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이 노래가 백창우 곡이었구나!

2013. 12. 4. 05:57음악/우덜- ♀

 

 

 이제보니 원곡은 강영숙이란 가수가 부른 거군요.

저는 여태 장은숙인 줄만 알았습니다.

 

https://youtu.be/mZ4sN1Sm9wo (장은숙 - 사랑)

 

 

"보고 파 하는 그 마음을 그리움이라 하면, 잊고져 하는 그 마음은 사랑이라 말하리.
두 눈을 감고 생각하면 지난날은 꿈만 같고, 여울져 오는 그 모습에 나는 갈 곳이 없네.
사랑은 머물지 않는 바람, 무심의 바위인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어둠의 분신인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

 

.

.

 

 

이게 무슨 말일까?

'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

<--- 또 깨질 거 뻔하니깐, 다신 사랑을 안하겠단 말인가?

아니면, '새 사랑'을 거부하고, '헌 사랑'을 다시 찾겠다는?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원작자가 정몽주구만 기래.

 

 

 


 

 

 

백창우

 

 

문학과 음악의 결합을 통해 대중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가고 있는싱어-송 라이터 백창우.

그의 초기 노래들은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애창 민중 가요였다.

임희숙의 히트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창작곡이다.

노래 동아리 '노래 마을'의 리더였던 그는

80년 말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더불어 민중 가요를 폭 넓은 대중에게 전파시켰던 노래 운동가였다.

네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독집 2장을 발표한 포크 가수이고

김광석 트리뷰트 앨범 '가객', 동요 북&송 등 스무 장 가량의 음반을 기획· 연출한 음반기획자이다.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쉽지않은 아티스트다.

 

백창우는 예명이다. 본명은 백남욱. 하지만 사고를 당할 액운이 있다고 해 백남훈이란 이름도 얻었다.

데뷔 때, 그를 '고집 세고 앞뒤 꽉 막힌 소'같다며 "벽창우"로 부름에 힌트를 얻어 백창우라고 예명을 정했다.

그는 평안도 진남포에서 소학교 교장을 했던 부친 백낙영과

평양 신학대를 다닌 신여성이었던 모친 임영신의 7남 1녀 중 막내로 1958월 12월23일에 의정부에서 태어났다.

조만식 선생을 도와 선전부장일을 했던 부친의 전력 때문에

그의 가족은 공산당을 피해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월남을 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처음에는 인천 앞 바다 보름도에서 살다가 경기도 의정부로 갔다.

백창우는 빈번한 이사로 친구를 사귈 수 가 없었다.

그래서 형들이 보던 만화,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나 루팡류의 추리소설들을 읽으며 친구를 대신했다.

'실수로 덤으로 세상에 나온 늦둥이'인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버지와 전차를 타고 약장수, 서커스 구경을 다닌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3-4살 때 한글을 뗀 그는 신동으로 통했다.

보따리 포목장사 어머니 등에 업혀 어머니가 알려 주는 가게 간판을 보며 한글 공부를 했던 것.

IQ 152가 넘는 수재였지만 의정부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몸이 아파 1년을쉬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자식들만 양평의 외곽 마을 산밑으로 보내져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정착을 위해 양계장, 참기름 장사, 연탄가게, 쌀장사. 만화가게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집안 사정이 좋아지자 수락산 밑으로 이사해 상계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2년 반 동안 한 곳에 거주했던 이때를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화려한 시절'로 기억한다.

이때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어울려 벌이는 놀이나 전래 동요를 처음으로접했다.

5학년 때 황량한 먼지 들판인 광주 대단지(지금의 성남)로 또 이사를 갔다.

생계 대책이 막막했던 이주민들은 유신 정권 최대의 시위를 터트렸다.

시위 구경을 나간 어린 그는 빗속에서 최루탄과 투석전 와중에 한 참외 트럭이 전복하는 걸 보았다.

갑자기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주린 허기를 채우기 위해 노란 참외를 주워 먹기 위해 몰려 들었다.

이 장면은 평생 그의 뇌리에 박힌 돌이 되었다.

철거민을 위해 생겨난 수진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겨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성남 서중에 들어가며 풍금이 있는 성남 교회의 유치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문학에 빠져 들었다.

그의 중 3시절은 음악과 깊숙한 연관을 맺은, 일생의 중요 계기였다.

취직을 한 누나가 4,000원 짜리 세고비아 클래식 기타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흥분했다.

학교에서 '8마디 곡 만들어 오기' 숙제를 냈다.

좋아했던 여자 음악 선생님이 그의 곡을 풍금 연주를 하며 “참 좋다.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칭찬은 어린 마음에 창작의 물꼬를 터 주었다.

그는 기타와 풍금을 이용해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로 곡을 만들었다.

어느 날 전학을 온 교회 동급생에게 풍금을 쳤다. 장난을 치기 위한 엉터리 연주였다.

헌데 진지하게 곡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해 오자 당황했다.

이때부터 "음악은 장난스럽게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어느 날 교회친구가 만돌린을 연주했다. 처음 보는 악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친구는 태평동에 살았던 선배 포크가수 한돌의 친동생이었다.

 

성남 서고에 입학해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제아들과 어울려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들에 야전(야외 전축)을 들고 나가

진추하, CCR 등 외국 팝송들과 김민기, 양희은, 이연실, 한대수, 박인희 등 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접했다.

천일극장 예술제 때 이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연습도 했다.

하지만 학교 공부가 시시해진 그는 밤을 새워 시와 소설의 습작에 몰두했다.

등굣길의 헌책방 가게에서 몰래 빼돌린 육성회비로 헌 문예지들을 많이 사 탐독했다.

 

77년, 고3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절망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절망감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40일 동안 강원도 탄광촌등 전국을 돌아 다녔다.

 

 

 

 

 

 

담임 선생의 도움으로 졸업을 했지만 고통에 신음하던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다음해 어머니의 희망대로 신학 대학에 들어 갔지만 몇 달만에 그만 두었다.

이때가 1979년.

친구들과 성남 신구대 앞에서 밤에는 포장마차, 낮에는 보따리 책장사를 했다.

제법 호황을 누리던 중 10ㆍ26사태가 터졌다. 군인이 학교를 점령하자 학생들 외상값도 못 받고 망했다.

 

이 시기에 소설을 쓰는 선배의 소개로

음반 기획자 지명길의 종로3가 사무실에 놀러가 그 동안 쓴 악보와 글을 보여 주었다.

지명길은 '제2의 김민기'가 나타났는가 착각할 정도였다.

우선 그의 곡들을 기타를 쳐 마란츠 녹음기로 녹음을 했다.

12월 어느 날, 지명길은 정식 앨범 제작을 제안해 왔다.

 

가수의 꿈은 없었지만 '재미있겠다' 싶어 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서 이틀간 녹음을 했다.

당시는 중앙정보부의 요원이 검열을 하던 시절. 백창우의 모든 곡들은 조사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대학생도 아니고 위험 그룹에 소속되지도 않은 개인인지라

문제가 되는 곡의 가사는 수정하고 빼버리는 선에서 넘어 갔다.

당시는 가사 내용 중 새가 북쪽으로 가도, 슬퍼도, 비가 계속 와도 안 될 뿐더러,

더구나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데뷔 음반 제작자인 지명길은 김민기 시대의 음악을 알았던 DJ출신.

그는 백창우를 '80년대식 제 2의 김민기'로 만들려했다.

당시 언론들도 포크의 기대주로 보도했다.

가위질로 만신창이가 된 데뷔 음반을 받아 든 그는 기쁨보다 “귀 빼고 좆뺀 당나귀 꼴”이라며 한탄했다.

 

 

 

 

 

 

음악이 정치, 사회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타이틀 곡 '바램'은 대학가에서는 '새농민가'로 불렸다.

이화여대 체육대회 때 응원가로 처음 불렸던 이 곡은 대학가의 농활 운동가로 애창되었다.

백창우는 자신이 부를 수 없는 곡들을 일반 가수에게 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래는 임희숙의  '나 하나의 사람은 가고' 와 강영숙의 '사랑'.

히트 넘버 작곡가로 이름이 나자 정애리, 혜은이, 김세화, 이동원 등 수 많은 가수들이 곡을 청해왔다.

그는 심의를 거치는 음반보다는 매니저를 맡은 구자룡과  종로 '무아' 등 서울과 지방의 음악실에서

간이 토크 콘서트 위주로 활동을 시작했다.

DJ들과 교류하며 영미 음악이 아닌 3세계의 음악을 접했고

선배 오세은에겐 기타 주법을 배우고 곽성삼 등 포크 계열의 가수들과 교분을 쌓았다.

 

80년대 초반, 성남의 달동네에 교회를 연 곱사등이 전도사를 도와 여름 성경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성가와 전래 동요를 가르치다 어린이 문화 모임  '굴렁쇠'와 동아리 '두레'를 결성했다.

그의 음반에 수록된 상당수 동요곡은 이 당시 만든 노래들.

빈민들을 위한 성남 시민회관의 '포크 콘서트82'는 고 김정호의 마지막 공식 무대이기도 했다.

김정호의 음악을 사랑했던 그는 추모 곡 '겨울새' 작곡했다.

  

83년, 주변의 무명 가수들과 성남YMCA에서 4시간동안 통기타 공연을 열었다.

당시 참여했던 친구들과 노래패 '노래 마을'을 결성해 성남 중동의 술집거리의 신생 소극장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군사정권의 서슬을 피해 은유적인 노래, 구전 가요, 전래 동요 등을 주로 노래했다.

하지만 대학 무대에서는 사회성 강한 곡들을 마음껏 불렀다. 

'노래 마을'은 집단성만을 강조하는 민중가요에 반기를 들고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를 추구했던 노래 모임이었다.

노래마을 1집은 안기부 요원이 검열을 했다.

12곡 중 11곡이 심의에 걸려 '은자동아 금자동아'만 심의를 통과했다.

 

검열보다 더 높은 벽은 제작자의 상업적 기획이었다. 타이틀 곡을 고르는데만 하루 종일을 싸웠다.

결국 합법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음반을 만들 수 없음에 직접 프로덕션 '노래나무'를 만들어

노래마을 2집, 3집 그리고 독집 2집을 제작했다.

 

2집 '사람 하나를 만나고 싶다/1990년'은 곽성삼과 비 내리는 남한산성 근처 숲 속에서 만든 노래들.

하지만 제작사 대우음반이 망해 93년에 덕윤산업에서 1만장 한정으로 CD를 만들었지만

이곳에서도 단 한푼도 못 받고 마스터까지 빼앗겼다.

하지만 '노래마을'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민주화 열기를 타고 '민중가요의 대히트'라는 가요혁명을 일궈 냈다.

 

 

 

 

 

 

90년대 초, 백창우는 고 김광석과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새로운 노래를 꿈꿨다.

김광석의 유작 노래인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때의 결과물.

하지만 갑작스런 김광석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두 번의 화재를 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창우가 노름에 미쳐서 음악을 그만 두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는 영화 예술 채널 A&C 코오롱에서 '시처럼 노래처럼' 프로 진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소문의 진원지가 지금껏 돌봐 주었던 노래마을의 스탭으로 밝혀지자 사람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가끔 재미삼아 했던 일을 빌미로, 자신에겐 한 마디 묻지도 않고 뒤에서 엉터리 사실로 매도한 사람들이 섭섭해

1년 반 동안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다.

 

99년초,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기획사 '삽살개'를 만들어 전래동요 2개, 이원수 동요집 2개를 제작했다.

어느 날 홍대 앞 사무실에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이 찾아와 음반 프로듀서를 제안했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매도 할 때, 유일하게 믿어 주었던 가수.

'이등병의 편지'를 작곡한 김현성과 함께 김원중의 3집 음반 작업을 했다.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시-노래 동인 '나팔꽃' 결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99년 3월, 도종환, 김용택, 정호승, 안도현 시인이 합류해 '나팔꽃'은 마침내 태동했다.

6개월 후 '작게 낮게 느리게'라는 기치 아래 한양대 동문회관 대강당에서 첫 공연을 열고

2회 공연부터는  2003년까지 대학로 샘터파랑새 극장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공연을 열었다.

금년부터는 대학로 소극장 정미소에서 철마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최근 나팔꽃 동인들과 국악 반주 음반을 발표한 백창우는

빚을 지고 되찾은 LP로 발매되었던 ‘노래마을1-3집’ 마스터 작업을 완료해 CD 재발매는 물론,

11년 만에 세 번째 신보작업에 몰두해 있다.

 

오랫동안 동요 작업에만 매달려 온 그는 이제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자기 본연의 포크 음악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는 자연 속에서 시냇물과 바람 소리와 더불어 연주한 음반을 내겠다는 소박한 꿈을꾸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