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미케네 유적지

2018. 8. 6. 08:47여행/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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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 도착해서 ─

 

 

 

 

 

 

 

 

 

 

 

 

 

 

음식 사진이 없는 걸 보니 별볼일 없었네벼.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그리스는 써빙하는 사람이 전부다 70대 노인네더라.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이 의외로 키가 작데? 특히 여자들은 150~160cm수준... 소인국에 온 거 같어.

난, 첨엔 알바니아 사람들인 줄로 알았다니?

 

 

 

 

 

 

지금 이곳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이니까, 습도가 높아서 그런가?

※ 발칸반도 > 펠로폰네소스반도

 

 

 

 

 

무화과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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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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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호메로스에 의해 "길이 넓고", "금빛 찬란한" 도시라고 찬양되었으며 트로이 시를 약탈한 아카이아인(人) 왕 아가멤논이 살던 도시였다. 아이오스일리아스 산과 자라 산 사이의 계곡에 위치해 외부의 침입을 막기 좋은 데다가 미케네를 창건한 전설적인 인물 페르세우스의 이름을 딴 맑은 샘물 페르세이아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등 호메로스의 말대로 '아르고스의 구석에 있는' 도시였다.

 

그리스 본토에 있는 후기 청동기시대의 주요 유적지로 체계적인 발굴작업은 1840년에 시작되었으나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이 가장 유명하다. '미케네 시대'라는 말은 종종 크레타를 제외한 도서(島嶼) 지방과 그리스 본토의 청동기시대 후기를 뜻한다(미케네 문명). 청동기시대 전기에도 미케네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건축물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몇몇을 뺀 대부분은 후기 시대의 건축물에 밀려났다. 남아 있는 궁전은 BC 14세기에(아마도 페르세우스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이 지역 전체 곳곳에 들어선 무덤에서 많은 미술품과 가공품이 나왔다. 미케네 성채의 사자문에서 시작되는 너비 3.6m의 비탈길은 5개의 테라스 벽으로 받쳐진 경사로로 이어지고 거기서 다시 궁전의 남서쪽 입구로 연결되어 있다. 궁전의 남서쪽 입구는 2개의 중심구역으로 통하는데 그 하나는 본래 언덕의 꼭대기에 있었으나 후에 그리스식 신전이 세워지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다른 하나는 서쪽 끝에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남쪽 방향의 낮은 테라스였다.

 

미케네 시대 후기(BC 1400~1100)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크게 발전했다. 크레타에 있는 크노소스가 파괴된 후, 미케네는 에게 해 지역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미케네 함대는 에게 해 앞바다를 제패했고 키클라데스 제도, 크레타, 키프로스, 도데카네스 제도, 소아시아 서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북부, 시칠리아,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의 시장에는 미노아 상품보다 미케네의 상품들이 더 많았다. 미케네의 약탈자들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해안지대를 습격했다. 아가멤논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대도시 트로이를 약탈한 것은 BC 1180년인 듯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BC 1250년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BC 16세기에 한때 미케네 미술은 미노아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크레타 미술가들이 본토로 옮겨갔음이 틀림없다. 모든 미노아 미술의 지역적 다양성들이 미케네 미술에 그대로 나타난다. 미노아 예술의 자연미와 화려한 특성은 그리스의 형식미와 균형감각에 혼합되었다. 이는 이미 헬라도스 문명 중기 시대의 채색도기에 나타나 있고 이후에는 아테네의 디필론 묘지에서 발견된 기하학 양식의 도자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미케네는 BC 1100년경 침입한 도리스인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외곽도시에서 원시 기하학 양식 또는  기하학 양식 시대의 무덤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계속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 미케네가 조그만 도시국가로 존속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성벽 역시 허물어지지 않았다. BC 6세기초에 신전 하나가 세워졌으며 여기서 출토된 훌륭한 부조물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BC 480년에 미케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400명의 남자들을 파견했고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 때도 군대를 보냈다. 미케네의 호전적인 이웃 아르고스 족은 페르시아 전쟁 때는 중립을 지켰지만 BC 470년에 태도를 바꾸어 미케네를 포위하고 비열한 복수극을 폈으며 BC 468년 미케네를 파괴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미케네는 부흥했고 새로운 신전이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세워졌다. BC 235년 아르고스의 참주인 아리스티포스가 미케네에서 죽고 성벽이 수리되었다. 스파르타 왕 나비스는 BC 195년경 일부 젊은 남자들을 끌고갔는데 BC 194년에 새겨진 비문에 그들의 억류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미케네에서는 로마 시대의 유물도 몇 점 발견되었지만 AD 160년경 그리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가 방문했을 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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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 문명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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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만의 발굴   

 

슐리만은 1873년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이라고 여긴 유물을 발굴한 후, 그것을 몰래 빼내와 그리스에 감춰두었다. 이에 터키 당국은 격분했다. 하지만 슐리만에게는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구실이 있었다. 터키 관리들에게 그 보물들을 넘겨주었다면, 그 진가를 모르는 그들은 금을 얻는답시고 용광로 속에 그것들을 처넣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터키 정부는 발굴을 금지하고, 슐리만을 그리스 재판소에 고소했다. 재판 결과, 1875년 4월에 슐리만은 1만 프랑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그는 벌금의 다섯 배인 5만 프랑을 무는 한편,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당시는 황실 박물관)에 트로이에서 출토된 석기와 토기 약간을 기증하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하지만 터키 정부는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 재개를 승인하는 데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876년이 되어서야 중앙 정부에서 허락이 떨어졌지만, 현지 총독은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트로이를 발굴할 수 없게 되자, 슐리만은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성채인 미케네를 발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 역시 슐리만이 트로이에서 일으킨 사건 때문에, 그리스 정부는 좀처럼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슐리만은 몇 가지 조건들을 내세워 그리스 측을 설득했다. ''발굴품은 모두 그리스 측에 넘겨준다, 그리스 관리의 감시 하에 발굴한다, 발굴은 반드시 한 번에 한 장소에서만 한다, 인부는 50~60명으로 제한한다.'' 등이었다. 결국 그리스 정부는 이 조건들을 받아들여, 1876년 7월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케네는 과거의 화려하고 영광스럽던 시절의 면모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황량한 언덕에 외눈박이 거인 퀴클로프스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거석의 방어벽 중 일부분, 그리고 사자문(Lion Gate)으로 불리는 성문의 상인방(上引枋)만이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스 측에서 파견한 감독관은 사사건건 슐리만과 언쟁을 벌였다. 싸움은 다분히 슐리만의 뱃심 좋은 행동 때문에 일어나곤 했다. 그는 한 번에 한 곳에서만 발굴한다는 약속에 전혀 개의치 않고, 처음부터 3곳에서 발굴에 착수했다. 성벽 밖 약간 떨어진 곳에는, '아트레우스의 보고(寶庫)'라고 부르는 궁륭형 무덤이 있었는데, 17세기 초 터키 총독은 거기서 황금제품을 발굴한 적이 있었다. 앞의 그 무덤과 흡사하지만 천장이 함몰된 이른바 '클리템네스트라의 무덤'의 발굴은 슐리만의 아내 소피아에 맡겨졌다.

 

슐리만은 사자문과 그 성문 바로 안쪽 두 곳의 발굴을 직접 지휘했으며 동원한 인부 수도 100명에 가까웠다. 감독관이 그에게 항의하자, 슐리만은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등 발굴을 둘러싼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언쟁은 새로운 발견으로 씻은 듯 사라졌다. 성문 바로 안쪽인 성채의 남쪽에 2중의 석판으로 둘러싸인 직경 약 26미터의 원형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슐리만은 처음에 이를 호메로스 시에 나오는 장로들의 집회 장소인 아고라(agora)시장이자 주민의 집회장소를 겸했던 곳으로 후일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거의 빠짐없이 나타나는 광장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곧 아고라가 아님이 밝혀졌다. 거기서 전투나 수렵 장면이 새겨진 5장의 무덤 돌이 발견되고, 그 아래에서 크고 작은 5개의 수혈묘(竪穴墓)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무덤들 안에는 17구의 유해가 있었다. 성인 남자 12명, 여자 3명, 유아 2명이었다.

 

남자의 얼굴 위에는 그 생김새대로 만들었으리라 짐작되는 황금가면이 씌워져 있었고, 여자 시신들 중 어떤 것은 문양이 있는 수백 장의 작은 황금판들로 뒤덮여 있었다. 또 출토품 중에는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 술잔, 관 등 그 양이 상당했다. 그밖에 청동제, 은제의 항아리와 토기류, 아름다운 상감장식이 있는 검 등 훌륭한 출토품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무덤들은 왕족의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P>

이 수혈묘의 발견으로 슐리만의 호메로스 신앙은 한층 더 굳어졌다. 호메로스는 '황금이 풍부한'이란 수식어로 미케네를 묘사하고 있는데, 출토품은 실로 '황금이 풍부한' 것이었다. 슐리만은 여기서 나온 한 장의 황금가면이 아가멤논의 것이며, 그것이 나온 무덤은 아가멤논의 무덤이라 여기고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그 후 이 무덤은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보다 훨씬 오래 전인 기원전 16세기의 것으로 밝혀져서 슐리만에게 적잖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제4호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술잔은 그의 큰 위안거리였다. 슐리만은 그 잔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11장 632행 이하)에 나오는 필로스의 '네스토르 왕의 술잔'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그 잔을 '여러 개의 대못이 박히고, 각각 2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는 손잡이가 네 개 달린 이중 받침의 술잔'이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4호 무덤에서 나온 술잔은 그것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다. 분명 못이 여러 개 박혀 있으며, 손잡이는 2개였지만 손잡이 각각에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형태의 술잔이었다. 슐리만은 네스토르 왕의 술잔과의 차이점보다는 유사함에 더 주목해, 서슴없이 그 술잔에 '네스토르의 술잔'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얼마 후 또 한 개의 수혈묘가 발견되었다. 성채 밖에서도 새로운 원형 묘역(Grave Circle)이 발견되었다. 편의상 그것을 '원형 묘역 '라 부르고, 슐리만이 발굴한 것을 '원형 묘역 A'라 불러 구분하고 있다. 그 밖에 지금까지 큰 불자리 흔적이 있는 메가론 양식의 왕궁, 깊은 물탱크, 창고, 성채 밖의 가옥들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 미케네는 확실히 에게 문명 후기의 중심이었다고 할 만큼 번영했던 강국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슐리만은 미케네 외의 지역, 특히 미케네보다 남쪽에 위치한 성채도시 티린스(1884~1885년), 미니아스의 보고가 있는 오르코메노스(1886년) 등을 발굴했다. 훗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그 주변에서도 미케네 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또 현대 도시가 서 있어 발굴이 극히 미미한 테베에서는 왕궁의 일부나 횡혈식(橫穴式) 분묘가 드러났고, 오르코메노스 동쪽에 있는 거대한 성채 글라도 발굴했다. 이 발굴들에 힘입어 우리는 미케네 시대의 문화적 특징들을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 문명의 이름을 '미케네'라는 한 성채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문명 전체가 미케네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케네와 같이 성채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소왕국들이 분립해 있던 세계였다.

 

아테네가 위치한 아티카 반도에서 에게 해의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 키클라데스 제도에서는 별개의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졌다. 그것은 에게 문명 시대의 크레타나 미케네로부터 다소 영향은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과 다른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가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 멜로스(혹은 밀로스)섬은 신석기의 재료인 흑요석 산지였던 까닭에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특히 중요한 곳이었다.

 

그 섬의 주거지 필라코피에서는 크레타의 영향이 뚜렷한 '나는 물고기'가 그려진 벽화나, 미케네 식의 성벽 등이 나왔다. 키클라데스 제도에서는 흰 대리석 팔을 가진 여인상이나, '바이올린 형'이라고 불리는 세부 처리가 생략된 인물상, 프라이팬처럼 생겼으나 그 용도가 불분명한 도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그 유물들 대다수는 출토지나 출토 당시의 정황이 명확하지 않다. 조직적이고 학문적인
발굴이 아니라, 주로 소규모의 도굴에 의해 은밀히 거래된 유물들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네스토르 왕은 그리스군을 지휘한 영웅들 중의 하나지만, 다른 영웅들보다 특히 연로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과 지식은 많지만, 더 이상 젊을 때처럼 용맹을 떨칠 수 없음을 한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웬만한 젊은이 이상의 힘이 있어서, 철철 넘칠 정도로 술을 따르면 감히 들어올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황금술잔을 가볍게 들어 기울였다. 호메로스 시의 그 대목을 연상케 하는 술잔이 바로 미케네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 네스토르 왕이 다스리던 나라가 필로스였다. 그것은 오늘날 어디쯤일까? 몇 개의 후보지가 떠올랐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쪽의 나바리노만 북쪽에 있는 에파노 엥글리아노스가 가장 유력시된다. 인근에서 벌집 모양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비록 도굴꾼들에게 유린당한 뒤였지만 미케네 식의 항아리 등 주목할 만한 부장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1939년 그리스 고고학자 쿠루니오테스와 미국의 블레겐이 공동으로 예비조사를 시작해, 그 이듬해에는 왕궁의 일부로 생각되는 석벽이나 벽화의 단편, 선문자 B가 새겨진 점토판 등을 찾아냈다. 그 결과 바로 그곳이 필로스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발굴은 중단됐고, 전후인 1952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발굴이 재개되었다. 그동안 그리스 측에서는 쿠루니오테스가 사망하여, 마리나토스가 그 뒤를 이어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발굴 결과 2개의 왕궁터가 드러났다. 하나는 네스토르의 왕궁으로, 그 서쪽에 인접한 보다 작고 오래된 궁전터는 네스토르의 아버지 넬레우스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네스토르 왕궁은 이른바 메가론식에 큰 불자리가 있는 옥좌의 방을 중심으로 거기에 몇 개의 방들이 딸려 있다. 그 방들은 벽 전체가 석회반죽으로 고정되어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왕궁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잔과 항아리 같은 도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필로스의 왕이 수출하려던 것이었으리라 추측한 학자도 있다.

 

그러나 출토품 중에 보다 중요한 것은 단편들까지 포함해 무려 1천 장이 넘는 선문자 B 서판들이었다. 필로스 왕궁은 기원전 1200년경에 불길에 휩싸여 멸망했다. 화염이 얼마나 거셌던지, 도기의 파편 중에는 마치 유리처럼 반쯤 투명해진 것도 있을 정도였다. 점토판은 거기에 새겨진 기록이 불필요해지면, 물을 부어 다시 반죽하여 쓰기도 해서, 본래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 점토판들은 맹렬한 화염 덕분에 도기처럼 굳어져 장구한 세월 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1936년은 아테네에 영국 고고학 연구소가 개설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로, 런던에서 기념 강연이 열렸다. 에번스가 〈아무도 읽을 수 없는 문자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크레타에서 발견된 미노스 문자에 대해 얘기했다. 그때 강연장에는 14세의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강연을 듣고서 '아무도 읽지 못한다면 내가 읽겠다.'라고 다짐했다. 소년의 이름은 마이클 벤트리스(1922~1956)였다.

 

그 후 그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지만, 소년 시절의 결심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독학으로 고문자를 연구하고, 때때로 연구논문을 써서 학자들에게 보내곤 했다. 물론 미노스 문자를 연구한 학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중에는 미국의 알리스 코버처럼 선문자 B를 대충 읽고 해석하는 데까지 나갔으면서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라고 단념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로 선문자 B는 그 글자 수가 약 90개로, 표음문자 알파벳에 비하면 많고 상형문자인 한자에 비하면 적은 음절문자일 것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또 단어마다 끝에 표기가 있어서, 낱말 하나하나 그 어두와 어미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미만 문자 조합이 다른 글자들이 있어서, 이 문자는 어미변화가 있는 언어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의 문장이 끝나면, 무언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 여자· 검· 말 등의 형상을 간략화한 그림이 그려지고, 그 뒤에 음가는 불분명하지만 숫자로 보이는 문자들이 씌어져 있었다. 이런
문자들로부터 그 문서가 재산목록, 경리기록, 수납기록이었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또 반복해서 나타나는 낱말들은 지명, 인명, 남녀의 직업명 등으로, 일반 어휘와는 구별된다는 것도 대강 알게 되었다.

 

벤트리스는 이 문자가 바로 초기의 그리스어를 나타낸다고 가정해 각각의 문자에 음가를 붙인 표를 만들어 서판들을 읽어보았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마침내 선문자 B를 해독했다고 판단, 1952년 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학자들에게 보냈다. 이 보고서를 눈여겨 본 케임브리지 대학의 존 채드위크 교수는 그에게 공동연구를 제안했고, 이듬해 두 사람은 학술지에 선문자 B를 해독한 논문을
발표했다. 벤트리스는 그 후 채드위크와 협력해 선문자 B 해독의 역사와 문법, 대표적인 점토판 300장의 해독, 단어집 등 이 문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총망라해 집대성한 《미케네 시대 그리스인의 기록》이란 책을 완성했지만, 출판 직전 자동차 사고로 요절했다.

 

여전히 벤트리스의 해독을 미더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블레겐이 2개의 파편이 하나로 연결되는 서판에서, 한 쪽은 초기 그리스어로 말· 당나귀로 읽고, 다른 쪽은 말과 당나귀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서로 일치함을 알아내고 벤트리스의 해독이 옳았음을 밝혀주었다.

 

에게 문명의 3개 문자 중 그림문자는 기원전 1700년 무렵까지 쓰였고, 선문자 A는 기원전 1800~1500년까지, 선문자 B는 기원전 1500~1200년 무렵까지 쓰였다고 추정된다. 그것은 그 문자들이 기록된 서판들이 출토된 유적의 층위로 알 수 있다. 선문자 B는 크노소스에서 출토되긴 했지만, 필로스에서 훨씬 다량으로 나오고 있다. 그밖에 미케네, 테베, 티린스 등에서도 소량이나마 출토되고 있어서, 미케네 시대에 쓰인 문자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선문자 B가 그리스어의 초기 형태라는 점은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인에 의해 이룩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선문자 B가 선문자 A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고, 비슷한 문자가 적지 않은데도 선문자 A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선문자 A가 어떤 계통의 언어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그림 문자나 선문자 A를 사용한 크레타 문명의 주인공들이 그리스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계통의 사람들인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선문자 B의 해독으로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인에 의해 이룩된 것임을 알았다. 선문자 B 서판들은 그것들이 출토된 왕궁터들, 예컨대 크노소스나 필로스 같은 도시들의 왕실 창고에 수납되던 공납물을 적은 일종의 왕실출납 장부와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왕궁에 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식량과 토지, 그 외의 무기류와 병력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하면, 미케네 사회는 왕국 전체의 지배자이자 왕궁의 주인인 왕이 농경과 가축 사육에 종사하는 주민들로부터 공납을 받는 군주제 국가였다. 왕은 이 공납제를 유지하기 위해 초보적 수준의 관료조직을 거느렸고, 이를 통해서 주민들을 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토 서판을 기록한 서기, 혹은 회계관 역시 그 관료 조직의 일부였을 것이다.

왕궁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특히 노예들의 수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았는데, 대개가 외지 출신의 아녀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쟁을 통해 붙잡혀온 포로들이었거나, 상인을 통해서 구매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직조를 비롯한 가사노동 및 제사 의식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한때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던 미케네는 까맣게 탄 선문자와 함께 그 흔적만을 남긴 채 붕괴되었다. 도대체 미케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미케네의 왕국들은 기원전 1200년경 왕궁들과 주거지들을 폐허로 만든 화재와 파괴에 의하여 붕괴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러한 파괴의 물결이 동부 지중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으나, 무엇이 그처럼 광범위한 참화를 일으켰는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분분하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테베, 티린스, 미케네 및 필로스가, 그리고 크레타 섬에서는 카니아 등의 도시가 일부, 혹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도시들과 왕궁들은 화재의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주요 유적들 모두가 대략 이 시기로 추정되는 때에 파괴되었다. 히타이트의 수도 핫투사도 키프러스의 주요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약탈당한 뒤 불태워졌다. 북부 시리아의 해안에
위치한 교역도시 우가리트도 파괴되어 회복하지 못했다. 동부 지중해의 보다 남쪽에 있는 다른 많은 유적들에도 비슷한 파괴의 흔적이 나타났다.


이러한 파괴의 물결은 보다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남쪽의 이집트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동부 지중해 일대에 일어난 대격동은 아직도 그 정체를 뚜렷이 알 수 없는 이른바 '바다 사람들의 대이동'에 기인한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미케네 문명의 파괴에는 그 무렵 두 번째로 발칸 반도를 남하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 특히 도리아계 방언을 사용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꽤 유력시되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 인구 이동은 이러한 격동의 원인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결과가 아니었을까? 정확히 무엇이 미케네 왕국들과 후기 청동기 시대 서아시아 제국들의 종말을 초래했는지 여전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

 

아무튼 붕괴의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결과는 매우 분명했다. 그것은 문명과 사회 조직의 소멸이요, 이주와 전쟁의 생활화였다. 그런 상태에서 문자 기록도 소멸하고, 이른바 '암흑 시대(기원전 1100~800년)'가 시작된 것이다. 이 암흑 시대를 벗어날 무렵인 대략 8세기 후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은 미케네 시대의 사건과 영웅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반영된 사회상은 주로 그 서사시가 형성되기 직전, 암흑기 후반(10~9세기)의 모습이었다.                  
                                

출처. [Daum백과] 미케네 문명의 부활 –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신선희 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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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 왕궁터

 

 

 

 

 

 

 

 

 

 

 

 

 

미케네의 사자의 문 (bc1300년경)

 

 

 

 

 

 

 

  

BC14세기에 만들어진 왕실의 원형무덤.

 

 

 

 

 

 

 

 

 

 

 

 

 

 

 

 

 

 

 

 

 

 

 

 

 

 

 

 

 

 

 

 

 

비밀 수로

 

 

 

 

 

산꼭대기인데도 우물이 있습디다.

 

 

 

 

 

후문으로 내려가는 길

 

 

 

 

 

 

 

 

 

 

 

 

 

 

"성벽 밖 약간 떨어진 곳에는, '아트레우스의 보고(寶庫)'라고 부르는 궁륭형 무덤이 있었는데, 17세기 초 터키 총독은 거기서 황금제품을 발굴한 적이 있었다. 앞의 그 무덤과 흡사하지만 천장이 함몰된 이른바 '클리템네스트라의 무덤'의 발굴은 슐리만의 아내 소피아에 맡겨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 1호가 〈파르테논신전〉이라더군요.

2호는? ‥ ‘1호’ 외에는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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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잘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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