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0. 20:12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노아노아 - 향기로운 타히티
저자 폴 고갱 역자 정진국
2019.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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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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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노아
분홍 새우
아를에서
나는 이렇게 문명에서 멀어진다.
<노아노아> 판본에 대하여
<노아노아>를 옮기고 나서
출판사서평
* 세계인의 고전이 된 화가 고갱의 타히티 이야기 <노아노아, Noanoa>
* 향기로운 사랑의 서사, 순수한 원색의 감정을 일깨우는 야생의 책.
* 상세한 주석으로 현대적 해석과 원전의 오류까지 바로잡은 완역판
1) 모든 타히티 여인에게 사랑은 정말 피 속에 있다. 득이 되든 아니든 항상 사랑한다!
<노아노아, Noanoa>는 타히티어로 ‘향기로운’이라는 뜻이다. Noa Noa라고 띄어쓰는 경우도 있지만 타히티어로는 단일 낱말이다.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은 제도와 규범에 얽매인 도시문명을 비판하며 타히티의 정경과 원시의 자유를 강렬한 색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인상주의 미술을 넘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책 <노아노아>는 고갱의 타히티 체험을 바탕으로 쓴 사랑과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문명과 원시성에 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은 ‘문명비판’, 타히티의 ‘자연과 신화’, 관념과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는 ‘마음여행의 지도’, 순수한 원색 감정을 일깨우는 ‘야성’이 들어있다.
<노아노아>에서 고갱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타히티 여인에게 사랑은 정말 피 속에 있다. 득이 되든 아니든 항상 그렇게 사랑한다.” 타히티 여인들은 순백색 티아레(Tiare)꽃을 머리(귀)에 꽂는다. 향이 진한 티아레꽃처럼 고갱의 <노아노아>는 그 누구도 구속하지 않으며, 자연의 순백색 향기를 전하는 책으로 이미 세계인의 고전이 되었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삶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밤이 찾아왔다. 침묵! 나는 비로소 적막한 타히티의 밤을 알았다. 내 가슴이 뛰는 소리만 들렸다. 하늘과 나 사이에는 도마뱀들이 살았던 가벼운 판다누스(Pandanus) 잎으로 덮은 큰 지붕뿐이다. 나는 잠결에 내 머리 위로 펼쳐진 자유로운 공간, 천상의 궁륭과 별들을 느꼈다. 유럽의 집들, 그 감옥으로부터 나는 이렇게 멀리 떨어졌다! 마오히(Maohi,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오두막은 영원과 우주와 삶으로부터 누군가를 떼어놓거나 추방하지 않는다.”
2) 나는 이렇게 문명에서 멀어졌다.
과거 고갱은 63일간의 긴 항해 끝에 타히티의 파페에테 항구에 처음 도착했다. 타히티에는 1790년대에 영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문신, 노래, 춤 등 전통 문화와 신앙을 금지했다.
이후 제국주의 프랑스가 들어와 보호령으로 영토를 장악했고 1880년 마침내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현재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5개의 제도(총 118개의 섬)로 구성되어 있다. 해상 전체 면적은 유럽 대륙 전체 넓이에 버금간다. 소시에테 제도에는 보라보라, 타히티 등이 있는데 타히티가 가장 크고, 마르키즈 제도에서는 히바오아가 가장 큰 섬이다. 타히티의 파페에테가 전체의 행정수도이다.
이 책에서 고갱은 이렇게 말한다.
“정복당한 그들은, 그들 민족이 간직하고 있는... 것에 프랑스에서 들여온 허접하고 격이 떨어지는 군더더기를 채웠다. 제기랄! 문명의 승리였다. 군인과 장사꾼과 관료의 문명 말이다. 나는 옛날의 타히티를 사랑했다. 그런데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하니 참기 어려웠다. 훌륭한 한 종족이 그 오랜 영광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해야만 하다니!”
고갱은 수도인 파페에테를 떠나 원주민 마을의 오두막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원주민들이 참모습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변화를 실감한다. “나는 문명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인간답게 사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숱한 환상에 시든 영혼, 지나친 노력에 지친 몸, 사회의 악습에 찌들어서 도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병든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20년은 젊어졌다.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야성이 넘치지만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들은 낡은 문명인, 삶의 지혜와 행복의 예술에 무지한 문명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못난 문명인’이었던 자신을 깨닫고 자유로운 야만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고갱은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설처럼 펼쳐낸다.
열대 자연의 빛나는 정취를 담은 그의 이야기는 문명과 야만에 대한 날카로운 화살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사랑 이야기로 바뀌면서 문학적 긴장의 파도를 넘는다. 고갱과 원주민 여인 테우라와의 사랑 이야기는 티아레꽃 같은 사랑을 낙원에 꽃피웠다가 끝내 안타까운 이별의 노래를 남기며 스러진다.
“테우라는 여러 날 밤을 울며 지새웠다. 이제 슬픔에 지쳐, 조용히 바위에 앉아 두 다리를 짠물에 담근 채였다. 발은 퉁퉁 부었다. 귀에 꽂았던 꽃은 무릎 위에 떨어져 시들었다.”
타히티 체류를 바탕으로 쓴 <노아노아>에는 타히티의 고대 종교와 신화까지 아우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담겨있다. 잠시 프랑스로 갔던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다. 타히티에서 거주하다가 남태평양 동쪽의 더 외딴 섬인 히바오아로 거처를 옮겼고, 유럽인들과는 어울리지 않은 채, 원주민 마을의 오두막에서 궁핍한 삶을 마감했다.
3) 상세한 주석으로 타히티의 자연과 문화, 신화와 전설을 선명하게 되살린 책
<노아노아>에서 고갱은 문명과 야만, 타히티의 정경뿐 아니라 불교와 폴리네시아의 신화 등 그의 작품세계의 바탕이 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풀어놓았다. 그래서 <노아노아>는 고갱의 예술과 언제나 함께 놓이는 문제적인 텍스트이다. <노아노아>는 고갱이 품고 실천했던 생각과 미적 혁신을 대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판과 극복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권력과 식민주의, 낭만주의적 환상, 유럽의 시각에서 상대화한 ‘야만’ 등에 관한 비판적 관점들이 그것이다.
따라서 타히티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화가 고갱 이해의 근거가 된다. 이 책은, 그동안 화가 고갱의 사적인 행적에만 초점을 맞춘 부수적인 텍스트 이해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타히티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고갱과의 균형을 맞춘 특별한 해설 번역판이다.
이 책은 그동안 프랑스식으로 표기해온 타히티어를 현행 타히티어(마오히어) 표기로 바꾸었다. 그리고 타히티의 자연과 풍속, 신화와 전설에 관한 풍부한 주석을 달아 이해의 폭을 넓혔다. 과거 비판의 쟁점이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관련 문헌을 통해 관점을 설명했다. 특히 폴리네시아 천문과 신화에 대해서는 프랑스판을 물론 현재까지 여러 나라 번역본에서 무심히 방치한 원전의 오류를 찾아내 바로잡았고, 타히티 문화나 신화에 대해서도 고갱 시대 이후의 현대적 입장을 추가했다. 타히티의 역사성을 주석을 통해 설명하면서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삶과 세계관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고갱이 인용한 듯 보이는 텍스트는 원문을 찾아 뜻을 다시 밝히면서 의미를 명확히 했다. 또한 <노아노아> 본문과 직결되는 고갱의 그림들을 알맞은 자리에 배치해 고갱 글과 그림의 호응관계를 통해 미술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따라서 고갱의 생각은 물론 타히티의 자연과 문화에 풍부한 해설로 균형을 맞춘 이 책은 타히티를 단지 낙원으로 치장하려는 책도, 화가 고갱의 신화를 강조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자유로운 인간정신이 엮은 문학적 텍스트, 인간과 자연, 문명과 원시, 자유와 억압, 낮과 밤이 교차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 타히티’에 관한 명상적 기행문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한 전문가의 번역과 문헌 비교 및 주해를 덧붙여 완전한 모습으로 펴내는 <노아노아-향기로운 타히티>는 고갱이 고흐를 회상한 역사적인 글 2편도 들어있다. 이 책에서 독자는,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과 어울리며 문학잡지를 탐독했던 화가 고갱의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1
마오히 사람들의 세계는 포(Po / 밤과 어둠: 신성한 초자연적 세계)와 아오(Ao / 낮: 일상)로 이루어진다.
기독교와는 다르게 어둠(포)의 시공간은 신성하며 좋은 것이다. 지옥이라는 개념은 없다.
** 폴리네시안(타히티) : 마오히 / 뉴질랜드 : 마오리 / 하와이 : 마올리
2
타히티로 가기 전에 고갱은 말라르메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정기 모임에 참석해 시인ㄴ들과 어울렸다. 말라르메의 초상도 그렸다. 따라서 고갱의 예술적 태도에 상징주의 문학의 특성이 배어 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에 충분하다. 에드거 알렌 포우의 시 <큰까마귀>의 내용을 자신의 그림 <Nevermore>에 끌어오고, 딸에게 남긴 노트에 포우에 관한 긴 글을 썼으며, 보드레르의 시를 인용하고, 상징주의 핵심 개념 '불가사이한 신비' 를 다른 글에서도 거듭 언급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면 더 분명하다.
상징주의에 관해서는 고갱 스스로 그것을 벗어났다고 말하려 했지만 마지막 시기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드몽프레에게 보낸 편지(1898. 2. 11)에서, "도마뱀을 발에 쥔 이상한 흰 새는 말이 공허하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타히티를 통해 벗어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상징주의의 기초적인 맥락 안에 있다.
3
고흐에 관한 글들은 1923년에 출판된 《前과 後 》에, 히바오아 섬 시기에 쓴 글은 1951년 출판된 《그림쟁이 이야기》에 수록되어 있다.
내가 아를에 도착했을 때,
빈센트는 자신을 찾고 있었고,
나는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 고갱 40살, 고흐 35살)
내 기억으로는, 힘든 때에,
그 친구 덕분에 그보다 더한 불행을 겪었다.
‘고갱의 데생은 반고흐의 데생을 연상시킨다’는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머물던 마지막 며칠동안,
빈센트는 극도로 거칠게 수선을 떨었다.
그러더니 말이 없어졌다.
어느 날 밤에는 빈센트가 벌떡 일어나 내 침대로 다가와 놀라기도 했다.
"이 시간에 왜 깨우고 난리야?"
항상 점잖게 말하면 관찮았다.
"빈센트, 무슨 일이야?"
그러면 다시 말없이 자기 침대로 돌아가 죽은 듯이 잠들곤 했다.
나는 그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을 초상으로 그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고흐>를 그렸더니,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난데, 미친 나야."
바로 그 날 저녁에 우리는 카페로 갔고
그는 가볍게 압생트 한 잔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술잔을 내 머리로 던졌다.
나는 피하면서 그의 팔을 뒤로 꺾은 뒤 카페를 나와 빅토르위고 광장을 건넜다.
조금 뒤에 빈센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곧 잠들었고 골아떨어졌다.
아침에 그가 일어나서 아주 침착하게 내게 말했다.
"엊저녁에 내가 못된 짓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잘 생각이 나질 않아."
"그래, 까짓 거 용서하지.
그런데 어제 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나도 참지 못하고 네 목을 비틀어버릴 지도 몰라.
그러니 동생한테 내가 돌아간다고 편지 해."
그런데 그날 아이고, 하느님!
저녁을 간단히 먹고 월계수꽃이 핀 길로 혼자 바람쐬러 나갔다.
빅토르 위고 광장을 다 건넜을 때,
내 뒤에서 아주 익숙한, 빠르고 갑작스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빈센트였다.
그가 손에 면도칼을 쥐고 내게 달려들던 그 순간, 내가 돌아섰다.
나는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가 멈추었고 고개를 숙이더니 집으로 가는 길로 달려갔다.
그때 내가 겁을 먹었을까?
곧바로 그릐 무장을 해제하고 진정시켜야 했을까?
종종 이렇게 묻게 되지만 그렇다고 자책하진 않는다.
나한테 돌을 던지려거든 던지시라.
나는 곧장 아를의 호텔로 들어가, 시간을 묻고, 방을 잡고, 잡자리에 들었다.
너무 심란해서 새벽 3시에야 잠이 들었고 7시 30분쯤 깨었다.
광장으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집 근처에 헌병들과 키 작은 형사가 와 있었다.
전날 밤 이런 일이 벌어졌다.
빈센트는 집으로 돌아가, 즉시 자신의 귀뿌리까지 바짝 잘랐다.
한동안 그는 지혈을 했던 모양이다.
이튿날 방바닥 타일바닥에 피가 흥건한 여러 장의 수건이 널려 있었다.
피가 흘러 방 두 개와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까지도 망쳐놓았다.
밖으로 나갈만해진 그는 머리를 싸매고, 바스크 베레모를 푹 눌러쓰고,
알고 지내던 사창가로 가서 그날 당번인 여자에게,
깨끗이 씻어 봉투에 넣은 자신의 귀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기억이요."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덧창을 닫고 창가에 놓인 탁자의 램프를 켰다.
10분 뒤, 동네사람들이 창부의 집으로 몰려가 술렁대며 그 사건에 대해 떠들어댔다.
집 문턱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이 모든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형사가 내게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대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난 모르는 일이요."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죽었소."
그 순간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알겠습니다. 자, 올라가서 보고 설명합시다."
침대에 빈센트ㅡㄴ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그의 몸을 더듬어 체온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는
"이 친구가 깨어나 내 소식을 묻거든 파리로 떠났다고 전해주시오.
그가 나를 보면 끔찍하게 나빠질테니까"
깨어난 빈센트는 곁에 있더누사람에게 파이프와 담배를 청하고 나서,
아래층에 있던 돈통 생각을 했다.
고통을 버티고나더니 나를 헐뜯게 될 의심을 했다!
빈센트는 병원으로 실려갔고, 도착하자마자 헛소리를 시작했다.
그 나마지 이야기는 세상사람 누구나 다 아는 이야이니 다시 말할 필요 없겠다.
내가 받은마지막 편지는 오베르 쉬 아즈에서 쓴 것이었다.
빈센트는 브르타뉴로 나를 찾아올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고.
"巨匠, 당신을 만나 힘들게 하고, 이제 스러지는 정신으로 죽어가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는 배에 총을 쏘았고,
불과 몇 시간 뒤에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면서 말짱한 정신으로 죽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자기 예술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사망했다.
※
타히티로 다시 돌아간 고갱은 1895년 9월 9일 파페에테에 도착했다.
타히티에 거주하다가 1901년 8월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 아투오나로 거처를 옮겼다.
이 글은 1902년에 썼고, 1903년 5월 8일 고갱은 아투오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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