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술라주

2011. 5. 26. 09:18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12 January 1996

 

 

 

                                               

                                                     Peinture, 20 juin 1957

 

 



Eau-forte 부식동판화 에칭 XXXV
Farbaquatintaradierung

1979

 

 

 





 

 

 

 









 

 

 

(글펌) http://sanstitre.blog.me/20021033421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 1917~)의 그림 « 회화 222 x 628 cm, 1985 4 » 을 만난 건

2005 12 21일 그르노블 미술관(Musée de Grenoble) 38번 방에서였다.

 

38번 방에 들어서면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림이 있다. 화사하고 선명하고 유연한 색을 자랑하는 샘 프란시스와 올리비에 드브레의 작품을 양 옆에 두고, 경쾌한 칼더의 모빌을 정면에 걸어 놓고 웅장함과 엄격함과 준엄함을 내뿜고 있는 작품, 군대간 애인을 보러 가는 마음으로 기차를 타게 한 술라주의 작품이 거기에 있었다

 

 

그림은 네 개의 캔버스가 나란히 놓여 한 작품을 이룬다.

언뜻 보면 각각의 캔버스는 비스듬하게 혹은 수평으로 색조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다시 삼분할 된 것 같다.

하지만 검정, 회색, 짙은 파랑으로 이루어 졌을 것 같은 이 미묘한 색조의 변화는

우리 눈의 착시 현상이 있기에 가능할 뿐이다.

술라주는 검정색 물감 한가지만 사용했던 것.

그는 검정 물감을 캔버스에 쏟아 붓듯이 바르고 올이 굵은 공업용 붓이나 쇠긁개로 긁어내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을 통해 생긴 가느다란 홈들은 멀리서 보면 흰색의 당겨진 실인 듯 보인다.

어떤 방향으로 긁었느냐 혹은 빗어냈느냐에 따라 일군의 홈들은 밝게 빛나고 다른 홈들은 어둡게 가라앉는다.

빌로드 천을 손바닥으로 훑으면 결이 일어선 곳과 결이 누워있는 곳이 구분되는 것과 같은 원리,

즉 빛의 반사 효과에 의한 것이다.

 

빛을 끊임없이 반사하면서 작품은 자신의 형태와 실재(實在) 또한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술라주의 그림은 감상자를 움직이게 만든다.

멀리서 볼 때가 다르고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니, 시선의 방향만 조금 바꾸어 줘도 빛은 그 파장을 달리하니,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겨보고 시선을 높였다 낮췄다 눈알을 굴리며 그림을 둘러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움직임은 도상 속 숨어 있는 디테일을 찾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빛이 들어오는 창과 나의 위치가 만드는 관계에 따라 그림은 또 달라질 것이다.

내가 이 미술관에 갔던 날은 날이 몹시 춥고 안개와 구름이 짙었던 날이었다.

많은 부분을 자연 채광에 의존하는 그르노블 미술관에서 이 작품이 햇빛 좋은 날엔 다르게 보이리란 건

당연한 얘기다.

술라주의 그림은 빛을 모사하지도 묘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림의 표면은 빛으로 가득하다.

검정색 물감 위에서 반사되는 빛은 관람자의 시선과 함께 매순간 재창조되는 빛이다.

 

술라주의 작품들을, 감상자의 시선의 방향, 자연광 혹은 인공 조명의 조건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그의 작품을 전시 도록으로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

도록으로 보면 그의 작품들은 검정 배경에 그어진 하얀 선들로 보인다.

카메라의 노출 정도에 따라, 그날의 빛의 조건에 따라

이 선이 더 선명하게 보일 수도, 흰색이 아닌 회색 선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의 작품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작품이 빛과 함께 드러내는 다양한 존재양상은

하나의 순간, 하나의 단위로 축소되고 포착된 하나의 실재만 남게 된다.

검정 물감이 반사하는 빛의 흐름은 사라지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단 하나의 면, 표면일 뿐인 것이다.


1979년은 술라주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연도이다. 초기 작업에서부터 이미 검정 색을 그 어떤 색보다 많이 사용해 왔던 그가 그림의 전화면을 오로지 검정 물감으로만 바르기 시작한 때가 바로 1979년부터다. 그는 이때의 검정을 우트르누와르(Outrenoir)라 부른다. ‘Outre’라는 불어 전치사는 ‘~을 넘어서, ~저쪽에라는 뜻이고, ‘noir’검정이란 뜻이다. 초검정 쯤으로 명명해 보면 어떨까? 이때의 검정은 빛이라는 환경 요소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검정, 일반적인 검정과는 구별되는 검정, 검정-noir-lumière . 검정은 빛과의 관계 속에서 조형적 힘을 발휘하고 빛과 검정은 동시성simultanéité을 획득한다. 검정색 하나만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모노크롬 회화, 단색화라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검정이 검정이 아니라 이 우트르누와르이기 때문이다. 술라주의 검정은 그림으로 하여금 빛과 어둠 속에서 줄타기를 하게 만든다. 그림의 표면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빛의 형상은 도대체 이 그림의 진실이란, 본 모습이란 뭘까 질문 하게 만든다. 술라주가 캔버스에 바른 것은 검정 물감 반죽이지만 그가 진정 그림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이었다.

  

색의 부정으로서의 검정이 아니라 색의 총합으로서의 술라주의 검정은

형상을 만들어 내거나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검정색을 줄기차게 사용해온 술라주는 그림이 하나의 이미지나

혹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그저 나무틀, 캔버스, 물감, 형태, 색 등의 물질로 이루어진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이 단순히 이 물질성으로만 축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말한다.

« 한 작품의 실재란, 사물로서의 작품 그 자체, 그것을 창조한 사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이 셋이 만드는

 삼중의 관계이다. »라고..

 

술라주는 작품의 제목으로 작품의 크기와 제작시기만 사용한다.

작품이 외부의 다른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음을,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에게 회화는 이미지, 형상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 나는 묘사하지 않는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재현하지 않는다.

나는 그린다. 나는 존재한다. » 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는 감상자에게 그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감상자가 검정색으로 뒤덮인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무엇을 느끼든, 그 검정을 무엇이라고 해석하든

그건 오로지 감상자의 몫일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릴 때 느끼던 화가의 감정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 그래서 그는 자기 작품을 액션 페인팅으로 분류하길 거부한다 -

그 그림을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하는 감상자이다.

감상자의 반응은 작가가 작업을 할 때는 예견할 수 없는 것이며 강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상자가 세상과 맺고 있는 문화적 관계, 그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따라 반응과 해석은 각기 다를 것이며

검정 물감 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처럼 정의하기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림 그 자체 이외에는 말해져야 할 것도 보아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작품이 있고 내가 있다.

그 사이에 공간이 있고 공간은 빛으로 충만하다.

빛은 검정으로 부정되고 동시에 검정 위에서 눈이 부신다.

 

술라주는 평생에 걸쳐 검정색과 작업했다.

그의 고집과 노력이 만들어 낸 검정의 빛, 이 모순의 빛, 그것이 바로 아우라가 아닐까?

 

  

 

순수한 무에 관한 시를 지으리

나에 관한 것도 아닌, 다른 사람에 관한 것도 아닌

사랑에 관한 것도 아닌, 젊음에 관한 것도 아닌

그 무엇에 관한 것도 아닌

말 위에서 잠을 자며 시를 지었다네

나의 시는 지어졌고, 나는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른다네

나는 이 시를 전해주리

그것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 줄 사람에게

저기 앙주 근처에서

그가 자기 상자에서 짝패열쇠를 꺼내 나에게 건네줄 수 있도록

 

(12세기 아키텐의 공작 기욤9세 作,

술라주가 자기 작품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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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 위에 설명글을 읽다보니 퍼뜩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아니, 이 양반 혹시 동양적 우주관에 대해서 뭔가 줘 들은 게 있는 거 아닌가?""이 양반이 추구하는 바가  '무(無)'나 '공(空)'이 아닌가?  "그걸 '검정'으로 함축해서!"-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1) 천자문의 시작이 이렇습니다.'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르황, 집우 집주, 넓을홍 거칠황'하늘을 검다 했어요.  단순히 공중을 가르키는 의미 만이 아니란 거죠.

 

 2) 그리고 중국인들의「반고신화」란 것이 있는데, 그 역시 이렇게 시작합니다.  

 

盤古渾淪 氣萌大朴 / 分陰分陽 爲淸爲濁 生老病死 / 誰實主之 無其始也 /  

 

"반고적 혼돈 상태에서 기가 싹터 크게 밑바탕이 되었다.이것이 음양으로 나뉘어 맑고 탁한 것이 이루어졌으며, 생노병사가 이루어졌다누가 이를 실제로 주관했으며 그 시작이 없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지 않았던 시절, 우주의 모습은 어둑한 한덩어리의 혼돈으로 마치 큰 달걀과 같은 것이었다. 중국의 시조 반고(盤古)가 바로 이 큰 달걀 속에서 잉태되었다. 그는 큰 달걀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곤하게 잠자며 1만8천 년을 지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흐릿한 어둠뿐이었다.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던 반고는 어디선가 큰 도끼를 하나 갖고 와서 어두운 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산이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큰 달걀이 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가볍고 맑은 기운은 점점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무겁고 탁한 기운은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 맑은 기운과 탁한 기운이 뒤섞여 있어 갈라지지 않았던 하늘과 땅이 도끼질 한번에 갈라지게 된 것이다.

 

 

 

피에르 술라주가 이런 동양적 우주관이나 존재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닐까요?어디서 줘 들은 노장사상에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불교일 수도 있고,감은 잡았으되 합리적 서양인으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었을 거거든요.

 

하여 피에르 술라즈의 이 말은 ─

 

‘Outrenoir’ : 검정을 넘어서

나는 묘사하지 않는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재현하지 않는다. 나는 그린다. 나는 존재한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러니까 피에르 술라주가 그 의미나 경지를 깨달았든지 못 깨달았든지 간에,

'색즉시공'을 화두로 잡고 탐구한 것이 아닐까.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