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9. 15:41ㆍ산행기 & 국내여행
연경당
아래는 최순우 선생의 '연경당'에 대한 글인데, 연경당은 화 수요일에만 개방한다고 하여
이번에 보질 못하고 왔다. 두고두고 아쉬울 것이다.
연경당 넓은 대청에 걸터앉아 세상을 바라보면
마치 연보라빛 필터를 낀 카메라의 눈처럼 세월이 턱없이 아름다워만 보인다.
이렇게 담담하고 청초하게 때를 활짝 벗은 우리 것의 아름다움 앞에 마주서면,
아마 정말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처럼
세상이 저절로 즐거워지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왕자의 금원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니
어디인가 거추장스러운 위엄이나 호사가 물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궁원다운 요염이 깃들일 성도 싶지만
연경당에는 도무지 그러한 티가 없다.
다만 그다지 넓지도 크지도 않은 조촐한 서재차림의 큰 사랑채 하나가
조용하고 밝은 뜰에 감싸여 이미 태고적부터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놓여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수다스러운 공포도 단청도 그리고 주책없는 니스칠도,
일체 속악한 것이 발을 붙일 수는 없는 곳이다.
다만 미끈한 굴도리 팔작 입에 알맞은 방주, 간결한 격자 덧문과 용자 미닫이,
그리고 순후하게 다듬어진 화강석 댓돌들의 부드러운 감각이 조화되어서
이 건물 전체의 통일된 간결한 아름다움을 가누어 주고 있는 듯싶다.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 반의 큼직한 이 남향 판 대청마루에 앉아서 보면
동에는 석주를 세운 높직한 마루방, 서에는 주실인 널찍한 장판방,
서재가 있어서 복도를 거치면 안채로 통하게 된다.
지금은 모두 빈 방이 되었지만 보료와 의자 등속, 그리고 문갑·연상·사방탁자·책탁자·수로 같은
세련된 문방 가구들이 알맞게 이 장판방에 곁들여졌을 것을 생각하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지금, 아마 그만치 반실이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 연경당이 세워진 것은 순조 28년(1826)이다.
이 무렵은 추사 선생이 40대에 갓들어선 창창한 시절이었고
바야흐로 지식인 사회는 주택의 세련과 문방정취에 신경을 쓰던 시대였으니
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이만 저만한 만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으레 지내 보면 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5월보다 11월이 더 좋다.
어쩌다가 가을소리 빗소리에 낙엽이 촉촉이 젖는 하오, 인적도 새 소리도 끊긴 비원을 찾으면
빈 숲을 등진 연경당은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 담담하고 외롭다.
알맞게 무겁고 미끄러운 기와지붕의 곡선, 사뿐히 고개를 든 두 처마끝이
그의 지붕 밑에 배꽃처럼 소박하고 무던한 한국의 마음씨들을 감싸안고 있다.
밝고 은은한 창과 창살엔 쾌적한 비율이 깃을 드리웠고
장대(壯大)나 화미(華美) 따위는 발을 붙일 수도 없는 질소의 미덕이
시새움도 없이 여러 궁전들과 함께 가을 비를 맞는다.
자연에서 번져와서 자연 속으로 이어진 것 같은 이 연경당의 고요 속엔
아마도 가을의 정기가 주름을 잡는 것일까.
낙엽을 밟고 뜰 앞에 서면 누구의 슬픔인지도 모를 적요가 나를 엄습해 온다.
춘녀사(春女思) 추사비(秋士悲)라 했는데
나의 이 슬픔은 아마도 뜻을 못 이룬 한 범부의 쓸쓸한 눈물일 수만 있을 것인가.
나는 가끔 이 연경당이 내 것이었으면 하는 공상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곧잘 나의 평생소원은 연경당 같은 집을 짓고
그 속에 담겨 보는 것이라는 농담을 해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 숨김없는 나의 현실적인 소망이면서도
또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허전한 꿈이기도 하다.
세상에 진정 잊을 수 없는 연인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마 세상에는 정말 못 잊을 집도 다시 있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 육간 대청에 스란치마를 끌고 싶었던 심정과
그 밝고 조용한 서재의 창가에서 책장을 부스럭이고 싶은 심정이 이제 모두 다 지나간 꿈이라면
나는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여인과 연경당의 영상을 안고 먼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된다는 말이 되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연경당은 충분히 아름답고 또 한국 문화의 결정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과 한국 사람이 낳은 조형문화 중에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온 이 주택문화처럼 실감나게
한국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또 없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예의 하나가 바로 이 연경당인 것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세련시켜온 한국의 주택 이천년사는
아마도 이 아름다운 결정체 하나를 낳기 위해서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同 p 23~25)
낙선재
대궐이나 절간 그리고 성문이나 문묘 같은 큰 건물에는 물론 한국의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쉬고 하는 살림집처럼 일상생활에서보다 우리 한국의 고유한 체취를 강하게 발산하는 곳은 없다.
이 요람 속에서 한국의 멋과 미가 오랫동안 자라나온 것이다.
기와집은 기와집대로 초가집은 초가집대로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정말 분수에 맞는
한국의 정서가 스며있다.
한국의 주택은 일본의 주택저럼 아기자기한 그리고 신경질적인 짜임새나 구조적 기교미를 자랑하지는 않는다.
인위적인 쩨�한 조산(造山)이나 이 발한 정원수로 뜰을 가꾸지는 않는다. 그리고 중국의 집처럼 호들갑스럽지도,
번잡스럽지도 않으며 절대로 장대 따위를 꿈꾸지도 않는다.
한국의 주택은 조촐하고 의젓하며 한국의 자연 풍광과 그 크기가 알맞다.
하늘로 향해 두 처마 끝을 사뿐히 들었지만 날아갈 듯한 경쾌도 아니요
조잡한 듯하면서도 온아한 미덕과 질소한 기능과 구조가 이 지붕 밑에 한국 사람들의 담담한
마음씨를 담기에 참으로 격이 맞는다.
한국의 주택은 일본의 주택처럼 코로 목향 내음을 맡으며 즐기거나
잘 다듬은 각재들을 쓰다듬으며 즐기는 따위의 근시안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사면의 자연풍광 속에 조화시켜 그대로 편안한 그리고 자연의 한 끝이 집 뜰일 수 있고
이 집 뜰은 담을 넘고 들을 건너서 사위의 자연 속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 한국 주택의 생리이다.
손으로 쓰다듬으며 즐길 만큼 정성들여 잔재주는 부리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마음 편한, 그리고 멀리서 두고 바라보아 한층 정이 가는 것이 한국 건축의 미덕이다.
창덕궁의 낙선재와 비원에 있는 연경당과 여러 초당들 그리고 운현궁의 주택들을 비록한 경향
각지의 격있는 구가들의 온아와 간소미에 빛나는 세련된 아름다움의 기조는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민족의 재산이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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