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6. 18:28ㆍ책 · 펌글 · 자료/문학
2008. 11
어려운 시절을 견뎌낸 김훈만이 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
김훈 신작 에세이 『바다의 기별』.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등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해낸 소설가 김훈이 4년 만에 새롭게 펴낸 에세이집이다.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간접적으로 작가의 속내를 드러내었던 소설과는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와 명석한 판단력 그리고 통찰의 언어로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김훈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록된 13편의 작품들은 치열한 삶을 살아낸 작가 김훈, 그리고 인간 김훈의 내면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힘겨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들, 작가로서의 고뇌, 죽음에 대한 사유 등 그간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면의 갈등과 싸우며 시대와 부딪히며 격렬한 인생을 살아온 김훈, 그가 지나쳐온 삶의 여정을 직접 들려준다.
『바다의 기별』은 온몸을 다바쳐 글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온 작가 김훈의 내면 세계와 삶의 모습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대와 가족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훈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층 더 깊게 해줄 것이며,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게 깊은 위안과 힘찬 용기를 선사해 줄 것이다. <양장본>
★ 이 책의 구성
13편의 에세이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3편의 산문은 치열한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김훈의 이야기입니다. 부록에는 그간 김훈이 펴냈던 저작물들의 서문을 모아 실었습니다. 또한 서문 모음과 함께 수상소감들도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자전거레이서.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지은 책으로 독서 에세이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선택과 옹호』, 여행 산문집 『문학기행 1, 2』(공저) 『풍경과 상처』 『 자전거 여행 1, 2』 『원형의 섬 진도』, 에세이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공차는 아이들』,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개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남한산성』과 소설집 『강산무진』 이 있다.
머리말
Ⅰ 바다의 기별
바다의 기별
광야를 달리는 말
무사한 나날들
생명의 개별성
칠장사 기행
글과 몸과 해금
시간의 무늬
Ⅱ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고향과 타향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
Ⅲ 말과 사물
회상
말과 사물
부록 서문과 수상소감
ㆍ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개/빗살무늬토기의 추억/강산무진
ㆍ공차는 아이들/밥벌이의 지겨움/풍경과 상처/자전거 여행/자전거 여행2
문학기행/원형의 섬 진도/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내가 읽은 책과 세상/선택과 옹호
ㆍ다시 임화를 생각함/스스로 두려운 마음으로/지표가 된 약봉투
오치균의 그림
김훈의 격정에 찬 산문은 참담함과 쓸쓸함으로 가득 찬 삶의 안과 바깥을 두루 내다보는 자의 비극적 탐미의 결과물이다.
100만부를 돌파한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 걸출한 장편소설을 펴내며 이 시대 최고의 소설가로 우뚝 선 김훈이 『자전거 여행1?2』,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에 이어 4년 만에 에세이집을 펴냈다.
올해 예순을 맞이한 김훈은 건국 60주년과 맞먹는 생애를 살아온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회상에 잠겼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간 털어놓지 않은 내밀한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눈과 발로 쫓아 사실에 입각한 글쓰기의 치열함과 죽음에 대한 사유, 악과 폭력을 바탕으로 한 약육강식의 세계에 대한 날 선 시선, 힘겨웠던 유년시절 등 그간의 삶과 문학과 시대를 눈부신 미문으로 묘파해 놓았다. 한 개인으로, 아버지로, 아들로, 소설가로서 겪은 삶의 비릿한 진실을 풀어놓아 소설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작가 김훈의 속살을 엿본다
김훈이 처음으로 내면의 풍경과 정신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맨살을 드러냈다. 대형 장편소설과 세상을 향해 쏟아낸 말과 사람살이의 풍경을 담은 에세이집을 내긴 했지만 작가 자신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이 책에는 김훈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지난날의 일화들이 삽화처럼 들어가 있다. 김훈을 말할 때 허무주의자, 탐미주의자, 마초 등의 수사들이 따라다닌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을 통해 드러난 이런 추상적, 관념적 모습이 아닌 진정성이 담긴 삶과, 시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김훈은 이 책에 풀어놓았다.
김훈은 그 누구보다 지극히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낙담한 인간을 눈과 발로 쫓은 디테일로 전달하는 작가다. 그가 온몸으로 써내려간 디테일이 삶의 구체성이 되어 산다는 것의 도저한 본질을 꿰뚫게 한다. 검박하고 담담한 듯 보이는 문장은 오히려 더 절절하게, 치열하게, 웅숭깊게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듯한) 문장은 오히려 심장을 터뜨릴 정도로 강렬함을 남긴다.
선과 악이 혼돈되고 전도되는 시대와 부딪히며 살아온 김훈이 그간의 내면 풍경과 삶, 시대, 가족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펼친 이 책에 더욱 눈길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훈의 신작 에세이 『바다의 기별』은 읽는 이로 하여금 김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기갈난 삶에 깊은 위안과 힘찬 용기를 주는 글들이 담겨 있다.
경제난으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삶에 주름살이 늘어가는 요즘, 영화나 소설이 현실보다 더 심오하고 극적일 수 있을까.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먹고살기 위해 치욕을 견뎌야 하는 나날이 늘어가는 이때 삶을 치열하게 견뎌낸 김훈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반갑다. 영화나 문학작품과 같은 서사예술의 감동이 극중 인물들의 행위와 감상자 개인의 주관적 체험과 기억이 교차될 때 발생하는 화학작용이라 한다면 이 책은 온전히 공감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13편의 산문이 실려 있는 이 책은 김훈이 차린 소박한 성찬이다. 작지만 알차서 그가 살아온 삶의 무늬들을 그려볼 수 있다.
살갗으로 읽어낸 엄정한 삶의 진상
『바다의 기별』에서 김훈은 사적인 차원의 구체적 회억을 처음으로 진술한다. 그가 들려주는, 빈한했던 유년시절과 시대와 불화했던 아버지, 그리고 헌신적이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신파적이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애틋함을 자아낸다. 그는 비루한 것을, 그 어떤 감상도 보태지 않고 다만 비루하다고 말하면서 그 비루함이 유도할지도 모르는 동정과 연민을 차단한다. 동정과 연민을 원천봉쇄하는 그의 강직과 직설이 오히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것은 김훈의 허무주의의 요체를 이룬다. 참담하고 참혹하지만 마주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김훈의 간명한 세계관과 수미의 쌍을 이룬다. '꾸역꾸역 이어지는 삶의 일상성'이야말로 경건하고 진지한 것이며, 삶은 단단하고 무참한 생계의 연쇄라는 일관된 생각을 송곳처럼 명료하게 보여준다.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광야를 달리는 말」중에서
"어머니는 거칠고 사납고 과장된 말을 무척 싫어하셨다. 몇 살 때였던가. 제헌절 날 어머니는 새 옷을 주셨다. 어머니가 주신 새 옷은 새로 산 게 아니라 입던 옷을 빨고 깁고 다려서 주신 옷이었다. "법을 만든 날이다. 새 옷을 입어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으로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어머니에게 헌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눈물겹다." -「고향과 타향」중에서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휴대폰을 사 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 「무사한 나날들」중에서
김훈에겐, 감상을 거부한 분노와 사랑이 곧 문법이며 문체다.
3부에 들어간 최근에 행한 강연 원고에서 김훈은 최초로 자신의 문학적 자의식과 문학론, 그리고 작가로서의 세계관을 매우 명료하면서도 단호하게 드러내고 있다. 2001년 『칼의 노래』를 상재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선 김훈은 일급의 좋은 작가임에 분명하지만, 대개의 좋은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천의무봉의 재능에 기대는 작가의 자리를 스스로 거역한다.
그는 치열한 자기부정의 방식으로 자기합리를 꾀하는 아찔하고 절대적인 모순성으로 가까스로 작가의 길에 서 있을 뿐이다. 그는 그 모순으로 삶이 매순간 만들어내는 애매한 국면의 진상을 꿰뚫는다. 인문성에 매몰된 정신주의자이기보다는 순결한 감각주의자이기를 자처하는 김훈은 다만 자신의 몸이 반응하고 지각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숙명을 긍정할 뿐이다. 거기에서 독특한 김훈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쓴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그의 허무주의는 해명되지 않는 삶의 기저를 투시한다. 그래서 그의 말이 빚어내는 풍경은 참혹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악과 폭력이 이 세상의 근본 바탕이며 그것을 지배하는 형식이 바로 약육강식이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의 심연에서 지각변동과 삼투압을 일으키는 분노와 사랑은 수사의 문법을 뛰어넘어 그것 자체가 곧 명백한 수사가 된다. 다시 말해, 김훈의 문법은 곧 분노와 사랑인 것이다.
보여지는 김훈과 보여지지 않는 김훈 사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부록
이 에세이집은 13편의 에세이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김훈이 펴낸 저작물들의 서문을 모두 모아 부록으로 실었다. 특별히 부록을 실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가 쓴 서문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문장가로, 작가로서 그가 살아낸 시대와 치열한 소통을 보여주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명백한 증물이다. 서문들을 읽다보면 시대와 늘 서늘하게 불화했던 김훈의 복잡하고 아름다운 내면 풍경이 어느덧 질서의 구조를 가지면서 오롯하게 드러난다.
서문 모음과 함께 김훈이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행한 수상소감들도 모았다. 한자리에 모아놓고 읽으면 개별적으로 읽을 때와 달리 김훈의 삼엄한 문학정신, 그 진정성을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서문과 수상소감은 김훈이 쓴 본문의 이야기를 보완하는 2차 텍스트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읽으면 보여지는 김훈과 보여지지 않는 김훈 사이에서 여러 겹을 이루고 있는 미세하고 구체적인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22쪽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한테서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 23쪽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32쪽
중모리 문장은 편안하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는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 또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59쪽
교도소 정문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 김지하가 검거되었던 것이다.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것을 업고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교도소 앞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나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94쪽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언어로써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악과 폭력과 야만성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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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어서, 마을과 강가를 어슬렁거리며 사람 사는 구석들을 기웃거릴 때, 쓴 글과 읽은 글이 무효임을 나는 안다. 이 환멸은 슬프지 않고 신바람이 안다. 나는 요즘 실물의 구체성과 사실성을 생각하고 있다. 실물만이 삶이고 실물만이 사랑일 것이다. 이 묵은 글을 모아놓고 나는 다시 출발선상으로 돌아가겠다. 기다려주기 바란다.
2008년 11월 김훈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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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김승옥)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언 땅이 곡괭이를 튕겨내서, 모닥불을 질러서 땅을 녹이고 파내려갔다.
그때 나는 육군에서 갓 제대한 무직자였다.
땅 파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다급하고도 악착스런 울음이었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한테서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나는 가부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부장이었던 것이다.
'오빠'라는 호칭은 지금도 나에게 두렵고 버겁다.
지금은 한식날 아버지 무덤에 성묘 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여동생들도 이제는 나이 먹어서 울지 않는다.
슬픔도 시간 속에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어 번씩만 집에 다녀갔다. 아버지가 어디를 헤매고 다니는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했고, 묻지 못했다.
아버지가 오시는 새벽에 나는 주전자를 들고 시장에 가서 해장국을 사다 드렸고, 아버지가 누운 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땠다.
아버지는 늘 예고 없이 오셨기 때문에, 차가운 구들을 덥히려면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야 했다.
아버지는 잠들지 못하시는지, 방 안에서는 쿨룩쿨룩 기침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기침소리는 몸속의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듯이 거칠고 깊었다. 기침소리에, 몸속이 무너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버지의 방 아궁이에 장작을 때면서 나는 오직 아버지의 기침이 멎기만을 빌었다.
(……)
허클베리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는 사내였다.
다시는 술 안 먹겠다고 아들한테 맹세해놓고서 그 다음 날 대낮부터 또 마시는 사내였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아버지가 허클베리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1학년 때던가. 천지분간 못하는 나는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꼭 허클베리네 아버지 같아요."
그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내 말이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허공을 올려다보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
죽을 생각을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휴대폰을 사 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 온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아득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을 죽는 날까지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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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래로, 인간은 죽음으로써 지구를 구해냈을 것이다.
다들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면, 또 다들 살 자리가 없어서 죽었을 터이다.
그래서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세계와 후손을 위해서 베푸는 가장 큰 보시이며 은혜일 것이다.
나는 산 자들의 그 어떤 위업도 그 죽음이 베푸는 은혜만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소각로 바닥의 흰 뼈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알았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들은 끝끝내 개별적인 것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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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병은 나의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나의 병을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려고 덤빈다.
생로병사는 생. 로. 병. 사.로 따로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포개져서 흘러가는 것임을 알았다.
생로병사는 분리되지 않는다.
생(生) 속에 사(死)가 있고 노(老)가 있으며,
병(病) 속에 사(死)가 있는 것이다.
이제마가 이해한 인간의 몸과 병은 정치사화회인 것이고
몸과 마음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의학은 인간의 개별성에 접근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동일한 징후에 동일한 처방이 아무런 효험이 없는 경우를
그는 너무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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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漆/七長寺)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964
칠장사를 중창한 혜소국사가 이 절에서 惡人 일곱 명을 거두어 먹이고 교화시켰는데, 악인들이 모두 크게 깨우쳐서 현인이 되었고 이 현인들을 기리기 위ㅙ 절 이름을 '漆'에서 '七'로 바꾸었고 절 뒷산도 칠현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안성 감옥을 부수고 길막봉이를 구출해서 칠장사로 데려온다. 이때 임꺽정의 무리들이 불상 앞에서 도둑 일곱 명이 임꺽정을 두목으로 삼고 의형제를 맺는다.
임꺽정(38세), 박유복(38세), 배돌석(37세), 황천왕동(34세), 곽오주(27세), 길막봉(21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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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내 마음 속에서는 국악의 장단이 일어선다. 이 리듬감 없이는 나는 글ㅇ르 쓸 신명이 나지 않는다. 내 몸 속에서 리듬이 솟아나기를 기다리는 날들은 기약이 없다. 그런 날, 나는 때때로 술을 마시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간다.
휘몰이 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부러진다. 사유가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대목마다 문장이 하니씩 들어선다. 이런 문장들은 대체로 짧고 다급하다. 문장은 조바심치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긴다.
휘몰이로 나가는 문장은 거칠다. 나는 이런 문장을 한없이 쓰지는 못한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리쯤으로 내려앉는다. 중모리 문장은 편하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는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중략)
珍島에서 본 시나위 악사는 왼손으로 해금의 네 줄을 싸감아 쥐고 떡 주무르듯이 소리를 주물렀다. 소리를 손으로 주무르는 것이다! 해금을 켜는 악사를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글이 해금의 소리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소리를 주무를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된가. 나는 해금악사가 소리를 손바닥으로 반죽해내듯이 내 문장을 주물러낼 수가 없다. 그래서 글힘이 모두 빠진 날 나는 해금 연주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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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는 거기에 무슨 인생의 심오한 철리가 들어있거나 놀라운 인식론이나 철학이 담겨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병영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진중일지에 불과한 책입니다. 그러나 그 책은 내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27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더 나이를 먹고 내가 나의 언어를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어느 날 나는 이 『난중일기』와 이순신이 처한 절망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겠구나, 말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것들을 느꼈죠. 그 『난중일기』의 생각은 그 후로 내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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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도 갇힌 城. 그 안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습니다. 싸우자는 자, 화해하자는 자, 뭐 오늘은 싸우자고 했다가 내일은 화해하자고 하는 자가 있고 또 거꾸로 말하는 자가 있고, 거기서 도망가는 자가 있고, 그 안으로 도망오는 자도 있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하는 자가 있어요. 그 안에서 40여일 동안 갇혀 있는데 지식인으로서 아무 말도 안하는 자가 있어요.
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난 대체 어떤 행동을 하면서 그 시절을 통과했을까를 생각하면 아무 답도 안나옵니다. 식은땀만 흐르지요. 나는 아미 짐작컨대 아무 말도 안하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무 말도 안하는 자가 제일 편하겠죠?
그런데 아무 말도 안하는 자도 어떤 내면의 풍경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남한산성』에 그걸 그리려다 못 그렸어요. 그래서 그 소설은 미완성입니다. 이 자가 아무 말도 안했기 때문이지요. 이 자가 한 마디라도 해야 거기다 걸치고 이 자는 대체 어떻게 된 자이길래 아무 말도 안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내가 쓸텐데, 이 자가 끝내 아무 말도 안하니까 나는 쓸 수가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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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자로서 살기 위해 나보다 센 놈한테 내 살점을 먹이로 내주어야만 한다면 또 그걸 뜯어먹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개돼지나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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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신문이나 저널 읽기가 너무 어려워요. 왜냐하면 언어가,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이 사회의 지뱌적 언론과 담론들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는 거예요. 그것은 아마도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신념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의견과 사실은 뒤죽박죽이 됩니다.
이 세상에 언어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시나 소설들도 다 소통을 꿈꾸면서 존재하는 예술입니다.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면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해버리면, 이런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심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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