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는 11월~3월이 여행하기 좋다는구만.
6월 ~8월이 우기라네.
한 번 가볼까?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1
-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일번지 포카라에 들어서는 초입에서 바라본 마나슬루
탈출인가, 출장인가?
11월 18일(금) 아침에 네팔 카트만두로 떠나 11월 26일(토)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7박9일 일정의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은 새얼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있는 힌두·불교문화권 탐방 시리즈의 사실상 두 번째 일정이다.
이번 네팔·히말라야 기행은 처음부터 3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을 두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처럼 인원 제한을 두게 된 것은 네팔 현지 사정이 그 이상의 인원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만큼 불편한 탓이 컸다. 결국 나와 한국 가이드, 현지 가이드 포함해 모두 26명의 인원이 이번 문화기행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게 되었다.
네팔, 히말라야 그리고 마나슬루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고, 8,000m급 이상 봉우리 중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된 산은 안나푸르나였다.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게 제2위의 높이를 자랑하는 K2는 난공불락의 어려움으로 인해 악명을 떨친 탓에 유명하고, 낭가파르바트는 목숨을 건 산악인들의 도전이 빛나는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들을 집어 삼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마나슬루는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슬루는 한국과 일본의 산악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이다. 다만 한국의 산악인들에겐 집념과 도전의 산으로, 일본의 산악인들에겐 영광의 산으로 기억된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마나사(Manasa)에서 나온 말로 ‘영혼의 땅’, ‘영혼의 산’이란 의미를 지닌다. 마나슬루가 처음 산악인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네팔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950년 영국의 W.틸만(H.W.Tilman) 등반대가 마나슬루 일대를 정찰하면서부터였다.
네팔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뒤 서구의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 원정대가 펼쳤던 극지원정 경쟁, 올림픽을 통한 스포츠 경쟁이 그렇듯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히말라야 초등 경쟁은 각국의 산악인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치열한 레이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알피니즘이란 말 자체가 애초에 서구에서 출현한 용어인 것처럼 그들은 알프스, 힌두쿠시, 알래스카 등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세계 알피니즘의 역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봉 등반 경쟁에서도 역시 그들이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상실한 영국은 특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독일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줄기차게 도전했다. 독일이 낭가파르바트에 집착한 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로 아이거북벽을 정복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경험과 역사가 배어나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티벳에서 보낸 7년>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쟌 모리스가 타전한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뉴스가 영국에 도착한 것은 때마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날(1953년 6월 2일)이었다. 영국 전역은 새로운 여왕의 등극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접하며 열렬한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히말라야에 등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처럼 히말라야 등정이란 사건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뉴스라고 생각했기에 국가적인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역시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에 성공하면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으로 마이니치(每日)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일본 산악회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 일본원정대는 초기엔 틸만 원정대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만으로 시작해 마나슬루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했고, 등정 가능한 코스를 여러 차례의 사전 원정으로 파악한 뒤 1956년 유코 마키가 이끄는 12명의 대원과 20명의 셰르파로 구성된 등반대가 본격적인 마나슬루 등정에 나서게 된다. 이들 원정대는 같은 해 5월 9일 토시오 이마니시와 셰르파 갈첸 노르부, 두 명이 정상 공격에 나서 마침내 마나슬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우리와는 민족적 감정이 뒤얽혀 있는 일본원정대에 의한 마나슬루 초등이었지만 이것은 서구 산악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히말라야 8,000m급 초등 경쟁에 동양의 산악인들이 뛰어들어 이룩한 최초의 쾌거였다. 이후 중국원정대가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초등(시샤팡마는 네팔이 아니라 티베트, 중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구 원정대가 도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14좌 봉우리 중 두 곳을 일본과 중국이 초등하는데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 원정대의 마나슬루 초등을 도우며 함께 했던 셰르파 갈첸 노르부는 1955년 프랑스 원정대와 함께 마칼루에 오른 데 이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8,000m급 2개봉을 초등한 사람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이들의 마나슬루 등정을 범국가적으로 축하했다.
16명의 한국원정대를 집어삼킨 마나슬루
우리나라가 히말라야 등정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일본보다 뒤처진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대한 정찰등반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는 사실상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이 완료되어 가던 시점이었는데 이후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도전하기까지 1971년 한국산악회가 추렌히말(7,371m)에 등반한 것이 우리가 경험한 히말라야 원정의 전부였다.
한국의 마나슬루 제1차 원정 당시 김정섭은 직접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뒷받침하면서 실질적으로 원정대를 꾸린 당사자였다. 그러나 제1차 마나슬루 원정대는 김정섭의 동생으로 원정대에 참여한 산악인 김기섭을 불의의 사고로 읽은 뒤 철수하고 만다. 김기섭은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희생자였다. 『집념의 마나슬루』는 자신이 빠진 채 진행되었던 제1차 마나슬루 원정에서 동생 을 잃은 슬픔과 비탄 속에서 동생의 시신을 찾아 고국으로 가져오고 제2차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제2차 원정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제2차 원정마저 1972년 4월 10일에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김호섭, 송준형, 오세근, 박창희와 함께 참여했던 일본 산악인 야스히사를 비롯해 셰르파들까지 모두 15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1937년 세계9위봉인 낭가파르바트(NangaParbat, 8,125m)에서 독일 원정대원 1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이래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규모의 대형 참사였다.
이후 김정섭은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실질적인 개척자로 활동했다. 김기섭, 김호섭, 김예섭, 세 동생을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묻은 맏형 김정섭은 1974년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마나슬루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악천후로 인해 6,800m에서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만 했다. 마나슬루는 그를 끝끝내 품어주지 않았다.
‘나마스떼(당신 안에서 신을 봅니다)’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2. 네팔과 카트만두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2. 네팔과 카트만두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
▶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촬영한 카트만두 시내 모습
퀴즈 문제는 “다음에 나열된 각 나라의 수도를 해발고도가 높은 순서대로 열거하시오.”였다. 주어진 시간 내에 나열된 수도 이름을 해발고도가 높은 순서대로 호명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의 정답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약 3,600m)가 가장 높고, 그 뒤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약 2,600m),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약 1,800m),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약 1,600m),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약 1,300m)의 순서였다. (참고로 서울은 평균 해발고도가 51m).
네팔하면 누구라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와 눈 덮인 히말라야를 떠올리게 되어 무조건 높고 춥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실제 네팔은 북위 27~30。부근이라 높은 고도로 올라가지 않는 한 이미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추위에 단련된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춥지 않다.
게다가 네팔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후로 해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6월~8월까지 3개월 동안이 우기(雨期)인데 이 기간엔 매우 더운 편이고,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가 건기(乾期)이다. 그런 탓에 네팔 트레킹은 대체로 건기에 집중되어 11월부터 이듬해 봄 3월까지가 네팔 관광의 성수기이다.
▶ 카트만두 국제공항의 모습이다. 네팔은 산업기반이 거의 없다시피해 자동차는 물론 대부분의 공산품들을 인도와 중국을 통해 들여오고 있다. 일본 차들도 많지만 현대, 기아차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붉은 색 차량은 현대자동차가 인도에서 생산하고 있는 i10이고, 그 뒤편으로 기아의 스포티지R이 보인다.
트레킹 성수기가 시작된 탓인지 때마침 카트만두 국제공항에 이착륙하려는 비행기들이 몰려 있어 연착하게 되었다. 센스 있는 기장의 특별한 배려였는지 몰라도 우리가 탄 비행기가 카트만두 북방 히말라야 부근까지 날아가 회항해준 덕분에 창가 좌석에 앉았던 승객들은 카트만두 북쪽에 위치한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여러 산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좌석이 한 가운데에 있어서 아쉽게도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말았다.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거나 트레킹에 나설 만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관광지 포카라에서 초경량항공기를 이용해 안나푸르나 일대를 돌아보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고, 마운틴 플라이트라고 해서 경비행기를 이용해 에베레스트, 로체 등지를 돌아보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네팔은 인도 쪽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는 한 어딜 가든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있는 산들을 볼 수 있는데 카트만두 역시 주변을 높고 낮은 ‘히말’ - 히말라야(Himalayas)란 말은 고대 산스크리트(梵語)에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가 결합되어 생긴 말로 본래 ‘눈의 집(거처)’란 뜻으로 네팔어로 히말은 ‘산’이라는 뜻이다 - 들이 둘러싼 분지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국의 대구광역시를 떠올리게 된다.
네팔 국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강남고속버스 터미널과 건축 스타일이 조금 비슷해 보였는데 공항 청사의 규모는 그보다 훨씬 작다.
내·외국인으로 분리된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심사과정은 그리 까다롭게 보이진 않았지만 심사요원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심사대를 통과하는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3개의 왕조가 번성했던 카트만두 분지
버스에 오르니 네팔 현지 가이드가 밝은 미소와 함께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 그는 한국 시간이 네팔 시간보다 3시간 15분가량 빠른데 손목시계를 우리가 흔히 보듯 12시를 기준으로 똑바로 세워서 보지 말고, 주먹을 앞으로 뻗어 보면 한국 시간을 네팔 시간에 별도로 맞추지 않고도 그대로 볼 수 있다며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 숴염부나트의 장난꾸러기 원숭이들
트리부반 국제공항 로비는 지방의 시외버스 터미널처럼 비좁은데 오가는 승객들로 부산하다. 공항 입구는 호객하려는 택시 기사들과 약속한 가이드를 만나려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인데 현지인들은 공항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 아마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공항 내부가 비좁아서 이들까지 들어와 손님을 맞는다면 그것도 참 어려운 일일 듯 싶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위장복 차림의 군인들이 FN-FAL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광경이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전투경찰 - 물론 한국의 전경처럼 시위 진압보다는 얼마 전까지 실제로 마오주의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였다 - 이란다.
네팔에서 카트만두는 1년 내내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고 비교적 넓은 농토가 있는 분지 지형이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어 네와르라는 도시문명을 이루며 번성할 수 있었다. 네팔 역사에 처음 기록된 릿처비 왕조 시대부터 이미 인도와 티베트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고, 문화적으로도 인도의 힌두문화와 티베트의 불교문화가 네팔 특유의 토착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네팔을 이루는 60여개 부족들이 함께 조화와 안정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 숴염부나트는 이른바 '원숭이 사원'이라 불릴 만큼 원숭이들이 많은데 때로 원숭이들의 짖궂은 장난 때문에 피해를 보는 관광객들도 있다.
몽골이 아랍지역을 공략하자 밀려난 이슬람세력이 다시 인도를 압박하던 13세기 경 이슬람세력에게 밀려난 인도 힌두교 세력이 네팔로 대거 밀려들며 릿처비 왕조를 붕괴시키고 세운 것이 말라 왕조인데 이들 역시 토착문화와 힌두·불교문화의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네와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다.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말라 왕조는 1484년 카트만두, 랄리트푸르(파탄), 박타푸르의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카트만두의 역사유적지들 대부분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네팔 서부의 구르카(Gurkha) 지역 산기슭에 세워졌던 샤 왕조는 처음엔 작은 분파에 불과했지만 점차 세력을 확대해 18세기에는 카트만두 분지의 3왕조를 무너뜨리며 통일왕국을 세우게 된다. 네팔의 정복군주라 할 수 있는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1472년 구르카의 왕이 되기 전부터 카트만두 분지를 탐냈는데 1745년 처음 승리를 거두면서 카트만두의 북서쪽에 있는 누와코트를 점령했다. 그로부터 몇 차례의 패배와 승리가 이어졌지만 마침내 카트만두를 침공한지 23년만인 1768년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강한 국수주의자였던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자신의 왕국을 보호하고 교역에 있어 좀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외국인이나 선교사들이 네팔에 들어올 수 없도록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네팔은 1951년까지 쇄국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의 계승자들은 네팔 왕국을 점차 확장시켜 국경선이 카슈미르와 티베트 그리고 인도 동부의 시킴까지 뻗어나갔지만 1792년 티베트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토 확장이 중단되고 말았다. 구르카 왕국은 전통적으로 전쟁과 영토 확장의 대가로 군인이나 장교에게 토지를 하사했는데, 테라이(남부 저지대) 지역이 늘 우선 수위였다. 티베트와의 전쟁으로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이번에는 인도를 넘어 네팔로 밀려들어오는 서구 세력(영국 동인도 회사)과의 치열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1810년 네팔과 영국은 전쟁에 돌입했는데 처음엔 험준한 지리에 익숙치 못한 영국군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결국 네팔은 무기의 질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영국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샤 왕조는 점차 밀려드는 서구 세력(영국)에 맞서 1814년에서 1816년까지 네팔 전쟁, 이른바 구르카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네팔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던 구르카 병사들조차 패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네팔은 비록 영국에 의해 완전히 식민지화되는 수모는 피할 수 있었지만 영토를 할양하고 영국주재관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네팔의 행정·교육 등 많은 분야에서 영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샤 왕조와 구르카에 대해선 “존 버뱅크, 권태경 옮김, 『네팔(큐리어스 시리즈 46)』, 휘슬러, 2005, 28쪽 참조”.)
매연과 교통체증 그리고 민주공화국으로의 변신
카트만두는 교통지옥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교통지옥이다. 몇 해 전 울릉도를 다녀오면서 산비탈 고갯길을 쌩쌩 내달리던 울릉도 버스 기사 아저씨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고난도 운전기술을 선보인다고 했었는데 네팔 카트만두의 운전기사들에 비하면 울릉도는 ‘새발의 워커’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우리가 탄 버스는 30인승으로 한국에서는 중형버스에 해당하는 크기인데 네팔 현지에서는 이런 버스 보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도로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버스는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네팔에 바다가 있는 곳은 유일하게 네팔 국기(國旗)뿐인 전형적인 내륙 국가이다. 네팔 국기는 특이하게도 두 개의 삼각형이 포개진 모양인데 이것은 고대 힌두교의 신들이 사용한 삼각형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가운데 그려진 달은 평화를 상징하고, 태양은 빛, 적색은 네팔, 청색 테두리는 바다와 하늘을 나타낸다.
이처럼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인 탓에 거의 대부분의 물류가 인도와 중국을 통해서 수입되고 있는데 석유는 거의 전량이 인도산이라고 한다. 가뜩이나 품질이 떨어지는 석유가 네팔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려는 중간 상인, 트럭 운전기사의 손을 타며 이물질이 섞여서 더욱 질이 낮아지게 되는데 그런 탓에 분지라 쉽게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카트만두 시내는 매연으로 찌들어 있었다. 그나마도 인도에 석유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간혹 석유 공급이 끊긴다고 한다. 네팔은 여전히 국제원조에 의지해 살아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카트만두를 히말라야 근방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던 우리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희뿌연 안개처럼 매연으로 가득한 거리는 우리나라의 5~60년대 거리 풍경과 비슷하다고 함께 간 어르신들이 말한다. 스와얌부나트 가는 길옆에 어떤 이들이 커다란 플랜카드를 내걸고 모여 있어서 저들이 뭐 하는 거냐고 현지가이드인 아눕 씨에게 물었더니 맞은편에 보이는 큰 건물은 네팔 국회의사당인데 그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거라고 설명한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현재 네팔은 오랜 왕정을 끝내고 새롭게 민주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본 네팔 국회의사당의 모습이다. 네팔 국회의사당은 중국에서 건립해주었는데 네팔의 도로들 중 상당수가 외국에서 무료로 만들어준 것들이기도 하다.
왕정체제에 반대한 민주화 시위는 1979년 전국 규모로 이어졌고, 1989년부터 반정부 시위가 빈발하면서 1990년 네팔의 왕정이 종식되고 입헌군주제가 수립되는 민주화가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더뎠고, 이에 불만을 품은 마오주의 반군들이 1996년부터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2001년엔 비렌드라 국왕 일가가 왕궁에서 무참히 살해되는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가넨드라 국왕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넨드라 국왕은 2002년 의회를 해산하고 2005년엔 군사쿠테타로 전권을 장악하며 과거로 회귀하려 들었다. 그러나 네팔 국민들과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며 결국 2008년 왕정이 폐지되면서 현재의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 되었다.
제헌의회선거가 실시되면서 2009년 마오주의 반군세력이 정권을 잡아 현재 네팔의 국회의원 601명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현재 네팔은 3개의 주요 정당을 포함해 21개의 정당이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는 중이다. 16차례의 선거 끝에 선출된 잘나라스 카날 총리가 6개월여 만에 물러나고 지난 8월 바타라이가 새 총리로 선출되었고, 11월초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수습단계에 들어섰지만 네팔의 정치적 미래는 카트만두의 뿌연 매연과 교통체증처럼 아직 예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만두를 비롯해 네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친절했으며 활기가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곳에 네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카트만두에는 집집마다 가장 높은 곳에 거룩하게 여기는 신상을 모셔두고 기도하는 작은 사원을 마련해 두고 있다. 사람들은 곳곳마다 신상을 세워놓고 붉은 염료와 주황색 꽃잎으로 장식해두고 있는데 이곳 네팔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을 신상 앞에서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참배의식으로 시작한다.
네팔의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 - 숴염부나트(Swoyambhu Nath)
스와얌부나트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마크 어빙 등이 지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도 당당히 수록되어 있는 세계 건축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탑(塔)이라고 하거나 탑파(塔婆)라고 하는 불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은 인도의 스투파에서 나온 말(梵語)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스와얌부나트는 거대한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가 특히 유명하다. 스와얌부나트로 오르는 365개의 계단 상층부에는 거대한 금강저(Dorjee)가 놓여있고, 그 맞은편에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가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고 하얗게 빛나고 있다. 이곳 사람들 중 불덕을 쌓고 싶은 이들은 시주를 통해 이 스투파에 하얀 칠을 하거나 장식을 덧대는데, 지름이 100m에 이르고, 높이가 36m로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인간의 마음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통찰의 영안(靈眼)’인 제3의 눈이 양미간(兩眉間)에 그려져 있다.
▶ 카트만두의 초록색 언덕에 피어난 하얀 연꽃. 숴염부나트
티베트 불교에서 스투파와 경내를 참배할 때는 반드시 시계 방향(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오래된 전통으로 불교경전에 제자가 부처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존경심을 표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 동행한 현지가이드 아눕은 심장이 있는 왼쪽은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오른쪽은 신에게 내어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나름 낭만적인 해석을 내놓아 동행한 여성분들의 찬사를 받아내기도 했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경내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사원답게 다양한 건물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가되며 세워졌는데 사찰의 입구부터 각종 기념품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어 한 사람 당 200루피 쯤 한다는 입장료를 안 내고 싶은 사람은 스리슬쩍 섞여 들어가도 알아채지 못할 듯 싶다. 금강저가 놓인 자리 옆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날씨만 좋다면 네팔 시내가 잘 보일 듯 싶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날은 안개인지 매연인지 때문에 시내 전망은 보기 어려웠다. 처음엔 정신이 없어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건물들을 둘러보며 생각해보니 한국의 사찰에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大雄殿) 역할을 하는 것이 이곳의 스투파가 아닐까 싶었다. 13세기까지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성지였던 스와얌부나트이지만 15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가 후에 다시 건립되었다고 한다.
▶ 숴염부나트 스투파의 주변으로 마니(Mani)차가 있다. 내부에 경문을 인쇄한 종이를 넣을 수 있고 한 바퀴를 돌리면 그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믿는다. 휴대용으로 소형 마니차도 있다.
▶ 숴염부나트의 유명한 대형 금강저 사이로 바라본 카트만두 시내 전경과 전망대에 선 관광객들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3. 마이티네팔과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
▶ 하이얏트리젠시 내부에서 전통악기를 이용해 공연을 펼치고 있는 네팔 음악인들
박영석 대장과 빌라 에베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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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셰르파(sherpa)란 히말라야 등반이나 전문적인 트레킹 가이드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네팔 고산 부족의 명칭이다. 앙 도르지 셰르파의 이름에 셰르파가 붙은 것은 그가 실제 산악가이드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부족명이 성씨(姓氏)처럼 사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앙 도르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삼부토건이 네팔에 건설하는 댐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1978년 한국 트레킹 팀과 함께 일했던 그의 친구가 찾아와 트레킹 팀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한국에서 파견 나온 주방 아주머니들로부터 한국 음식 만드는 법과 한국어를 배웠다. 1983년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산악인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한 앙 도르지는 1990년 한국에 나와 한국어 공부를 했고,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를 따라 다시 네팔로 들어왔다가 1991년 6월부터 빌라 에베레스트를 인수해 네팔을 찾는 한국 원정대와 트레킹 팀을 돌보고 있다.
▶ 카트만두에서 치트완 가는 길에 만난 소년들(카트만두 시내 저 때만 해도 엉덩이가 그렇게 시달리게 될 줄 미처 몰랐다. ㅠ.ㅠ)
이제 고인이 된 박영석 대장은 지구의 3극점,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오른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와 같은 기록을 가진 사람은 인류를 통틀어 그가 유일했다. 이것을 일컬어 산악의 그랜드 슬램이라고 한다는데 이처럼 엄청난 기록을 가진 그는 어째서 또다시 안나푸르나에 갔던 것일까?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닙니다. 탐험하지 않는 탐험가는 탐험가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는 산악인은 산악인이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신대륙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게 탐험이고 도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 같은 탐험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팔 카트만두의 빌라 에베레스트. 이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박영석 대장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이얏트 리젠시에서 네팔의 현재를 보다
▶ 하이얏트리젠시 호텔 현관 모습. 나중에 따로 설명할 일이 있겠지만 네팔의 건축 양식은 사원의 건축 양식을 많이 본뜨고 있는데 지붕 꼭대기에 첨탑 형식의 작은 표식이 있는데 이것을 '가쥬르'라 하고(사진엔 나오지 않았지만), 처마 끝에 가로로 길게 연이어 세워져 있는 나뭇살을 '툰다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많은 문양과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들어가는 문 위에 반원형 형태로 되어 있는 장식은 '토라나'라고 해서 모시고 있는 신을 새겨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네팔 최고급 호텔이란 명성에 걸맞게 정원이나 수영장, 테니스 장 등 부대시설이 훌륭하다. 꽃피는 계절에 왔다면 무척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제공된 아침식사도 다분히 서구화되어 있었지만 그 기본만큼은 네팔식이었다.
카트만두에서 로열치트완 국립공원(Royal Chitwan National Park)에 이르는 여정
로열치트완 국립공원은 카트만두에서 서남쪽으로 약 160㎞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만약 한국식 거리 개념이라면 길 막히는 걸 고려하더라도 넉넉잡고 2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네팔이고, 네팔의 시간은 네팔의 방식대로 흘러간다. 현지 가이드인 아눕은 아예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란 뉘앙스로 주의를 준다.
▶ 워낙 노면상태가 거칠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그나마 건진 한 컷. 사진에 모두 나와있진 않지만 만약 버스가 절벽에서 구른다면 대략 100여 미터는 굴러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가파른 낭떠러지이다.
네팔은 인도 대륙 북부와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 사이에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 나라인데 동 네팔과 서 네팔을 잇는 도로는 실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도로는 해발고도 2~3,000m가 넘는 고산지대를 끼고 건설되어 잘해야 2차선이고, 그나마도 포장이 잘 되어 있지 못하다. 포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도 국경에서 온갖 물건을 과적한 상태에서 트럭과 버스들이 오가다 보니 도로의 여기저기가 파여 울퉁불퉁하다.
도로 폭은 좁고 차량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데 자칫 사고라도 나면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것 같다. 그런데도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네팔의 공공 시외버스에는 사람들이 문 밖에 매달려 있거나 지붕에서 한가롭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마이티 네팔과 고속도로 휴게소
카트만두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버스가 카트만두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야 비로소 네팔이란 나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산은 한국의 산지처럼 야트막한 경사를 그리며 완만하게 솟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치솟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산이었다. 그런데 그 산 중턱까지 계단식 논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이 올라가 있다. 이런 풍경은 네팔의 어딜 가든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수여하는 ‘제15회 만해대상’을 받은 '마이티 네팔'은 평범한 네팔의 어머니이자 주부였던 코이랄라 대표가 어느 날 인도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들의 비참한 처지를 알게 되어 지난 1993년부터 여성의 인신매매에 반대하고 감시하는 기구로 설립한 기구이다. 본래는 초등학교 영어 교사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마련한 작은 방 한 칸으로 시작해 가정폭력과 인신매매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돕기 시작했고, 구걸하는 여성들에게 밥을 제공했다.
마이티네팔은 현재 29개 국내 지부와 세계적인 후원 네트워크를 갖춘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런 공로가 서서히 알려지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고, 할리우드의 배우들 중에도 데미 무어는 마이티 네팔을 지원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진행을 맡기도 했었다.
'마이티 네팔(http://www.maitinepal.org)'
이란 말의 뜻은 우리가 영어로 생각하기 쉬운데 ‘힘센(mighty) 네팔'이 아니라 ’친정 어머니(maiti)의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 세워져 있는 경고판이다. 가난한 네팔 여성들에게 돈과 직업, 결혼을 빌미로 접근해(요즘은 여성들이 중개상으로 많이 나서는 추세라고 한다) 위장결혼시킨 뒤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가면 남성이 성매매 업소에 인신을 팔아넘긴다고 쓰여 있다(사진은 룸비니 국경 근처의 바이라하와(Bhairahawa)에 세워져 있는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곳이 인신매매의 중심이라고 한다).
실제로 코이랄라 대표는 '네팔의 어머니'란 별명으로 불리운다. 마이티 네팔은 인도 등지로 성노예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 1만 2천여 명을 구출했고, 사회의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자활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네팔 여성을 유혹해 인신매매하는 방식이 주로 시골 여성들에게 접근해 사기 결혼이나 일자리 등을 주선하여 데려가는데 주로 인도 등지로 팔려간다고 한다. 톨게이트 앞을 지나는 차 안에 혹시 젊은 여성이 타고 있으면 마이티 네팔 요원들(이들 역시 ‘마이티 네팔’에 의해 구조된 여성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차를 세우고 여성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봐 수상쩍다 싶으면 젊은 여성을 맡아 보호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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