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 던컨 & 최승희 & 공옥진

2010. 10. 4. 16:29책 · 펌글 · 자료/ 인물

 

 



 

      이사도라 던컨 1878. 5. 26.~1927 9 14

 

 

 

사도라 던컨은 전통 무용을 배웠으나

차차 예술은 물론이고 개인 생활에서조차 전통과 관습을 거부하는 파격을 보인 인물입니다.

관습을 배격하는, 자유분방한 연애와 동거, 개인 생활, 그녀의 춤 모두는 당시 보수적이고 편협한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녀의 춤은 고대 그리스 무용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맨발로 무대에 선 것으로 유명합니다.
재봉틀 거부 파리스 싱어,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에센닌과의 사랑, 두 아이들의 비극적 죽음 등
그녀의 인생은 성공과 비극적 최후라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았습니다.
이사도라 던컨은 자신의 규칙에 따라 삶을 살았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로운 사고,

현대 무용에 기여한 업적으로 인해 지금도 열렬한 팬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사도라 던컨은 불행하게,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타고 가던 자동차의 뒷바퀴에 스카프가 끼어 사망했습니다.
 

(옮긴글)

   

 

 

 

.

  

 

 

 

아래 사진은 이사도라 던컨이 연습하고 공연하던 극장입니다.

이번에 페테르부르그 갔을 때 찍어온 것입니다.

제 북유럽 여행기 <러시아 페테르부르그> 편에 들어 있답니다.

 

 

 

 

   

 

이사도라는 그동안 주로 좁은 장소에서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해 춤을 추었다.

그런데 부다페스트의 공연기획자인 알렉산더 그로스로 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오페라 극장에서 정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많은 관중들을 위해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일반 대중이 자신의 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려했던 이사도라의 생각은 분명히 기우였다.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 모였던 일반 관객들은 이사도라의 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앙코르 무대에서 그녀가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에 맞춰 왈츠를 추자

광란 상태의 관객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으로 극장 지붕이 터져나갈 듯했다.

이사도라는 그 환호가 가라앉을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맨발로 왈츠를 추어야만 했다. 

   

뮌헨에서 성공을 거둔 이사도라는 최종적인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낙천적인 성격의 이사도라도 이번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를린의 상징인 크롤 오페라하우스는 수백명의 배우가 동시에 설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음악 연주를 위해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전체가 동원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사도라 단 한 사람만 등장해 여러 시간 독무(獨舞)를 해야 했다.

 

이사도라의 베를린 공연은 성공 정도가 아니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소동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녀는 관객들의 환호에 따라 여러 번 앙코르 곡을 추워야 했으며,

마지막에는 젊은 학생들이 무대로 뛰어올라 기진맥진한 그녀를 떠메고 극장을 나섰다.

그들은 이사도라의 마차에서 말을 모두 풀었고, 말 대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마차를 끌어서 그녀를 호텔로 모셨다.

이날 밤을 계기로 이사도라는 독일 젊은이들에게 거의 여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인들은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아예 무관심했다.

이사도라는 이 사실에 격분했다.

당시에 프랑스가 정의의 편이고 독일이 악당이라고 생각했던 이사도라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하던 중 막바지에 어깨에 붉은 숄을 두르고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 일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지는 않았다. 

미국은 이사도라가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찾은 땅이었다.

그렇지만 천박한 미국 문화는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가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동안 비평가들은 날을 세워 그녀를 난도질했다.

미국을 떠나며 그녀는 절규했다.

"미국이여, 안녕. 내 다시는 너를 보지않을 것이다."

 

  

 

 

인고의 세월이었던 러시아 시절의 어느날,

이사도라와 세르게이가 예술에 대한 논쟁을 하던 중에 세르게이가 말했다.

"詩는 기록으로 남는 것이고 오래 기억되기 때문에 영원히 살지만

무용은 공연하는 순간 끝나는 것이고 그 감동은 언젠가는 잊히기 때문에 결국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사도라는 즉시 서툰 러시아어로 응수했다고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대로 죽지 않아."

 

 

 

 

- 《불멸의 여인들》에서 발췌함 -

 

 

 

 

  

 

 


 

 

 

 

 

 

 

 

최승희(崔承喜) 서울1911~1969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2번이나 월반하여 1925년 숙명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숙명여고에 다닐 때 졸업 후 도쿄[東京] 음악학교에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연령 미달로 좌절되고

사범대학도 같은 이유로 불합격되었다.

그러던 중 큰오빠 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 <수인囚人〉을 보고 감명받아 무용에 입문하기로 하고

이시이 바쿠와 함께 도쿄로 떠났다.

1927년 가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공연할 때 한병용과 함께 출연했고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귀국하여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 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공연을 했고 1931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인 안막(安漠:본명은 안필승)과 결혼했다.

결혼 후 경성에서는 창작 여건이 어려워 1933년 이시이에게 되돌아갔다.

 

일본에서 이시이의 공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1934년 9월 일본 청년회관에서 그녀의 첫 무용발표회가 열렸는데

이때 발표한〈거친 들판에 가다〉·〈칼춤〉·〈승무〉 등은 조선의 정취를 담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최승희는 순회공연을 하고 학용품·화장품 광고에도 출연했다.

또 신흥영화사에서 만든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舞姬)〉에서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누렸다.

최승희는 이런 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937년 12월 미국을 거쳐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네덜란드 등을 순회공연했다.

해외공연 후 많은 평론가들은 동양의 무희라고 극찬했고,

벨기에에서는 제2회 국제무용 콩쿠르 대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가부키 극장에서 공연했는데 내용은 대개 조선무용이었고 반주는 조선에서 데리고 간 악사들이 맡았다.

그러던 중 일본총독부의 요구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떠났다.

1942년 16일간 24회의 연속 독무 공연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세계 무용계 최초의 장기 독무로 평가된다.

해방 후 일본군 위문 공연이 친일경력으로 평가되어 활동이 여의치 않은 데다 안막이 먼저 월북하자

그녀도 1947년 4월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 무용계를 선도하여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1948년 김구 환영 공연과 무용극〈해방의 노래〉·〈춘향전〉 등을 발표했다.

1950년 소련 순회공연을 했고 중국무용을 연구하여〈조선의 어머니〉·〈거친 파도를 헤쳐〉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고 무용극〈맑은 하늘 아래서〉를 발표했으며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그녀가 만든 최승희무용연구소는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고,

그녀의 무용도 주체예술사상에 맞지 않는다 하여 무용계에서 제외되었다.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을 펴냈고 1966년 〈문학신문〉에〈조선무용 동작과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을 발표했다. 1967년 그녀도 숙청당했고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으며,

그녀의 딸 안선희가 볼쇼이 발레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003년 2월 북한은 최승희가 문인 한설야, 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이때 최승희의 묘비에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였던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민족주의적·국제주의적 성향이 섞여 있다.

그녀는 장기공연과 지속된 순회공연을 통해 대중의 인기를 모음으로써, 당시 춤 작품의 유통구조에 신기원을 열었다.

최승희는 음악과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과 함께 무대 위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강렬한 눈빛과 몸동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 출처.브리태니커.)

 

 

 

   

 

 

 

 

       공옥진 (孔玉振) 1931년 8월 14일~ , 전남 영광

 

 

 

남도판소리의 대가인 대일(大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창을 익혔다.

그후 일본에서 최승희 문하에 있으면서 천대받는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한동안 영광(靈光)의 다리 밑에 살며 문전걸식했다.

결혼에 실패하고는 불갑사(佛甲寺)에서 2년 2개월 동안 수진(秀眞)이란 법명으로 수도생활을 했다.

1947년 국극협회·임방울창극단, 1951년 김연수 우리악극단에 참가했다.

1961년까지 김월산 여성국악단·박녹주국극협회·조선창극단 등 많은 국악단체에서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그후 10여 년간 영광에서 농사지으며 지냈다.

1973년 남도문화제 등장을 계기로 '1인창무극'을 창안하고,

1978년 공간사랑 등 명무전(名舞展) 공연에서 아쟁·대금·장구를 잡아놓고 판소리창과 독특한 표정의 병신춤이 곁들여지는

1인창무극을 선보였다.

그중〈심청가〉과〈수궁가〉에서 특징을 보여 일반대중 및 대학가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곱사춤 · 문둥이춤 · 앉은뱅이춤 · 외발춤 · 덩치춤 · 동서남북춤 · 오리발춤 등 기존 57가지에 이르는 종목을 비롯해

허튼춤 · 턱붙은곱사춤 · 엉덩이빠진곱사춤 · 절름발이곱사춤 · 오리발병신춤 등 수많은 병신춤을 만들어냈다.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문순태의 소설 〈병신춤을 춥시다〉(1982)로 그녀의 일대기가 소설화되기도 했다.

 

익살과 청승맞음, 숨김없는 꾸밈새 속에서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몸짓은 걸인생활 속에서 터득한 민중적 세계관과

특유의 흉내 솜씨가 빚어낸 것이다.

그녀는 눈물과 웃음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몸으로 깨친 민중예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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