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2016. 6. 20. 18:15내 그림/(수채화 소재)

 

 

 

그려보고 싶은 그림이 너무 많아

 

 

 

 

 

 

 

 

 

▲ 등짐을 지고 설산에 오르는 네팔 사내들. 김남희 촬영. /미래M&B 제공




 

 

 

 

 

 
 
 

 

 

 

 

 

 

 

 

네팔 안나푸르나에 산다는 것

란드룩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에게 안나푸르나는 생활이다

16.06.20 10:29l최종 업데이트 16.06.20 10:29l

 

눈빛 초롱초롱한 네팔 아이가 받아내는 물줄기가 성수처럼 느껴져 '생수를 사서 먹어라'는 여행 안내서를 어기고 벌컥벌컥 그 물을 마셨다.ⓒ 송성영

 

 

 

란드룩에서 둘째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평소처럼 아침 겸 점심을 간단하게 마치고 게스트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한 아이가 란드룩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수돗가에서 작은 청동 항아리를 씻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빙그레 웃는다.

아이는 청결하게 씻은 청동 항아리에 물을 담는다. 마치 성수라도 담아내듯 정성스럽다. 작은 항아리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물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빛을 닮았다.

"이 물 먹어도 되니?"

내가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며 아이에게 물었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항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힐긋힐긋 쳐다본다. 내가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부끄러운지 히죽 웃는다. 아이가 저만치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대 본다. 차갑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줄기에 입을 댄다. '자칫하면 배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두고 벌컥벌컥 마신다. 란드룩에 오기 전 톨카에서 마신 물 때문에 배가 살살 아파왔지만 반나절 만에 잠잠해졌다. 인도나 네팔의 도심에서 석회질 성분이 많은 물을 잘못 마셨다가는 큰일을 치룰 수도 있지만 여기는 청정한 히말라야 기슭이 아니던가.

반드시 생수를 사서 마시라는 여행 경고장을 어기고 내 몸을 믿고 싶어졌다.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 의사가 수술대에 올라야 될지도 모른다 했던 다친 무릎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도무지 걷지 못할 것만 같았지만 1개월도 채 안돼서 어제 톨카에서부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1시간 거리를 걷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인도를 거쳐 이곳 네팔에 오기까지 3개월 동안 낯선 사람들이 친절하게 건네는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수없이 어겨왔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두려움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형체 없는 귀신과 다름없다. 두려움은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다. 여행길도 마찬가지다. 낯선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만끽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홀로 떠나는 여행길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결별하고 낯선 것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이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병든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내 오랜 믿음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성수처럼 다가왔던 물을 마시기 전에 망설였다. 두려움으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낯선 나라를 홀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내 오랜 믿음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지 않기를...

 

 

물을 긷던 한 네팔 여인이 넋을 놓고 안나푸르나를 바라보고 있다.ⓒ 송성영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 북인도 시골 마을 코사니에서처럼 이곳 란드룩에서도 밭일은 여자들 몫인가 보다.ⓒ 송성영

 

 

 

이른 아침부터 수돗가에서 아낙네가 양동이에 물을 긷다 말고 안나푸르나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안나푸르나를 평생 동안 바라보고 살아왔을 아낙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 같은 배낭객들은 평생 한두 번 볼까말까 하는 저 안나푸르나에서 벗어나 화려한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어젯밤 남편과 대판 싸우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온다.

아니다. 나는 불경한 생각들을 접어둔다. 저 아낙네는 신처럼 변함없는 저 안나푸르나를 향해 마음속으로 행복한 뭔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온갖 상상을 해가며 좀 더 마을 아래로 내려섰다.

밭일을 마치고 빈 대바구니를 가볍게 이고 걸어가는 아낙네를 뒤따라가 본다. 북인도 시골 마을 코사니에서처럼 이곳 란드룩에서도 밭일은 여자들 몫인가 보다. 아낙네가 들어선 낡은 집은 란드룩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붕들을 전시해 놓은 듯 초가지붕과 함께 납작한 돌과 양철을 얹힌 지붕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낙네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본다. 나는 아낙네에게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며 몸짓으로 말을 건네 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돌아서 나왔다.

 

 

 

안나푸르나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저 계곡 반대편 마을을 향해 걸었다. ⓒ 송성영

 

 

 

계곡 반대편에 자리한 주변에 다랭이밭이 널려 있는 작고 아담한 마을에서 한 세월을 보내고 싶었다.ⓒ 송성영

 

 

 

란드룩 마을 저 아래로 안나푸르나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계곡이 있다. 저 안나푸르나를 향해 모든 잡생각을 버리고 걷고 또 걷고 싶었지만 무릎 통증 때문에 트레킹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계곡 건너 마을까지라도 가볼 작정이다. 거기에 안나푸르나를 조망할 수 있는 적당한 민가를 찾아 사나흘 보낼 생각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으로 내려서는 돌길이 급경사다. 30분도 채 내려서지 못했는데 고장난 무릎에서 불편한 신호를 보내왔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린다. 무릎 관절이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뻑뻑하다. 어제는 적당한 경사의 산길과 평지를 걸었기에 한 시간을 족히 걸었지만 이 길은 다르다. 한 걸음 한 걸음 급경사를 내려설 때마다 고통이 밀려온다.

마을을 건너는 다리가 눈앞에 보인다. 안나푸르나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사이에 놓여진 저 다리를 건너면 올망졸망 들어서 있는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본 것과 달리 마을은 평화로움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마을 주변 산비탈에는 온통 다랑이밭이 널려 있다. 열 가구가 채 안 돼 보이는 저 작고 아담한 마을에 머물면서 어떤 작물을 심고 또 어떤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무릎 통증과 함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갑자기 무릎이 뚝 꺾이는 느낌이다. 숙소로 향해 다시 비탈길을 올라갈 일이 까마득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다리를 건너 마을로 내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 나가기 위해 돌계단에 앉아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애초에 사나흘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의 날개는 점점 더 창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여권이고 비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저 아담한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슬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처음 히말라야 설산을 만나 그 아래 까마득한 암자를 바라보면서 고민 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내 고민을 말끔히 씻어 주는 비가 내렸다. 나를 보호해 주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비를 통해 내게 메신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상상을 접고 얼른 돌아가라. 어제는 돌아갈 곳이 없어 막막했는데 오늘은 분명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고지를 코앞에 두고 몰려온 무릎 통증

 

 

토마토를 저울에 달아 주는 란드룩의 네팔 사내. ⓒ 송성영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에 절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다시 비탈진 돌길을 올라설 무렵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저만치 산비탈에 돌집을 짓고 살아가는 한 사내가 대바구니에 토마토와 자두를 챙기고 있다.

하루에 한 끼 정도를 과일로 때우고 있던 나는 사내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으로 토마토 1킬로를 달라고 했다. 내가 돈을 내밀자 사내 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아낙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사내는 대바구니에 실려 있는 저울을 꺼내 꼼꼼하게 달아 준다.

"아이들은 없나요?"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손짓으로 요만한 아이가 없냐고 했더니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이 그제서 씨익 웃는 표정이 된다. 사내는 아내의 불룩한 배를 손짓한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것이다. 사내가 대바니구를 챙겨 어깨에 걸쳐 메고 집을 나선다. 아내는 집 나서는 남편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배웅을 한다.

사내는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돌며 과일 행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트레킹족들이 뜸한 비수기라서 장사가 시원치 않을 것이다. 조만간 세상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 사내는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과일 장사 나서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송성영

 

 

 

충남 공주 산골에 살 때 시를 쓰는 한 후배가 '문학소녀'를 꿈꾸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기를 앞장세워 우리 집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며 대나무 숲을 둘러보면서 참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다며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쓰러져가는 사랑채며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흙 마당,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고 여름이면 감질나게 흐르는 산기슭의 식수, 거기다가 장마철이 돌아오면 똥물이 튀기는 재례식 화장실이며 온갖 생활의 불편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떠난 뒤 아이들 엄마의 눈치를 살펴가며 '그렇게 아름답다면 여기서 한번 살아봐라 그 소리가 나오는지...' 참 진상들이라고 비난했는데 지금 내가 그 꼴이었다.

멀고 먼 길 따라 안나푸르나를 찾아와 감탄을 자아내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내게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해 삶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과일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행상을 나서는 저 사내는 뭐라 말할까.

누군가를 비난하는 손가락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저들 앞에서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수니 뭐니 해가며 그 물을 받아 농사를 지어가며 한 세월을 보내고 싶다는 내 생각은 사치였다. 삶은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더 많다.

때로는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오겠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그렇듯이 히말라야 설산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저들 또한 대부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은, 저 안나푸르나는 나의 사치스런 생각을 질타하며 비를 통해 내 자신을 직시하라 일렀던 것이다. 어리석은 내 마음을 되돌아 보자 무거웠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문득 고행길은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남희

 


편집자 주 : 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과 자치안성신문사가 공동주관하는 제2회 생명학교 첫 번째 강의가 지난 3월 22일 시작했다. 이 번 생명학교는 지난해 생명학교의 호응이 좋아 이를 바탕으로 한 달 동안 준비모임을 꾸려 시민들이 접근하기 쉬운 장소와 주제, 강사진을 선정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번 생명학교에서는 생명의 가치와 환경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전 지구적 생명의 위기 속에서도 건강과 행복을 유지할 실천방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강연은 오는 4월 27일 6번째 강의까지 계속된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번 생명학교의 모든 강의 내용을 지면강연 형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즉 본 기획기사는 기자의 시점이 아니라 강의자의 시점으로 안성천 살리기 시민모임 정인교 공동대표가 정리했다.

이번 호에는 지난 29일 있었던 도보여행가 김남희씨의 “약함을 유대로 더불어 살아가기”강연 내용을 소개한다. 세 번째 강연은 오는 4월6일(수) 공도도서관에서 김훈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가 “생명공학 소비시대 알권리, 선택할 권리”라는 제목으로 강연한다.



 

 

김남희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 저자, 도보여행가.



 

 

"우리는 모두가 약하면서 강인한 존재이다.
서로의 약함을 기대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행을 통한 네 가지 만남

저는 여행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니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하고 여행을 다녀왔던 곳 중에서 생명의 가치를 느끼게 해 준 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여행에 대한 정의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은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 가지고 있는 성이 있다. 이 성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준일 수도 있고 편견과 선입견일 수 있다. 여행은 A라는 곳에서 B라는 곳까지의 장소 이동이지만 우리 안의 흔들리지 않는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게 여행의 진짜이유이다.

생각의 성을 벗어나면서 만나는 다양한 만남이 있는데,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에 어린이를 위한 인권그림책을 본 적이 있다. 책 내용 중에 한 어린이가 자기를 소개하는 글이 있었다. ‘내 안에는 4개의 방이 있다. 첫 번째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방, 두 번째 나는 알지만 남이 모르는 방, 세 번째 나는 모르지만 남이 아는 방, 네 번째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방이다.’ 이는 어린이 뿐 아니라 이 세상 살고 있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서는 깨닫기 어렵다. 이것을 알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연애는 자신의 의지로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여행은 그렇지 않다. 나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야 한다.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 가톨릭성지 순례길은 800km이다.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매일 물집과 신경통, 어깨 결림을 겪어가며 걷는데 이 길에서 돌아보는 자신의 얼굴은 일상의 얼굴과 다를 거라 생각한다. 또한, 칠레의 토레스 델파이네 국립공원은 트레킹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9박 10일 동안 트레킹을 한 적이 있었다. 침낭을 비롯한 개인용품과 8일치 식량을 준비하여 배낭에 매고 걸어보았다. 혼자서 일주일치 식량을 배낭에 싣고 여행한 적은 처음이었다. 인간이 일주일동안 생존을 위해 얼마나 많이 먹는지 피부로 알게 되었다. 이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일주일치 식량을 매고 다닌 경험이 없는 사람과 앞으로 인생의 고단함을 얘기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 더불어 정신적 지평선까지 확장되는 경험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만남은 타인과의 만남이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지구 저 멀리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낯선 존재들을 만나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의 존재로 기억하게 되는 일이다. 만약 시리아를 여행하지 않았다면 신문을 볼 때 시리아 난민에 대해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 것이고 아프리카를 가지 않았다면 기아문제나 에이즈, 인종차별에 대해 나와 상관없는 나라의 일이라고 치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거의 모든 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므로 말을 건네며 길을 알려주고 밥을 먹여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그 나라의 타인은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으로 다가왔다. 여행은 타인의 의미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티오피아를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내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가야할 몫을 부당하게 가져온 것이 없었던 걸까? 다른 나라 아이들은 사탕을 달라고 쫓아오지만 이티오피아 아이들은 고작 생수병인 빈 플라스틱 병을 얻고자 저 멀리서 버스를 탄 여행객을 찾아왔다. 부탄은 GNH라는 국민총행복지수라는 개념을 1972년에 만들어 내고 GDP, GNP의 성장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영적인 성장과 행복을 기준으로 통치하겠다고 한 나라이다.

제가 여행을 하면서 환경문제나 에너지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저를 유혹하는 나라들은 네팔과 같이 대부분 저개발국가들이었다. 이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깨달은 것은 전 세계 인구의 1/5이상의 사람이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50km를 벗어나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고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은 하루에 많은 시간을 물 긷는 일로 시작해서 물 긷는 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구라는 별의 한정된 자원이나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다른 문화와의 만남이다.>

 

여행에서는 역사, 문명, 문화 등 인류의 살아온 발자취를 마주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을 바라볼 때 우리 생각의 성으로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단정 짓지 않아야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보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몇 백년간 나름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이방인인 우리는 이 낯선 상황들을 평가하지 않고 ‘왜?’하고 들어다보고 ‘어째서?’하며 궁금해 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한 마을의 뒷길을 보며 우리와 다름을 보게 되었다. 꼬불꼬불 S자로 만든 길을 보며 우리나라의 시선으로 길을 만들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경제적 효율로 계산해 아마 일직선의 계단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건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너무나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여행이라는 것은 우리만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우리만의 세계사를 다시 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교나 사회 미디어에서는 역사 또는 세계사를 강자의 시선 즉 이긴 자의 이야기로만 들려주고 있다. 여행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서 평소에 들리지 않았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다. 중동지방을 여행하면서 중동문제를 다시 고민하고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레바논이라는 나라는 800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이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수립된 이후에 친이스라엘 기독교세력과 친 팔레스타인 무슬림세력간의 내전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망명으로 빠져나가 지금은 국내 레바논인구보다 망명으로 국외에서 생활하는 레바논사람들이 많다.

 

<네 번째는 자연과의 만남이다.>

 

여행은 지구라는 별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찾아낸 우주의 별 중에 유일하게 초록빛을 가진 별이 지구라는 행성이다. 무수한 생명이 공존하며 살아있어 아름답고 다양한 생명들이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이 우주의 하나밖에 없는 신비한 행성을 만들은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찾아 발로 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감동은 다른 밀도로 다가온다.

찰스다윈의 종의기원의 아이디어를 얻은 곳인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섬은 철저하게 야생동물을 만지거나 접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섬에서 조개껍질 하나도 가져올 수 없다. 가이드를 통해서만 섬에 상륙할 수 있고 숙식은 섬 밖의 배나 요트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그 곳에서 수영을 할 때 바다거북이나 바다사자들과 어울려 할 수 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또, 남미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은 아름답지만 언제까지 지켜질지 미지수이다. 여러분들이 쓰는 핸드폰 원재료인 리튬이 대규모로 발견되어 선진국에서 호시탐탐 개발을 노리고 있다. 핸드폰 교체를 자주 바꾸지 말자! 우리들로 인해 이 아름다운 풍경을 잃을 수 있다.



 

 



 

 

좋은 여행이란?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여행을 몇 가지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로는 혼자 하는 여행이다.

 

연인과 같이 가족과 같이 가는 것도 좋지만 나를 둘러싼 관계의 그물망을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의 여행이다. 나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고 다양한 만남은 혼자일 때 더 많이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가끔 혼자 하는 여행을 권한다.

 

두 번째는 천천히 느리게 하는 여행이다.

 

풍경 좋은 곳에서는 우두커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엽서를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여행이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사회는 모두 똑같은 속도로 가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멈추면 퇴보된다고 말한다.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원하더라도 여행만큼은 천천히 느리게 가는 것이 어떨까?

 

세 번째는 자기만의 주제가 있고 나만의 스타일이 있는 여행, 내 멋대로의 여행이다.

 

우리 사회는 개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소수자를 차별하는 등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똑 같은 길로 가기를 바라고 인생의 정답이 있다고 말하려고 한다. TV예능프로그램에서 유명해진 여행지를 쫓아간다든지 패키지여행 같은 보편화 되어있고 획일적인 여행보다는 내가 원하는 여행은 무엇이고 어떤 여행을 갈지 고민하는 여행. 내 멋대로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테마여행을 계획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네 번째는 책임여행(responsible travel)이다.

 

다른 이름으로 공정여행, 지속가능한 여행, 생태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행자에게는 여행하는 지역의 자연과 문화, 경제적 환경을 지키고 보호할 책임이 있다.




지속가능한 여행을 위하여 실천할 수 있는 것들

 

1. 비행기이용 줄이기: 항공사의 탄소상쇄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육로를 이용하여 여행하기
2. 전기와 물 에너지를 아끼기 : 어느 나라에서는 한 호텔에서 낭비하는 전기와 물의 양이 5개 마을이 소비하는 물의 양보다 많다고 한다.
3.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기
4. 동물을 확대하는 쇼나 투어에 참여하지 않기
5. 멸종위기의 동식물로 만든 기념품 사지 않기
6.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 식당, 카페 이용하기(스타벅스, 버거킹, 맥도날드 안녕): 런던의 그 많던 작은 찻집들이 사라지고 스타벅스 등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다.
7.여행지의 인사말 익히기
8.적선보다는 기부하기
9. 여행지의 생활방식과 문화 존중하기


 

다섯 번째로 좋은 여행은 공부하고, 준비하는 여행이다.

 

여행을 가기 전 그 나라 영화도 찾아보고 간단한 언어도 익히는 것이 좋다. 그 나라에서 널리 퍼진 소매치기 방법도 알고 가면 미리 대비할 수 있어 중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해진 일정을 벗어나는 여행이다.

 

여행에서 만난 현지인을 따라 그 나라 풍속과 먹을거리도 맛보는 등 일탈적인 여행도 좋은 경험이다. 이런 여행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안전이다. 충분히 안전수칙을 익히고 다녀야 할 것이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어떻게’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약함을 유대로 더불어 살아가기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해준 여행이 탄자니아 여행이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무한경쟁의 세계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저는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을 보면서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다. 동물의 세계보다 인간의 세계가 무한경쟁의 세계이고 승자독식의 세계인 것 같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동물은 사자인데 5일 동안 이 곳을 여행하면서 사자를 봤지만 사냥에 성공한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자가 날카로운 어금니와 발톱이 있어도 먹잇감인 임팔라와 톰슨가젤은 빠른 발과 멀리 보는 눈이 있어 쉽게 먹히지 않는다. 그나마 사자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무리에서 벗어나고 거동 불편한 늙은 어미와 경험 없는 어린 새끼정도이다. 동물의 세계는 강자가 정해져있지 않고 약한 생명이라도 저마다 스스로 지킬 힘과 지혜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사자가 사냥에 성공해도 먹고 남는 것은 미련 없이 버리고 간다. 그 다음은 하이에나가 먹고 독수리, 까마귀 등 순서대로 와서 먹는다.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장면은 누우와 얼룩말의 무리이다. 이들은 수십만 마리가 함께 물을 찾아 먼 거리를 이동한다. 누우는 15km밖의 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얼룩말은 눈이 좋아 멀리 있는 포식자를 잘 구별한다. 두 짐승은 약함을 유대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욕망의 엔진을 끝없이 가동하는 인간의 모습이 만물의 영장이 맞나 싶기도 한다.

일본 베델의 집에서 2박3일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베델의 집은 일본 홋카이도 정신질환장애인들의 생활공동체이다. 여길 다녀온 후 저만의 성이 무너지고 아주 다르게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곳은 장애인들이 회사를 설립하고 음반을 제작하고 밴드도 하고 영화도 찍고 카페도 열고 전국으로 순회강연도 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해서 주목받고 있다. 이곳의 주요 이념은 “약함을 유대로 살아가고 약함을 스스로 공개하자.”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문제투성이”이다. 인생은 끝없이 문제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친구들에게 당신의 병은 감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온 증거라고 하며 이것을 드러내고 공유하자고 말한다. 장애인에 대한 당신의 편견과 선입견도 스트레스 받지 말고 가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가 약하면서 강인한 존재이다. 서로의 약함을 기대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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