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12. 10:10ㆍ음악/음악 이야기
득음의 4가지 관문
명창이란 판소리나 민요 등 우리 소리를 빼어나게 잘하는 사람에게 붙여주는 우리 국악계만의 호칭이다.
명창이 되려면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며, 이를 위해선 ‘목구멍에서 피를 세 번 토할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실 좋은 노래 솜씨란, 아름답고 탁월한 목소리에다 음정과 박자, 기교가 어우러지면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피를 세 번 토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판소리는 2003년 유네스코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일종의 솔로 오페라이다.
판소리는 노래와 대사가 쉼없이 반복되며 완창을 하는 데 무려 3~4시간이나 걸린다.
따라서 엄청난 에너지와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명창들의 소리 훈련과정인 득음의 조건에는 다음 4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째, 영화 <서편제>에도 나오는 것처럼 계곡 폭포 아래서 소리를 내는 훈련을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모든 소리성분을 포함하고 있는 폭포 소리를 뚫고 뻗어 나가야 1단계 관문을 통과한다.
우렁찬 폭포수의 백색소음을 뚫고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려면 얼마나 크고 또렷해야 할까.
이 과정을 통과하면 엄청난 음량을 일단 갖출 수 있게 된다.
둘째 단계는 동굴에서의 훈련이다. 동굴 안에서는 모든 소리가 울린다. 동굴의 흙이나 바위벽 등이 고르지 못한 탓에 소리의 난반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목욕탕에서의 울림과 유사하다.
메아리 효과 때문에 음량은 목소리보다 크게 들리지만 소리가 뒤섞여 윙윙거리므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따라서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동굴의 울림을 극복하고 목구멍에서 공명을 잘 일으켜 섬세하고 명료한 소리를 뽑아낼 수 있을 때,
명창의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셈이 된다.
셋째, 갖가지 소음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야 한다.
<서편제>를 보면, 왁자지껄한 시골장터에서 소리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처음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 가닥 선율이 시장의 온갖 소음을 뚫고 뻗어 나온다.
장사치들의 호객소리, 다툼, 동물 울음, 자동차 소리 등 다양한 소리가 뒤섞인 소음을 유색잡음이라 하는데,
명창이 되려면 이 모든 소리를 극복하고 독창적인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관문은 해변이나 들판 같은 광활한 곳에서의 훈련이다.
벌판이나 평지에서는 소리가 초라해진다. 소리가 부딪혀 되돌아오는 반향이 없기 때문이다.
파도소리가 끊이지 않는 해변이 특히 그렇다. 벌판에 바람이라도 불어대면 소리가 흩어지게 된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낼 수 있을 때, 명창의 가장 어려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명창이 되기 위한 득음의 4단계. 옛 소리꾼들은 무심코 이런 과정을 밟았는지 모르겠지만,
소리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런 훈련과정은 무척 치밀하고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명창을 일궈낸 선조들의 남다른 소리 철학에 감탄하곤 한다.
<배명진 숭실대 교수 소리공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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