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2019. 9. 20. 21:18음악/음악 이야기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저자 ㅣ 이민희 
출판 |  2016.4.5.

  

책소개

명곡을 명곡답게 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나다!

아름다운 멜로디 뒤에 가리어진 반전 스토리『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모든 음악에는 선율을 만들어낸 사람의 내면과 예술에 심취한 스토리가 담겨져 있다. 이 책은 아름다운 멜로디에 깃든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들려주어, 음악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한다. 아름다운 음악의 탄생에 따른 창작자의 고통을 다룬 에피소드와 역사, 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클래식부터 팝과 같은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소개한다.

유투가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로 노래한 비극의 역사, 존 레논이 ‘이매진’으로 보여준 희한하지만 힘 있는 시위, 빌리 홀리데이가 노래한 ‘이상한 열매’의 정체 등 명곡을 명곡답게 즐길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악에 얽힌 탄탄한 스토리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음악을 색다르게 해석하는 재미를 선사하며, 예술에 가리어진 서늘한 공포와 차가운 현실을 풀어내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저자 : 이민희
음악 웹진 백비트(100beat)의 편집인이다. 음악 잡지 《프라우드─에서 기자로 일했다. MBC 라디오 《플레이리스트, 김나진입니다─의 선곡 작가를 거쳐 《푸른밤, 정엽입니다─에서 음악 원고를 쓰고 있다. 네이버 뮤직과 다음 뮤직, 《씨네21─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목차

1장. 음악, 벽을 넘어 세상과,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다
2장. 음악, 가장 정의롭고 가장 자유로운 저항
3장. 음악, 아름다운 선율 뒤에 가리어진 섬뜩한 진실
4장. 음악, 사랑을 유혹하는 멜로디










1


에디뜨 피아프 - '장미빛 인생'



그녀는 1915년 파리의 어느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생후 두 달만에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아버지는 유랑하는 서커스단원이었다. 하여 돌봐줄 이가 없어 여기저기 떠돌다가 사창가에 자리잡은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된다. 한때 백내장으로 실명 위기에 처할 만큼 척박한 환경이었으나 다행이 일곱 살에 시력을 회복한다. 유랑생활을 접고 거리의 광대로 나선 아버지를 따라 구걸을 한다. 


아버지와 함께 거리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래를 불렀는데, 아이답지 않은 구성진 노래로 어느 순간 고정팬이 생겨났다.  그러나 한푼도 벌지 못하는 날에는 밥을 먹기 위해 사창가를 찾았다. 그녀가 18살 때 가진 아이가 죽어 묻을 돈이 없을 때에도 사창가를 찾았다. 그런 비참한 삶을 달래줄 친구는 오로지 노래, 혹은 노래로 얻은 돈으로 생긴 술이었다.


경찰 단속을 피해 떠돌던 그녀에게 샹제리제 클럽 제르니의 대표였던 루이 르플레가 나타나 그녀에게 '피아프(참새)'라는 별명도 지어주고 피아프의 인생 활로를 열어준다. (# 스무살 무렵의 에디뜨 조반나 가씨옹의 키는 142cm, 체중 33kg였다.) 그러나 갑자기 르플레가 암살된다. 피아프는 그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살해용의자로 지목되어 범죄자로 구속되었으나 클럽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진범이 밝혀지고 감옥에서 벗어났다. - 어느새 피아프는 르플레가 돕지 않아도 기반을 되찾을 만큼 신뢰를 얻고 있었다.


무슨 기구한 운명인지 피아프는 교통사고만 네 차례나 겪었다. 절망과 죽음의 문턱을 두루 겪고서 그녀의 노래는 진정한 깊이를 얻었다.  파리는 화려한 쇼가 쏟아지는 쾌락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삶을 반영하는 진정한 예술의 전시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인생의 모든 극단을 뚫고 나와 희망을 노래하는 에디뜨 피아프가 있었다.








2


스콧 맥켄지 - San Francisco

                  - Be Sure to Wear Flowers Your Hair (그곳에서는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1967)


여름철 그곳에는 히피들의 모임이 있어요 / 새로운 생각을 가진 세대들이 있어요 / 사람들은 활기에 넘쳐나요 /







3


메르세데스 소사 - Gracias a la Vida (1971)



생(生)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별을 닮은 눈동자를 받았기에

흑백을 구분하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내 사랑을 찾을 수 있다네.


소리와 문자를 받았기에

어머니, 친구, 형제와 자매, 사랑하는 영혼, 길을 비추는 빛,

이런 말을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다네.


웃음과 눈물을 받았기에

슬픔과 행복을 알았고

그 슬픔과 행복은 나와 당신의 노래를 만들었다네.


- 메르세데스 소사, ‘생에 감사해’ 중에서


노래를 만든 사람은 평생 칠레의 민속음악을 채집한 '비올레타 파라'이다. 그는 남미음악과 서양음악을 결합하는 작을 하면서 일생을 바쳐 연구한 자료들로 민속음악의 전당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좌절의 순간에 거짓말처럼 삶을 예찬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남겼다.(1966년 녹음). 이듬해 비올레타 파라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세상과 작별한다.



Gracia sala Vida -Mercedes Sosa

http://blog.daum.net/wongis/7086740






4


헨델 - 메시아





5


밥 말리 - No Woman No Cry (1974)



No woman, no cry, yeah

밥 말리 (Bob Marley | Robert Nesta Marley)
출생-사망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 - 1981년 5월 11일
1972년 밥말리 앤 더웨일러스 1집 앨범 [Catch A Fire]
1978년 UN 평화 메달
1974 그룹 '밥말리 앤 더웨일러스' 멤버


중년의 백인 아버지와
10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메이카 트렌치타운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밥 말리 플래티넘을 기록한 뮤지션
그리고 레게의 최고스타가 되었다.


또한 그의 음악을 더욱 빛나게 했던 평화, 정의, 자유, 형제애를 부르짖은 저항정신은
많은 이들의 우상이 되게했다
Bob Marley(본명: Robert Nesta Marley)는
레게의 본고장으로 잘 알려진
(그러나 당시엔 아무도 몰라주던 영연방의 식민지 였던)
자메이카의 St. Ann에서 영국의 해군대좌였던
중년의 백인 아버지와 당시 10대에 불과했던
자메이카 태생의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1945년 2월 6일 출생하였다.







밥말리의 음악은 방황하는 이들의 국가가 되었고,
그의 가사에 담겨진 정신은 현재까지 살아있다.
그는 진정한 레게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1945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혼혈의 섬소년 밥은
세계적인 지위를 얻은 유일한 레게 스타이다.
그는 17세에 처음으로 레코딩했고,
19세에 원래는 The Wailing Rudeboys로 불리었던
The Wailers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마리화나 소지혐의로 미국 교도소에 투옥되었던
강력한 rastafarian 말리의 노래가사는
그의 종교관과 정치관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유명한 "Rastaman Vibrations" 앨범에
수록된 "War"의 가사는 Haile Selassie의 연설에서 나온 것이다.
자메이카의 영웅이 되고나서 말리는 1975년
영국과 미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자신이 어느새 세계적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랫말에서 나타난 그의 사상으로 인해 정작 고향에서는
폭력과 불안 등 정치적인 긴장감에 둘러싸여 편안히 살기 어렵게 되었고,
1976년에는 정체불명의 총잡이들에게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저격을 당한 뒤 밥말리는 살아났지만,
이를 계기로 자신의 기반만은 항상
자메이카에 남겨두면서 보다 많은 시간들을
미국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투사였으며 레게를
세계에 알렸던 이 사나이는 1981년 5월 11일 뇌암으로 숨졌다.
그러나 그의 전설은 현재 레게를 연주하고 듣는 모든 이들에게 살아있다...


<뮤직라이프쿤타킹>
출처: https://udoon.tistory.com/845 [섬 머리안]





No, woman, No cry/Bob Marley

 


이 노래는 밥 말리의 흑인 인권운동을 늘 지지해준 그의 아내, 리타 말리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No, woman, no cry'를 '여자가 없다면, 울 일도 없다'라고 해석한 일부의 견해에 난 동의할 수 없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의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


우선 밥 말리(Bob Marley)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레게 음악의 대부이다. 1981년에 38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악당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투쟁하는 가사를 써냈다. 음악적으로만 보자면 흑인답게 곡들의 테마를 절묘하게 만들어 청중들의 귀에 쏙 들어오도록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NO WOMAN NO CRY

밥 말리의 유명한 곡 중 하나이다.

우선 곡을 들어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그다지 기쁜 분위기는 아니다.

기쁨을 이런 식으로 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픈가? 약간의 슬픔은 분명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곡 전체에 따뜻함이 배어있어서 슬픔이 지배적이지는 않다.

이 곡을 관통하는 개념은 <힘들지만 끝까지 싸우자>이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사랑 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

No, woman, no cry.

이 가사 때문에 사랑 노래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울지 말라고 달래는 내용 등등...

밥 말리는 그런 내용을 노래로 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거의 매일 콘서트를 했던 사람인데, 기자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악당들이 쉬지 않고 나쁜 일을 꾸미기 때문에 쉬면 안됩니다.”


트렌치타운의 정부 건물 앞에서 앉아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보아 실지로 있었던 일인 듯 하다.

트렌치타운은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과 접해있는 도시이다. 곡의 주인공은 한 여인,

리고 조지(Georgie)라고 불리는 다른 친구와 정부에 항의를 하기 위해 앉아있다.

밥 말리는 평생 인종차별 등 모든 부조리에 저항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부 마당에 앉아서 위선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다른 시위자들 틈에 섞여 있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아마도 관리들이 틀에 박힌 거짓말들을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저항하는 동안 좋은 친구들도 있었고 잃어버린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밥 말리는 있었던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혹시 나중에 세상이 좋아질 경우(In this great future) 말이다.

So dry your tears, I seh.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그러니 눈물을 닦으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라 지금 이들은 참담한 심경으로 무엇인가 불합리한 권력에 맞서 저항을 하고 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절망하고 있고,

남자는 계속 싸울 것이고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멈추라고 말하는 것이 이 곡의 주된 내용이다.



다시 트렌치타운의 정부 마당에 있다.

조지라는 친구가 장작불을 준비한다. 밤새 태울 것으로 보아 이들은 철야 집회를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이 먹을 옥수수 죽을 준비한다.


이 곡의 가장 유명한 라이브 버전(위의 동영상이 아니라)을 들어보면, 이 부분을 노래할 때 관중들이 환호한다.

왜 그럴까?

“옥수수 죽”은 고난의 상징이고 이 부분을 밥 말리는 절규하듯이 외친다.

암담한 가운데에서도 죽을 먹으며 저항하는 정신이 공감대를 불러왔기 때문에 관중들이 환호했을 것이다.



 


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

또 힘든 현실 내용이 나온다. 차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나는 발이 있다. 그래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But while I'm gone, I mean:

그리고 그렇게 가는 한, “모든 것은 잘 될거야!”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이 곡은 결론적으로 암담한 현실과 용기, 희망을 표현한 곡이다.

용기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곡 분위기 전체가 슬픔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밤새 피어나는 장작불과 옥수수 죽 같은 따뜻함이 슬픔을 감싸고 있다.

처음부터 올갠의 따뜻한 톤이 곡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이 곡(위에서 말한 라이브 버전)에는 기타 솔로가 참으로 기가 막힌데,

역시 슬픔과 따뜻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듯 하다.

기타를 치는 사람들은 한번쯤 카피해볼만한 솔로라고 생각한다.



☜  번역을 기막히게 잘했습니다.

 

  





6


U-2  - Sunday Bloody Sunday


 

 

 

오늘의 뉴스를 믿을 수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아요

얼마나 이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아이들의 발 밑에는 깨진 병 조각들이

막다른 골목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습니다.

나는 전쟁의 경고에 무심했는데, 그냥 방관하고 있었는데,

일요일, 피의 일요일이었습니다







7


사이먼 & 카펑클 - El Condor Pasa  (1970)



페루 사람들은 지금도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페루인의 심장에는 영원한 콘도르로 남아 있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투팍 아마루 2세'라고 불리는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1742-1781)다. 그는 스페인에 맞서 항쟁을 이끈 인물이다.



달팽이보단 참새가 될래

못이 될 바에야 망치가 될 거야

길이 아니라 숲이 되겠어

땅에 묶인 인간은 가장 슬픈 목소리를 내지

지구를 발 밑에서 느끼고 싶을 뿐인데





8


존 레논 - Imagine




9


스메타나 - <나의 조국> (1879)




10


버글스 - 라디오의 살아있는 죽음


1920년 미국, 미국에 이어 프랑스는 1921년, 영국은 1922년, 독일은 1923년에 라디오를 처음 선보였다.

한국은 1927년 경성방송국을 통해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라디오 방송을 개국했다.




11


자우림 - EV1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


GM社에서 1996년 출시한 전기자동차 EV1은 1999년까지 350만 달러의 제작비로 1117대가 생산됐다. 선풍적인 인기로 대여를 신청한 대기자가 4000명을 넘었다. 그런데 그 목록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50명으로 줄었다. 그 많던 사람이 다 어디로 갔을까?

자동차 부품업계, 카센터, 정유업계의 반대로 캘리포니아 연방은 2003년 배기가스 제로법을 철회했다. 정부의 대대적인 발표와 함께 무공해차는 저공해차로 대체되었다. EV1을 생산한 GM은 전기자동차에 이상이 있다고 발표했다. 생산라인을 없애고 직원들을 해고했다. 그리고 수거된 자동차는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머나먼 매립지로 보내졌다.






12


주디 갈랜드 - Over The Rainbow (1939)


주디 갈랜드가 주연한 로드 무비의 고전 <오즈의 마법사>(1939)는 주인공 도로시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게이 文化의 텍스트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게이들은 자신을 '도로시의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던 Over The Rainbow 는 대표적인 게이의 頌歌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디 갈랜드는 패그해그(*faghag=게이와 잘 어울리는 여자)로 통한다. 주디 갈랜드는 다섯 번 이혼했는데, 그녀의 전 남편이었던 타이론 파워, 마크 헤론, 빈센트 미넬리는 결혼 후에야 게이이거나 바이 섹슈얼이었음을 알았다. 네번 째 남편이었던 마크 헤론은 딸의 남편과 야반도주까지 했다.

주디 갈랜드가 불행한 삶으로 인한 신경쇠약과 알콜, 약물 과다복용으로 마흔 일곱에 사망한 이후에도, Over The Rainbow 원곡을 탁월하게 해석해 명성을 얻은 두 가수가 공교롭게도 단명했다.



에바 캐시디는 1996년 흑색종 말기 진단과 함께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해 작은 무대에서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생을 마감한다. 하와이안 가수 이즈는 키 188cm, 체중 343kg의 과체중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38세에 무지개 너머로 갔다. 



   Over the Rainbow (오버 더 레인보우) - 무지개 너머

? Israel Kamakawiwo'ole 1993 ?






13


레조 세레스 - Gloomy Sunday


1) 유행처럼 번지는 자살 이야기


1936년 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조셉 켈러라는 製靴工이 죽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용의자는 물론 의심스런 정황을 찾지 못했다. 발견된 유서에는 'Gloomy Sunday'의 가사를 인용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사건은 단순 자살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곧 비슷한 사건이 터져 나온다. 추정되는 사망자는 1백 명이 넘었다. 거기에 확실한 자살자는 17件이 있었다. 어느 거리의 밴드가 'Gloomy Sunday'를 연주하는 동안 行人 2명이 권총 자살했다는 보도가 따랐다. 다뉴브 강에 몸을 던진 젊은이들도 있었다. 사망자와 함께 있었던 증인에 따르면 심야클럽에서 'Gloomy Sunday'를 들은 후 저지른 일이라 했다.


그 대상은 10대 소녀부터 80대 노인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헝가리는 물론 전 유럽이 속수무책이었다. 권총 자살한 베를린의 잡화상의 시체 발밑에는 'Gloomy Sunday'의 레코드판이 놓여 있었고, 로마의 한 청년은 'Gloomy Sunday'를 연주하는 거리 밴드에게 돈을 다 털어주고 자살했다.


사건이 꼬리를 물자 당국은 이 모든 죽음이 'Gloomy Sunday'와 연관이 있다고 판단했다. 부다페스트 전역에서 이 곡의 방송불가 판정을 내린다. 영국의 BBC는 보컬 버전을 폐기하고 연주곡만 틀었다. 하지만 사건이 또 일어났다. 약물과다로 숨진 영국 여인의 집에서 연주곡 'Gloomy Sunday'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Gloomy Sunday'의 살벌한 기록은 넘쳐난다.

노래를 소재로 한 영화도, 소설도, 논문도 나왔다. 헝가리에서 이 곡을 듣고 죽은 사람만 187명이라는 것, 1936년 4월 파리에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試演 후 차례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 원본 악보를 헝가리 당국이 폐기하고 나치도 전량 회수했지만 누군가 기어이 찾아내 연주했다가 자살했다는 것 등등. 과연 20세기의 '베르테르 효과'였다.


하지만 이것을 반박하는주장도 있다. 사실상 'Gloomy Sunday' 는 단서에 불과할 뿐 자살의 확실한 증거로는 불충분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헝가리는 자살강국으로 독보적인 자살률을 단편적으로 보이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인구 10만 명당 자살 인구가 45명에 육박했다.)



2) 약혼녀도 죽었고 작곡가도 죽었다


'Gloomy Sunday'를 만든 레조 세레스는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그가 파리에서 활동을 마치고 부다페스트에 돌아왔던 1933년, 그해 약혼녀와 결별하면서 그 슬픔을 'Gloomy Sunday'로 만들어 공식 발표한다. 원래 제목은 "세상의 끝"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후 당대의 詩人 '라즐로 자보'가 노랫말을 붙이면서 '우울한 일요일'로 굳혀졌다.


'Gloomy Sunday'를 발표할 당시에 그는 "이것은 슬픔의 노래가 아니라 절망의 노래"라 설명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은 경험을 토대로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작품에 담았다는 것이다. 가사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난 이의 고백을 다룬다. 가사만큼이나 선율도 절절하다.



우울한 일요일, 시간은 바삐 흐르고.

벗이라곤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눠온 그림자.

(이제는) 작고 하얀 꽃들이 당신을 깨울 수가 없다네.

(여기는) 슬픔의 검은 마차가

당신을 데려간 그곳이 아니기에

천사들은 당신을 돌려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곳에 내가 찾아간다면 천사들은 화를 낼까.

...... 아무도 눈물 흘리지 말기를,

난 기쁘게 떠났다네.

죽음은 꿈이 아닌 것,

죽음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니.


- 레조 세레스 'Gloomy Sunday' 중에서



Sunday is gloomy
우울한 일요일
The hours are slumberless
내 시간은 헛되이 떠도네.

Dearest the shadows
I live with are numberless
벗삼아 지낸 소중한 그림자들은
이제는 셀 수도 없이 많고.

Little white flowers
Will never awaken you
작고 하얀 꽃들은
결코 그대를 깨우지 않으리.

Not where the dark coach
Of sorrow has taken you
슬픔으로 가득 찬 검은 마차는 당신을 어디로 데려간 것인지.

Angels have no thought
Of ever returning you
천사는 다시 그대를 돌려주지 않을꺼야.

Would they be angry
If I thought of joining you?
내가 당신 곁에 머문다면 그들조차도 화를 내지 않았을까?

Gloomy Sunday

Gloomy is Sunday
With shadows I spend it all
내가 흘려보낸 그림자들과 함께 했던 우울한 일요일.

My heart and I
Have decided to end it all
내 마음은 모든 것을 끝내려 하네.

Soon there'll be prayers
And candles are lit I know
곧 양초들과, 슬픔에 젖어 기도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Let them not weep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기를...

Let them know that I'm glad to go
나는 기쁘게 떠나간다네.

Death is no dream
죽음은 꿈이 아니리

For in death I'm caressing you
죽음 안에서도 나는 그대를 감싸고 있으니.

With the last breath of my soul
I'll be blessing you
내 영혼의 마지막 숨결까지도
당신을 축복하리.

Gloomy Sunday

Dreaming, I was only dreaming
I wake and I find you asleep
꿈꿀 뿐, 나는 깨어나
잠든 그대를 보는 꿈을 꿀 뿐.

In the deep of my heart here
Darling I hope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소망하네.

That my dream hasn't haunted you
내 꿈이 당신을 유혹하지 않기를....

My heart is telling you
내 마음이 속삭이네.

How much I wanted you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갈망하는지...

Gloomy Sunday
is absolutely Gloomy Sunday

Gloomy Sunday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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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림-gloomy sunday
 




첫 번째 공식 사망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레조 세레스의 약혼녀다. 'Gloomy Sunday' 는 나오자마자 일주일 만에 라디오 시장을 강타했다. 성공에 도취된 레조 세레스가 재결합을 제안하고자 약혼녀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살아있는 그녀는 없었다. 시신만 발견했을 뿐이다. 독약을 먹은 그녀의 책상에는 두 글자의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  'Gloomy', 'Sunday'


레조 세레스는 계속해서 클럽을 드나들며 성실한 연주자로 살았다. 속죄의 의미로 미국에서 받는  'Gloomy Sunday'의 저작권료를 거부하고, 헝가리에서 받는 저적권료는 공산당에 기부했다. 부정적인 평판을 만회하고자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지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1968년 1월, 68세의 나이로 레조 세레스는 부다ㅣ페스트 아파트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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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키스피파(Kis Pipa)'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다.  'Gloomy Sunday'와 관련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전통의 명소다. 1930년대에는 레조 세레스와 그의 친구들이 'Gloomy Sunday' 를 연주하곤 했다. 지금은 누구나 곡을 연주한다. 절망이 아니라 낭만의 이름으로, 피아니스트는 물론 관광객 또한 피아노 앞에 앉는다.






14


투팍 & 비기 - 죽은 두 래퍼가 함께 부른 노래



2pac biggi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투팍과 비기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본 이들은 레코드 관계자들이다. 투팍은 이미 녹음해둔 작품이 많았기에 死後에도 정규앨범만 여섯 장이 나ㅣ왔다. 비기는 사망 싯점에 나온 2집(Life After Death)을 1천만 장 팔아치웠다. 레코드사 사장 퍼프 대디는 비기를 추모하는 싱글 < I'll Be Missing You>를 발표해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15


모짤트 - <레퀴엠>





15 - 1

엔니오 모리꼬네 & 조안 바에즈 - <발라드 of 사코 & 반제티>

벤샨 -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23점의 작품을 공개했다.





15 - 2


빌리 홀리데이 - Strange Fruit (1939)


린치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1882년에서 1968년 사이 3446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린치를 당했다. 단지 죽이는 게 끝이 아니었다. 린치 당해 죽은 시신을 화형하거나 나무에 매다는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흑인은 신고조차 두려웠고 범행에 가담한 이들을 부르는 법정도 없었다.

모두가 자포자기 하고 수수방관하던 시절에 교사로 일하던 우이스 알렌은  두 명의 흑인 린치 사건을 다룬 시

Strange Fruit 을 1936년 잡지 <뉴욕 티처>를 통해 처음 공개했다. 어느 정도 반응을 얻자 참상을 알리기 위해 시를 띄울 노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작곡가를 수소문하다가 본인이 직저부곡을 쓴다. 허나 가수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가수가 눈에 들어왔다. 빌리 홀리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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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 - 사의 찬미 (1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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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1897-1926)의 <死의 讚美>는 그 시절 무려 10만 장 가량을 팔았다. 재생장비의 보급에 한계가 있을 시대인데 놀라운 수치다. 노래 자체에 쏟아진 열광적인 반응은 아닐 것이다. 윤심덕에 대한 세상의 속된 관심들, 그리고 노래 취입 직후 애인과 함께 돌연 사라졌다는 극적인 스캔들의 효과일 공산이 크다.


<사의 찬미>는 제목부터 생의 덧없음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녀가 직접 써내려간 가사는 매혹적인 죽음을 택한 윤심덕의 인생과 일치했다. 그래서 <사의 찬미>의 취입 배경이 음반의 세일즈 전략이었다는 의혹도 있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망 혹은 실종은 아예 허구였으며, 어느 무명가수가 취입한 <사의 찬미>를 더 많이 팔기 위해서 레코드사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당시 신문에서 보듯 두 남녀가 몸을 던지자마자 배를 세우고 수색했다지만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반자살로 위장해 제3의 장소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는 설도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이 어느 악기상 직원으로 일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 따랐기 때문이다.


자살의 동기치고는 그들의 관계가 대수로울 것이 없는 관계였다는 주장도 제기 됐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흔한 연애였기 때문이다. 윤심덕 같은 미혼여성과 김우진처럼 처자식을 두고 학업을 계속하는 남자의 연애가 많던 시대였다.


무성한 소문 속에서 노래도 변했다. 윤심덕이 부르는 '할머니 찬송가' 말고도 또 다른 '사의 찬미'가 있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라는 노래가사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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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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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어 토모아나 - Pokarekare Ana (1914년)



1) 뉴질랜드의 로미오와 줄리엣


2) 만들어진 전설, 살아 있는 전설

 뉴질랜드 호크스베이 지방의 마오리족 대표였던 파레어 토모아나는 평생 부족의 인권보장에 힘써온 언론에 종사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음악인이었으며 미디어와 예술 모두를 쥐고 있던 권력자였다. 그가 <Pokarekare Ana>의 가사를 썼지만 선율까지 만든 것은 아니다. 마오리족 사이에 오랜 세월 전승되던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1921년 저작권협회에 등록한 노래다.

파레어 토모아나는 마오리족과 뉴질랜드로 이주한 서양인의 융합정책으로 이 노래를 활용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마오리족 출신 군인을 양성할 수단으로 노래를 동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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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격동을 거치면서 노래는 꾸준히 구전됐다. 자연스럽게 한국 감수성에 맞는 새로운 가사를 입혔고 원래 3받자였지만 부르기 쉬운 2박자로 바뀌었다. 이규대와 조연구로 구성된 포크 듀오 '바블껌'이 부른 <戀歌)는 박인희의 <모닥불>,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라라라)와 더불어 애창된 노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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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 공무도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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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 & 에릭 클랩튼


조지 해리슨 + 링고스타 아내 모린콕스

에릭클랩튼 + 패티 보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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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 푸가체바 - 백만 송이 장미 (1982년)



1)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는 그루지아 수도 트리빌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양부모와 살다가 열두 살에 집을 나와 간판과 바람막이용 창문을 제작하면서 연명한다. 제대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남다른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어느 순간부터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트리빌시에 공연차 찾아온 유랑극단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보는 즉시 사랑에 빠진다. 수소문 끝에 그녀가 장미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미친사람처럼 장미만 구하고 다녔다. 미친듯이 일했고, 모든 습작을 내다 팔고, 심지어 집까지 팔아서 장미꽃을 산다. 그리고 마르가리타가 묵고 있는 숙소와 골목 구석구석을 장미꽃으로 물들였다.


시간이 흘러 1910년대에 그의 작품이 신문에 소개된다. 작품에 대한 리뷰 가운데 그의 모자란 교육수준을 들먹이는 평가가 있었다. 그는 혹평에 결국 붓을 꺾고 그림과 연을 끊은 후 비참한 말년을 지내다 1918년 지역 공동묘지에 묻혔다. 현재 300여 점 가량이 그루지아와 러시아 일대의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2)

그루지아 화가 피로스마니의 비극적 삶은 노래가 되었다. 그의 생애를 노래한 <백만 송이 장미>는 그루지아를 비롯한 러시아에서 크게 히트한 작품이다. 노래를 부룬 가수는 알라 푸가체바 - 러시아의 국민가수다. 각종 음원을 2억여 장이나 팔아치운 괴력의 인물이다.


그러나 노래의 기원은 그루지아도 러시아도 아닌 라트비아다. 라이몬즈 파운스 작곡, 레온스 브리에디 작사. 모두 라트비아 출신이다. 원래 라트비아 현지에서 발표했지만 알라 푸가체바가 불러 인기를 얻음으로써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당시의 제목은 <마라가 준 인생>으로, 라트비아 건국 신화 속의 어머니 마라가 딸에게 행복을 선물로 줬으나 그걸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딸의 아픔을 가사에 담았다고 한다.


노래는 그루지아에서도 애창되었다. 그러나 그루지아는 소련의 통치를 받아며 남북으로 분리된 나라다. 몇 해 전 분리독립을 꾀하는 친러시아 성향의 남 오세티아를 그루지아가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으나 2008년 러시아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전쟁 이후 러시아를 환기하는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르는 사람에게 약 40만 원 상당의 벌금을 부과하는 정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