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 조안 바에즈

2016. 10. 16. 21:06음악/음악 이야기

 

 

 

 

밥 딜런 (Bob Dylan) 가수

 

 

 

 

출생 1941년 5월 24일 (만 75세)미국

가족 아들 제스 딜런아들 제이콥 딜런

학력 미네소타 대학교 중퇴

데뷔 1962년 1집 앨범 'Bob Dylan'

수상 2016 제58회 그래미 시상식 베스트 히스토리컬 앨범상  외 5건

 

 

 

 

밥 딜런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자서전

Bob Dylan , 밥 딜런 지음 | 2010.03.29

 

 

2016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이 쓴 최초의 자서전!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이 쓴 최초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이 직접 쓴,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과 솔직한 내면 고백이 읽는 이에게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이번 자서전에서 밥 딜런은 가수 겸 작곡가의 꿈을 안고 뉴욕에 진출, 맨해튼에서 무명가수로 고생하던 시절의 일화와 느낌을 비교적 담담하게 소개하는 한편 그의 음악을 검증하는 마크인 뛰어난 이야기 솜씨와 아름다운 표현력을 활용하면서 자신과 예술을 지금의 자리에까지 이끌어 준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해 차분히 회고한다. 
이 책은 대부분 진정한 창작과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또한 퇴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절반의 노력, 심지어 실패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있다. 그밖에도 이름을 로버트 짐머만에서 밥 딜런으로 바꾸게 된 사연, 뉴욕에서 만난 애인 수즈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냉대, 시대의 부름을 외면하지 말라는 반전 시위대와 히피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까지 준비했던 사연 등 독자들은 뜻밖에도 매우 솔직한 딜런을 만나게 된다.

 

 

 

Bob Dylan

저서(총 2권)
Bob Dylan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를 아는 것은 납세와 같은 신성한 의무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음악계와 학계에서 ‘딜런 읽기’는 실제로 교양필수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록의 40년 역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와 함께 최정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이들 ‘전설의 빅 4’ 가운데에서도 딜런이 남긴 궤적은 차별화 아닌 특화(特化)되어 역사를 장식한다.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

 

 

 

 

 

 

밥 딜런의 옛 애인이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했다

                      |  작성자 권태호 기자                                   

             

 

JOAN BAEZ AND BOB DYLAN

한때 연인이기도 했던 가수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바에즈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밥 딜런의 불멸을 알려주는 또 한 걸음”이라며 “저항적이고, 세상을 등진 듯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 예술가/작곡가는 노벨문학상에 딱 맞다”고 말했다. 바에즈는 “밥의 노래는 깊이, 어두움, 분노, 미스테리, 아름다움, 유머로 가득찼다. 지난 60년간 내가 그의 노래를 부를 때보다 기뻤던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노래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면서 젊은 시절 딜런과 함께 있던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1941년생 동갑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60년대의 아이콘’으로, ‘광장의 노래’로 함께 했고,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1961년 4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하던 무렵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금새 연인이 되어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함께 지냈다. 딜런이 무명작곡가에 불과했던 시절, 이미 신비한 미성으로 포크음악의 신예로 떠올랐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내세웠고,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 등 자신의 여러 곡을 바에즈가 부르게 했고, 둘은 어느새 민권·반전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 이후, 이어진 워싱턴 대행진 뒤 20대 초반이었던 둘은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며 공연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시작된 직후 열린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도 딜런과 바에즈는 선배 피트 시거와 함께 반전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1965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헤어진다. 딜런은 그해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나타나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나간다. 그러나 당시 관객들은 그를 향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소리치며 항의했다. 그리고 그의 노랫말에는 점점 ‘우리’보다 ‘나’가 많아졌다. 이후 발표한 ‘미스터 탬버린맨’ 등 그의 걸작들도 대부분 개인의 고독을 노래한 곡들이 많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사람들은 내게 이 시대의 양심으로서 의무를 회피하지 말고,밖으로 나와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내가 대변하고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뒤에도 민권·반전 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 지평을 국제적으로 더 넓혀나갔다. 1971년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그리스에서 연 것을 비롯해 프랑크 독재 치하의 스페인, 베트남, 북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레바논 등 전쟁과 독재에 시름하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이처럼 존 바에즈가 전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민중과 민권을 벗어나지 않은데 반해, 밥 딜런은 늘 움직였다. 포크록으로 넘어갔던 그는 이후 내슈빌 컨트리록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1980년대에는 기독교에 귀의해 가스펠록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에서도 또 벗어났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와 헤어진 직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하는 등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동시에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 늘 불화로 끝맺었다. 존 바에즈는 운동권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해리스와 1968년 결혼했으나, 그도 이혼했다. 존 바에즈가 무료공연과 공연기금 전액기부 등을 할 때, 밥 딜런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또 순회공연에 나서 이를 메우기를 반복했다.

 

바에즈는 1993년 사라예보 내전 당시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는 관객들을 위해 방탄조끼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고, 2011년 11월 뉴욕 리버티 파크에 통기타를 들고 나타나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존 바에즈는 그가 부른 노래 ‘흔들리지 않게’(노 노스 모베란·No Nos Moveran)처럼 (물가 심어진 나무처럼) 늘 그 자리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밥 딜런은 자신이 작곡한 노래이자, 종종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 ‘아임 낫 데어’(I am not there)처럼 늘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존 바에즈는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밥 딜런은 “나는 집단적 인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밥 딜런은 ‘광장’을 떠났지만, 밥 딜런의 노래는 지금도 존 바에즈가 ‘광장’에서 부르고 있다.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1975년 본인이 작사·작곡한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Diamonds and rust)에서 딜런과의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노랫말을 쓰기도 했다.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는 ‘숯은 다이어먼드가 되고, 철은 녹이 된다’는 뜻으로 지난 일을 회상하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아니... 저런, 여기 당신의 환영이 다시 오고있네요.

하지만 그건 이상한 건 아니죠. 그건 단지 달이 차 오르자 당신이 전화를 하게 된 거죠.
난 여기에 앉아 전화기를 들고 있어요.
파멸을 자초하면서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2년전, 내게 친숙하던 그 목소리를 듣고 있네요.

 

나는 기억해요, 당신의 눈이 울새의 알보다 더 파랗던 것을.
당신은 나의 시가 서투르다고 했죠
어디에서 전화를 거는 거죠? 중서부의 어느 전화부스에선가요.
10년 전 난 당신에게 커프스 단추를 몇 개 사주었죠. 당신도 내게 무언가를 주었죠.
우린 모두 추억이 무얼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어요. 그건 바로 행복과 상처죠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이미 지난날의 사람, 씻겨지지 않는 기억속의 사람,

원초적 방랑자여, 당신은 길을 잃고 내 품으로 들어왔죠. 그리고 거기서 당신은 머물렀죠
바다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가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편이었어요
그래요, 반쪽 조개껍질 위에 있는 그 소녀는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었죠

 

이제 난 갈색 나뭇잎을 흩날리는 가운데 당신이 서 있는 걸 보아요
머리칼은 희끗희끗해 졌군요.
이제 워싱턴 광장 너머로 초라한 그 호텔의 창가에서 당신은 미소를 보내고 있군요.
우리의 숨결은 흰 구름이 되어 한 데 섞이고 공중에 걸려 있어요
솔직히 말한다면 우린 그때 그곳에서 죽을 수 있었을 거예요.

 

이제 당신은 내게 말하고 있어요. 당신은 지난날을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그럼 다른 말로 해 보세요. 말솜씨가 너무나 능숙해 막연하게 돌려 말하는 당신.
지금 난 그 막연함이 좀 필요하기에 모든 게 너무나 명백하게 되었죠.
예, 난 당신을 끔찍이 사랑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행복과 상처를 내게 준다고 해도 나는 이미 댓가를 치루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