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가 무주 지남공원《한풍루》 현판글씨가 창암 이상만의 글씨 같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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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

▲ 창암 이삼만이 쓴 글씨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의 현판 [보제루(普濟樓)]
천부의 필재(筆才)를 타고난 이삼만은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후기 3대 명필로 꼽힌다.
본관은 전주, 본명은 규환이고 호는 창암 또는 완산(完山).
1830년 9월 28일 순조 30년 전북 정읍 부무실에서 태어난 창암은
조선말기 격동의 시대에서 역대 중국 서예와 고대 한국서예 등 선대 서예가들의 진면목을
철저한 연구와 실험정신으로 천착,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정수인 ‘창암체’를 개발했다.

▲ 창암 이삼만의 [서론(書論)]
그는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씩 썼다고 하는 이야기와
벼루를 세 개 맞창 내었고
천 자루의 붓을 몽그라뜨렸다는 일화(磨穿十硯 禿盡千毫)를 볼 때
그가 글씨에 매진하였던 정열은 상상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창암은 어려서부터 글씨 쓰기를 즐겨 몇 해 동안이나 필가의 문에 드나들었으나
그 참뜻을 알지 못하여 항시 탄식하다가
중년에 충청도에서 노닐 때 우연히 진(晋)나라 주정(周綎)이 쓴 비단바탕의 글씨를 얻었고,
또 서울에서 유공권(柳公權)의 글씨를 얻게 되어 고인의 용필지본(用筆之本)에 눈을 떴으며
만년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수적(手蹟)을 얻어 고인의 획이 힘찬 대목을 엿보았다.
본시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글씨 공부로 가산마저 기울었지만 살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베를 빨아서 글씨를 연습하였으며
병중에서도 천자(千字)를 썼고,
글씨를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한 점 한 획을 한 달 내내 가르쳤다.
그때 창암은 글씨의 기본을 중요시하여
행서(行書)나 초서(草書)를 쓸 때도 해서(楷書)의 기본 되는 50자 정도를 매일 반복하여 연습하였다.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고 전하는데
그리하여 거침없는 '창암체(流水體)'를 이루었다.
그것은 글씨이면서 그림이고 동시에 붓으로 추는 춤(筆舞)이었다고 한다.
뱀 같은 미물도 놀랄 지경의 神筆이라고 한다.
창암의 글씨가 중국에까지 알려지면서 널리 그 이름을 떨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 창암 이삼만의 [정기이발(正己而發)]
창암이 거처하는 가까운 곳에 약포점이 있었다.
그 주인은 대구 약령으로 약을 사러 간다면서 약재품목을 적어달라는 부탁했다.
그러자 창암은 약포 주인이 부르는 대로 약재품목을 써 내려갔다.
무려 두루마리 종이 한필을 다 써 버렸다.
며칠 후 대구에 도착한 주인은 중국인 약재 상인에게 약재품목이 적힌 두루마리 글을 내밀었다.
그러자 중국인은 약재품목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휘둥그래진 눈으로 두루마리 글씨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급히 약을 챙기고 난 다음 상인은,
“돈은 필요 없으니 두루마리만 달라!”고 사정하면서,
“도대체 이 글씨는 누구의 글씨냐?” 조선에도 이런 명필이 있는가?”하고 놀랐다.
중국으로 약재품목이 적힌 두루마리를 가져간 후 조선의 명필 이삼만이란 이름이 중국에 퍼지게 되었다.

▲ 1831년에 쓴 글씨로 ‘專尙蒼古 者爲第一功夫也(옛 것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공부)’라는 뜻이다,
어느 날 창암이 전주에 우거할 때 한여름의 한더위를 피하려고 한벽루에 올라왔는데.
한 부채장수 아저씨가 부채 보따리를 부려놓고 다락의 한켠에 눕자마자 이내 코를 골았다.
창암은 불현듯 필흥(筆興)이 일어 집에 가서 필묵을 가져와 모든 부채에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로 부채에 합당한 문자나 시구를 써 넣었다.

▲창암 이삼만의 [솔천재(率天齋)]
한참 후 부채장수가 깨어보니
합죽선이란 합죽선은 모두 먹칠이 되어있지 아니한가?
화가 난 부채장수는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창암은 시비를 논하지 않고,
“만약에 이 부채가 팔리지 않으면
저기 보이는 저 집이 내 집이니, 그리로 가지고 오시오”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 후 합죽선은 몇 달이 지나도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한 중국인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 펼쳐놓은 합죽선의 글씨를 발견하고,
그 글씨가 바로 창암의 글씨임을 확인한 후에
보통 합죽선의 2, 3배 값을 지불하고 모조리 사갔다.
그 중국인은 그 부채를 중국에 가지고 가서 창암의 글씨를 크게 알렸다.
그리하여 중국은 물론 국내에도 창암의 글씨가 널리 알려져
글씨를 배우겠다는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었다.

▲1845년에 이삼만이 홍주의 주경의에게 서법에 대해 써준 서첩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 대표작으로는
전남 천은사의 보제류(普齊樓) 편액, 회승당(會僧堂) 편액,
선암사 만세루의 설선당(說禪堂) 팔상전(八相殿),
금산 보석사의 대웅전(大雄殿) 편액 등이 있고,
금석(金石)으로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와
용진의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 음기(전면은 추사 김정희서),
봉동의 김양성 묘비 음기(전면은 추사 서)등
많은 금석문이 남아있다.●

▲이삼만의 ‘소탕수경’(疎宕瘦勁)

▲이삼만(李三晩, 1770~1845?), ‘무이도가’(武夷棹歌), 종이에 먹, 67.3×31cm, 개인 소장.
주희(朱喜)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서시(序詩)에서 제7곡(第七曲)까지 여덟 폭에 쓴 것 중 마지막 폭이다. 창암의 행초 필적 가운데 변화로움이 잘 드러나는 수작이다.
탈초하면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度幾寒”이다.
창암 이삼만(1770~1847)의 경우 모필(毛筆)과 함께
남들이 쉽게 시도하지 않은 갈필(葛筆·칡뿌리)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꽤꼬리털)과 같은 특이한 도구나 옷감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 주목되는 도구와 재료의 확장인데
이는 창암 글씨의 소탕(疏宕·탁 트이고 거칠음)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한 맛을 내게 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펌2)

그림1. 이삼만(李三晩, 1770~1845?), ‘무이도가’(武夷棹歌), 종이에 먹, 67.3×31cm, 개인 소장.
주희(朱喜)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서시(序詩)에서 제7곡(第七曲)까지 여덟 폭에 쓴 것 중 마지막 폭이다.
창암의 행초 필적 가운데 변화로움이 잘 드러나는 수작이다.
탈초하면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度幾寒.
좀 과격하지만 요즘 예술에서 민족이란 단어는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이유는 사람의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예술에 한국 민족 노동과 같은 수식어 자체가 제약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예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서예 하면 늘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대한민국’아니면 ‘민족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금의 공모전중 열의 일곱 여덟은 ‘대한민국’을 운운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민족을 말하지만
무엇이 한국적이고 민족적인지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점은 좀 다르지만 이러한 현실인식은 서예역사를 보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다.
일각에서 창암 서예를 한국적이라 하고
추사를 중국서예 수입업자 정도로 파악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창암을 우리나라 서예의 가장 큰 병폐인 외래 지향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서예이론을
자주적이고 민족주체적인 서예이론과 예술로 전환시켜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창암이 서예도구나 이론적 측면에서 중국과 달리 독창적인 반면
추사는 도구 재료는 물론 이론까지도 중국 것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창암만이 한국적이라는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런 잣대로 한국성 여부를 따지면
정작 한자(漢字)를 소재로 하는 한 중국 것이 아닌 순수 우리 서예가 어디에 있는 가 하는
난감한 질문에 봉착하게도 된다.
# 도구와 재료의 확장과 극공
창암 이삼만(1770~1847)의 경우 毛筆과 함께
남들이 쉽게 시도하지 않은 葛筆(칡뿌리), 竹筆, 앵우필(鶯羽筆·꽤꼬리털)과 같은
특이한 도구나 옷감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 주목되는 도구와 재료의 확장인데
이는 창암 글씨의 소탕(疏宕·탁 트이고 거칠음)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한 맛을 내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그림1)
창암의 독특한 글씨 철학 또한 59세 때 쓴 ‘서론’에서 잘 피력되어 있다.
“서법은 먼저 팔을 들어 장심(掌心)이 비어 있는 상태로 붓을 쥐어
기혈(氣血)이 종이 위에 붓도록 해야 하며…
곧 모든 서체가 이를 좆아 그 덕을 신명나게 이루어 낼 것이다”고 한
이른바 창암 서법의 5대 원칙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집필 운필 용묵 등에 관한 창암의 체험이 그대로 우러나 있다.
또한 창암은 글씨를 씀에 있어 인품· 고법(古法)· 극공(極工·온 힘을 다 바쳐 공부함) 통영(通靈·신령스러운 경지)등의
네 가지를 강조한 것도 남다르다.
특히 하루 천자 쓰기로 벼루 세 개를 구멍 냈다고 전하는 창암의 극공의 결과는
‘필결’에 집필법 운필법 영자팔법(永字八法) 결구법 등의 학서론으로 정립되어있다.
# 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

그림2. 이삼만의 ‘소탕수경’(疎宕瘦勁), 31×22cm, 개인소장.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창암의 서법이론의 토대는 늘 자연(自然)과 결부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산은 기복이 있어 세(勢)를 얻고, 물은 굴절(屈折)이 있어 세를 얻으니 붓 또한 회선(回旋)하여 세를 얻는다.
세를 얻은 즉 힘이 저절로 붙어 붓 길이 이루어진다.”라고 하고 있다.(그림2)
‘영자팔법’에 대한 창암의 접근방식 또한 이와 같은데
‘동국진체’의 시작인 옥동과도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영(永)자의 첫 번째 점인 ‘측(側)’에 대해
옥동은 “점은 음 양으로 나누어지려고 하면서도 나누어 지지 않는 형상이다”고
주역원리를 그대로 적용하였다.
반면에 창암은 “점은 하늘의 해와 달 사람의 눈과 같아서 사방을 살피는 것만 맡는다.
작고 굳세게 찍어 높은 산에서 돌 떨어지는 것 같이 하고,
또 솔개가 걸터앉은 듯 맵시 있게 하되 형태는 각각 적절해야 한다.”고 갈파하면서
사물의 형상과 비유해내고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사항만 살펴보았지만
창암의 학서 방법론이나 자연주의적 시각에서 글씨를 풀어내는 것은
고래로부터 있어왔지만 특히 창암에게 있어 유독 두드러진다.
# 창암서예의 졸박성
그럼에도 창암의 경우 글씨의 이상을 진(晋)을 넘어 한(漢) 위(魏)시대 예서(隸書)에 두고 있다.
“글씨의 도(道)는 한(漢) · 위(胃)를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진나라 명가들만 전적으로 공부한다면 혹시 고운 것만 취할까 두렵다”는 창암의 인식은
스승격인 원교나 동시대 라이벌격인 추사와도 기본적으로는 궤를 같이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창암은 두메산골에서도 이미 조선말기 시대서풍의 국제적 동향을 꿰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첩학(帖學)중심의 창암과 비·첩 혼융의 추사의 차이는 학서 방법과 실천의 차이이지
왕법(王法)을 초극한데에서 글씨의 근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근본 지향이 다른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득필(得筆)의 경지가 아니면 거론조차하지 않고, 일운(逸韻)이 없으면 칭찬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로지 필력이 강하며 근골이 풍성한가에 달려있다”고 하는 데에서 창암 글씨의 지향이 읽혀지는데,
초서에 대한 다음 언술은 창암의 심미 이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농섬(濃纖)한 곳은 싸늘한 연기가 외로운 소나무에 옅게 낀 듯하고,
우뚝 솟은 곳은 마치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에 구름이 걷힌 듯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창암 서예의 한국성과 세계성
주지하듯 초서는 작가의 성정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서체다.
창암은 여기서 작가의 성정과 기질이 삼라만상의 형상을 빌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 감상자에게 무한한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창암 서예의 풍격이나 이상은 한마디로 자연에서 얻은 졸박미(拙朴美)로 함축되는데,
이것은 이미 원교의 ‘고질미(古質美)’ 추사의 ‘고졸미(古拙美)와 동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창암 만이 한국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논의는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진다.
요컨대 서예야 말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보편성이나 세계성을 전제하지 않고
한국이나 민족을 너무 앞세우면 곤란해 질수 있다고 본다.
작가의 활동근거지가 시골 서울 중국의 문제도 아니고,
소재가 한글인가 한자(漢字)인가도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작품이 예술의 본질에 여하히 접근하고 있는 가가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창암이나 추사는 모두 한국적이고 그래서 세계적이다.
〈이동국|예술의 전당 학예사>
천은사 보제루 현판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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