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5. 20:57ㆍ여행/그리스
전부다 올리브 밭입디다.
고대나 지금이나 올리브밭이 부의 상징이랍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50리터를 짠다든가?
길가에 드문드문 저런 작은 집 모양의 조형물이 있습니다.
교통사고 난 희생자의 가족이나 친지가 추모의 정으로 만들어 세운 거랍니다. 불법이 아니라네요.
한 장소에 여러 개가 있으면 사고 다발지역!
※
나프팍토스 시내에 들어오니까 거리에 자동차며 사람이며, 북적북적합디다.
모든 상점들이 바겐세일하는 날이랍니다.
나프팍토스는 자그마한 小邑입디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는 이곳 나프팍토스에서 3km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함.
다리를 깃점으로 에게海(터키쪽)와 이오니아海(이태리쪽)가 나뉨.
※
레판토海戰은 1571년, 오스만 투르크와 스페인/베네치아/제노바 연합군 간에 지중해 패권을 놓고 벌인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스페인/영국의 거침없는 대항로 개척시대가 열림.
돈키호테를 지은 세르반테스像
레판토해전에 쫄따구로 참전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해적에게 납치돼서 고생고생하다가……
세르반테스가 이곳에서의 경험을「희망가」라는 시로 지었다는데,
베네치아 성벽 스타일이라더군.
레판토 해전
1. 배경
1537~38년 사이 오스만 투르크와 베네치아 중심 스페인, 포르투갈, 말타, 피렌체 등의 기독교 연합 함대가 지중해 동부의 해상권을 두고 프레베자에서 해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기독교 연합 함대가 패배하자, 지중해의 제해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1566년 9월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황제가 사망하고 쌀림 2세가 제위를 이었다. 쌀림 2세는 키프로스 섬에 대해 관심이 컸는데, 마침 1569년 9월 13일 키프로스 섬에 있던 베네치아 의 화약 공장이 폭발하여 그곳에 주둔 중이던 베네치아 함대가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쌀림 2세는 이것을 키프로스 섬 공략의 기회라 판단, 1570년 4월 베네치아에 사절을 보내 키프로스 섬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이 주장을 일축하였고, 투르크는 이에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하여 1570년 8월 키프로스의 Nicosia와 Famagusta를 점령한다. 이에 베네치아는 기독교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2. 전개
교황의 호소로 반 투르크 동맹(스페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등)이 결성되고, 기독교 연합함대는 1570년 늦여름 크레타 섬에 함선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기독교 연합함대는 초기엔 지휘 계통이 통일되지 못하여 혼란을 겪었으나 곧 돈 후앙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휘 계통을 통일하였다.
1570년 8월 25일 기독교 연합함대는 시칠리 섬의 메시나에 집결하였다.(육군 3만, 해군 5만, 갤리선 208척, 갤리어스 6척, 갈레온 26척, 프리깃과 브리간틴 76척 등. 총 316척)
연합함대는 9월 15일 메시나를 출항하여 코루푸로 향하였다.
한편 투르크 함대는 메시나에 집결 중인 기독교 연합 함대를 방해하기 위해 키프러스를 함락시킨 뒤 아드리아 해로 항진하였다. 투르크 함대는 아드리아해 일대를 약탈한 뒤 베네치아에 근접하였으나, 결국 코린트만으로 귀항한다. 투르크 함대는 연합 함대에 대항하기 위해 9월 27일까지 함대를 레판토로 집결시키도록 했다.(갤리선 210척, 갈레온 40척, 소형함선 20척, 병력 7만 5천, 함대사령관 알리 파샤)
10월 7일 양 함대는 레판토에서 조우하였다. 연합함대는 3개 전대로 나뉘어 중앙 전대의 갤리선 64척은 돈 후앙이 직접 지휘하였고, 갤리선 54척의 우익 전대는 도리아가 그리고 갤리선 53척의 좌익 전대는 바바리고가 지휘하였다. 후방의 예비 전대 갤리선 30척은 산타 크루츠가 맡았고, 갈레아스는 중앙과 좌익 전대 앞에 각각 2척씩, 나머지 2척은 우익과 예비 전대 사이에 배치시켰다.
이에 맞선 투르크 함대는 알리 파샤가 직접 지휘하는 중앙 전대에 갤리선 95척을, 갤리선 93척의 좌익 전대는 울루치 알리가, 그리고 갤리선 54척의 우익 전대는 시로코가 각각 지휘하였다.
10부터 기독교 연합함대 바바리고의 좌익전대와 투르크함대 시로코의 우익전대가 맞붙었다. 바바리고는 진형을 흩뜨리지 않으면서 1시간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바바리고가 눈에 화살을 맞았고, 지휘권을 이어받은 그의 조카도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바리고 전대는 시로코의 전대를 해안으로 밀어 부쳐 시로코에게 중상을 입히는 전공을 올린다. 지휘관을 잃은 시로코 전대는 지리멸렬하였다. 레판토 해전에서 양 함대가 입은 손실의 대부분은 바로 이 전투에서 발생하였다.
중앙 전대간의 전투는 약 30여분 뒤에 시작되었다. 돈 후앙이 타고 있던 기함의 현측으로 알리 파샤가 지휘하는 투르크 함대가 돌진해 왔다. 연합함대의 기함이 알리 파샤에게 점령되려는 찰나 콜로나의 기함이 알리 파샤의 함선에 소총을 난사하였다. 위기에서 벗어난 연합함대는 알리 파샤의 함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알리 파샤를 전사시켰다. 그 뒤 투르크의 중앙 전대도 많은 피해를 입은 채 후퇴한다.
한편 외해 쪽에선 도리아와 울루치 알리 간에 복잡한 양상으로 전투가 전개되었다. 도리아는 울리치 알리의 행동에 따라 외해로 크게 반원을 그리면서 우회하였다. 이는 연합함대의 좌익과 중앙 전대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울리치는 이 기회를 틈타 도리아 전대의 주력 부대인 말타 기사단의 함선과 베네치아 갤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말타 기사단은 울리치의 갤리 7척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아 3명을 제외하고 전원 전사하였다. 그러나 울리치는 말타 기사단의 깃발을 휘날리며 프레베자로 후퇴하였다.
3. 결과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는 1만 5천이 사망하였고, 갤리선 1척은 투르크에게 나포되는 등 갤리선 12척을 상실하였다. 이에 대해 투르크 군은 3만이 전사하였고, 8천이 포로가 되었으며, 노수 1만 5천의 기독교도 노수들이 해방되었다. 117척의 갤리선이 나포되는 등, 총 230여척의 갤리선을 상실하였다. 이 뒤 투르크는 유럽의 기독교권에서 철수하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레판토 해전은 갤리선을 주력으로 한 최후의 해전이었고,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인 최후의 일전이었다. 이 해전이 일어난 지 17년 뒤에 일어난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영국간의 해전에서는 범선과 함포간의 전투가 주류였다. 그러므로 레판토 해전은 해전의 역사상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가름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www.seah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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