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게 아내가 있었다?

2019. 8. 29. 13:37미술/미술 이야기 (책)






조르주 드 라 투르,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 1640~4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8×94㎝, 루브르 박물관, 




카라바조와 비슷한 시대를 살다간 조르주 드 라투르(1593-1652)는 예수를 아예 역사적 인물로 보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거리의 女子에서 예수의 제자가 된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보여준다. 막달레나를 예수의 부인이라고 암시하는 작품을 여러 점 남기고 있다. 기독교의 입장으로는 이단 숭배인 셈이다. 이런 위험한 발상 탓에 라투르 역시 죽음과 함께 폐기된 역사의 갈피에 묻히고 말았다.

막달레나는 예수의 십자가 형장에 있었고 임종을 지켰으며, 부활을 처음 확인한 성서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르네상스 이후 많은 화가들이 주제로 삼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에피소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깊은 슬픔 속에 오열하는 모습으로...... 그런데 라투르는 임신한 막달레나를 그리고 있다. <촛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에 나오는 여인이 막달레나다.

그렇다면 복중의 태아는 누구일까? 그녀가 바라보는 탁자 위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기물들이 놓여 있다. 성서, 십자가, 채찍, 죽음과 연관돼 보이는 해골, 그리고 자신을 소멸시켜 세상을 밝히는 촛불 등등...... 이런 은유들은 당연히 그림 속 막달레나의 아기가 예수와 관련돼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라투르는 무슨 근거로 이처럼 도발적 해석으로 막달레나를 그렸을까? 성서에 없는 음성적으로 전해온 외경에서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면서 학자들은 외경(外經)의 존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과학적 근거를 찾아내기도 했다. 현재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성서는 3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수천 년에 이르는 유대인 역사인 여러 가지 자료와 문서 중에서 선별하여 정식 경전으로 인정한 것이 성서(聖書)다.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예수를 神으로 보자는 입장이었다. 즉 하나님, 예수,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사상이다.

이 과정에서 제외된 자료와 문서를 외경이라 하는데, 그 중에 막달레나와 예수의 관계를 다룬 내용도 있다. 이에 따르면 막달레나는 예수의 부인이었으며, 예수 사후 이집트로 몸을 숨겨 딸을 낳았고,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를 통해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다. 작가는 예수의 후손이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를 이루었고 그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온다는 상상을 과학적 추리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제의 모티프로 거론된 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은 역동적인 구성과 완벽한 원근법 구사로 르네상스 회화의 결정판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후략)


- 출처. 전준엽 지음.《예술의 생각, 인문의 마음》





The painting as it looked in the 1970s

 


The Last Supper, ca. 1520, by Giovanni Pietro Rizzoli, called Giampietrino (active 1508-1549),



저게 어떻게 남자(요한)로 보이는가?

자, 그래서 그녀를 막달레나라고 친다면,

막달레나에게 바짝 붙어서 귓속말로 협박이라도 하는듯,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바로 그 험상궂게 생긴 노인이 베드로다. 

그렇다면 이 시츄에이션은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CARAVAGGIO Supper at Emmaus 1601 Oil on canvas, 141 x 196 cm National Gallery, London

 


예수의 뒷편에 서 있는 이 인물은 식당 매니저로 보이는데,

그를 통해 (카라바조의) 현실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예수를 바라보는 표정이 재밌다.

마치 정신나간 사람을 쳐다보듯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이다.

카라바조는 이 인물을 등장시켜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다.”

(※ 예수도 생김새가 전혀 성스럽지가 않다. 심하게 말하면 동네 건달, 사기꾼 같다. ← 내 말임)


- 전준엽 지음.《예술의 생각 인문의 마음》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2)



카라바조의 불경스런 성서 해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부활한 예수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제자 도마가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확인하는 장면이다.

카라바조의 성서에 대한 도발적이고 불경스러운 해석 때문인지 카라바조는 죽음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300 여년 이상 평가가 유보된 채 흘러왔다. 20세기 들어서야 카라바조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으면 그의 천재성이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다.


- 출처. 同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