 이해된다.
나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낭에서 잠바를 꺼내 입고, 벌벌 떨며 사진 몇 장 찍고 산을 내려왔다.
오늘은 처음으로 5000m를 넘게 걸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그새 한 시간이 지났다.
오전 내내 다리에 힘이 없어 고생했기에 계란볶음밥을 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볶음밥이었지만 그래도 한 그릇 다 비웠다.
▲ 이우는 저녁해를 받고 있는 탐셸꾸.
ⓒ2004 김남희
▲ 페리체 마을.
ⓒ2004 김남희
1시 15분 출발.
기얀드라는 여전히 언니 가방을 멨다. 가방이 없어서인지, 내려가는 언니의 속도는 놀랍게도 빨랐다.
한 시간 이십분 만에 딩보체에 도착했다.
언니는 머리가 너무 아파 정신없이 내려와 약부터 먹었단다.
3시. 잠시 쉰 후 페리체로 출발했다.
딩보체에서 페리체로 가는 고갯길(지름길)은 놀라운 풍경을 감추고 있다.
로체 샤와 아일랜드 피크가 뒤편으로 보이고, 왼쪽으로는 아마 다블람이, 오른쪽으로는 따우체와 촐라체에 이어 로부체가 이어진다.
아일랜드 피크 위로는 낮달이 떠올랐고, 구름이 몰려와 아마 다블람을 휘감고 있다.
‘여기 인간계 맞아?’하는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풍광이 뛰어났다.
30분이면 넘을 고갯길이지만 너무 아름다워 한 시간 넘게 소요하며 페리체로 내려왔다.
페리체는 그 모든 봉우리들의 발치에 납작하게 엎드린 마을이다.
기얀드라의 친구가 요리사로 있다는 쿰부 롯지(Khumbu Lodge)로 왔다.
이곳은 무엇보다 화장실이 건물 안에 있어 좋았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침낭 속에서 몸을 비비꼬며,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는 승산 없는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저녁은 모모라 불리는 야채 튀김 만두와 뜨거운 우유에 탄 미숫가루 그리고 공짜로 한 그릇 얻은 야채 카레다.
만두도 맛있었지만 카레의 맛이 일품이다. 지금까지 먹은 물 탄 카레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맛있는 밥 한 그릇에 세상을 얻은 듯 행복해하고, 날마다 변화하는 풍경에 천국에라도 이른 듯 감사해한다.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을 받아 세수하고, 그 물로 발을 씻었다.
남체에서 샤워한 후 처음으로 발을 씻는 것이라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기얀드라 친구 덕에 뜨거운 물은 공짜란다. 이 깊은 산골에서도 ‘빽’은 통한다.
기얀드라는 뜨거운 물이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갖다 주겠다며 오랜만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9시까지 난롯가에서 머물다가 방으로 돌아오니, 실내온도는 바깥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추위도 따라와 방에서도 모든 것이 언다.
필요한 물건들을 침낭 속에 넣고 자지 않으면 모두가 언다.
화장품도 얼고, 침대 머리맡에 둔 찻잔의 물도 아침이면 얼어 있고, 물 티슈조차도 꽁꽁 얼어버린다.
카메라 건전지와 물티슈를 침낭 속에 넣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또 어떤 풍경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침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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