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도 홍익대 미술학부 문제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의
윤두서의 인물화와 함께 제시하고 두 작품의 표현상의 특징을 비교하여 설명하라는 문제였습니다. ’
문제가 무지 어렵네요잉!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설명하는 것만도 벅찬데, 이건 윤두서의 자화상과 비교 評說하라는 문제가 아닙니까?
미대 들어가는 애들 수준을 우습게 볼 게 아니네요잉!
우선 호크니의 작품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죠?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가장 큰 특징은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공간과 평면의 상반되는 개념을 서로 연결시켜 새로운 예술세계를 연 점이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통한 콜라주 작품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어떻게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시각을 재해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진에 내재되어 있는 원근법의 법칙을 완전히 뒤엎어버림으로써 사진이 갖고 있는 재현이라는 체계를 완전히 해체 시키고, 사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합치시킴으로써 좀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공간의 효과를 만든다. 사진은 여러 장의 사진프린트를 병렬과 조합으로 붙여놓은 포토 콜라쥬기법을 사용하여 기존의 사진적 시각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표현한다. "사진이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해두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원근법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없애고, 현실의 시점을 다양화함으로써 사진을 이전과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좀 더 흥미로워 질것이다."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 중의 하나가 원근법이라는 얘기네요 잉? -> 광의(廣義)의 원근법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회화작품에서 입체감 ·공간감을 갖게 되는 것은 원근법 때문인데,,
피카소가 2차원적 회화를 3차원으로 끌어올렸다면,
데이비드 호크니는 거기에 시간( t)의 함수를 더한 것이라는 ─
윤두서의 자화상은 원근감은 커녕 뚜루루 말면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즉 2차원적 회화입니다.
<- 입체감 ·공간감과는 전혀 관계가 없죠.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초상화 주인의 인물됨이나 정신세계까지 느껴진다"고들 말합니다 (以形寫神).
단순한 사실감 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느낌이 온다는 ─
‘ 피카소가 3차원, 호크니가 4차원이라면 윤두서는 2차원적 재료를 가지고 4차원을 넘어서 5차원의 세계를 그렸다! ’
하여,, ‘함수 확장’의 단계 내지 순서를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점 → 선→ 면 → 공간 → 시간 → 정신’
◀ 이것이 또한 이 문제의 정답입니다.
※ ‘추상화’란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지오토 작품(?)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고 읊은 이는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뭔가에 마음이 끌려 병을 앓을 때가 있다. 상사병이라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렇다면 미술 작품에 마음이 끌려 생기는 병도 있는가? 있다. 바로 ‘스탕달 신드롬’이다.
스탕달 신드롬은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의 이름을 딴 병리 현상을 말한다. 사람에 따라 걸작 미술품을 보고 갑자기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호흡 곤란, 우울증, 현기증, 전신마비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증세가 스탕달 신드롬이다. 심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하지만 안정제를 먹거나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오면 대부분 회복된다.
스탕달은 그의 책 <나폴리와 피렌체-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에서 “산타크로체 교회를 떠나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며,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걷는 동안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고 기록했다. 교회 안에 있는 예술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런 증상을 겪었다는 것인데, 이 기록에 의거해 1979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신과 의사 그라치엘라 마게리니가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마게리니는 이와 관련해 모두 107건의 임상 사례를 학계에 보고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환자들이 모두 관광객이며 이 가운데 이탈리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환자가 부재한 것은 피렌체에서 발생한 사례를 토대로 한 연구이기에 이들이 르네상스 걸작에 이미 충분히 ‘면역’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 환자의 사례 또한 보고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 관광객들이 주로 그룹으로 몰려다니다 보니 걸작과 개인적으로 만날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마게리니의 판단이다.)
이런 점으로 미뤄 볼 때, 스탕달 신드롬은 위대한 걸작에 대한 동경을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이들이 막상 실물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면서 순간적으로 강렬한 정신적 충격에 사로잡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지적이기보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에 충실한 편이라고 한다.
※ 피렌체에서는 매년 12명 정도가 스탕달 신드롬에 걸린다. 요주의 장소로는 우피치 갤러리의 보티첼리 방, 아카데미아 갤러리의 ‘다비드’ 상 앞, 사크레스티아 누오바의 미켈란젤로 작품 앞,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의 루카 조르다노의 방 등이 꼽힌다.
자,그러면 1817년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교회에서 이 증세를 보인 스탕달은 당시 어떤 작품에 그렇게 깊이 사로잡혔던 것일까?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가 그 그림이라고 하는 설이 한동안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스탕달을 사로잡은 것은 14세기 화가 조토가 그린 산타크로체 교회의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였다.
산타크로체 교회에는 조토의 작품뿐 아니라 치마부에, 도나텔로, 베네치아노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이들 전체가 장엄한 시각적 감동을 전해주는 가운데 특히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다룬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매우 드라마틱하고 감상적인 표현으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토는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도 그렸다.)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를 스탕달 신드롬을 야기한 작품으로 잘못 지목한 풍설은, 그림의 주인공인 베아트리체가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겁탈한 폭군 아버지를 다른 가족과 함께 힘을 합쳐 살해한 소녀로,
로마 시민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과 스탕달이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첸치 일가>라는 소설을 쓴 것이 겹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보면, 레니의 그림에 지독히도 혼을 빼앗긴 문인은 스탕달이 아니라 영국 시인 셸리다. 셸리는 1819년 로마에 갔다가 당시 콜로나 궁에 소장되어 있던 ‘베아트리체 첸치’를 보고 깊은 감동과 전율을 느껴 스탕달의 작품과 동일한 제목의 희곡을 썼다.
화가가운데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스탕달 신드롬으로 추정되는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보았을 때 그랬다. 반 고흐는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이 개관한 해(1885년), 이곳의 걸작들을 보려고 친구와 함께 미술관을
방문했다. 설치된 작품들을 둘러보다 ‘유대인 신부’를 보는 순간,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말았다. 감동과 충격으로 도저히 다른 작품을 볼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친구가 그와 헤어져 미술관을 다 돌 때까지도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 고흐는 친구에게 “이 그림 앞에 앉아 2주를 더 보낼 수 있게 해 준다면 내 수명에서 10년이라도 떼어 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혼절 상태까지 이른 것은 아니지만, 명화와의 만남으로 비롯된 극도의 흥분이 그를 그렇게 돌부처로 만들어버렸다.
마게리니의 보고 이후, 그의 동료 학자들 가운데서 이 연구의 지평을 확장해 보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로마 심리학 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최근 미술관의 고전 걸작들(특히 인체를 그린 명화들)이 일부 관객에게 관람 후든 아니면 바로 그 현장에서든 성적인 의미가 담긴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경향이 있음을 밝혀냈다. 연구소는 이 현상을 ‘루벤스 신드롬’이라고 이름 지었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대가 루벤스는 그림에 살집이 풍성한 여성들을 관능적인 자태로 그려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화폭에서 여성들이 누드 혹은 세미 누드 상태로 근육질의 남성들과 어우러진 모습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에로티시즘을 발산한다. 신화 주제를 다룬 ‘땅과 물의 결합’ 같은 작품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로마 심리학 연구소 조사에서, 2천 명의 미술관 관객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약 20% 정도가 이 루벤스 신드롬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신드롬이 스탕달 신드롬처럼 극히 제한된 사람이 아니라, 매우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그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
병적증세든 성적 행동이든 미술작품은 이처럼 사람들의 정신과 심리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작품의 양식이나 사조, 창작 배경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감상은 내밀하고 주관적인 감정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미술 감상이 때로 사람들의 정신과 심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비판해도 할 말은 없다. 마게리니가 스탕달 신드롬에 대해 보고하면서 자신의 연구가 이탈리아의 문화관광 산업에 피해를 줄까봐 조심스러워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사병이 무섭다고 사랑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스탕달 신드롬이나 루벤스 신드롬이 무섭다고 미술 감상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든 예술 작품이든 대상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혹당하는 게 우리의 운명인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운명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출처 :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Beatrice Cenci, Guido Reni, 64.5 x 49 cm, 1662, Oil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16세기 이탈리아에 실존했던 방탕한 귀족 프란체스코 첸치의 딸인 베아트리체 첸치(1577-1599). 그녀의 아버지는 베아트리체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자기 저택의 어느 방에 가두어 놓았다고 한다. 너무 아름다웠던 그녀는 결국 14살 때 아버지에 게 겁탈당하는 비극을 맞게 되고 이후 아버지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렸다. 결국 베아트리체를 불쌍히 여긴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그녀에게 반해있던 집사의 도움으로 2년이 지난 어느날 밤 아편으로 아버지를 잠재워서 죽인 후 어머니와 베이트리체는 아버지 시체를 시트로 말아 정원의 무성한 나무 숲에 버린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었고 시의 공무원들이 정당방위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사면을 무시하고 처형을 명했다. 베아트리체는 어머니, 오빠와 함께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비명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견디어 냈다고 한다. 처형 당일 로마의 산 탄젤로교 앞의 광장에 단두대가 설치되고 절세의 미녀를 한 번이라도 보려고 전 이탈리아의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처형 장면을 보고 있던 귀도 레니는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의 베아트리체 첸치를 그렸다. 이후에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이 그림을 보고 심장이 뛰고 무릎에 힘이 빠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 으며 , 이 그림을 보고 한 눈에 반해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첸치 일가족' 이란 글을 썼다. 스탕달은 이 같은 증상을 치료하는데 1개월 이상 걸렸는데, 'Elevated Mental Disease'라고 불리는 이 병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느끼는 순간적인 압박감이나 정신적인 충격을 일컫는다. 이 증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하는데,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는 이 말의 유래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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