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떠난다’는 말보다 설레는 게 또 있을까?
얼마나 자유로우면 ‘훌쩍’ 떠날 수 있을까.
*
*
물방개는 육식 곤충이다.
물고기나 벌레, 조개, 그 밖의 다양한 생물, 때로는 그 시체를 먹는다.
이 벌레의 특이한 점은 늪지에서 생육(生肉)이나 시체를 먹고 사는 주제에
등딱지 밑에 날개를 숨기고 있다가 때때로 공중으로 비상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낮이 아니라 밤에 날아다닌다.
비열한 벌레가 어쩌다가 공중을 나는 기술을 터득했을까.
그런데 왜 밤에만 날아다닐까.
낮 동안 늪에서 생육이나 시체를 먹고 지내는 까닭에 밤이 되면 그 혐오스런 소행에 가책을 느껴
반동으로 묘하게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꿈을 꾸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인간의 몽유 보행처럼 이 벌레에게도 몽유 비상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 어딘지 모르게 나와 닮았다.
- 후지와라 신야,《티베트 방랑》 -
*
*
이 엄청나게 많은 승려들이 그저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살만 찌는 가축 집단으로 본다면 정말이지 무섭다.
저 녹지대 높은 곳에 성처럼 지어진 사원에 들어앉아, 한창 토실토실 살 오른 간난아기처럼
아무 얽매인 데 없이 먹어대는 인간이 백 명씩 이백 명씩 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왜 이런 집단이 파탄나지않고 유지되느냐면 예로부터 티베트의 사원은 거대 지주이기 때문이다.
이 고지에서는 비옥한 땅이 한정되어 있고 자연조건도 일정하므로 곡물 생산량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자연 제약 속에서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사회제도를 만들었다.
바로 최근까지 용인되던 일처다부제도 그 좋은 예다.
농가의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입을 덜기 위해서 사원에 맡겨져 허드렛일을 하면서 승려 공부를 한다.
그런 승려들에게 종교적인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그런대로 그들이 구도자처럼 보인다.
- 후지와라 신야,《티베트 방랑》 -
*
*
술도 담배도 육식도 하지 않는 것은 계율이라 부를 만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는 육식자들이 고행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면 여자에 대해서는 어떤가?
나는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적막감도, 젊은 남자의 선열함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온전한 남성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남자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일 리도 없다.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의 큰 원인은,
자신의 전 생활과 신체를 타자에게 바치는, 즉 주인을 섬기는 처지라는 것이다.
주인이란 부처나 조사, 활불인 대승정 등이다.
법회나 독경 중에 상좌에 앉은 대승정에게 끈적끈적한 존모의 눈길을 보내며 희열에 찬 표정을 보면
그가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든다.
또 하나는 이들에게서 피학적인 성격을 느낀 적이 있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로서 한 사람의 승려를 대할 때 느끼는 것인데,
남성을 찍을 때의 감촉보다 여성을 찍을 때의 감촉에 가깝다.
또한 그들은 여성성을 형성하게끔 만드는 환경에 놓여 있다.
하루의 상당 시간을 노래를 부르며 지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노래란 독경을 의미한다.
티벳의 독경은 음악의 범주에 가깝다. 일종의 주인에 대한 연가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들의 정신의 표현임과 동시에 간접적인 성의 표현임을 분명히 느꼈다.
장대한 노래가 끝날 무렵, 그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평온한 해방감,
그리고 종장이 누그러지기 직전에 한껏 고조되는 열띤 창화(唱和)에서
성 교합 때의 흐름과 유사한 억양의 과정이 느껴졌다.
독경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한껏 고조될 때는 손에 들고 있는 요령소리도 고막을 찢을 듯하다.
좌우로 몸을 흔드는 승려들의 움직임과 일체가 되면서 어떤 다른 힘에 의해 흔들리듯
격렬하고 화려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절정에 오른 뒤, 짧은 정적이 찾아든 찰나,
나는 그 정적 멀리,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전혀 다른 요령의 음색을 들었다.
그것은 분명 승려들이 흔드는 요령의 음색이지만 거기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
*
성(性)
이빨이 아파도
性은 있다
허리가 아파도
性은 있다
산속에도 性 물속에도 性
동물도 性 인간도 性
천사도 性 악마도 性
똥에도 性 밥에도 性
하루종일 담배와 性
하루종일 자동차와 性
하루종일 만년필과 性
죽을 때까지 性 살 때까지 性
여자가 원수 아니 性이 원수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다도 性
山은 물이요 물은 山이다도 性
교회도 性 절간도 性
결혼도 性 이혼도 性
性의 노폐물인 자식도 性
효도도 性 충성도 性
데모도 性 혁명도 性
전쟁도 性 평화도 性
생식기를 잘라도
性
性을 없애 버려도
性
오르가즘
너와 나 사이의 육체의 경계선을 도저히 구분할 수 없게 됐을 때
우리의 육체는 마치 비누방울이나 솜사탕처럼 가벼워진다
그리고 중력이 있든 없든 무게가 거의 실리지 않는 상태로
허공을 부유(浮遊)하고 있는 먼지들처럼도 된다
우리 두 사람의 유체(幽體)가 육체로부터 이탈이라도 해 버린 듯
나의 넋과 너의 넋이 허공중을 떠돌고 있다
그리고 낯설어 보이는 두 개의 육체가 서로 힘겹게 압박하며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자궁에의 그리움
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그 침침한 어둠 속에 잠겨
한껏 멍멍한 고독 속에 잠겨 들고파
무성한 거웃 수풀에 가려
한껏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고향의 입구
그 입구로 힘겹게 기어 들어가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
따스한 양수(羊水) 속을 나른하게 유영(遊泳)하면서
골치 아픈 이 조국을 잊고파
더러운 생로병사도 잊고파
*
*
티벳불교는 '라마교 + 인도불교'로 알고 있습니다.
(티벳 라마교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모르는데, 외형상으론 라마교 흔적이 많이 지워졌답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힌두교 이슬람 勢에 밀려서 티벳으로 도망갈 때,
고승들이 석가모니 불교의 비경(秘經)을 가지고 가서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비전(秘傳)으로 내려갔다는,
그것이 티벳불교라는 말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사람이 죽는 순간부터 죽고난 이후, 즉 사후세계에 대한 설명인데,
너무도 놀라울 정도로 상세합니다. 마치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온 사람이 쓴 것 같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라서 신앙의 영역으로 치고 마는데, 의문이 많이 남습니다.
(제 블로그 속에 썸머리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또 티벳불교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 그중의 한 일파를 말하는 것인지, 밀교(密敎)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밀교도 유파가 또 나뉠 겁니다만,) 성교합(性交合)을 우주의 원리로 이해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보니, 티벳불교에 스며있는 그런 암시를 후지와라 신야가 느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마광수의 시에서 티벳불교를 많이 떠올리곤 하죠.
x-text/html; charset=iso-8859-1" width=76 src=https://t1.daumcdn.net/planet/fs11/4_12_20_4_5jQNC_4516422_4_414.wma?original&filename=414.wma x-x-allowscriptaccess="sameDomain" allowNetworking="internal" autostart="true" loop="-1" volume="0">
'책 · 펌글 · 자료 > 예술.여행.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트, 도쿄』 (0) | 2012.06.22 |
---|---|
『여행자의 독서』 (0) | 2012.04.06 |
터키 '소금호수' (0) | 2011.10.13 |
‘타지마할’ 기울은 게 맞았어요. (0) | 2011.10.06 |
퍼스트 클래스 (펌) (0) | 2011.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