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데 키리코 - 《거리의 신비와 우울》

2019. 10. 1. 09:05미술/미술 이야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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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조 데 키리코 / 거리의 신비와 우울 (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

 

초현실주의란 이성을 거부하고 인간의 의식 아래 숨은 마음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운동을 말합니다.

추상미술과 함께 20세기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조이자 양식입니다.


첫째, 초현실주의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에 주목합니다.

인간의 의식 아래에 놓인 무의식을 화폭에 재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 뜻밖의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둘째, 감상자는 이러한 놀라움으로 자신의 무의식과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삶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됩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들처럼 메시지가 모호합니다.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조차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즐겨 표현하는 재료가 <꿈>, <환상>, <무의식>인 데다

그들이 행하는 방식이 왜곡과 비논리적인 병치(竝置)이기 때문입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는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 화가로서

초현실주의 화파의 선구자 중 한 사람입니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형이상학파의 대표적인 리더였습니다.

형이상학 화파는 전통적 조형 질서를 존중하되 정신성을 추구하려 한 사조인데,

이런 정신성의 추구가 초현실주의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키리코의 주목받는 그림은 그가 20대인 1910년대에 그린 작품입니다.

‘거리의 신비와 우수’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입니다.

 

금 한 소녀가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갑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거인이 다가옵니다.

하늘은 녹색입니다.

회랑이 이어진 고대 都市風의 건물 끝에는 노란색 깃발이 펄럭입니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컨테이너가 문이 열어 젖혀진 채로 있습니다.

제목처럼 신비로우면서도 우수에 찬 거리를 담은 작품입니다.

작품이 완성된 해가 1914년임을 주목할 때

이 그림에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품의 제목이 말하는 ‘우수’는

개인적 우울이라기보다는 절망과 폭력이 난무한 ‘시대의 우울’일 수 있습니다.

키리코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본성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거리의 신비와 우수’에 담긴 이미지들은 우리 안에 잠자는 무의식과 매우 닮았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무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무의식에는 - 우리가 인식하고 싶지 않은 -

공격성, 분노,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 복수심, 심리적 상처 같은 본능적인 욕구가 내재합니다. 

위험하기 때문에 억압될 수밖에 없지만 무의식은 답답함과 불안, 우울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거리의 신비와 우수’는 우리에게 불안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불안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해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듯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20代에 이렇게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은 뒤에 키리코가 

1930년대부터는 형이상학화파를 해체하고 

라파엘로와 루벤스 등의 화가 작품을 모사하는 화가로 전향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그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이자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박상희 블로그 글에서 발췌하여 다시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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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것이나 완전히 수수께끼 같은 것과 마주쳤을 때

우리에게 엄습해오는 기묘한 심리적인 변화와 암시를 주제로 그리는 형이상학적 회화의 선구자

─ 조르지오 데 키리코.

 

그는 이탈리아 화가로서 그리스 보로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아테네의 미술학교에 다닌 후 뮌헨으로 나가 뮌헨 미술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아놀드 뵈클린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인 예술을 지향하였다.

1910년 이미 독자적인 회화정신이 형성되었으며,

사물이 순간적인 형상에서 깊은 가치를 나타내는 일종의 형이상적 회화표현으로 나아갔다. 


1911~1915년 파리에 머무르며 피카소 등과 사귀었고 입체파의 영향도 받았으나,

그의 본질적인 구상은 화면의 몽환적 구성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카를로 카라 및 조르조 모란디와 함께 <形而上繪畵>의 양식을 수립해가기 시작하여

현실의 사물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적 영역을 암시하는 유파로서

1917년 본격적으로 <形而上繪畵派> (Metaphysics school)를 제창했다.

 

그는 그리스 · 로마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대리석상,

음영이 짙은 투시적 건물,

기계적인 형식들이 얽히고 설킨 근대도시의 단편적 정경 등

이러한 연관성 없는 대상물을 주관적으로 끼워맞춰

몽환적인 고독의 세계를 재구성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 일련의 작품의 영향으로 <형이상학파>가 그를 선구자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미래파>에 반발한 이탈리아 畵壇을 풍미하였다.

1920년대 중엽에는 좀 더 사실적이고 낭만적인 양식을 채택했으나

초기 양식만큼 광범위한 찬사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키리코는 그 후에 그때까지의 작품을 부정하고

라파엘, 루벤스 등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모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앙드레 브르통은 키리코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동시에 배신자라고 술회했다.

1933년부터는 고전적 作風으로 돌아가 신선미를 잃었으나 화단의 장로로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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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 《거리의 신비와 우울》을 보면,,

그의 초기 형이상학적인 작품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아래 거리에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가는 소녀가 보인다. 

달려가는 방향에 있는 컨테이너는 왜 이유없이 문을 연 채 아무도 없이 저기 서 있는지. 

건물 뒷편에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있다.

이 후미진 곳에서 저 둘은 곧 마주칠 것만 같다.


더군다나 이 거리는 깨끗하게도 아무도 없다. 

왼쪽의 새하얀 건물은 냉정하게도 어두운 검은 그늘의 시선만을 보이며

외면하듯 위압적으로 견고한 성벽마냥 쌀쌀맞게 서 있다.

왼쪽 건물 외벽에 있는 알수 없는 기호는 마치 빈 공사장인 듯, 

마치 무슨 범죄라도 일어날 듯 한 폭풍 전야를 암시하는 것 같다. 

 

맑지만 우울한 색상의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서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는 깃발은 불안감을 더욱 가중 시킨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그림이지만,

보이지 않는 미지의 심연과, 견고함이 대비된 장소에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금시라도 일어날 듯 한 광경이다.

사람의 자아의 외연에 있는 경계선과 현실이 만나는 곳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과장된 원근, 대비되는 색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는 불안과 우울함을 느끼게 한다.

왼편의 건물과는 서로 다른 원근법으로 표현된 오른편 건물은

억지로 이어붙인듯 이러한 불안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노란색 길과 초록색 하늘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낯선 풍경처럼 보이게 한다.

 

키리코의 그림에는 이와 같이 대체로

1) 황량한 광장과 2) 위압적으로 보이는 건물, 3)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림자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

 

<거리의 우울과 신비>에는 어둠의 소실점 외에 빛의 소실점이 있다.

왼쪽 흰색 열주의 건물이 이루는 소실점이다.

어쩌면 소녀는 굴렁쇠를 굴리며 어두운 우수의 소실점을 넘어서 저 빛의 소실점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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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코가 형이상학 회화를 그리게 된 연유는

그가 22세의 젊은 시절 방문했던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광장에서 받은 영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나는 병적인 감수성의 상태에 처해있었다.

나의 눈에는 건물과 분수대의 대리석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두가 꿈틀거리며 다시 소생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키리코의 대표작 <거리의 우울과 신비>의 공간은

마치 진공상태와도 같이 고요하게 멈추어버린 듯하다.

완전히 텅비어버린 도시에 등장한 굴렁쇠를 굴리는 소녀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로 존재가 확인되는 인물,

과장된 원근법이 사용된 건물과 문이 열려진 채 놓여있는 텅 빈 컨테이너는

음산하고 불길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기묘한 공간에 연관성 없는 대상물들을 자신의 주관대로 배열한 작품에 대해

키리코는 “예술작품이 진실로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인간적 한계에서 벗어나야 하며, 논리나 상식은 이에 방해가 된다.

따라서 이는 꿈과 어린아이의 정신상태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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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데 키리코는 1888년 그리스의 볼로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서 공학을 전공하였으나 아테네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배운 다음,

1906부터 1909년까지 뮌헨의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뵈클린클링거의 화풍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편 밀라노와 피렌체의 미술관에서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연구하기도 하였다.

1911~1915년 까지는 파리에 머물면서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을 만나 큐비즘에 관심을 두었다.

1914년에는 큐비스트들이 무시했던 원근법을 이용하여

흉상과 인체 모형에 기하학적인 요소를 배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915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페라라에서 카를로 카라(Carlo Carra)를 만났는데,

이 무렵 그를 비롯한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와 함께 형이상적 회화를 창시하였다.

그는 1919년에는 발로리 플라스티치 그룹에 참가하였고,

1924년 재차 파리로 가서 제1회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초자연주의) 전에 출품하였다.

 

그의 사상적 흐름에는 독일 낭만파와 니체, 쇼펜하우어 등 독일 철학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것이 결국 신비적이고 몽환적인 조형 사고를 수립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환상에 의한 그의 메타피지컬한 화면이 쉬르레알리즘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1933년부터는 고전적 작풍으로 돌아가 차차 신선미를 잃은 경향이 있었으나,

화단의 장로로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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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면 속에는 空間과 事物이 익숙함과 낯선 느낌이 기묘하게 공존할 뿐만 아니라,

時間 또한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 事件이 벌어지는 시간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미래에 대한 豫示(미리 보이거나 알림) 인가?

오래된 향수인가?

아니면,,

데 키리코가 회화적으로 해석했다는

'이렇게 공간과 사물, 그리고 시간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 채

어떤 알 수 없는 순환의 한 지점을 언뜻 드러내는 상태'인 것인가?

 

 

광장공포, 밀실공포, 대인공포, 고소공포, 분리불안, 거세불안 등......

키리코의 작품에서 느낄수 있는 감정도 

이런 아직 닥치지 않은 어떤 불길한 가능성에 대한 불안의 심리가 아닐까.

 

 

 

 

 

 

거리의 신비와 우수 사랑의 노래

 

거리의 신비와 우울 (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