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말꽃모음』

2018. 10. 26. 20:33책 · 펌글 · 자료/문학

 

 

 

 

연암 박지원 말꽃모음 2017. 10

 

 

 

 

소설가 “설흔”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연암 박지원”

이 책은 소설가 설흔의 눈으로, 연암 박지원의 사상과 글의 정수를 엮어 그 향기를 피워 올린 글모음이다. 허나 박지원의 글을 서두부터 결말까지 전체를 모두 실어놓은 것이 아닌, 꽃처럼 돋보이는 단락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해서 엮은, 말 그대로 ‘고갱이’만을 간추려 놓은 모음집이다. 엮은이는 시처럼, 편지처럼, 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작업했다고 한다.

설흔이 서두에 박지원을 잘 모른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는 과한 겸양의 말이다. 그는 박지원의 「우상전」을 재해석해 『시인의 진짜 친구』라는 글을 쓴 바 있고, 박지원의 글쓰기론을 소설로 풀어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라는 콘텐츠를 생산할 정도로 누구보다도 ‘박지원’을 사랑하고 깊이 있게 연구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자신 안에 녹여내고도 차고 넘치는 ‘박지원’의 고갱이만을 모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설흔’이 한 조각 한 조각 이어붙인 박지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역설’과 ‘해학’, ‘비판 정신’ 같은 키워드로 설명되는 기존의 ‘박지원’의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조각 조각의 합이 ‘박지원’이라는 전체를 새롭게 재구성해낼까? ‘설흔’이라는 프레임으로 다시 바라본 박지원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그가 남긴 글을 통해 ‘박지원’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

『연암 박지원 말꽃모음』은 다음과 같이 7부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01 벗
02 가족 
03 읽고, 쓰고, 공부하기 

04 고독, 예술, 시(詩) 
05 세상을 사는 지혜, 방법, 혹은 깨달음 
06 인물전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인물전 
07 열하일기

1장에서는 재야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기로 유명했던 박지원의 ‘벗’에 대해 다루었다. 박지원은 뛰어난 역량을 지녔음에도 세상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과 교우하고, 서얼 출신 문인들과도 신분을 가리지 않는 우정을 나누었던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내리는 ‘벗’의 정의, 홍대용, 이덕무 등에 대한 평가, 벗을 대하던 마음가짐과 벗과의 묘하고도 아름다운 우정, 인연을 소중하고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가짐 등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을 키워드로 한 2장에서는 형님과, 누님에 대한 소회, 형수님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를 잃은 절절한 슬픔, 처남을 아끼는 살뜰한 모습과, 자식과 손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 등 박지원이 가진 ‘가족애’의 면면을 느낄 수 있다. 역사 속 이야기와 문학 작품으로만 그를 접했던 독자라면 ‘박지원’이라는 인간의 지극히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장으로, 평면적으로만 느끼던 옛사람 박지원을 살아 숨 쉬었던 하나의 인물로 입체감 있게 느끼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3장에서는 ‘문호’이자 ‘학자’로서 ‘학문’과 ‘문장’을 대하는 박지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읽고, 쓰고, 공부하기’라는 키워드로 이루어진 이번 장에는 박지원이 갖는 ‘문장’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 ‘글공부’에 대한 방법 및 당부, ‘독서’와 ‘공부법’, ‘학문’과 ‘삶’의 관계, ‘공부’란 무엇인지에 대한 박지원만의 명확한 시각과 철학을 보여준다

4장은 ‘고독, 예술, 시’라는 주제로 천둥소리 한번에 거문고로 화답을 하며 밤잔치를 열던 옛사람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시를 잘 쓰지 않았던 박지원이 남긴 귀한 시 작품들을 수록했으며, 시에 버금갈 만큼 생생하고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시와 같은 문장들을 골랐다. 마음에 드는 글을 새로 지어 뜻 맞는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소리 내 읽고 감상하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는 박지원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5장은 ‘세상을 사는 지혜, 방법, 혹은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생활 속에서 박지원이 깨우친 것들과 잔잔한 철학들, 그가 스스로 내린 개념이나 단어에 대한 정의들, 그만의 눈으로 해석하고 바라본 세상에 대한 시각들을 모았다. ‘풍자’와 ‘비판’, ‘통찰’과 이면을 꿰뚫어 보던 박지원 특유의 철학이 잘 담겨져 있다.

6장은 ‘인물전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인물전’이라는 제목으로, 박지원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 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까닭들을 밝혀놓아 박지원의 작품들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박지원 작품 속 주인공들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매력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7장에는 박지원의 대표작인 『열하일기』에 대한 것을 골라 실었다. 『열하일기』에서 엮은이의 마음에 와닿은 문장들은 물론 『열하일기』를 비난한 유한준에 대한 울분을 토한 박지원의 편지글 등을 통해 당시 그의 심정까지 헤아려볼 수 있다. 더구나 덧붙인 엮은이의 짧은 주석을 통해 박지원에게 열하일기란 무엇이었는지, 열하일기가 만들어진 역사적, 개인적 계기는 무엇인지,『열하일기』에 담긴 박지원의 철학은 무엇인지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의 방대한 저작에 걸친 생애와 사상을 시집과 같은 작은 책 한 권에, 이렇게 간결한 말꽃들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일 것이다. 특히나 이번 말꽃모음에는 설흔이 달아둔 짧은 주석을 통해, 박지원은 물론 설흔의 흔적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잔잔한 재미를 더했다. 엮은이가 특별히 이 문장을 고른 까닭이나 감동을 느끼는 지점들에 공감하며 박지원이라는 조선시대의 큰 문장가이자 학자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 말꽃모음』속의 문장들은 시와 같은 형식의 짧은 글들이지만, 편히 읽을 수 있다는 작은 수고로움에 비하면 그의 사상과 철학이 응축되어 집약된 문장들이 전하는 울림은 커다란 깊이로 감동을 선사해 줄 것이라 믿는다.


엮은이의 말
박지원이 쓴 『연암집』, 『열하일기』, 『연암선생서간첩』에서 글을 뽑았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도 박지원의 글이 있기에 거기서도 좀 뽑았다. 대부분의 글은 부분적으로만 인용했다.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줄였으며 어려운 글은 제외했다. 시처럼, 편지처럼, 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이 박지원에 대해 더 잘 알고,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박지원의 삶과 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평하는 걸 듣고 싶다. 그래서 나 또한 귀동냥으로 박지원이라는 인간과 작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면 한다.

 

 

 

저자 박지원

저서(총 97권)
박지원  조선 후기의 문호이자 실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그밖에 공작관·무릉도인武陵道人 · 박유관주인薄遊館主人 · 성해星海 · 좌소산인左蘇山人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당시 중국의 정세를 살피고, 그 선진 문명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심도 있는 내부 비판을 시도하였다.
1786년 음직으로 처음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이후 여러 말단 벼슬을 거쳐 1792년 안의 현감에 임명되었고, 1797년 면천 군수가 되었다. 1800년 양양 부사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홍대용과 함께 조선의 주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 위에서 이용후생의 실학을 모색했으며, 창조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를 통해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갖고 있던 미망과 편견, 허위의식과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와 미의식의 지평을 몸소 열어 나갔다.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문체반정의 핵심에 자리하게 된 『열하일기』를 통해 불후의 문장가로 조선의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벗어나 이덕무, 홍대용, 이서구, 백동수 등과 어울려 수학하였다.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열하일기』라는 저서를 남겼다.
그는 69세에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1

벗의 정의

 

날개 우(羽)자를 빌려 벗 붕(朋)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자와 또 우(又)자를 합쳐서 벗 우(友)자를 만들었다.

‘벗이란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2

내겐 벗이 없다

 

명성, 이익, 권세를 좆는 세 가지 부류의 벗을 버리고 난 후 비로소 눈을 밝게 뜨고 참다운 벗을 찾아보았습니다.  한 사람도 찾지 못했습니다. 멋 사귀는 도리를 다하면서 벗을 사귀기란 확실히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그러나 어찌 한 사람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내가 일을 당했을 때 잘 깨우쳐준다면 돼지 치는 하인도 나의 어진 벗이고, 의로운 일에 대해 충고해 준다면 나무하는 아이라도 역시 나의 좋은 벗이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벗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돼지 치는 벗은 학문을 논하는 자리에 함께하기 어렵고, 나무하는 벗은 예를 갖추는 자리에 함께하기 어렵지요. 그러니 옛날과 지금을 더듬어 살아보면서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3

 

몽직(이한주)은 달 밝은 저녁이나 함박눈 내린 밤이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술 한 병 들고 와서는 거문고를 타고 그림을 말하며 흠뻑 취하곤 했다. 그 당시 나는 고요히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달빛 아래 쓸쓸히 거닐다 돌아오면 몽직이 와 있었고, 내리는 눈을 보며 몽직을 생각하면 어느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열어보면 그이는 바로 몽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을 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박지원과 깊은 우정을 나눴던 이희천은 나라에서 금서한 『명기집략』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효수되었다. 이한주 또한 비명횡사했으므로 이희천을 떠올린 것이다.

(고소설사 4대 사건 : 제1차 유양잡조 사건 / 제2차 설공찬전 사건 / 제3차 명기집략 사건 / 제4차 소설 수입 금서령 사건)

 

 

 

4

어제 그대가 정자 위 난간을 배회할 때, 나는 다리 곁에 말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서로 간의 거리가 한 마장쯤 되었겠지요. 우리가 바라본 곳은 아마도 그대와 내가 서 있던 그 사이 어디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

.........

 

그대는 나날이 나아가십시요. 나 또한 나날이 나아가겠습니다.

 

 

 

 

5

『북학의』를 펴서 보니『열하일기』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꼭 한 사람이 쓴 것 같았다. 그랬기에 재선(박제가)은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보여줬을 것이다. 나 역시 흐뭇해서 사흘 내내 읽으면서도 지겨운 줄을 전혀 몰랐다.

 

- 그렇다면『북학의』는 공저일 것이다.

 

 

 

 

6

참 슬픈 일일세! 내 일찍이 벗을 잃은 슬픔을 아내를 잃은 슬픔보다 훨씬 크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아내를 잃은 자는 두 번 세번 장가라도 들 수가 있고,  서너 차례 첩을 들여도 안 돨 것은 없지. (……) 벗은 그럴 수 없네. 눈이 있기는 하나 내가 듣는 것을 누구와 함께 들을 것이며, 귀가 있기는 하나 내가 듣는 것을 누구와 함께 들을 것이며, 내 입이 있기는 하나, 내 코가 있기는 하나, ....... 마음이 있기는 하나 내 지혜와 깨달음을 도대체 누구와 나눠야 할까?

 

 

 

7

살아 있는 석치(정철조)라면 함께 웃기도 하고 욕지거리도 하면 몇 섬 술을 꼭지가 돌도록 마셔, 마구 토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히고, 정신이 어질어질해 다 죽게 되어서야 그만둘텐데,, 아, 지금 석치는 정말로 죽었구나!

 

 

 

8

백아와 종자기

 

종자기가 죽었을 때 백아는 거문고를 끌어안고 한탄했겠지. 이제 나는 누구를 위해 연주해야 하나? 내 연주를 들을 사람은 어디에 있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단번에 줄을 끊었겠지. 쨍 소리가 요란했겠지. 그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네. 맥아는 자르고, 끊고, 부수고, 박살내고, 짓밟고, 아궁이에 쓸어 넣어 불에 태웠다네. 그제야 겨우 성에 찼겠지. 스스로에게 물었네.

"속이 시원하냐?"

"시원하다."

"울고 싶으냐?"

"울고 싶다."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해서 종이나 경쇠가 울리은 것 같았겠지. 눈물은 구슬처럼 옷에 뚝뚝 떨어졌겠지. 눈물 가득한 눈으로 보면 빈산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었겠지.

내가 백아를 보았냐고? 그럼, 보았고말고!

 

 

 

 

백아절현(伯牙絶鉉)

 

성연자에게 음악을 배운 유백아(伯牙)는 거문고의 최고경지인 금예(琴藝)의 반열에 올랐다.

백아(伯牙)는 태산에 올라 일월이 뜨고 지는 장관을 보며 화성을 득하고,

봉래 바닷가 파도소리에서 대자연의 교향을 득하니 마침내 음악의 본령을 깨닫는다.

하지만 천하를 주유했거늘 자신의 참 경지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고

20년만에 고국에 돌아오니 스승 성연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다.

상심한 백아(伯牙)가 스승이 남겨준 고금일장(古琴一張)으로 시름에 겨워 탄주를 시작했다.

갈대가 흐트러진 강기슭 뱃전에서 애잔한 거문고 소리가 백아의 시름을 타고 은은히 울려 퍼지는데

뜻밖에도 바람결에 사람의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아의 탄금에 탄식을 한 사람은 종자기(鍾子期)란 가난한 나뭇꾼.

백아가 줄을 가다듬고 '水仙操' 한 곡을 뜯으니,

"파도가 바람에 휘날리고 넘실 넘실 흐르는 물이구료."

놀란 백아가 다시 '天風操'를 탄주하니

"해와 달을 가슴속에 거둬들이고 별들을 발밑에 밟고 섰구려"

금예의 경지를 알아주는 종자기의 경지....

....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백아가 금을 타며 바다 떠올리면 종자기의 마음도 바다가 되고,

산을 생각하면 함께 산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백아가 高山(고산)의 정취를 실어 연주하니 ─‘우뚝한 기상이 큰 산과 같구나!’

백아가 流水(유수)의 정을 실어 연주하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구나!’

이듬해 종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무덤 앞에서 통곡을 하던 백아는

미련 없이 칼을 들어 거문고 줄을 자른다. ‘知音’이 없는 세상!

백아는 홀로 금을 탄주할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후일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백아절현(佰牙絶絃)이라 불렀다.

 

-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백아절현(伯牙絶鉉) - 

 

 

 

좋은 친구는 마음의 그림자처럼


친구사이의 만남에는 서로의 메아리를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상호간의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 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詩句가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 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9

아름다운 꿈

 

꿈에 벗들이 찾아와 말하더구나. 산수 좋은 고을의 원님이 되었는데 왜 우리를 대접하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리더구나.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았다. 모두 죽은 벗들이었다. 그래서 상을 차려 술을 올린 것이다. 예법에 없는 일이기는 하지. 그러나 다만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백아절현(伯牙絶鉉)

 

성연자에게 음악을 배운 유백아(伯牙)는 거문고의 최고경지인 금예(琴藝)의 반열에 올랐다.

백아(伯牙)는 태산에 올라 일월이 뜨고 지는 장관을 보며 화성을 득하고,

봉래 바닷가 파도소리에서 대자연의 교향을 득하니 마침내 음악의 본령을 깨닫는다.

하지만 천하를 주유했거늘 자신의 참 경지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고

20년만에 고국에 돌아오니 스승 성연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다.

상심한 백아(伯牙)가 스승이 남겨준 고금일장(古琴一張)으로 시름에 겨워 탄주를 시작했다.

갈대가 흐트러진 강기슭 뱃전에서 애잔한 거문고 소리가 백아의 시름을 타고 은은히 울려 퍼지는데

뜻밖에도 바람결에 사람의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아의 탄금에 탄식을 한 사람은 종자기(鍾子期)란 가난한 나뭇꾼.

백아가 줄을 가다듬고 '水仙操' 한 곡을 뜯으니,

"파도가 바람에 휘날리고 넘실 넘실 흐르는 물이구료."

놀란 백아가 다시 '天風操'를 탄주하니

"해와 달을 가슴속에 거둬들이고 별들을 발밑에 밟고 섰구려"

금예의 경지를 알아주는 종자기의 경지....

....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백아가 금을 타며 바다 떠올리면 종자기의 마음도 바다가 되고,

산을 생각하면 함께 산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백아가 高山(고산)의 정취를 실어 연주하니 ─‘우뚝한 기상이 큰 산과 같구나!’

백아가 流水(유수)의 정을 실어 연주하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구나!’

이듬해 종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무덤 앞에서 통곡을 하던 백아는

미련 없이 칼을 들어 거문고 줄을 자른다. ‘知音’이 없는 세상!

백아는 홀로 금을 탄주할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후일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백아절현(佰牙絶絃)이라 불렀다.

 

-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백아절현(伯牙絶鉉) -  

 

 

 

10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꺼내 먹어라. 내가 직접 담갔다. 아직 다 익지는 않았다.

 

-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시절에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소고기 볶음은 잘 받았느냐? 아침저녁으로 먹고 있느냐? 왜 좋은지 나쁜지 답이 없느냐? 참으로 버릇이 없구나. 버릇이 없어.

 

- 연암이 맏아들 박종의에게 보낸 편지다. 연암은 음식을 가끔씩 만들곤 했던 것 같다.

 

 

 

 

 

11

청탁하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처남(이재성)이 보낸 편지가 와 있더군요. 내 고독한 처지를 위로하느라 이렇게 썼습디다. "가족과 함께 사는 신선은 없으니 쓸쓸하다고 투덜대지 마시길. 쓸쓸해야만 비로소 시선을 만나볼 수 있는 법이랍니다."

이 사람은 이번에 겨우 급제한 늙은 진사입니다. 집안끼리 알고 지내셨을 테니, 환한 창 아래서 글을 쓰면서 손길가는 대로 말씀 드린 겁니다. 훌륭하신 분이 이끌어주실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합니다.

 

- 벗이자 우의정인 김이소에게 처남의 취직을 부탁하는 글.

 

 

 

 

12

글쓰기는 전쟁과 같다

 

글을 잘 짓는 사람은 병법에도 能할 것이다.

글자는 군사이고, 글의 뜻은 장군이다.

제목은 敵이고,

오래된 이야기의 인용은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서 단락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행군하는 것과 같다.

운(韻)으로 소리를 맞추고 멋진 표현으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다.

앞과 뒤를 어울리게 하는 것은 봉화를 올리는 것이고,

비유는 기병이 기습공격하는 것이다.

문장에 입체감을 주는 억양반복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고,

제목의 뜻을 밝히고 마무리하는 것은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13

글의 맨얼굴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경전에 나오는 그럴듯한 말을 억지로 연결시켜서 근엄하고 엄숙하게 꾸미는 사람은 화가를 불러서 초상화를 그리게 할 때, 용모를 싹 고치고 나서는 이와 다를 바 없다. 평소와 달리 시선을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주름살 하나 없이 편 옷을 입고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그이의 참모습을 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14

이명과 코골이

 

한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몹시 기뻐하며 곁에 있던 동무에게 말했다. "이 소리 좀 들어봐, 내 귀에서 소리가 나. 피리나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동글동글한 게 꼭 별과 같아!"

동무가 귀를 대 보았으나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이는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시골사람과 한 방을 쓴 일이 있는데 그 사람은 코를 심하게 골았다. 코 고는 소리가 하도 커서 토하는 것도 같고, 휘파람 부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같고, 후후 불을 부는 것도 같고, 솥의 물이 끓는 것도 같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것도 같았다. 들이 쉴 땐 톱질 소리가 났고, 내뿜을 때는 돼지 우는 소리가 났다.

다른 이가 깨우자 화를 내며 말했다. "난 그런 일 없소."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의 경우는 더 심하다.

 

 

 

15

물속의 물고기

 

물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네. 그 이유를 아는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라서 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낙서(이서구)의 온 방에 전후좌우 책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네. 그러니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니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밖에.

 

 

 

16

 

저 하늘을 나는 새는 얼마나 생기발랄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새 존(鳥) 한 글자로 적막하게 표현함으로써 색깔을 지우고 소리를 없애 버리지요. 이래서야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새 조각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17

하늘은 푸른데 천(天)자는 푸르지 않아

 

나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아이가 있는데 읽기를 싫어합니다. 그걸 나무랬더니 아이가 이렇게 말합디다.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싫습니다.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기죽일 만합니다.

 

 

 

18

사람과 매미와 지렁이

 

자네가 똑똑하고 꾀바르다고 해서 남들에게 잘난 체를 하거나 생명 있는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되네. 우리가 뭐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네. 냄새나는 가죽 주머니에 남들보다 문자 몇 개 더 지니고 있을 뿐이지. 나무 위의 매미소리, 땅속의 지렁이 울음소리가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19

말똥과 여의주

 

말똥구리는 자기가 굴리는 말똥을 사랑하지. 그러므로 용이 가진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네. 용 또한 여의주가 있다고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는다네.

자패(유금)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했다.

"제 시집에 딱 어울리는 말이외다."

그는 시집 이름을 '말똥구슬'로 붙인 후 내게 서문을 부탁했다.

 

 

 

20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마음이다. 일년 내내 글을 읽어도 공부가 늘지 않는 까닭이다.

 

가난한 이가 글 읽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자가 글읽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21

글쓰기의 어려움

 

글 쓰는 이에겐 네 가지 어려움이 있다. 1) 근본이 되는 학문을 갖추기 어렵고, 2) 공정하고 밝은 안목을 갖추기 어렵고, 3) 자료를 아우르는 역량을 갖추기 어렵고, 4) 정확한 판단력을 갖추기 어렵다.  재주, 학문, 식견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없어도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22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책을 읽다가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리지. 한 글자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를 않지. 그러나 제목을 정해 놓고 글을 구상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읽은 내용이 하나 둘 떠오르다가 강물처럼 쏟아져 흐른다.

 

 

 

23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 뭔지 아느냐? 마음에 드는 글을 새로 지었을 때 뜻 맞는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 글 잘 읽는 청년에게 글을 읽게 하고는 누워서 감상을 듣는 것, 바로 그것들이다.

 

 

 

24

최홍효는 소문난 명필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답안지를 쓰다가 자신이 쓴 글자 하나가 왕희지의 서체와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차마 그것을 버릴 수 없어 답안지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화가 이징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다락에 올라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집에서는 그가 있는 곳을 몰라서 난리가 났다. 사흘 후에 그를 찾아낸 아버지가 화가 나서 종아리를 때렸다. 이징은 울면서도 떨어진 눈물로 새를 그렸다.

 

 

 

 

 

 

 

 

 

 

 

 

 

 

 

 

 

 

 

 

 

 

 

 

 

 

 

 

 

 

 

 

 

 

[경향신문] ㆍ경향신문 후마니타스 인문기행 ‘열하일기’ 2차 답사

지난달 27일 중국 하북성 승덕(承德)시 열하문묘 앞 마당에서 이승수 한양대교수(왼쪽에서 네번째)가 경향신문 열하일기 답사 참가자들에게 연암 박지원의 열하 방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 열하문묘는 문화대혁명 때 소실됐으며 2010년 복원됐다. 문묘 왼쪽에 연암이 묵었던 태학관이 있다. 후마니타스연구소 제공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의 열하일기 답사팀이 지난달 24~28일 연암 박지원과 함께 걸었다.

‘열하일기’ 속 ‘동악묘기’ ‘황도기략’ 등 연암의 서술 따라 ‘통주~승덕’ 기행 “짐승 같은 산과 귀신 같은 산봉우리들이 창과 방패를 벌여놓은 듯” 험난함 묘사한 고북구 명문장 ‘야출고북구기’ 낳은 만리장성 3대 관문…답사팀엔 단풍 물든 평온한 산촌

지난 6월 1차(압록강~심양~산해관~통주)에 이은 두 번째 연행길 답사였다. 2차 답사는 북경의 초입 통주(通州)에서부터 시작됐다. 북경과 항주를 잇는 중국 대운하의 기착점인 통주는 남방의 물산이 몰렸던 물류기지였다. 230여년 전 연암은 빽빽이 들어찬 배들을 본 뒤 “운하의 선박들을 구경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수도의 장관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옛 운하 물길에는 배 한 척 다니지 않는다. 답사팀은 강변을 걸으며 화려했던 통주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통주에서 북경성 방향으로 8리 지점에 팔리촌이 있다. 청나라 옹정제는 팔리촌에서 북경까지 40리길에 석도(石道)를 닦았다. 곡식 운송 대로였다. 그 시작이 영통교(永通橋)다. ‘팔리교’라고도 하는 이 다리는 노구교(蘆溝橋), 조종교(朝宗橋)와 함께 북경 3대 석교로 꼽힌다. 1446년에 건설된 영통교 양쪽 난간에 수 십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돼 있다. 다양한 얼굴의 조각상은 마모가 심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리 양단의 아래에도 엎드린 사자 두 마리가 있다. 운하의 홍수를 막는 진수수(鎭水獸)이다.

다음 방문지는 동악묘이다. 중국 5악의 하나인 태산의 신을 모신 도교 사당이다. 6만㎡의 넓은 경내에 북경 민속박물관이 있다. 연암 연행단의 삼사, 곧 정사·부사·서장관이 황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옷을 갈아입었던 곳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 ‘동악묘기’를 남겼다. 답사팀도 연암처럼 경내를 어슬렁댔다. 입구의 800년 된 회화나무는 사당의 산증인이다. 동악태제를 비롯해 ‘동악묘기’에 묘사된 여러 신상과 비석들은 옛 모습 그대로다. 동악묘를 나오니 가을 해가 기울고 있었다. 동악묘 맞은 편에 ‘永延帝祚’(영연제조)라는 글자를 새긴 유리 패루가 눈에 들어온다. 좌우에는 고루와 종루가 우뚝하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은 북경에서만 한달간 체류했다. 자금성 서쪽의 서단 인근에 있던 서관(西館)을 숙소로 사용했다. 앞서 연행사들이 주로 묵은 숙소는 옥하관(玉河館)이었다. 그러나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사신의 숙소가 되면서 조선 사신들은 회동관으로 밀려났다. 연암이 가기 한 해 전 회동관이 불탔다. 연암 이후에는 서관을 주로 사용했다. 답사팀은 아침 일찍 옥하관을 찾아갔다. 답사팀을 이끈 이승수 한양대 교수가 앞장섰다. 회동관이 있었다는 왕부정의 금어호동(金魚胡同)을 거쳐 천주교 동당을 들렀다. 이어 옥하관으로 가는 동교민항(東交民巷)은 사신들의 거리다. 명청시대에는 사관(使館)들이, 20세기 초에는 대사관들이 모여있었다. 옥하관이 있던 곳에는 중국 최고인민법원이 들어섰다. 경비가 삼엄해 입장은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이승수 교수는 “‘옥하’는 한국 문헌에만 등장하고 중국 자료에는 ‘어하(御河)’로 나온다”고 옥하관의 명칭을 설명했다. 어하에 3개의 다리가 있었다는데, 지금 어하는 물론 어하교도 없다. 하천을 메워 도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의로(正義路)’가 그것이다. ‘정의로’ 입구에 안내판이 있다. “전체 길이는 730m이다. 동쪽 장안가 남쪽의 정의로의 본래 이름은 어하교이다. 어하의 옛 길이다….” 북경에 남아있는 옥하관에 대한 유일한 표지이다.


옥하관에 비하면 유리창 거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점가로 이름 높은 관광 명소다. 거리 이름은 황궁에 납품하던 유리기와를 만든 곳에서 유래했다. 연암이 이곳을 놓칠 리 없다. 그는 유리창의 양매서가를 거닐고 ‘육일루’, ‘선월루’ 서점을 찾았다. 연암은 유리창의 건물이 27만 칸이었다고 <열하일기>에 적었다. 이승수 교수는 유리창은 선진 문물의 수입 창구였을 뿐 아니라 한·중 지식인의 ‘만리신교(萬里神交)’의 장, 곧 만남의 장소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청나라 말, 이곳의 서점은 270여개나 됐다. 지금 서점은 거의 없고 골동품 가게가 대부분이다. 서울 인사동의 변천과 비슷하다. 평일이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연암에게 북경은 ‘호기심 천국’이었다. 이곳저곳을 쏘다녔고, 중국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열하일기>의 ‘황도기략’은 유리창, 자금성, 천단, 종묘와 사직 등 북경 문화유산에 대한 기록이다. 북경 최고의 천주교회인 천주교 남당도 중요한 사적이다. 연암은 이곳 성당의 그림·악기 등에 관심을 보였다. 이 성당은 1605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개인 예배당에서 비롯됐다. 소현세자와 친교가 두터웠던 아담 샬(중국명 탕약망)이 와서는 본격 교회 건물로 증축했다. 1650년의 일이다. 이곳은 연행사들의 필수 코스였다. 김창업, 홍대용도 이곳을 찾았다. 성당 입구에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와 마테오 리치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교회당은 바로크식 건물로 아치형의 출입문이 인상적이었다. 성당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한 답사팀은 성당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 방문은 돌발적으로 이뤄졌다. 연암 일행은 당초 북경에서 건륭제의 만수절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다. 열하로 오라는 통보를 받고, 연암 일행은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북경에서 열하, 곧 승덕까지 230㎞를 4박5일에 걸쳐 주파한다. 밤잠도 이루지 못한 채 산과 강을 지나고 장성을 넘었다. 이 속에서 ‘일하구도하기’와 ‘야출고북구기’라는 명문장이 나왔다.

연암은 하룻밤에 아홉 개의 강을 건넜을까. 이승수 교수는 백하, 조하, 난하가 이어지고 구불구불 산들이 계속되는 지형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면서도 픽션이 가미된 산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밝혔다. 여행길에 ‘호질’과 같은 소설을 뚝딱 지어내는 그의 상상력으로 볼 때 개연성이 있는 얘기다. 북경~열하 노정에서 떨어진 북경시 회유구에 있는 ‘구도하(九渡河)’에서 착상해 ‘일야구도하기’를 썼을 수도 있다. 열하 가는 옛 길은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북경 사람들의 식수원인 밀운저수지가 들어선 뒤에는 노정을 추적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야출고북구기’의 현장 고북구는 관광 명소다. 고북구는 산해관, 거용관과 함께 북경에서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만리장성 3대 관문 가운데 하나이다. 명대 이전에는 북방유목민족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였지만, 청나라 강희제 이후에는 피서산장으로 통하는 행차길로 사용됐다. 지금은 황제가 다녔다는 고어도(古御道)와 크고 작은 사원들을 복원해 관광객을 부른다. 답사팀은 고어도와 고북구 장성길을 걸었다. 연암은 “짐승 같은 산과 귀신 같은 산봉우리들이 창과 방패를 벌여놓은 듯하다”고 고북구의 험난함을 묘사했지만, 답사팀이 걸은 고북구는 단풍이 물든 평온한 산촌이었다. 내친김에 고북구를 끼고 있는 반룡장성에 올랐다. 구불구불 용이 서려있다는 반룡장성은 장관이었다. 잘 다듬어진 팔달령장성과 달리 폐허의 장성에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북경에서 보기 어려운 파란 하늘은 답사팀을 더욱 설레게 했다.

황제의 여름별장 있는 열하에서 연암은 승려·사신·학자들 만나며 동아시아를 조망 그 배경인 문묘·태학관,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호텔로도 임대…당시의 풍취 사라져


열하는 황제의 여름별장 피서산장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연암에게 피서산장의 풍광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열하의 건륭제 생일잔치에 참여한 승려, 사신, 학자들을 주목하며 동아시아 세계를 조망했다. 열하는 세계의 형세를 살피는 심세(審勢)의 현장이었다. 그는 생각의 일단을 <열하일기> ‘심세편’에 담았다. 답사팀 역시 연암의 시각을 주목했다. 연암이 열하 체류 동안 숙소로 이용했던 태학관을 먼저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태학관은 공자 문묘에 부속된 성균관을 말한다. 유생들의 학교이자 기숙사이니 연암의 숙소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 학자들을 만나 인생과 자연과 철학을 논했다. 중국 3대 문묘의 하나인 열하 문묘는 문화대혁명 때 소실됐다가 2010년에 복원됐다.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문묘는 썰렁했다. 새로 세운 콘크리트 시설에서 연암의 체취를 맡기는 어려웠다. 성균관으로 복원된 태학관은 호텔로 임대해 줄 정도로 관리가 엉망이었다. 연암이 달빛 아래 담배 물고 거닐었던 풍취는 어디에도 없다. 중국 문화의 현주소다.

승덕 피서산장 앞 시민공원에 세워진 박지원기념비. 박지원의 성을 ‘樸’으로 잘못 적었다(위 사진). 열하일기 답사 참가자들이 지난달 26일 고북구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옛 황제의 행차길인 고어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후마니타스연구소 제공


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세계문화유산 피서산장을 한 시간 동안 걸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피서산장 안에 박지원과 이덕무의 기념비가 있었다는데 비석이 놓였던 자리는 텅 비어있다. 아쉬워하던 차에 피서산장 밖 시민공원에서 박지원 기념비를 만났다. 그런데 아뿔싸! 박지원의 성 ‘朴’이 ‘樸’으로 되어있다. 중국에 없는 ‘박’씨를 번체자로 쓰면서 빚어진 오류다.

피서산장 밖에 있는 수미복수지묘는 건륭제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 티베트 불교 제2인자 판첸라마가 한달 넘게 거처했던 찰십륜포(札什倫布)이다. 연암은 이곳에서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만남을 지켜보며 청의 외교정책을 들여다봤다. 관찰 결과가 <열하일기>에 있는 ‘찰십륜포’, ‘반선시말’, ‘황교문답’이다. 이 글들은 오늘날에도 국제정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텍스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아시아는 소리 없는 전쟁터이다. 연암은 보이지 않는 외교전쟁을 읽어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연암의 ‘심세’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황금 기와지붕이 이채로운 수미복수지묘를 거닐면서 연암의 통찰력의 근원을 생각했다. 경향신문 열하일기 답사팀의 여행은 열하 외곽, 경추봉에서 끝났다. 야구방망이를 닮았대서 ‘방추봉’이라고도 불리는 경추봉에 오르니 피서산장과 승덕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열하를 해자로 삼고, 소포탈라궁(보타종승지묘)과 수미복수지묘를 유목 민족을 회유하는 사찰로 배치한 피서산장은 별장이지만 기실 정치적 공간이다. 연암은 경추봉에 오르지 않고도 이를 간파했다.

답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참가자들은 4박5일의 소회를 얘기했다. 장소가 시간을 호출한다고 했던가. 답사에 참여한 30명은 모두 200여 년 전 연암을 만나 함께 걷고 대화했다. 연암은 우리 역사의 큰 바위 얼굴이었다. 연암을 만나게 한 가이드북은 <열하일기>였다. 참가자들은 여행을 통해 연암 박지원이라는 거인을 마음속에 품었다. 북경 공항에 도착했을 때야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승수 교수가 한마디를 던졌다. “말은 다 했으나 생각은 끝이 없을 것이다(言有盡而意無極也).” 열하답사는 늦가을날의 몽유(夢遊)였다. (※지명·인명 표기는 현지 중국어 발음이 아닌 한자음을 따랐다.)

북경·승덕(중국) |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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