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단골로 쓰던 토지문화관 삼 층 끝 방에서는 선생님의 텃밭이 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매고 거두시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철이 난 것처럼
흙에서 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생명줄인지를 깨우쳐갔지요.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뿌린 것에다 백배 천배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는 게 땅의 마음이라고,
본전 까먹지 말고 이자로 먹고 살아야한다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밭에 엎드려 김을 매고 있는 게 아니라 경배를 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땅에 대한 경배가 곧 농사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입으로 하는 직업적인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천성의 농사꾼이셨습니다.
사실, 땅이 거저 이자를 붙여줍니까. 인간의 피땀과 등골을 있는 대로 빼먹어야
거기 합당한 이자를 붙여주는 게 땅 아니던가요.’
‘작년 선생님의 마지막 생신 때 생각이 납니다.
그때 우리는 그게 마지막 생신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했습니다.
따님을 통해 선생님은 치료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아무도 당신 병을 아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걸
미리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건강한 척은 완벽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줄담배까지 피우셨으니까요.
딴 생신 때와 달랐던 것은 우리가 원주로 가지 않고 선생님이 서울 오신 김에 생신을 핑계로 식사자리를
마련한 거였습니다. 남산의 힐튼호텔에서였습니다.
… 그날 모임의 압권은 호텔 앞에서의 노느매기였습니다.
선생님은 당신 생신을 빙자한 저희의 식사대접 자리에 오시면서도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또 원주에서 난 것, 통영에서 부쳐온 것들을 구메구메 챙겨 오셨습니다.
우리 속물들은 국산차만 타고 들어가도, 소형차만 타고 들어가도 주눅이 들 것처럼
럭셔리한 것으로는 서울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특급호텔 현관에다가 온갖 촌스러운 것들을 풀어놓고
차에 나누어 실어주신 선생님 때문에 얼마나 행복하고 통쾌하고 으쓱했는지요.
그 거침없으심은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자랑스러웠습니다.’
선생님댁 주방과 거실에는 과일 떡 등 먹을 것이 넘쳐보였습니다.
‘어느 핸가 명절을 앞두고 있어 우리도 뭔가 작은 선물을 사 가지고 갔는데
그런데도 토지문화관 식구들을 잘 먹일 수 있어서 어떤 선물보다도 먹을 것이 제일 반갑다고 인사치레를
하시고 나서 주방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쌀독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난 저 쌀독만 있으면 돼. 저 많은 먹을 것들이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끼니때 쌀독에서 쌀을 한 줌씩 내다가 한 톨이라도 바닥에 떨어지면 엎드려서 손가락 끝으로 찍어 담아야
마음이 편해”
… 돈으로 치면 몇 푼 안 되는 푸성귀를 얻기 위해 땅을 기던 선생님,
쌀 한 톨을 위해 부엌바닥을 기던 선생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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