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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 국내여행

덕산 (남연군묘/스파캐슬)

 

 

 

 

날도 많이 서둘렀습니다만,

누님이 원래 약속시간을 개떡같이 아는 사람이라서 40분씩이나 집 앞에서 묵쌔기치다보니

부모님께 들려서 아침을 먹고 출발할 때는 거의 8시가 다 되었습니다. 

약속할 때마다 상습적인데 환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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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버지께 말씀을 드린 건 나흘 전이었습니다.

수화기 저쪽의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로 좋아하시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사실은 원래, 이번 주말에는 정선 <하늘재>라는 곳엘 가려고 했었지요.

<하늘재>가 아니라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10월에서 11월 초까지는 산행할 곳이 너무도 많습니다.

좋은 철엔 혼자 실컷 놀아놓고, 을씨년스러우니까 그제서야 부모님을 모시고 나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양심에 찔려서 안되겠습디다. 그래서 일을 꾸민 거죠.

어머니가 보행이 힘겨우셔서 휠체어를 싣고 가야 합니다.  

요즘 대전-당진 간 고속도로 뚫렸잖습니까?

예산 수덕사 I.C로 해서 가니까 덕산까지 잠깐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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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들린 곳이 이곳  남연군 입니다.

이 <남연군묘>는 풍수하는 분들에게는 필수 답사 코스입니다. 풍수지리로 유명한 묘터랍니다.

대원군이 이 자리로 이장해 오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쓴 풍수 소설도 있지요.

저는 전에 친구의 안내로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좋아하실 듯하여 첫번째 행선지로 정했습니다.

웬 횡재냐는, 생각지도 못했다며 좋아하시더군요.

 

   

 

 

 

 

 

 

 

 

터가 제법 넓고 그런대로 관리가 잘 되고 있습니다.

  

 

 

 

 

 

 

  

 

  
 

남연군묘[南延君墓]

 

명당 중의 명당,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알려져 있는 남연군묘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자락에 터 잡고 있다.

면소재지에서 45번 국도를 15번지방도로 갈아타고 가야산을 정면으로 보면서 그대로 계속 직진하면 옥계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를 지나 상가리 가는 길에 들어서서 고개를 약간 치켜들면 석문봉(653m)을 중심으로

左로는 가야봉(677.6m)이 右로는 옥양봉(621.4m)이 병풍을 두른 듯 그 웅장한 자태를 확연히 나타낸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내리면 옥양봉에서 뻗은 긴 산자락 끝과 그 안쪽으로 가야봉에서 뻗은 산자락 끝이 중첩되어 막고 있어

마치 더 이상은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남연군묘가 위치한 가야산도립공원의 입구로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공원의 널찍한 주차장 옆 구릉에 오르면 남연군묘가 있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이구(李球 -1822)로 인조(16대)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그런데 그가 영조(21대)의 계보가 된 것은 그가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에게 후사(後嗣)가 없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계보는 영조에서 정조, 정조에서 순조, 순조에서 헌종으로 이어지다가 제24대왕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된다.

세도정치의 절정을 이루었던 안동김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 은언군(영조의 손자, 정조의 아우)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셋째아들인 강화도령 원범을 제25대왕(철종)으로 보위에 오르게 한다.

그러나 철종마저도 후사 없이 죽게 되자 남연군의 손자이며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이 제26대 고종으로 보위에 오른다.

흥선군이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실권을 잡기까지의 행적은 야화 등에 의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비록 영조의 증손자인 셈이고, 자신은 현손인 셈이지만

당시의 안동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그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남연군의 후손이 보위를 잇는 남연군묘가 이장되면서 폐사된 가야사는

상가리에 다시 세워졌다.

흥선군은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고, 안동김씨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는 풍수공부를 하며 전국의 명산이란 명산은 빠뜨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실권을 잡기 위해서는 명당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년을 찾아다녔으나 마음에 드는 명당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二代)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고 물었다.

흥선군은 망설이지 않고 가야산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다.

그런데 흥선군이 지관을 따라 그 자리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더구나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절의 탑 자리에 묘를 이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의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려 옮겼다.

이때가 1844년이다.

상여는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왕손을 운구하는 일이었으므로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이 동원되어 메었고,

가장 마지막에 맨 '남은들'마을에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도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있다.

다음 일은 가야사를 폐사(廢寺)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전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절반을 가야사 중들에게 주고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기도 하고,

당시의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명품 단계벼루를 뇌물로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흥선군의 계략에 의해서 가야사는 폐사(廢寺)되고 탑의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다음해인 1845년에 이곳으로 남연군묘를

이장하였다.

이때 정만인은 후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석회 3백 부대를 써서 관곽(棺槨)을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남연군묘 이장 후 흥선군은 둘째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명복으로 바로 고종황제가 된다.

남연군묘를 이장하고 18년 후다.

명복이 등극하여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군은 가야사를 없앤 죄의식에 가야사와 탑의 은덕에 보덕한다는 의미에서

가얏골 상거리에 보덕사(報德寺)를 새로 지어 주었다.

그 후 고종황제의 뒤를 이어 순종이 등극하였으니 남연군묘는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대천자지지가 정확히 맞는 셈이다.


남연군묘는 이대천자지지라는 ‘명당설’로도 유명하지만,

이 묘의 명당설 때문에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하여 우리나라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더욱 유명하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조선과의 통상교섭을 요구했던 서구 열강들이 실권자인 대원군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자,

그의 강력한 권한이 아버지 남연군묘가 명당이기 때문이라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말에, 남연군묘를 파헤쳐 그의 기세를 꺾고,

또한 남연군의 유골을 확보하여 통상개방에 협상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1868년 4월 21일 밤 오페르트가 주동이 되어 저지른 사건이다.

그러나 무덤은 단단한 석회석으로 다져 놓아 쉽게 파지 못했고, 조수(潮水) 때문에 철수함으로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은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며 더욱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또한 천주교인들이 개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천주교박해를 강화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한 계기가 된다.


남연군묘의 주산(主山)은 가야산 석문봉(653m)이다.

석문봉의 좌우에는 옥양봉(621.4m)과 가야봉(677.6m)이 연이어 시립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풍수에서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이 호위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천을, 태을이라 함은 북극성 주변의 별로서 천황대제를 뜻하는 천황대제성(天皇大帝星)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별을 말한다.

석문봉을 중심으로 천을, 태을로 3개의 봉우리가 균형 잡힌 형태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큰 봉황의 머리와 양쪽 날개를 연상시키게 하여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서쪽 봉우리인 가야봉 너머로 석양이 질 때 더욱 그러한 분위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남연군묘의 주룡은 석문봉의 중심에서 좌선(左旋)으로 출맥(出脈)하여 수많은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면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억센 기(氣)를 정제하고 순화하며 내려와 크게 과협(過峽)한 후 혈장(穴場)을 만들었다.

석문봉에서 뻗은 여러 산줄기 중 가장 튼튼하고 힘찬 모습이다.

그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진짜 용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풍수지리에서 혈의 크기는 주룡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곳의 힘찬 용맥을 보고는 과연 천자지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남연군묘의 혈장(穴場)은 힘차게 내려온 주룡이 해(亥)방에다 머리를 묻고 입수도두(入首倒頭)를 만들었다.

입수도두는 생기를 정축(停蓄)해 놓았다가 혈에 공급해 주는 곳으로 둥그렇게 뭉쳐진 모습이 단단하고 유연하면서 양명해 보인다.

입수도두에서 양옆으로 지각을 뻗어 혈을 좌우에서 보호해주는 선익(蟬翼)은 그동안 사초 등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지만 제법 뚜렷하다.

 

 앞에서는 혈장을 지탱하면서 혈의 생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툼한 전순(氈脣)을 만들었다.

완벽하게 혈장의 요건을 갖춘 다음 그 한가운데에 혈을 결지하였다.

특히 전순(氈脣)에는 흙만으로는 기세 강한 입수룡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납작한 반석과 같은 요석(耀石)들이 수도 없이 박혀있다.

전순에 요석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용혈(龍穴)의 기세가 크다고 하여 대혈(大穴)의 증거가 된다.

또한 요석 하나에 정승 판서가 하나씩 난다고도 하고, 그 모습이 임금의 옥쇄와 흡사하면 어보사라 하는데

이것이 있으면 제왕이 나온다고 할 만큼 매우 귀한 돌로 여긴다.

이곳의 요석 중에는 두 개의 큼지막한 것이 있는데 이를 옥쇄에 비유하여 어보사라 하고 두 개이기 때문에 2대천자지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풍수에서는 혈을 품고 있는 일정범위를 혈장(穴場)이라고 하는데

와형(窩形), 겸형(鉗形), 유형(乳形), 돌형(突形)의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와형은 삼태기나 소쿠리, 닭둥우리처럼 생긴 형태이고, 겸형은 와형과 유사하나 양다리를 크게 벌린 형태이고,

유형은 뚜렷한 용맥 위에 여자의 유방처럼 불룩 솟은 형태이고,

돌형은 유형과 유사하나 혈장 뒤에서 반드시 움푹 꺼졌다가 돌기(突起)가 되거나, 거북이 등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처럼 볼록한 형태로 산정(山頂)이어야 한다.

남연군묘의 혈장은 돌형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석문봉에서 내려온 주룡이 최종적으로 한번 움푹 꺼진 뒤 돌기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혈은 음양(陰陽)의 개념으로 볼 때 혈장이 음(陰)이면 양(陽)에 있고, 혈장이 양이면 음에 있다고 한다.

이는 우주만물의 이치가 양중유음(陽中有陰)하고, 음중유양(陰中有陽)이라는 음양상생(陰陽相生)의 원리를 풍수에 적용한 것이다. 남연군묘는 혈장이 돌형이므로 음에 속한다. 그래서 혈은 양에서 찾아야 한다.

이곳은 혈장에 오르기 전에는 봉분이 보이지 않아

혈은 우묵한 곳 즉 음래양수(陰來陽受)와 음중유양(陰中有陽)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연군묘의 단정하게 다듬어져있는 봉분 주위에는 상석과 비석, 한 쌍의 석양(石羊)과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

그리고 하나의 장명등(長明燈)을 석물로 설치하였다.

모든 석물의 조각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지만 장명등이 특히 눈길을 끈다.

풍수에서는 혈 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조안(朝案)또는 안대(案對)라고 하는데,

남연군묘의 조안은 마치 만조백관(萬朝百官)이 조아리는 듯한 형상(形象)이다.

아주 먼 곳까지 시야가 틔어 있으면서도 허전하지 않게 잘 짜여 있다.

남연군묘의 청룡과 백호를 이루는 산줄기를 살펴보면,

청룡줄기는 옥양봉에서 길게 뻗어 목성(木星)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수구(水口)를 막아준다.

백호줄기는 가야봉에서 뻗어 금성과 목성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청룡끝자락의 안쪽으로 그 끝자락을 오므려 역시 수구를 막아준다.

청룡은 길고 백호는 짧은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수구를 관쇄(關鎖)해주고 있고,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물을 역수(逆水)시키니 길격 형상이다.

또한 청룡, 백호의 여러 줄기가 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듯이 산자락을 맞대고 있어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가히 천자지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완벽한 터가 없듯이 흠결도 보인다. 청룡 쪽이 혈과 많은 거리를 두고 감싸니 그 사이가 계곡이 되어 풍살(風煞)이 염려되고,

또한 청룡줄기 하나는 몽둥이를 들고 묘를 향해 공격하는 듯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를 두고 풍수가들은 고종과 순종이 외세의 치열한 압력 속에 숱한 시련을 받다가 망국의 서러움을 당하였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백호 쪽은 청룡보다 높고 크며 각각의 모습이 뛰어나 청룡을 압도하고 있다.

특히 백호줄기에서 기봉한 원효봉은 만만치 않은 위용을 자랑하며 혈을 능압하는 듯하다.

이를 두고 차손과 내당의 주장이 강한 곳이라 고종이나 순종 모두 장남이 아닌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고

명성왕후 민비의 득세가 대단했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남연군묘에서 동북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청룡자락에는 문화재자료 제182호로 지정된 미륵불이

남연군묘를 등지고 골짜기를 향해 서있다.

그런데 이 미륵불이 돌아 서있는 이유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북쪽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한 일종의 풍살(風殺) 비보(裨補)로 세워진 것이라는 설이 있고,

원래 가야사(伽倻寺)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묘를 쓰자 등을 돌렸다는 설이 있다.

세워진 연대에 대해서도 설왕설래하고 있는데 기법으로 봐서는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남연군묘 이장당시에 세웠다는 마을사람들의 증언이 있긴 하지만 규명하기는 어렵다.

실제 조각된 장식을 보면 미륵불이라기 보다는 관세음보살로 봐야한다는 설도 있다.

풍수에서는 혈을 감싸고 빠져나가는 물길 또한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무조건 혈을 감싸고 빠져나간다고 다 좋은 물길은 아니다.

여기서도 음래양수(陰來陽受) 즉 우선룡(右旋龍)이면 좌선수(左旋水)가 받고, 양래음수 즉 좌선룡이면 우선수가 받아야

음양화합이 되어 좋은 물길로 본다.

남연군묘의 물길은 우측 백호에서 득수(得水)하여 우수도좌(右水倒左)로 혈을 감싸주면서 좌측 을진(乙辰)으로 파구(破口)된다.

이곳 주룡이 좌선룡이므로 우선수가 감싸니 양래음수로 음양화합이 되어 좋은 물길이다.

남연군묘의 좌향(坐向)은 亥입수룡에 따라 해좌사향(亥坐巳向)을 하였다.

좌향이란 등을 대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혈의 뒤쪽 방위를 좌, 혈의 정면을 향이라 한다.

결국 좌와 향은 180도로 대칭 되는 방향이 된다.

풍수의 좌향법은 일차적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에 의하여 좋은 혈처를 결정했더라도 그 좌향을 파구의 방위와 양기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 법에 따라 적법하게 적용했을 때만이 생물체가 가장 좋은 생기를 취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용혈사수에 향을 추가하여 지리오결(地理五訣)이라고도 한다.

좌향법에는 용을 보고 정하는 법, 물을 보고 정하는 법 등 여러 이론이 있어 적용하는 법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법이 가장 맞는 좌향법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여러 좌향법을 비교하여 그 지형에 가장 적합한 것을 적용할 일이다.

이곳의 해좌사향도 어느 좌향법을 적용했는지는 모르나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亥입수룡에 巳향이니

입수룡과 향이 모두 같은 정음(淨陰)이 되어 합법하고, 팔십팔향법으로는 부귀왕정(富貴旺丁)한다는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합법하다. 

G700:RA101+R100-cp04223dfa01   

 

 

 

 

 

 

 

 

 

  

'堂狗三年 吟風月'한다고, 울 어머니도 아버지랑 사시면서 많이 유식해지셨습니다.

저렇게 어려운 한자도 막 읽습니다.^^

 

  

 

 

 

 

 

 

 

 

 

  

 

올라가는 길을 나무계단으로 갈 지(之)자로 오르기 좋게 해놨습니다.

온천엘 가자면 어머니 모시고 다닐 여자 한 명이 있어야할 게 아닙니까?

軍에 있는 아들놈이 외박을 나온 바람에 누님을 보조로 데리고 왔습니다.

사실 어머니로서는 불편한 며느리보다야 딸이 백번 낫지요.

노인들 저렇게 손잡고 다니는 거 쉬운일이 아닙니다.

체중을 실어서 옴팡지게 붙잡고 의지하기 때문에 힘듭니다.

 

  

 

 

 

 

 

 

 

 

'풍수'에 관심있는 분들 모임에서 답사여행을 나오셨나 봅니다.

서로들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제 수준이나 거기서 거깁디다.^^

여긴 바닥이 순전히 바위 투성입니다. 이런 속에 흙구덩이가 있다니,

그것도 간신히 묘자리 하나 정도 밖에 안되는데,

이런 자리를 발견하다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정만인(鄭萬仁)이란 사람이 정말로 알려진 바처럼 대단한 풍수(風水)였었던 모양입니다.

 

 

 

 

 

 

 

 

 

 

 

 

울 아버지도 반풍수는 되십니다.

아버지 사시는 동네서 초상이 나면 아버지한테 옵니다.

인제 양구에서도 부릅니다.

 

 

 

 

 

 

'육관 손석우'라고 아시지요?

수염을 산신령처럼 길러가지고 무지하게 폼재며 으시대던 지관이 있었잖습니까?

고관대작이니 재벌이니하면서 방귀깨나 뀌는 놈들의 모든 묘자리를 다 자기가 잡아줬다면서,

돈을 천문학적으로 벌었다는 그 손석우.

그 양반 묘가 요 위에 있습니다.

여기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물 막아놓은 저수지 바로 옆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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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손석우 묘(墓) 입니다.

 

 

 

 

 

 

 

 

 

 

  

 

이게 진짜 육관 손석우의 묘(墓)일까요?

앞에 나무가 가려져 있어서 전경을 볼 수도 없고, 그래서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만,

어느 모로 봐도 명당은 택도 없는 자리인데,

아니, 그보다도 보다시피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질 못합니다.

그렇게 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데 자손들이 묘를 이렇게 뒀을까요?

아버지도 그러십디다. 가묘(假墓)같다구요.

미스테리 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그대로 차에 앉아 계실줄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올라오셨더라고요.

어머니도 반의반 풍수 되셨습니다 그려.^^*

어머니가 오는 길에 멀미를 심하게 하셔서 목욕이나 하실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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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온천 입니다.

 

여기가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다는  덕산 '스파캐슬' 입니다.

전에는 '스파피아'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저는 이번이 두번쨉니다. 친구랑 사우나만 하고 간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냥 입장료를 내려면 48,000원이나 받습니다.

카드할인보다도 '지역 주민 할인' 젤 크더군요. 40%. 

대전-충남 사람이면 됩니다. 물론 주민등록증을 확인하지요.

 

  

 

 

  

 

 

 

  

 

 

  

 울 아버지 이거 한번 타시고는 혼비백산했습니다. ㅋㅋㅋ

 

 

 

 

 

 

 

 

처음 가보는 사람은 궁금하니까 다 돌면서 하루 종일 놀아도 되겠습니다만

그냥 목욕탕만 이용해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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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좋으셨을 겁니다. 물 속에선 혼자 걸으시지요.

아버지랑 나랑 놀고, 어머니랑 누님이랑 놀았습니다.

저는 평소에 밥때를 걸러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런데 이 날만큼은 엄청 배가 고풉디다.

예산에 수복식당인가 한우고기로 유명한 집이 있어서 거기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는데

시간이 안되겠기에 그냥 이 안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게 된다면 하룻밤 자면서 여유있게 즐겨야겠더군요.

이제 <추사고택>으로 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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