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거는 먼저 아우슈비츠 다녀와서 쓴 글 중에서 추린 것인데...
여기서는 가이드의 설명을 이어폰으로만 듣게 되어있다.
혼잡을 덜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는데, 아주 잘된 방식이다.
그리고 아래사진의 앞에서 걸어가는 두 사람 중에 왼쪽의 퉁퉁한 여자가 폴란드인 가이드인 셈인데
의무적으로 동행해야 하는 일종의 감시역이다.
저 입구에 씌여있는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꽤 유명한 글귀인데,
단순한 속임수만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으로 증오와 경멸의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안다.
유럽 사람들의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역사가 아주 깊은 것인데 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자세한 내막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 공통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 느낀, 뭔가 누적된 정서가 있는 모양이다.
아우슈비츠가 독일에 있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독일이 폴란드 점령했을때 지명을 전부 독일어로 바꿔놔서 그렇다.
폴란드 남부에 '크라카우'라는 폴란드 제2의 도시가 있는데
<아우슈비츠>는 거기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원래는 폴란드 지식층들을 정치범으로 몰아서 수용하는 시설이었다고 한다. (1940. 6.)
유대인 등의 수용시설로 사용한 것은 불과 3년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그 3년 동안에 수백만명을 죽였다는 얘기가 된다.
왜 하필 여기를 살인공장으로 선정했을까?
위 사진에서 보듯이 온갖 곳에서 유대인 등을 잡아오기에 거리상으로도 적당했고 교통이 좋았다.
또 하나는 독일 점령지역 중에서 유대인이 폴란드에 가장 많이 거주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과거 14C 흑사병때 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흑사병으로 3년 동안에 유럽의 1억 인구 중에서 3천만명인가가 죽었단다.
당시의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데
폴란드왕국이 종교나 주거에 대해서 관용정책을 썼던 탓으로 폴란드로 이주한 유대인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시설이 부족하다보니 제2, 제3, 해서 모두 3개를 지었다더라.
내가 방문한 곳은 지금 손으로 가르키고 있는 제1 수용소다.
그리고 수용소나 살인공장이 여기 <아우슈비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 전지역에 40갠가 50갠가가 있었다는데
대부분은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증거를 인멸해버렸고
지금 이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수용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 <아우슈비츠>에서의 희생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찌가 모든 증거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생존자의 증언이라거나 시설 등을 감안해서 방증으로 유추해 볼 뿐인데
대략 250만명쯤 되는 것으로 본다고 하더라.
유대인이 600만명 죽었다는 얘기는 이스라엘 그들의 주장이고
대체로 400만명 정도 될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 400만명이란 것도 모두 여기에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2차대전 동안에 이렇게 저렇게 희생된 모든 사람을 포함한 숫자다.
이곳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유대인은 군인으로 참전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전쟁을 피해 도망다녔다는데,
그래서 잡아다가 집단수용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2차대전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가 유대인인 줄로 아는 사람이 많다.
사실이 아니다.
최대 피해자는 러시아이고, 두번째는 폴란드, 유대인은 그 다음의 세번째에 해당한다.
우리가 잘못 알게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교묘한 술책도 있겠지만 지난날의 냉전시대 때문이다.
굳이 적성국인 소련이나 폴란드의 피해를 알려서 동정심을 유발시킬 필요가 있겠는가다.
그래서 일부러 숨긴 것이나 다름 없다.
희생자를 보면 러시아 2천만, 폴란드 800만, 집시나 부랑자 1천2백만 정도 된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수용하고 말 것도 없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분류를 바로해서
가스실로 직행했다고 한다.
노인이나 어린애 장애인 임산부 등은 바로 죽였고,
모면한 나머지 사람들도 기껏 3개월도 못살고 죽었다고 한다.
그만큼 먹는거 없이 일이 고단했다는 얘기다.
전시해 놓은 사진을 보면 70키로 되던 사람이 25키로 됐다는 말이 실감난다.
아침에 커피 한 대접, 점심에 뭔 국인가 한 대접, 저녁에 두부 한 모 크기의 빵을 줬던데
그 말은 이해가 좀 안간다.
동남아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있던 연합군 포로들도 칸차나부리 같은 오지에서 무지하게 힘든 철로공사를
하면서도 한끼에 비스켓 서너개 밖에 먹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더라.
저 인형은 죽기 전에 뺏은 걸까
죽고나서 뺏은 걸까.
구두약통이다.
그 정황에 구두약통을 다 챙겨오다니... 무슨 의미일까?
왜 저런 허접한 것을 이런 중요한 공간에 전시했을까?
... 유대인들은 당시 사회에서 상류층이었단 얘기다.
위엣 것은 안경테고 아랫 것은 의족인데
의족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밑창이 튿어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귀중품을 거기에 숨겨왔단 얘기다.
내가 카메라 조작을 잘못해 놓는 바람에 실내에서 찍은 많은 사진들이 못쓰게 됐다.
사실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는데 엄격히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혼잡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저런 식으로 전시한 물품 중에 큰 가방 더미가 있다.
가로70센티 세로50센티 폭30센티쯤 되는데, 어쩌면 하나같이 모양도 색도 똑같다.
잡아올때 일률적으로 지급한 가방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당시에 유행했던 최고급의 명품 가죽가방이란다.
내용물의 무게는 20키로를 넘을 수 없게 했다고 한다.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달랑 저 가방 하나에 모든 것을 챙기라 한다면
나라면 무엇을 담아가야 할까.
당시 독일은 물론 유럽 경제의 30%를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담은 자루다.
머리카락 무게가 2톤이면 부피가 얼마나 될까?
오른쪽에서 두번째 줄에 있는 사람들은 父子지간이란다.
아들보다 애비가 세달 더 살았단다.
남자애들인데 자지를 죄다 잘랐다.
그러고도 죽지 않았다는 게, 뱃속에 차는 오줌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 할 거 없다.
저 사진 찍고 바로 죽었을 거다. 생체실험에 희생된 애들이다.
가운데 있는 여자는 母女로 잡혀온 여자인데
마찬가지로 생체실험에 사용되고 죽었다.
이번엔 어미 보다 딸이 두달 반 더 살았단다.
<아우슈비츠> 1대 수용소장을 했다는 <루돌프 헤스>를 처형한 교수대란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받고 수감중에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누구 말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가스실 근처에 세워져 있다.
가스실이다.
규모가 소형인걸로 봐서는 초창기에 만든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제1수용소다.
기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지은 것은 제2 ,제3수용소이고
무지막지하게 대량으로 학살한 곳은 <아우슈비츠>제2수용소다.
저 지붕에 올라가서 뚜껑을 열고 가스통을 터트려 붓는 것이다.
하얀 분말이라는데 저 가스통 하나가 250인분이란다.
아마 저 정도의 가스실이라면 하나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미쳐 없애지 못하고 흘리고 간거다.
가스실 바로 옆에 있는 화장(火葬) 시설이다.
가스실로 끌려들어가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거 한 통에 두명씩 넣을 수 있는데, 모두 8개다. 2ⅹ8 = 16 이다.
굴뚝에서 허연 연기가 끊어질 때가 없었단다.
미쳐 화장하지 못하는 시체들은 아무데나 매장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주변 어디서건 유골이 흔하게 발견되다고 한다.
여긴 특히 체리나무가 많은데 체리가 아주 실하고 맛있으며 나무가 잘 큰다더라.
이 사진을 다시 보자.
연합군이 찍은 항공사진이다.
무슨 뜻인가?
연합국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알면서도 방관했단 얘기다.
어쩌면 수고를 대신해주는 히틀러에게 감사했을런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연합국 수뇌들의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히틀러와 똑같았단 얘기다.
저 사실을 국민들이 알았다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 경제의 3할을 유대인이 쥐고 흔들었단 얘기는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알다시피 유대인이 돈 버는 방식은 고리대금업 아닌가?
어떤가? 살의를 느낄만도 하지 않은가?
수용된 사람들 복장에 보면 표시가 있다.
정치범. 유대인. 전쟁포로. 공산주의자. 집시.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등이다.
폴란드 얘기는 나중에 소금광산을 소개할때 더 하기로 하고 몇마디만 보태고 끝내자.
가이드 신씨가 제기하는 의문이 하나가 있는데 <아우슈비츠>를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는 거다.
최근에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책을 읽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됐다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여기를 끝으로 바로 체코로 넘어가야하는 촉박한 일정 때문에 자세한 얘기를 더 들을 수 없었다.
뭔 책인가 읽어보면 알겠지.
왜, 무엇을,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일까?
2. 이거는 먼저 소개했던 책이고...
"세계사의 참극인 홀로코스트는 지난 반세기 동안 뒤틀리고 변색되면서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괴물에게 먹혀버렸다.
그 결과 인류는 파시즘의 야만에 대한 자기 성찰의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게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비극이다."
홀로코스트는 우리 모두가 아니라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이 독점하고 있다.
그들은 인류가 홀로코스트에 책임져야한다고 끊임없이 부르짖지만 그건 오직 유대인을 위해서이다.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의 유일한 상속자임을 주장하는 동안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비극에서 유대인의 참사로 절하되었고,
급기야 시온주의자들의 음모 따위로 전략해버렸다.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의 감옥에 가둠으로써 나찌가 응당 받아야 할 형벌을 턱없이 감해주었다.
나찌 인종주의자들은 유대인만 학살한 것이 아니었다.
나찌는 집시, 장애인, 공산주의자 들을 학살했다.
나찌는 파씨즘의 인종주의가 낳은 극단적인 광기였다.
인류는 나찌의 인종주의를 심판대에 올려야 했고 이를 통해 뿌리깊은 인종차별을 청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했다.
홀로코스트의 신화는 그 모든 것들을 무산시키고 이스라엘을 탄생시켰다.
범죄자들은 터무니없이 값싼 면죄부를 얻었다.
전후 독일은 유대인에게 사죄하고 보상함으로써 집시와 장애인과 러시아와 동유럽인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에 대한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다.
매년 8월 2일 집시들은 추모행사인 '집시의 밤'을 연다.
1944년이날 하루에만 4000명의 집시들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집시학을 연구하는 이언 핸콕은 500만에서 1000만에 달하는 집시들이 나찌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야드 바솀에 모인 서유럽과 북미의 외교사절들이 홀로코스트를 추모하며 고개를 숙일 때,
자신들의 발치에 유대인 못지않은 참극을 겪은 집시를 비롯해 나찌의 인종주의에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이
여전히 피흘리고 신음하고 있음을 알 테지만 애써 외면하며 이스라엘에 감사할 것이다.
유재현. 샬롬과 쌀람/창비>에서 발췌했습니다.
샬롬과 쌀람, Shalom, Salam 장벽에 가로막힌 평화
이스라엘이 독립 60주년을 맞았다.
지난 2년간 이스라엘이 정력적으로 준비해온 60주년 기념행사는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은 물론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세계 곳곳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텔아비브의 라빈 광장과 예루살렘의 밤하늘은 현란한 불꽃으로 물들었고 그 한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이
지난 세월 전가의 보도로 되새기던 홀로코스트는 다시금 빛을 발했다.
이스라엘은 나찌에 희생된 어린이의 수라며 150만개의 구슬을 아이들로부터 모으는 이벤트를 벌였다.
하지만 지금 홀로코스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주일 뒤 팔레스타인 가자와 서안, 그리고 요르단과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알 나크바(대재앙) 60주년을 맞았다.
독립 60주년을 코앞에 두고 이스라엘 전투기는 가자지구를 겨냥해 최초의 야간공습을 단행했다.
홀로코스트는 아우슈비츠나 텔아비브의 야드바�이 아니라 가자지구와 서안, 아랍 각국에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팔레스타인인에게 대재앙은 단지 6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당한 뒤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던 이슬람 저항조직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 이스라엘에
비토당한 후 가자지구에 감금당했다.
봉쇄된 가자에는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탱크가 화염으로 수를 놓고 있다.
장벽으로 둘러싸인 서안의 도시와 난민캠프 들은 새벽마다 이스라엘군의 습격을 받고 있으며
네게브 사막의 이스라엘 감옥에는 팔레스타인 십대들이 넘쳐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은 장벽 안에 갇히고 굶주리고 살해되고 유린당하며 인종청소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한때 유대인이 나찌에 당했던 참상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으며, 60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발전적이다.
반세기가 넘게 세계는 팔레스타인을 비호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해왔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왕따를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홍수처럼 넘치는 국제적 립써비스 속에서 건재한 것은 미국의 패권과 이스라엘의
독립 60주년을 축하는 불꽃일 뿐이다.
팔레스타인은 대재앙 60주년이라는 길고긴 재앙의 늪 속으로 끝없이 침잠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체제에 정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비정함과 냉담함, 잔인삼, 탐욕, 기만과
책략으로 충만한 불의가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팔레스타인의 오늘은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에 머무는 동안 나는 온갖 종류의 비극이 그곳 사람들과 벗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한다면 어떤 이들은 지옥의 불 위를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지만 다른 자들은 대추야자나무의
그늘이 드리워진 오아시스의 단물로 입을 축이고 있었다. 그건 끔찍하게도 더러운 경험이었다.
난민과 농민, 노동자, 빈민, 실업자 들이 말 그대로 팔레스타인의 불행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동안 그 곁에서
자치정부의 부패와 결탁한 신흥 자본가계급은 동족의 피가 흐르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 궁전을
짓고 있었고, 푼돈을 흘리며 더 큰 부와 권력을 향한 정치적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치정부의 관료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스라엘이 대신 거두어 적선하듯 건네주는 세금을 빼돌리고
그 알량한 권력을 힘없는 자들에게 폭력으로 내려먹이고 있었다.
그사이에 끼어든 중간계급의 위선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번지르르한 옷을 입고 흰 얼굴을 번득거리며 고급승용차를 타고 라말라의 문화쎈터에 모여들어
팔레스타인의 고난을 관람한 뒤 깨끗하고 번듯한 집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누워 단꿈을 꾸었다.
어떤 자들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써갈기고 노래하지만 대중이 싸우는 곳에는 출현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그들은 자기 땅이 아니라 해외를 향해 목을 빼고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팔아가며 구차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나는 누가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적인지, 팔레스타인인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묻고 또 물어야 했다.
축출당한 하마스가 가자에 갇혀 이스라엘 전투기의 공습을 받는 동안, 대중에 의해 불신임당한 파타의
마흐무드 압바스가 다시 등장해 워싱턴과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권력을 하사한 부시와 올메르트의 손을 잡았다.
이현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서는 내부의 적들과 먼저 싸워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그리고 누가
해방의 주역인지를 일깨워준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고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
레바논 베이루트 / 정치그림을 그리는 젊은이들
자치(自治)라는 이름의 식민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밀어내고 있다는 주장은
영토확장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선전이다.
이스라엘의 바람은 값싼 노동력과 종속된 시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늘 서안과 가자가 감옥이 되고 있는 이유는 점렴된 감옥이야말로
이 두 역할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투스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관은 국토의 13퍼센트를 떼어
10개의 반투스탄을 만들었고 신식민지로 삼아 통치했다.
반투스탄의 흑인은 백인 산업자본과 농업자본에 저렴한 노동력 원천이 되었고
또한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시장으로 기능했다.
반투스탄은 더이상 불가능한 재래의 식민지 직접통치를 대체할 가장 효율적인
통치수단이었다.
그 핵심 키워드는 인종의 '분리'였으며
바로 이것이 저임노동력과 시장이라는 신식민지적 공식을 가능케 했다.
한편, 반투스탄은 정치적 · 군사적으로 더없이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한정된)자치는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에는 명분을,
흑인에게는 환상을 제공했다.
흑인을 국토 13퍼센트에 몰아넣음으로써
남아공 백인정권은 한정된 물리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마치 흑인을 우리에 몰아넣고 그들 중 가장 탐욕스로운 자에게 '자치'라는 몽둥이를 들려
우리지기로 고용함으로써 한층 수월하게 지배하고 수탈할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그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쨋든 점령지 내 유대인 정착촌의 확대는 점령의 항구화에 기여함으로써
실질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점령지에 대한 수탈은 체계적으로 심화되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된 1970년대말 점령지는
연간 6억달러의 이스라엘 상품이 판매되는 통제된 시장이었다.
1967년 점령지의 탄생으로 확대된 이스라엘 국내시장은 경제부양을 가져오기까지 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저렴할뿐더러 착취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히 낮은 점령지의 값싼 노동력을
만끽했다.
1980년대 중반 서안과 가자의 노동력은 이스라엘 전체 노동력의 7퍼센트를 차지했고,
1985년에는 점령지 가용노동력의 3분의 1을 이스라엘이 이용하고 있었다.
특히 건설업에서의 비중은 압도적이어서 건설노동력의 45퍼센트를 점령지에서 충당하고 있었다.
또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로부터 이스라엘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는 점이다.
1967년 전쟁 이후 급증한 이스라엘의 군사비 지출은 1973년 전쟁을 거치면서
1980년대에는 GDP의 24퍼센트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로 치솟았다.
이 과정에서 점령지는 막대한 군사비를 빨아들이는 호스 역할을 했다.
점령지에 건설되기 시작한 점령촌은 이스라엘군의 보호를 동반했고
다양한 군사시설에 대한 지출로 이어졌다.
요컨대 점령지에 대한 폭력적 식민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이익과 무관하지 않음은두말할 나위가 없다.
......
빈곤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데,
노동력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없는 집일수록 식구가 늘어나는 건 그 때문이다.
반면에 노동력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반대 결과를 낳는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이 존재해야
풍요를 지탱할 수 있다.
선진국의 인구감소는 후진국의 (급속한) 인구증가 덕분에 가능하며,
그 본질은 소수의 선진자본주의 인구가 다수의 후진자본주의 인구의 고혈을 빨아
자국의 모순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구의 인구통계학적 두려움은 다분히 선동에 불과하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야생마의 울음소리 같은 파도
더러운 날개의 새들이
셀 수 없이 하늘을 난다.
바다와 하늘
가자엔 단지 바다와 하늘
그리고 죽음을 향해 걷는 생명들
슬픔으로 가득한 눈동자에
눈물은 촛불처럼 타오른다.
아직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는 그곳
바다와 하늘
……
상처는 깊이 벌어지고
해변엔 시체들이 누워있다.
……
- 압델 카림 싸바위 「바다와 하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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