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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집

 

 

 

 

 

 

추사집 

 

 

김정희 지음 

역자 최완수 옮김    

출판사 현암사 | 2014.10.02    

| 페이지 수 768            

 
75,00067,500

 

 

 

 

저자 : 김정희
저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역자 : 최완수
역자 가헌(嘉軒) 최완수(崔完秀) 선생은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연구의 일인자이다. 1942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66년 국립박물관을 거쳐, 1966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으로 있다. 그동안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서울대 미대 회화과 및 대학원, 이화여대 ㆍ 동국대 ㆍ 중앙대 ㆍ 용인대 대학원, 연세대에서 강의하였으며, 현재 연세대 ㆍ 국민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秋史集』(1976), 『金秋史硏究艸』(1976), 『그림과 글씨』(1978), 『佛像硏究』(1984), 『謙齋 鄭敾 眞景山水畵』(1993), 『名刹巡禮』 1 ㆍ 2 ㆍ 3(1994), 『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ㆍ 2(1998), 『조선왕조충의열전』(1998), 『겸재를 따라 가는 금강산 여행』(1999), 『겸재의 한양진경』(2004),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ㆍ 2 ㆍ 3(2007), 『겸재 정선』(전3권, 2009)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간다라 佛衣攷?, ?釋迦佛幀圖說?, ?謙齋鄭敾?, ?謙齋眞景山水畵考?, ?秋史實紀?, ?秋史書派考?, ?碑派書考?, ?韓國書藝史綱?, ?秋史 一派의 글씨와 그림?, ?玄齋 沈師正 評傳?, ?尤庵 당시의 그림과 글씨?, ?古德面誌總史? ,「謙齋 鄭敾 評傳」등이 있다.

 

 

 

 

 

 

목차

 

 

다시 펴내는 추사집 머리말
해제/ 초판 머리말
완당김공소전 阮堂金公小傳
평설/ 추사의 학문과 예술
김추사의 금석학

제1부 서론 書論


계첩고 ?帖攷
〈국학본 난정첩〉 뒤에 제함 題國學本蘭亭帖後
〈영상본 난정첩〉 뒤에 제함 題穎上本蘭亭帖後
〈난정서〉 뒤에 씀 書蘭亭後
두 왕씨의 글씨를 논함 論二王書
난정수필 蘭亭隨筆
서파변 書派辯
묵법변 墨法辨
「원교필결」 뒤에 씀 書員嶠筆訣後·Ⅰ
「원교필결」 뒤에 씀 書員嶠筆訣後·Ⅱ
《청애당첩》 뒤에 제함 題淸愛堂帖後
〈예학명〉에 발함 ?鶴銘跋
구양순이 쓴 〈화도사비첩〉 뒤에 제함 題歐書化度寺碑帖後
미남궁 글씨의 옛날 탁본 진본 뒤에 제함 題米南宮墨跡舊拓眞本後
예찬의 글씨 뒤에 제함 題倪瓚書後
원 왕숙명의 글씨 뒤에 제함 題元王叔明書後
축윤명 〈추풍사첩〉 뒤에 제함 題祝允明秋風辭帖後
《이진재첩》에 제함 題?晋齋帖
김군 석준이 소장한 〈배경민비첩〉 뒤에 제함 題金君奭準所藏裴鏡民碑帖後
구양순 · 저수량의 글씨를 논함 論歐?書
미남궁의 글씨를 논함 論米南宮書
성친왕의 글씨를 논함 論成親王書
백하의 글씨를 논함 論白下書
옛사람의 글씨를 논함 論古人書
원교가 산곡을 논한 것을 다시 논함 再論員嶠論山谷
박혜백이 글씨를 묻는 것에 답함 答朴蕙百問書
홍우연에게 써서 주다 書贈洪祐衍
윤생 현부에게 써 보냄 書贈尹生賢夫
정육에게 써 보냄 書贈鄭六
방노에게 써 보냄 書贈方老
상우에게 써 보임 書示佑兒
태제에게 써 보냄 書贈台濟
고동상서 소장 담계 정서 족자에 씀 書古東尙書所藏覃溪正書簇
서지환에게 써 줌 書付徐志渙
서결 書訣
글씨 쓰는 법을 논함 論書法
전서와 예서 배우는 법 學習篆隸法
붓을 논함 論筆


제2부 화론 畵論


《석파 난권》에 제함 題石坡蘭卷
《석파 난첩》 뒤에 제함 題石坡蘭帖後
《군자문정첩》에 제함 題君子文情帖
조희룡의 화련에 제함 題趙熙龍畵聯
이재 소장 〈운종 산수정〉에 제함 題?齋所藏雲從山水幀
〈낙목일안도〉에 제함 題落木一?圖
고기패의 〈지두화〉 뒤에 제함 題高其佩指頭畵後
여성전이 그린 〈매란국죽정〉에 붙여 씀 題呂星田畵梅蘭菊竹幀
학옥섬의 〈삼공도〉에 제함 題?玉蟾三公圖
〈인악의 영정〉에 제함 題仁嶽影
〈백파상〉을 기리고 아울러 서를 붙임 白坡像? ?序
〈소당의 작은 영정〉에 제함 題小棠小影
스스로 작은 초상화〉에 제함 自題小照
스스로〈작은 초상화〉에 제함, 제주에 있을 때 自題小照 在濟州時


제3부 금석고증학 金石考證學


신라 진흥왕릉고 新羅眞興王陵攷
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
승가사 〈진흥왕 순수비〉 僧伽寺 眞興王 巡狩碑
북수비문의 뒤에 제함 題北狩碑文後


제4부 경학 經學 · 불교학 佛敎學


천축고天竺攷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
인재설 人才說
적천리설 適千里說
도천송이 있는 『금강경』 뒤에 제함 題川頌金剛經後
『불설사십이
장경』 뒤에 제함 題佛說四十二章經後
영모암 편액 배면 제지에 발함 永慕庵扁背題識跋
부인 예안 이씨가 돌아간 것을 슬퍼하는 글 夫人禮安李氏哀逝文

제5부 서한문 書翰文


둘째 아우 명희에게 與舍仲 命喜 · 1~4
막내아우 상희에게 與舍季 相喜 · 1~9
상무에게 與懋兒 · 1~4
상우에게 與佑兒
사촌 형님 교희씨께 上從兄 敎喜氏 · 1~2
재종손 태제에게 與再從孫 台濟 · 1~2
석파 흥선대원군에게 與石坡 興宣大院君 · 1~7
민질 태호에게 與閔姪 台鎬
조이당 면호에게 답함 答趙怡堂 冕鎬 · 1~3
신위당 관호에게 與申威堂 觀浩 · 1~3
조운석에게 與趙雲石 寅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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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蘭을 잘 쳤는데, 난 치는 법을 예서 쓰는 법에 비겨 말하고,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그것을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그의 서화관(書畵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의 감식안도 이와 같은 고답적인 문인 취미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이전 작품으로으로는 다만 이인상의 서화만을 인정하였고, 후진의 작품으로는 대원군 이하응의 난초와 소치 허유의 산수화나 신관호의 예서 정도를 인정하였을 뿐이다.

추사의 이와 같은 차원 높은 淸朝 문인풍의 감상안은 종래 조선 성리학을 바탕으로 길러져 왔던 조선 고유의 國書風(동국진체) · 國畵風(진경산수/풍속화)에 대하여는 지극히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원교 이광사의 서법과 書論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나 겸재 정선 그림의 학습 금지와 같은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 이후의 서화가로서 추사를 흉내 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큰 유행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고유의 국서풍과 국화풍은 일조에 된서리를 맞고 시들어 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국내 고증학 수준은 추사의 수준을 뒤따를 만큼 진전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 그래서 그를 따라 배운 서화가의 대부분은 내용도 개성도 없는  범본형사(範本形似)에 그치고 있었는데 - 갑자기 서구 문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자 조선 말기의 서화계는 서구 감각의 새로운 물결에 휩쓰려 버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