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2016. 6. 30. 14:19미술/서양화

 






 

베르나르 뷔페(1928 1999)

 


음울한 잿빛과 날카로운 선묘로 화면 가득 비극적 내용을 주로 그렸던 뷔페(Bernard Buffet.1928-1999.프랑스)는 냉정했던 아버지와 생활고 때문에 근심 걱정에 싸여 살던 어머니 밑에서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1943년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야간 강습소를 다니며 데생을 배운 그는 이듬해 꿈에 부풀어 파리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뷔페의 정규 미술공부는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슬픔과 좌절감에 방황하던 그는 학교 친구 로벨 망티안느의 배려로 같이 화실을 쓰게되면서 생전 처음 유화를 시작하자마자 타고난 천재성을 드러냈다.

 

194618세때 파리 화단에 등장한 뷔페는 야수파 경향의 작품을 선보이1948년(20세)에 이르러 공허한 무채색 배경에다 예리하게 그어진 수직. 수평선의 금욕적 구도로 주제 자체의 기묘한 실존성을 통렬하게 떠올리는 특이한 구상 세계를 개척했다. 전후 파리 화단은 엄청난 전쟁 체험의 비통함을 표출시킨 비구상, 비정(앙포르멜) 미술이 새롭게 진행된 데 반해 그는 우수어린 시각으로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구상회화를 추구했다.

그 결과 불과 20세의 나이에 프랑스 최고 권위의 비평가들이 신인에게 수여하는 크리틱 상을 수상한 후 프랑스 구상화가의 상징적 존재로 전 세계적으로 뷔페 열풍을 몰고 왔다.

 

 

'베르나르 뷔페의 자살, 그 성공과 실패

 

1999105일(71세) 파리의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 프랑스 신문들은 한 화가의 죽음을 알렸다. '베르나르 뷔페 자살 '. 뷔페 그의 자살은 우리들에게 놀라움을 줄 정도로 충격적이다 . 그는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친근한 화가였고 이미 30년전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소개될 정도로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독특한 표현법으로 프랑스 사람들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아온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이며 대중적인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그의 예술을 아는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까지 한다.

 

적어도 뷔페는 전후 금세기 화가들에게 있어 프랑스가 낳은 가장 전설적인 화가였다 . 그는 아직도 유명 작가중 가장 잘 팔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일본 이태리 러시아 등지에서 프랑스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 그의 나이 71,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화가 ,프랑스 현대 예술의 교주로 불렸던 뷔페 .

 

내가 뷔페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미술쪽에서 코디네이터를 하고 있는 친구 밀렌 비뇽이란 프랑스 여자로 부터 였다 . 우리는 올 봄 뷔페의 전시가 있는 갸르니에 화랑으로 연락을 했고, 나는 또 프랑스에서 미술잡지를 발행하는 뷔페의 절친한 친구인 파트리스 드라 페리에르에게도 그와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확인 했다 . 우리는 가을에 보기로 했고, 그는 그런 우리의 약속을 져버리고 자살을 했다 , 그는 왜 자살을 선택 했을까 ? 아니 누가 그를 죽였는가 ?

 

베르나르 뷔페 그런 그는 누구인가 ? 1928년 베르나르 뷔페는 파리의 말제르브시에서 태어났다 . 그는 11살에 카르노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박물학 식물학에만 겨우 관심을 가진 청년 이었다 .15살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파리시의 야간 고등학교에서 데생 수업을 받고 파리의 에꼴드 보자르에 입학했다 .

 

17살 되던 해 그는 친구 로베르 망티엔느의 소개로 시골집에서 머물면서 이미 '십자가의 강하''로베르의 초상'등을 제작 했다 . 194618. 그는 파리의 보자르 화랑에서 열린 '30세 미만의 살롱전'에 자화상을 출품했다 . 19살 그는 피에르 데카르그의 발굴과 추천으로 지금은 파리의 대학가이자 라틴식당들이 모여있는 캬티에 라탱 지역의 작은 서점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

 

초기 작품에서 부터 그는 전투적인 모습의 작품을 보이기 시작했다 . 그는 이 전시에서 이미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작업은 어린 시절의 작업으로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풍에서 독특함을 보였다 . 그는 그 전시회에서 파리의 국립미술관을 위해 레이몽 코니아가 ' 어린 닭이 있는 정물'을 구입할 정도로 화가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았다 .

 

삐쩍 마르고 거치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신문기자들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쓴 당대의 뛰어난 시인 랭보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난 잔인함이 주는 쾌락을 묘사하는데 내 재주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 '말도르로의 노래' 의 주인공 시인 로트레아몽과 비견하기도 했다 .

 

1953년 피카소가 레닌의 초상화를 그려 화제가 되기도 했던 유명한 된 레 레트르 프랑세즈 라는 ' Les Letteres Francaises '라는 잡지에 당대의 지성 루이 아라공은 드루앙 다비드 화랑에서 풍경의 유화전 , 비스콩티 화랑에서의 뎃상전 이 두 전시회를 보고 뷔페를 가리켜 ' 풍경화는 4세기 부터 존재해 왔으며 베르나르는 겨우 24'이라고 지적하며 베르나르가 독창적으로 이룩한 풍경화의 신선함을 극찬했다 .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미술애호가인 쟝 지오노는 '순수의 탐구' 저자를 위해 뷔페가 드라이포인트를 제작한 그는 '그의 그림을 보면 그 안에서 날고 싶다는 욕망을 100번이나 더 느낀다'고 실토 했다 .

 

잔인한 선을 가진 화가라고 일컽는 그의 선묘법 후벼내는 듯한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선으로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유럽에 알려졌다 . 1955년 이태리의 로마와 밀라노 , 스위스의 바젤 , 영국의 런던, 암스테르담 등에서 그의 명성은 화랑가에서 자자했다 . 그러나 그의 나이는 고작 27세 였다 .

 

 그해 프랑스의 전통적인 미술잡지' 꼬네상스 데쟈르'가 기획한 전후의 화가 10인중 1위에 오를 정도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다 . 그의 나이 28살에는 얼마전 죽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세자르와 함께 프랑스의 최고 작가로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해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작가로 지명도를 떨쳤다 . .

 

이전 부터 그의 화풍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 다만 그는 특별히 어떤 한 쟝르를 고집 하지는 않았다 . 그는 꽃도 많이 그렸고 풍경도 그렸고 정물도 많이 그렸다 . 그러나 그의 기법은 언제나 동일하고 일관 했다 . 놀랄만큼 간결하고 날카로운 선 , 힘있는 선들을 바탕으로 한 구성 등으로 그는 불안과 격분 공포에 대한 거부의 세계를 강렬하게 묘사해냈다 . 특히 그는 세계 대전에 대해 민감해 했고 격분했다 .

 

1955년 개인전에서 그는 '전쟁의 공포'를 주제로한 작품을 발표 할 정도로 인간적 상황을 고발했다 . 이 작품들은 우화적이면서 참혹한 인상을 준 작품들로 인하여 관람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 시리즈로 제작된 이 대형작품에는 1. 전쟁을 알리는 천사의 모습  2.네 사람의 시체가 매달려 있는 숲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학살의 장면을 보여주며 3.강제수용소를 그림으로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전쟁의 일면을 그려냄으로서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참상과 끔찍함을 호소했다 .

 

또한 마치 도미에처럼 인간의 처참함을 드러냈다 . 그의 손이 닿으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 황폐한 들판의 풍경 등이 격동한듯 힘있는 모습으로 변화 했으며, 수직선이 빚어내는 강렬한 선의 힘은 한결같이 그의 작품을 경탄하게 하는 서사적 감동을 주었다 .

 

1958년 그는 미모의 여인 아라벨과 결혼을 했다 . 그녀는 그 이후 뷔페의 가장 오랜 여자 모델로 그의 화면에 빠짐없이 등장 했다 , 1961년에는 다비드 에 가르니에 화랑에서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만을 가지고 '아나벨의 초상화'전이라고 전시를 가질 정도로 내조했다 . 아나벨은 뷔페를 향하여 '그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며 , 그를 열정 있는 사람, 위대한 화가 기상천외한 화가로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

 

그의 작업은 특별했다 . 그가 여행한곳이나 관심이 있는 부분은 연작으로 제작하는 방법을 택했다 . 그가 이태리를 여행하고는 베니스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듯이 그의 작업은 한 주제를 정하게 되면 곧이어 작업에 몰두 하고 전시를 하는 등 테마 전시람회를 즐겨 했다 .


'그리스도의 수난 ' (1952) 을 시작으로 '런던의 전망 (1961)' '베니스'(1963) , '가죽 벗긴 짐승'(1965) '바다'(1965) '옷을 벗은 여인들' (1966) 투우사전 (1967) 나의 서커스 (1968) 프랑스의 교회 (1969) 1루아르강의 성(1970) 미친 여자들전 (1970) (1973) 풍경 (1974) 단테의 신곡(1976) (1979) 나체전 (1980)일본전 (1980) 자화상 (1982) 자동차전 (1985)같은 해 뷔페 자동차 100년전, 네덜란드전 (1986) 돈키호테 (1989) 해저 2만리 (1990) 뉴욕 풍경전 (1991)등 이외에도 동물이나 새등을 주제로 전시를 갖기도 했고, 올 봄 그가 자살하기 전까지 그는 인간의 근원적 형상과 원형을 보여주는 듯한 원숭이 씨리즈를 발표했다 .

 

그만큼 그는 작품의 제작에 있어서는 대단히 집요함과 최근에는 중국에 가서 전시를 하는 등 세계를 향해 그의 이름을 알리는데 힘을 기울였다 . 그런 그는 사실 19세기의 프랑스의 사실주의의 후계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 다비드와 제리코, 쿠르베를 숭배했던 뷔페는 '인본주의와 원시주의를 가진 장엄한 분위기를 가진 엄격성을 회화속에서 구현했다 . 뿐만 아니라 그는 화화를 비롯하여 입체 그리고 판화등도 제작했다 ,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한 21점의 드라이 포인트로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까뮈의 이방인 , 쟝 꼭토, 보들레르 등의 판화와 삽화를 제작했다 . 이외에도 롤랑 쁘띠 발레단의 ''과 프랑스와즈 사강의 '어설픈 만남을 위하여'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하기도 할 정도로 그의 재능은 폭넒게 펼쳐졌다 .

그만큼 뷔페는 세계적으로 가장 알려진 현대 구상작가 중에 한 사람이었다 . 그는 '싫건 좋건 간에 우리는 베르나르 뷔페가 우리시대의 중요한 증인' 이란 점을 인정 해야 한다고 피에르 브와드 프레는 '뉴욕의 풍경' 연작 전람회에서 기록했다 .

 

뷔페는 매우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손재주가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 그는 작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모두 영감이 아니고 손의 힘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작가였다 . 그래서 그런 그가 자살 했다는 것은 더 의미가 깊게 다가온다 .

그는 프랑스 투르투르 자택에서 비빌봉지를 얼굴에 덮어쓴채 질식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평소에 그는 말이 적고 극도의 단절 상태에 있었으며 파킨슨씨병을 앟고 있었으며 '삶에 지쳤다 '는 말로 이미 자살을 예고 하고 있었다고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예술가에게 있어 어디든 있을 수 있다 . 197143살 그는 퐁피두 대통령이 주는 슈발리에 들라 레지옹 드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 그러나 정작 프랑스 현대미술의 보고이자 산실인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딴 퐁피두 센터는 단 한 점도 그의 그림을 사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고 중요한 전시 때도 그는 그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공식적으로는 대접 받지 못했고 전시하지도 않았다 .

 

그의 그림은 언제나 억대 이상의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고 그의 그림은 파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현금과 같은 작가 중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그의 작업보다 훨씬 더 불란서 비평가들로 부터 냉대를 받았다. 그의 예술과 인생에 관한 극도의 평가는 늘 찬반양론이었다 .

 

올 봄 문화예술 프로그램 전용인 채널 5ARTE 텔레비젼 방송에서는 베르나르 뷔페의 특집을 기획했다 . 이 특별기획은 베르나르 뷔페의 70년에 이르는 예술과 인생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 여기에는 베르나르 뷔페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준비하고 있는 300호를 능가하는 대작들로 가득찬 그의 아트리에와 작업중인 작품들이 소개 되기도 했다 .

 

베르나르 뷔페는 침묵했지만 거기서 뷔페의 부인인 아나벨 뷔페는 이렇게 국제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전람회에 조차 미술평론가들은 그림조차도 보러 오지도 않는다고 미술평론가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평론가들이 아무리 뷔페를 낮게 평가 폄하해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뷔페의 작품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서 항변 했다. 그 자신 역시 '비평가들의 욕지꺼리가 나의 붓을 꺾을 수 없고 이런 우직한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까지 했다 .

 

그러나 그는 '예술적 품평보다 돈벌이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한적이 있을 정도로 '多産 작가''재벌작가'라는 오명을 끝내 벗어 버리지 못했다 . 이러한 그의 오명이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다닐 때까지 그는 수많은 작품을 전세계로 내다 팔았다. 특히 그가 위에 열거했던 전시 중 테마작품의 상당수가 일부 주문에 의한 제작품으로 팔기 위해 제작 되었다는 점에서 뷔페는 70년대 이후 그의 예술성을 상업성에 맟춰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로 낙인이 찍혔다 .

 

그럼에도 그는 매우 부지런한 작가이며 화단의 귀재였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다 . 그는 사실 많은 작가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그의 전람회는 해마다 이어졌고 그때마다 그의 전시는 성황을 이루었다 . 이러한 그의 전람회에 일부 부정적인 인식이나 시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너무 자주 쉽게 주제를 정하다 보니 초기 그의 회화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엄격한 표현 . 불안함에 대한 절박한 긴장감 ,이런것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화사한 색채와 고민없는 꽃, 풍경과 건물들 광고처럼 보이는 자동차 그림 등이 등장하여 전형적인 매너리즘에 빠진 양식화된 작품을 낳게 되었다고 비난했다 . 특히 이런 뷔페의 상업성과 결탁은 파리의 번화가에 있는 모리스 갸르니에 화랑의 돈벌이에 야합했다고 따돌림을 당했다 .

 

그는 후회 했고 그는 이전과 같이 주제가 무거운 인간의 비극적인 세계를 그리는데 주력했다 . 그러나 불란서의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뷔페가 죽기 전까지 온 정열을 다하여 악착같이 인간에 관한 고민을 진지하게 성찰한 그림들을 형상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에 대한 프랑스 비평가들의 평가는 냉혹했고 스무살 때의 비평가상의 영광은 다시 돌아 오지 않았다 .

 

프랑스의 예술이론가인 쟝 뤽 샬리모는 '베르나르 뷔페는 이미 70년대 이후 끝났다'고 주저없이 말했다 . 렉스프레스지의 평론가는 뷔페의 작품이 소개된 특집방송에서 공공연하게 '나는 그의 전람회에 갈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고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

 

대다수 뷔페를 좋아하고 사랑했던 애호가들은 그의 자살을 비통해 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화랑이 단순히 뷔페의 명성을 이용하여 그림만 팔아먹었고 그의 작품에 있어 예술적인 평가를 위한 노력에는 무관심했다고 화랑을 욕했다. 우리의 화랑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뷔페와 화랑 그리고 화랑의 역활이라는 것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일부에서는 뷔페가 설령 한 때 상업적인 것에 눈이 멀어 그림을 남발했다고 모든 평론가와 미술관들이 천대하는 것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동정론도 일고 있다 . 그러나 그에게 찍힌 아니 그에게 내린 평론가들의 시각은 전혀 교정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가 러시아의 에르미타쥬에서 전시할 때도 그의 전시는 파리에서도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부러울 것 없는 그가 자살한 이유에 대해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그가 '삶에 지쳐 있다' 는 측근의 표현과 그가 프랑스 최고의 인기작가로 군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평론가들로 부터 왕따를 당한 것이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그러면 왜 프랑스 평론가들은 그들이 이미 약관 20세의 나이에 비평가상을 주면서 천재라고 했던 작가에게 등을 돌렸을까?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예술성을 인정한 평론가들의 기대와 희망을 져버렸기 때문에 더 깊은 배신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다시는 프랑스에서 예술가가 상업성과 결탁해서 예술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한 예술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

 

어쩌면 그가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가 마지막 남긴말 '삶에 지쳤다' 는 말 외에. 나는 그의 자살에 프랑스 비평가들의 차고 냉정한 대접에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어쩌면 프랑스의 비평가들은 그의 나이 20살에 그에게 수여한 비평가상을 거둬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가 비평가들이 준 상을 가지고 재벌이라고 불리울 때까지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

 

리오넬 죠스펠 총리가 '전후의 빈곤과 고통을 예리하게 그려낸 작가'로 쟈크 시락 대통령이 '그의 붓놀림과 채색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하다'며 거장의 죽음을 애도 했지만 한 예술가의 벽에 부딪힌 자살은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외롭고 쓸쓸한 예술가의 길과 냉혹함을 가져야만 할 비평가의 길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뷔페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펌글)

 

 

 




 

BERNARD BUFFET (1928 in Paris - 1999 )
            











 
























 

 

 

 

 

 

 

 

 

 

 

 

  
 
 
 
 
 
 
 
 
 
 
 
 
 
 
 
 
 
 
 
 
 
 
 
 
 
 
 
 
 
 
 
 
 
 
 
 
 
 
 
 
 
 
 
 
 
 
 
 
 
 
 
 
 
 
 
 
 
 
 
 
 
 
 
 
 
 
 
 
 
 
 
 
 
 
 
 
 
 
 
 
 
 
 
 
 
 
 
 
 
 
 
 
 
 
 
 
 
 
 
 
 
 
 
 
 
 
 
 
 
 
 
 
 
 
 
 
 
 
 
 
 
 
 
 
 
 
 
 
 
 
 
 
 
 
 
 
 
 
 
 
 
 
 
 
 
 
 
 
 
 
 
 
 
 
 
 
 
 
 
 
 
 
 
 
 
 
 
 
 
 
 
 
 
 
 
 
 
 
 
 
 
 
 
 
 
 
 
 
 
 
 
 
                                                                


 

출처 :화실전 원문보기 글쓴이 : 나비

 

 

 

 

 

 

 

 

 

 

 

 

 

 

 

 

 

 

 

 

 

 

 

                      

 

 

 



L'enterrement




Inondation




Raie et broc




Lapin et casserole rouge




La salle de bain




Femme assise





General d'Empire




Paravent : Les instruments de musique




La corrida : Desplante de rodillas




Les Folles : La mariee




La Vallee, Saint-Cast




Le manoir aux ombelles




Wattignies, la maison du marais




Les bords de Seine







Audierne, les filets bleus




Don Quichotte : Les duegnes




20000 lieues sous les mers : le hublot geant du Nautilus




Le Dome de Milan




Le Chateau Saint-Ange




L'Odyssee : Les Sirenes










Squelettes travestis




Tempete en Breta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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