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4. 21:30ㆍ음악/영화. 영화음악
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에 사는 빈자 가족. 그들은 과연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수년 전 최고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영화 강의를 하러 갔을 때예요. 30분쯤 빨리 갔는데, 앞 시간엔 이름이 꽤 알려진 경영학 교수가 ‘두바이가 몰락한 원인’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었어요. 아! 저는 쇼크 먹었어요. 이 교수님이 불과 그 1년 전 또 다른 강의장에서 ‘두바이의 성공 요인’을 강의하던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바 있으니까요. ‘도대체 두바이의 1년 뒤도 예측하지 못하면서 잘되면 잘되는 이유를, 못되면 또 못되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분석만 해대는 이 사람은 진짜 전문가일까’ 하는 의심이 들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영화의 성공과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영화전문가들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요. 요즘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까지 받은 이유를 두고 이런저런 분석들이 넘쳐나지만, 만약 하나도 상을 받지 못했다면 아마도 ‘기생충이 백인 주류사회의 벽을 넘지 못한 원인’을 분석하는 기사들이 이구아수 폭포처럼 쏟아졌겠죠?
기생충이 빈부격차라는 이슈를 소재로 하기에 자본주의 심장인 미국사회의 공감을 얻었다는 분석이 올바르다면, 자나깨나 계급격차와 노동계급의 박탈감을 영화로 웅변하면서 칸 영화제에서 ‘단골’로 수상하는 켄 로치(영국)와 다르덴 형제(벨기에) 같은 유럽 거장들은 왜 아카데미에선 싸늘하게 외면받았을까요?
부자는 위에 살고 빈자는 아래에 사는 모습을 통해 계급격차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흥미를 끌었다고요? 무식한 소리 마세요. 부자는 지상에, 빈자는 지하에 사는 모습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에 이미 등장한, 결코 새롭지 않은 설정이라니까요? 이 작품이 1927년 작이니,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요.
백인이 다수인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이 기생충을 최고로 꼽았다는 건 미국 주류사회가 충분히 납득하고 공감할 만한 무언가가 있단 얘기잖아요? 저는 그것이 빈부격차란 소재 자체가 아니라, 빈부격차를 바라보는 봉준호의 관점(viewpoint)과 태도(attitude)라고 봐요.
오잉?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잘 들어보세요. 제가 분석하고도 너무 놀라워 스스로 깜짝 놀랐으니까요. 우선 기생충엔 나쁜 놈도 좋은 놈도 없단 사실이에요. 아니, 모두가 나쁜 놈이자 좋은 놈이란 표현이 맞겠지요. 처음엔 가난한 송강호 가족을 ‘개무시’하는 부자(이선균)가 정말 나쁜 놈처럼 느껴져요. 가난한 사람한텐 무슨 냄새가 난다면서 조롱하잖아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가해자가 피해자로 보이는 마술 같은 뒤바뀜이 일어나요. 돈만 많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부자 가족이 영악한 빈자 가족에게 빨대를 꽂혀 쪽쪽 빨아 먹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불쌍함을 넘어 동정심까지 샘솟지요.
인디언 놀이를 하다 획 돌아버리면서 이선균을 찌르는 송강호의 모습에선 부자를 바라보는 빈자의 시선이 대번에 느껴져요. 백인에게 자기 터전을 빼앗긴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빈자는 제 것이었던 기회를 부자들에게 박탈당해 사회적 소수로 전락했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런 빈자가 성정(性情)은 부자보다 더 약아빠지고 독살스럽게 그려지는 전개가 또 절묘해요.
‘부자=나쁜 놈=가해자’ ‘빈자=착한 놈=피해자’란 등식이 깨지죠? “부자인데도 착해” “부자들이 순진하고 꼬임이 없어”라는 송강호 가족의 명대사를 보세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은 채 능청스러운 유머를 구사하며, 구호를 외치기보단 질문을 던지려는 봉준호의 태도가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세련되고 현실적으로 다가갈지, 이젠 상상이 되시죠?
더욱 놀라운 기생충의 힘은 클라이맥스에 있어요. 높은 곳에 사는 부자와 반지하에 사는 빈자의 갈등에서 끝났다면 미국인들의 기대를 뛰어넘진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기절초풍할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돌연 장르의 옷을 블랙코미디에서 스릴러로 갈아입잖아요? 바로 반지하보다 더 지하에 사는 ‘극빈자’(박명훈)의 등장이죠.
기생충에서 햇빛은 희망을 상징해요. 부자는 햇빛이 내리쬐는 언덕 위 궁궐 같은 집에 살지만, 빈자는 햇빛이 겨우 드는 반지하에 살며 실낱같은 희망만을 허락받을 뿐이에요. 그러니 햇빛이라곤 한 줄기도 들지 않는 진짜 지하에 사는 극빈자에게 희망이란 도통 없어 보이죠.
그런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 벌어져요. 반지하에 사는 빈자는 부자를 미워하고 시기하지만, 진짜 지하에 사는 극빈자는 “부자 덕에 떡고물이 떨어져 내가 먹고사는 것”이라는 투로 외려 부자를 옹호하지요.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극빈자를 괴롭히고 그들에게 폭력을 퍼붓는 건 부자가 아니라 빈자라는 설정이에요. 빈자가 빈자로서의 기득권(?)을 극빈자에게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전대미문의 모습이 연출되지요.
세상을 어떻게 부자와 빈자로 일도양단하겠어요? 부자와 더 부자, 더 더 부자, 더 더 더 부자가 있듯, 빈자도 더 빈자, 더 더 빈자가 있겠지요. 이 작디작은 계층의 간극에서도 무시와 반목과 갈등이 잉태되는 사회를 만들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근원적으로 ‘계층본능’을 가진 동물적 존재가 아닐까 하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서슬 퍼런 이야기를 기생충은 들려주어요.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눠 보는 일은 제일 쉬운 일이에요. 약자의 편에 서는 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약자의 부조리를 짚어내는 건 그에 못지않은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죠.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가져와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기생충이 진짜로 멋진 영화인 이유예요.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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