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의 집 - 1

2016. 6. 3. 20:13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김기창

 

 

1)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에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병으로 청각을 상실하였고 언어장애를 얻었다.1930년(18세)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이묵헌(以墨軒)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31년(19세)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였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4년 연속 특선을 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라는 위치와 김은호의 후원에 힘입어 일제강점기 유명 작가로 성장하였다.

추천작가가 된 후 1942년 친일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 ‘조선남화연맹전’, ‘애국백인일수전람회’ 등에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또 강제 징집을 고무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의 삽화를 그리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펼쳐 『친일인명사전』(2009)에 포함되었다.

해방이 되자 1946년 5월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12월 「미술운동과 대중화문제」 등의 글을 발표하며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1950년대에는 동양화가 추상 예술의 풍조를 따라 시대성에 발맞춰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영기와 함께 ‘현대동양화’ 운동을 주창하였다.

1946년 한국화가인 우향 박내현과 결혼했고 다음 해 제1회 ‘우향-운보 부부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는 한국 미술계 최초의 부부전이었으며 1971년 제17회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하와이 호놀룰루 동서문화교류센터와 뉴욕 동남아시아 박물관의 초청으로 개최한 부부전은 해외미술시찰의 계기가 되었다.

홍익대학교와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로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김은호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비판적이었던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동양화 모색을 주창하며 백양회를 결성하였다.

일제강점기 김기창의 작품은 김은호의 화풍을 충실하게 수용한 채색인물화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인 박내현과 함께 서양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완전한 추상화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미국과 멕시코 등을 시찰한 후 다시 작품에 변화를 보였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필선과 적색, 황색이 두드러졌으며 1970년대의 청록산수 연작과 바보산수, 민화풍의 화조화 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1973년부터 세종대왕, 김정호, 을지문덕 등 역사적 위인들의 영정 제작을 담당하였다.

청각장애우들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는데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2)

호는 운보(雲甫). 7세 때 장티푸스로 언어불능에 청각까지 잃었으나,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워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첫 입선했다. 연 4회 특선을 했으며, 24세 때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해방 전에는 김은호의 영향으로 정확한 선묘와 설채(設彩)를 바탕으로 한 인물화와 자연풍경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널뛰기〉(1931)·〈물새〉(1932)·〈여 女〉(1932)·〈정청 靜聽〉(1933)·〈금운 琴韻〉(1934) 등 선전에 출품, 입선한 작품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27세에 선전 추천작가가 된 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조선총독부 전시체제와 문예정책에 협조했다. 친일미술가조직 구신회(九晨會)에 참여하거나(1941) 조선남화연맹(朝鮮南畵聯盟) 전시회(1942), 반도총후미술전람회(1942, 1943),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覽會)(1944) 등에 일본화 부문에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출품했다. 〈매일신보〉에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의 삽화를 그리는 등 친일행위에 적극 가담했다.

해방 이후에는 활달한 필법으로 화사한 꽃과 새 등을 소재로 전통을 재해석한다는 평을 받았다. 1950년대부터는 아내인 화가 박래현과 함께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주로 서민적인 내용을 주제로 직선과 면분할, 담백한 색채를 통한 조형의식을 보여주었다.

〈황토〉·〈노점〉·〈무당〉·〈구멍가게〉·〈복덕방〉 등이 이때 작품이며 입체적 시각으로 전통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1960년대 중엽 완전한 추상표현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시집가는 날〉·〈젊음에의 초대〉·〈유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1968년 해외여행 이후부터는 추상표현의 작품을 중단하고, 먹을 절제해 강인한 주제의식을 뚜렷이 드러낸 〈나비의 꿈〉·〈태양을 먹은 새〉 등을 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청록산수(靑綠山水) 연작,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바보산수(山水) 연작, 민화풍의 화조 등을 제작했다. 〈새벽 종소리〉와 같은 바보산수와 〈쌍계 雙鷄〉·〈부엉이〉 등이 그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작품세계는 계속 변모했으며, 마포걸레로 추상화 대작들을 그려내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국제전에 초대출품했으며, 개인전뿐만 아니라 1964년 하와이 호놀룰루 동서문화교류센터와 뉴욕 동남아시아 박물관 등에서 초청한 부부전을 10여 회 가졌다. 1971년 3·1문화상을 받았으며, 한국미술대상전과 대한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 홍익대학교와 세종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운보문화재단

 

운보 김기창 화백은 전 생애에 걸쳐 한국 미술 문화의 발전에 기여해 왔으며, 한국 근 현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한국화를 정립하였다. 또한, 그는 미술계 전 분야에 대해 뛰어난기량을 선보였으며, 대학에서 후학을 배출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기여하였다. 더욱이, 운보 김기창 화백은 청각장애인으로 그의 강한 정신과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예술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러한 불굴의 의지와 정신은 작금의 젊은이들이 본받을 점이 매우 많으며 한국적이면서 세 계적인 그의 작품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국미술문화의 체계정립과 발전을 위해 평생을 보내신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 켜 지역 문화발전과 나아가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한국미술문화에 대한 국민의 이해증진과 미술인구 저변확대를 목적으로 법인을 설립한다.

 

운보문화재단의 주요 사업은 미술관 운영과 장학 사업을 통해서 운보 선생의 뜻을 기리는 것이다. 미술관의 운영은 미술품을 포함한 훌륭한 작품 전시를 통해 일반인의 이해 증진에 힘쓰고 자료 수집과 학술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며 내용은, 운보의 자료 수집, 보존, 관리 및 전시와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조사, 연구. 작품의 보전, 전시에 관한 기술적인 조사, 연구. 미술, 강연, 강습, 연구회 등의 개최와 간행물의 제작 및 배포, 국내외 다른 미술관과의 간행물 및 정보의 교환 등 유기적인 협력을 내용으로 운영하며, 장 학 사업은 재단 수익의 사회 환원과 운보 선생의 뒤를 이어 한국 미술계를 이끌고 나갈 유능한 인재 발굴,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데, 장학 대상은 창의적이고 재능 있는 화가 지망생과 특히, 환경이 어려운 불우 청소년, 기타 한국화에 뜻이 있는 학생으로 한다.

 

  운보 미술관은 미술품을 수집, 보관하고 또 전시를 통해 대중들에게 귀중한 작품을 보여주는 특수 문화 공간의 기능을 수행한다. 운보 미술관은 이러한 전시를 중 심으로 하는 미술관의 기본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부대 시설을 확보하고 복합 공간을 만들어 지역 주민의 참여를 확대시키고자 한다. 대중들이 그 속에서 미술품과 만나고 감상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각종 시설을 확보하여 다양한 미술관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대중교류의 장, 사회 교류의 장으로 확대시킨다.

 

  운보 미술관은 위치적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산자락을 끼고 자리잡았으며 조경이 훌륭하며 화가가 직접 작업해온 생가가 한옥 집으로 들어서 역사성 있는 표식물을 갖춘다. 미술관, 생가, 박물관, 작업장이 겸 하여 있어 사람들이 이곳에서 미술 활동에 참여하여 다양한 경험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청주시내의 예술의 전당, 충북대, 청주대 등의 미술대학과 연계하고 충북 인근의 관광명소와도 연계하여 관 광지로서 또 문화활동의 장으로서 사람들을 모으고 예술 활동에 접하게 하여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술세계와 미술 문화를 이해시키고 나아가 우리 문화의 이해를 높여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문화적 이상을 높이고 우리의 얼과 자긍심을 심는데 재단의 모든 역량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재단법인 운보문화재단은 우리나라의 미술문화발전에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사명감 속에서 저희들은“사랑의 실천”이라는 경영이념과 특히, 비영리단체의 성격에 충실할 것이며, 우리들이 가진 달란트를 필요로 하는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 여 고통을 나눔으로써 사회적 선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봄에 여길 왔다가 되돌아간 적이 있었지요잉. 잉?

웬 관람료를 4천원씩이나?

─ 받을 만하더이다.

분재만 봐도 그 값 충분히 되니깐 입장료 아까워 하지 마셈.

별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개인미술관으로서는 크기가 세계 최대랍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초정리 탄산약수 원탕에 들려서리...... (입욕료 7천원)

얼굴과 불알이 따끔따끔해지는...... ^^*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지 않고 살았다는것,

오히려 소음공해 속에서 조용히 예술에 정진할 수가 있었다는 것,

다만 아내와 아이들과의 대화를 못해 아쉽다는 것,

늙어가매… 禪의 경지로 예술을 하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 이상은 운보의 말씀입니다.

 

 

 

 

 

 

 

 

 

 

residence [rézədəns]  거처 ②거주 ③소재 (장소) ④오염 물질의 잔류 

 

any address at which you dwell more than temporarily 

the official house or establishment of an important person (as a sovereign or president) 

the act of dwelling in a place 

a large and imposing house 

 

 

 

 

[충청신문=청주] 신민하 기자 = 고 김기창 화백이 노년을 보낸 청주 ‘운보의 집’ 활성화를 위해 정부에 지도·감독권 이양을 요구해 온 충북도가 자구 노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충북도가 운보의 집 활성화 차원에서 제시한 사업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난색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운보문화재단의 자구 노력과 ‘초청 르네상스 사업’으로 대표되는 이 일대 관광·문화 산업 추진이 운보의 집 활성화에 긍정적일 수 있다는 게 충북도의 구상이다.

신찬인 충북도 문화체육관광국장은 27일 “규정을 위배하면서까지 지도·감독권을 넘겨받는 것보다 문체부, 충북도, 운보문화재단 등 3자가 운보의 집 활성화를 위해 공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체부의 사무 위임 규칙상 운보문화재단은 활동 범위가 3개 이상의 시·도에 걸쳐 있는 비영리 법인이어서 시·도가 지도·감독권을 넘겨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김 화백이 세상을 뜬 뒤 운보의 집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자 도내 시민단체들로 꾸려진 ‘운보의 집 정상화 대책위원회’는 지도·감독권 이양을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충북도 역시 2013년 11월 운보의 집 활성화 사업을 조건으로 내세워 지도·감독권 이양을 건의했다. 그러나 문체부는 운보의 집 활성화에 수백억원을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충북도가 운보의 집 측면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도 역시 예산 지원이 수반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의 지도·감독권 이양이 운보의 집 활성화와 직결되지 않는다고 판단, 자구 노력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신 국장은 “연간 1만5000∼2만명이 운보의 집을 방문하고 있다”며 “초정 르네상스 사업 등으로 주변 관광사업이 궤도에 오른다면 운보의 집 방문객 역시 증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초정 르네상스 사업은 운보의 집 인근인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 일대를 역사와 문화, 의료관광 구역으로 특화·발전시키자는 취지에서 추진되고 있다.운보의 집은 1만원권 지폐 속의 세종대왕 초상을 도안한 것으로 유명한 김 화백이 어머니의 고향인 내수에 1984년 집을 지어 2001년 타계할 때까지 노년을 보낸 곳이다.

 

 

 

 

 

 

 

 

 

 

여긴 사랑채고,

 

 

 

 

 

저긴 안채고,

 

 

 

 

 

 

 

 

 

 

우리나라 100대정원에 들었다고 하는데… 다들 눈깔이 삔 건지, 아니면 내 누깔이 삔 건지.

운보가 그림은 잘 그렸습니다만 건축엔 젬병 아닌가베?......

 

 

 

 

 

 

 

 

 

 

 

 

 

 

그려, 이 맛이여!

요즘 담배 피고 싶어 환장하것네. 꿈에서도 피네.

 

 

 

 

 

 

 

 

우향(雨鄕), 박래현 朴崍賢  (1920년 4월 13일- 1976년 1월 2일)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 군산으로 이주하여 일본인 미술교사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937년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東京女子美術專門學校 일본화과를 졸업하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전북 순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2년만에 사임하고 1940년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에 건너간 그 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초기에는 사실묘사를 기초로 한 화조, 인물, 산수 등을 그렸으나 1950대부터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이후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와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국전 초대 작가와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백양회(白陽會)의 창립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의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출국하여 南美 각국과 멕시코 등지를 시찰하였고, 이러한 여행을 계기로 서구 미술의 방법론과 판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뉴욕의 밥 블랙번 연구소와 프렛 그래픽 센터에서 판화와 타피스트리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최한 귀국 판화전은 우리나라 화단과 판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5년 다시 판화 수업을 하기 위하여 미국에 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회복하지 못하고, 1976년 1월 2일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1946년 김기창(金基昶)과 혼인한 이후 그와 더불어 국내외에서 1947년 이래로 모두 10여 차례의 부부전과 개인전을 가졌다.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구사하면서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화면 속에 끌어들여, 감각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강렬한 화풍을 이룩하는 등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이러한 회화 세계는 대체로 4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1940년대)는 일본 화법에 근거를 둔 인물화 작품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이다. 제2기(1950년대)는 김기창과 더불어 동양화의 재료를 가지고 서양 현대 조형이 쌓아 올린 분석적인 방법을 원용하여 대상에 대한 입체적인 형태 해석과 면 분할이라는 반추상적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제3기(196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상성이 강한 화풍을 이루었다. 제4기(1970년대)는 판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하여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보여 주었다.

대표작으로 「부엉이」(1953년)·「노점(露店)」(1956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품 19」(1965년)·「작품 F」(1973년) 등이 있다.

 

1940년 선전 최고상(창덕궁상),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56년 제5회 국전 대통령상, 1972년 문화공로상, 1974년 제6회 신사임당상 등을 수상하였다. 1978년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우향 박래현 판화전』(최병식, 시몽화랑, 1995)

『우향 박래현』(경미문화사, 1978)

『한국현대작가십인』(오광수, 열화당, 1977)

「박래현, 그의 작품세계」(김성희, 『한국현대미술가100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9)

 

 

 

 

 

 

 

 

 

 

 

 

 

 

 

 

 

 

 

 

 

 

 

 

 

 

 

 

 

목재 쓴 거 보세요.

건축업자가 누구였는지, 신났겠습니다.

 

 

 

지하가 있더이다. 비밀공간으로 만들었을 듯합니다.

구경 다하고 나가려는데, 집관리하는 아주머니가 알려주고 안내까지 해주십디다.

고마우셔라~ 개방한 지 얼마 안됐다면서~~

입구가 감쪽같습니다. 지하통로가 있으리라곤...... 

 

 

 

 

 

 

 

 

 

 

 

 

 

 

운보가 어머니로부터의 모태신앙이라는군요.

여기 그림들은 예수의 생애를 조선시대 식으로 그린 것인데,

6. 25 전쟁 중에(1952년~1953년) 군산 처갓집에 피난왔을 때 그렸다고 합니다.

2년동안에 이 많은 작품을 다 그렸다니!

그냥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수준이 상당합니다.

기본기나 필체가 김홍도 신윤복에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 이 그림을 보니까 호생관 최북이 떠오릅디다? 특히 저 나무.

 

 

 

 

 

 

 

 

 

 

 

 

 

 

이 양반 정말!, 능수능란하네요!

친일행적 때문에 문제가 되는 듯한데, 어릴때부터 청각장애인임을 감안해야 되지 않을까.

재능을 가지고 말하자면 문학에서의 서정주보다 훨씬 윗질이네요.

우워~~~~'!!!!!!

??????

내가 어떻게 이 양반에 대해서 그토록 무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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