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연 산문집,『기억 속의 풍경』

2015. 9. 2. 09:44책 · 펌글 · 자료/문학

 

 

 

 

 

 기억 속의 풍경 주종연 지음 태학사 | 2015.06.10

 

 

 

제2회 김태길수필문학상 수상한 주종연의 산문집『기억 속의 풍경』.

어린 나이에 전쟁을 치르며 가족과 고향을 잃은 불운한 디아스포라 세대의 아픈 추억을 엮었다.

일제 침략과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힘이 없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지 못했던 슬픔이 곳곳에 묻어난다.

일흔에서 쉰, 서른 즈음으로 거꾸로 삶을 돌아보며 이 땅에서 살며 보고 느껴온 단상들을 모아 한 시대를 증언한다.

* 주종연(시인) : 1937년 함경북도 무산 산양대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졸업.

 

 

머리말 

일흔 즈음에


1. 해묵은 대답
2. 무녀 월선이
3. 더 콘서트
4. 출향관(出鄕關)
5. 공포증 이야기
6. 겹쳐진 얼굴
7. 만주 땅 길림(吉林)에서
8. 씁쓸한 기억
9. 누나의 죽음
10. 하얼빈 역에서
11. 김열규 선생과의 대화
12. 기억 속의 풍경
13. 시베리아 기행 

 

쉬흔 즈음에


1. 쿠날라
2. 고려양(高麗樣)
3. 마명심전(馬明心傳) 

 

설흔 즈음에


1. 나무
2. 이타카를 지나며
3. 어느 한 승려의 죽음
4. 군가(軍歌)와 더불어
5. 자화상(自畵像)
6. 만주리(滿州里)
7. 아버지
8. 최후의 센티멘털리스트
9. 베쓰의 추억
10. 봄의 영가
11. 나의 학창 시절
12. 어린 아들에게
13. 릴케의 산문에 붙여
14. 둥우리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R. 릴케는 말한다.

소설은 허구를 전제로 하기에 그것이 설사 진실을 표상한다 하더라도 실제적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허구도 아니요, 은유나 비유 또는 상징과 같은 굴절된 장치나 구성에 의탁하지 않고

가감 없는 진솔한 진술을 본령으로 하는 것이 산문 양식 말고 어디 또 있을까?

 

 

 

 

 

 

초등학교의 첫 담임선생님은 일본인 여성 오다기리 미찌고였다. 검은색 동그란 안경을 낀, 사십대 초반에 웃음이 별로 없는 선생님은 다소 근엄한 인상으로 오늘날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종종 커다란 그림책을 들고 와 교탁 위에 세워 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의 배경 공간에서 일어난 재미 있는 이야기를 우리들 ‘半島人’ 어린이들에게 쉬운 일본말로 들려주었다.

어느날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모두 책을 덮고 눈을 감으라 하셨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은 새로 들어갈 대목을 아주 나직한 소리로 읊조렸다.

 

 

아까이 도리 고도리 (빨간 새야 새야)

나제 나제 아까이 (와라서 빨갛지)

아까이 미오 다베다 (빨간 열매를 먹었지)

 

순간 머리속은 온통 붉은 색깔이 되었다.

 

아오이 도리 고도리 (파랑 새야 새야)

나제 나제 아오이 (왜라서 파랗지)

아오이 미오 다베다 (파란 열매를 먹었지)

 

이번에는 세상이 온통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전쟁도 끝나고 세상도 바뀌었다. 다소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으나 저『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라든가『요코 이야기』에서처럼 험한 꼴을 당하지 않고 선생님은 무사히 귀국선에 올랐는지,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 젊은 나이에 이국에서 경험한 꿈과 끔찍한 좌절로 얼룩진 삶을 어떻게 감내하며 여생을 보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방랑의 마음

 

               - 空超 오상순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바다를 마음에 불러 일으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깊은 바다 소리

나의 피의 조류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한 푸른 해원―

마음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의 향기

코에 서리도다.

 

 

 

 

첫날밤 /오상순

 

어 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 바다 속에서

어족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원의 생모 현빈이여!

 

머 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밤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孕胎)고

침침히 깊어간다

 

 

 

 

 

 

이 兄! 앞으로 예술적 감동은 어떤 다양한 형태로 창안될 수도 있겠지만 문자를 매개로 하는 이야기 예술이 본령이었던 우리들의 시대는 아무래도 서서히 물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고희를 넘긴 우리들의 나이처럼 기나긴 휴먼 기간만이 화석화되어 兄이나 나의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것이 그저 쓸쓸히 느껴질 따름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생후 열 살에서 열두어 살 때까지 경험한 언어 위주로 최적화되어 있다는데, 이 모두 내 나이 열 살도 되기 이전에 체험한 것들이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들이 내 사고의 틀이 되어 이제까지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착찹하기 짝이 없어 난감해진다.

 

 

 

 

 

 

“다음 생에도 우리 동기로 만나요. 누나!”

 

 

 

 

 

“……조용한 방에서 좋은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 어느 누구의 지배자도 어느 누구의 하인도 되지 않는 것이 궁극적 인생의 목표이며, 정신의 자유를 위해 자기 예술과 자기 인생의 정신적 독립을 위해 살아왔던 의식 있는 유럽의 지식인이요 최초의 세계인”이라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에서의 주장은 여러모로 선생(김열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