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2020. 2. 5. 19:47미술/한국화 현대그림







韓國性의 完成으로 世界的 스타덤에 오른 暴風의 老畵家


김남수
/ 미술평론가




지금 우리들에게는 한국미술의 세계화라고 하는 중요한 과제가 우리 미술인들 앞에 가로 놓여있다. 한국미술의 개방은 미술을 통한 나라간의 장벽이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며 어설픈 몸짓이나 서툰 제스츄어 가지고는 살아남기 힘든 세계질서의 미술환경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날 동서간의 소통이 어렵고 정보가 차단되었던 시대에 남의 것 흉내를 내거나 표절을 하는 등 문화적 아류가 기승을 부렸던 시대는 이제 종언을 한 것이다.  지금 한국미술은 국제경쟁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전과 시련을 동시에 맞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최후의 승부수는 그들과 공존할 수 있는 ‘한국성’이라고 하는 독보적인 예술양식의 완성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서양화단에서 현역작가로 한국성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화가로 원로화가 변시지 화백을 들 수 있다. 본란이 표지작가로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 화백을 선정한 것은 이미 세계의 유명작가들과 함께 인터넷 망 등 사이버아트 갤러리 등에 널리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나가는 배 A leaving boat> 31.8 x 39.4 cm 1996


 

邊時志화백의 최근 핫 뉴스

한국산업은행(총재 유지창)은 지난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제 37차 ADB(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가졌었다. 세계 70개국의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국제금융 및 투자은행, UN산하 WTO(세계무역기구)와 ILO(국제노동기구) 관계자 등 3천500여명의 금융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금융올림픽이라 불리는 이 세계적 행사에 주최측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일환으로 가장 동양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의 작품화집 ‘BYUN SHI JI'를 1천권 제작을 하여 선물로 증정을 했다. 국제자유도시인 제주의 풍물을 소재로한 대표작들이 소개된 이 화집은 화가 ‘변시지’화백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거친 파도 A roaring> 39.4 x 53 cm 1984





< 하염없는 걸음 Weary walk> 31.8 x 39.4 cm 1987



<고뇌 Deap agony> 50 x 60.6 cm 1983




<고향 Home> 33.4 x 24.2 cm 1985

 

이번 화집에는 일본에 유학시절 공모전 등에서 수상한 작품, 인물화와 풍경화, 60년대 서울 비원파(장리석, 손응성 등)로 활동했던 시절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변시지화백은 1948년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공모전 단체의 하나인 제34회 광풍회(光風會)전에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여 지금까지 56년 동안 정회원으로서 출품을 해오고 있다. 이번 화집에는 황토빛으로 물든 제주의 풍경 40여점이 수록되어 있다. 외국 손님들에게 선물로 전해진 이 화집은 갖고져 하는 희망자들이 많아 주최측은 제2판 추가제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韓國의 元老畵家 邊時志,

세계의 畵聖 21명과함께 웹사이트에 登場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뭘 하는 사람일까요'라는 웹 사이버 퀴즈 설문요지를 미국 미시간 대학이 학생들의 문화지식 학습을 위해 내 놓았다. 학생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학급에서 배운 문화적 주제나 인물과 관련한 사항을 인터넷 사이버로 설문을 던져 예/아니오(yes/no)로 답변을 하는 게임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인물을 설정한 학생은 예, 또는 아니오,로 답변하고 이 때 다른 정보를 유출하면 아니 되고 남은 학생들이 설정한 인물의 정체를 알아내면 다른 학생이 다시 인물을 설정하고 질문을 받는다. 상대그룹이 설정한 인물을 모두 밝혀내는 팀이 이긴다. 미시간 대학의 쥴리엔 월터스씨가 제공해준 자료에 의하면 게임 당일 채팅 방을 개설한다(한 방에 학생 3~4명). 누가 먼저 인물을 설정할지 정한다. 채팅 방에 올라온 알파벳 순으로 해도 좋다. 남은 학생들은 인물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고 설정한 인물은 예,/아니오,로만 답변한다.채팅 룰이 ‘스레드’일 경우 학생들은 순서를 기다릴 필요없이 질문하고 ‘논스레드’일 경우 순서를 기다려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은 후 다음 질문을 보낸다. 대답은 예,/아니오,로 간단히 하되 질문에 상응하지 않는 대답을 하게 되는 경우 대화를 지속할 수 없다. 상대의 설정인물을 가장 빨리 맞추는 그룹이 승리를 하게 된다.학생들의 작업노트에는 인물에 대한 아래와 같은 정보를 적어 놓는다. 또한 좋은 정보를 찾을만한 웹사이트 목록도 적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이름, 성별, 국적, 사망일, 직업, 장르, 주제, 내용, 이주, 주요약력, 그밖에 중요한 정보 등이 화가에 대한 설문요지다. 비록 인터넷의 채팅방법을 원용하고 있지만 문화와 관련한 학습효과가 크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예술가에 대한 월드 웹 정보로는 다음과 같은 주소가 있다. 인터넷 예술사(C화이트콤브), 보스턴대학 인터넷 관련 링크, 엔카르타 프랑스, 엔카르타 스페인 백과사전, 동 이타리아, 독일 등 그 수효가 많다. 인터넷 사용어로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일본어, 포루르칼어. 스페인어 등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번 사이버상에 설정된 인물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름 그대로 세계의 화성들이 소개되고 있다. 레오나르드 단빈치, 미켈란젤로, 바크, 보쉬, 살바드로 달리, 알바트 뒤러, 엘 그레코, 칸딘스키, 프리다 칼로, 틀루즈 로트렉, 호앙 미로, 조지아 오키프, 파블로 피카소, 르느아르, 디에코 리베라, 로댕, 틴토레토, 한국의 변시지, 일본의 카츄시카 후쿠사이 등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움 Yearning> 72.7 x 91 cm 1988




<기다림 Waiting> 45.5 x 60.6 cm 1992

 


<꿈 Dream> 24.3 x 33.4cm 1991

 



世界의 有名 인터넷 사이트에

100大作家와 함께 邊時志 화백 登場


지난 1997년 원로 서양화가 변시지 화백은 세계적인 유명화가들과 함께 외국의 유명 인터넷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한국화단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큰 감동을 불러 이르켰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인 미국의 세계적인 인터넷 사이트인 '야후(YAHOO)'에 변시지 화백이 세계 100대 화가로 소개되면서 한국 미술계의 비상한 관심과 눈길을 끌었다. 또한 미국의 인터넷 라인인 ‘Best Art.Com'에 피카소, 반 고흐 등과 함께 소개됐으며, 그 후 프랑스의 유수한 인터넷 사이트인 ’www. ifrance.com'에 고흐, 모네, 밀레 등과 함께 소개됐으며, 세계 유명화가 17명의 ‘가을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 아트 사이트는 그가 일본에서 귀국후 70년대 초 서울의 ‘비원파’시절 그린 비원의 <가을풍경>이 소개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인 www.inter-art.com에도 80년대의 작품 <콜로세움>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토록 변시지 화백의 작품세계가 7,8년 전부터 세계 각국의 인터넷 사이버 아트 창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비록 작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유재 등 서양의 것을 사용하고 있지만 동양인으로서의 예술양식, 특히 한국인으로서의 한국성을 지향하는 극명한 정신주의와 주제가 세계예술의 질서와 맞아 떨어짐으로서 국제적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아트페어나 파리 견본시장, 비엔날레 등을 통하여 간헐적으로 혹은 단발로 끝나는 몇 몇 작가들이 없지 않았지만 거게가 이벤트성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邊時志의 作品世界

그의 예술세계가 국내는 물론이요,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지난 74년 중앙화단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제주로 금의환향, 제주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불과 3년 만인 77년, 그의 작품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에게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잠재력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작업 해

 

온 그의 소재나 대상,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 등이 제주풍경으로 환치(換置)되는 등 극적인 변화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매너리즘이나 한 가지 패턴에 안주하고 있는 다른 대가들에 비교하면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으며 유화의 세계에서도 작가 변시지화백처럼 극적인 변신이 가능함을 실증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요, 아카데미즘이나 사실주의 기초수업이 튼튼한 바탕이 되어 오늘의 작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든 것이다.





<나그네 A vagabond> 24.3 x 33.4 cm 1990



 

훌륭한 예술인의 탄생은 한 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본란에서 표지작가로 선정된 변시지 화백도

훗날 미술사학자들이 올바른 평가를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한국의 화단사에 변시지 화백 만큼

세계시장과 국제미술계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평가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열대성 남극의 정취가 물씬 밴 제주는 아스팔트문명의 산물인 공해와는 전혀 절연된 깨끗한 풍토적인 환경과 분위기, 그들만의 순결무구한 삶이 전개되고 있다. 제주가 고향이면서 바쁜 나날의 망각 속에 살아 온 작가 변시지화백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애정 때문에 새삼 발견한 것은 황토빛깔의 완만하게 굴곡이 진 밭이랑과 화산질로 된 구멍이 쑹쑹 뚫린 검은 바위돌, 나지막이 두른 돌각담, 완만한 해안선과 모래톱, 남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짜릿한 바다 바람, 제주 토종의 조랑말, 물질하는 해녀, 붉고 검은 부석돌이 쌓여 만들어진 곳자와 길, 한라산을 정점으로 밋밋하게 흘러내린 구릉지대,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극의 태양, 멀리 수평선 위에 떠 있는 고깃배, 등 작가의 시계에 들어오는 자연환경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작가의 소증한 소재요 피사체 였다. 사실 작가의 마음속에 비친 제주의 풍광은 그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리라. 격정적인 시정(詩情)과 시상(詩想)이 떠오른 시인(詩人)이 시를 읊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듯이 작가 변시지화백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되어 그 풍물시를 회화로 조형화 한 것이다.



            


<해촌 A village by the sea> 50 x 65.1 cm 1980


특히 작가의 자화상을 메타포로 이미지화 한 가끔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 단장을 짚고 외롭게 걷는 더벅머리 사내의 모습, 모래사장이나 해안가에 앉아 이젤을 세워 놓고 몰아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점중인물(點中人物), 낚시를 드리운 노옹의 태공망의 풍경은 그 모두가 작가의 자화상이자, 이미지로 체험한 상상의 세계였다. 이 작품 속에는 작가의 숭고한 염원과 최상의 기도가 농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소재들이 작가의 심상으로 재구성되어 회화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그 표현의 방법론과 양식에서 변시지화백만의 독보적인 경지요, 오리지날리티이며, 그 누구도 닮지 않은 그만의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행여 그의 화폭 속에 불필요한 덧살이나 췌육이 딱지딱지 장황한 설명으로 가해진다면 그 작품의 순수성에 훼손이 갔을 것이다. YAHWOO 등 인터넷 사이버 갤러리에 변시지화백이 세계100대 화가로 등장을 한다던지, 파리나 유럽 등지의 웹아트 사이트 등에 그가 선택되어 소개되고 있는 점은 우리 한국미술의 쾌거요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정부의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유능하고 국익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는 원로화가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함으로서 해외진출을 통한 한국미술의 세계화등 재원상의 많은 투자 등 정부나 국가가 해야할 과제들이 화급을 요하고 있다. 즉 세계의 아트페어나 세계의 경매시장에 출품과 상장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서 세계속의 한국미술은 21세기 외화가득의 전략적인 문화예술사업으로 자리매김을 해야하는 것이 당면한 초미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Portrait of nemo> 110 x 80 cm 1951





<환상 An illusion> 24.2 x 40.9 cm 1991



<폭풍의 바다 Sea of the storm> 91 x 116.8 cm 1993




結 論

21세기 정보화시대는 IT산업 못지 않게 문화예술이 나라마다의 중요한 국가의 전략산업으로서 재충전의 기회를 다져가고 있다. 미래학의 석학들은 문화예술이 그나라의 부를 측정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비록 조상에게 물려받은 5000년의 역사를가지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화예술의 후진국으로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훌륭한 예술인의 탄생은 한 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본란에서 표지작가로 선정된 변시지 화백도 훗날 미술사학자들이 올바른 평가를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한국의 화단사에 변시지 화백 만큼 세계시장과 국제미술계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평가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록 양화의 장르를 탐구하는 원로 화가지만 그의 작품의 주제나 정신주의는 한국성의 추구, 토속적이고 풍토적인 작가만의 사투리적인 예술양식을 천착함으로 성공한 예술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作家의 行蹟

변시지화백은 192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출생했다. 선친과 함께 도일, 45년 오사까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 후 동경의 데라우찌만지로(寺內萬治朗)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아테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했다. 48년 23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여 일본 미술사상 전무한 일로 NHK는 톱뉴스로 한 주간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49년 도꾜 긴자 시세이도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졌고, 51년과 52년 광풍회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56년까지 광풍회 정회원으로서 출품한 그는 57년 영구 귀국길에 올랐으나 2004년까지 광풍회전 정회원으로서의 작품을 출품해오고 있다. 60년 서라벌예대 미술과 과장으로 초빙되었고 이해 서울미대 동양화과 출신의 이학숙여사와 결혼했다. 75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과 전임, 86년 ‘화가 변시지’ 열화당 출간, 94년 서귀포시민상, 97년 서귀포기당미술관에 변시지상설전시실 개관, 동 명예관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예술양식은 10년 내지 20년의 텀을 두고 변화를 해왔다. 가령 57년 귀국하기까지의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75년 고향인 제주도로 귀향하기 까지의 서울에서의 작품활동, 그리고 지금의 제주에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무언의 대화 Mute dalogue> 39.4 x 27.4 cm 1996

 


<거친 바다 Rough sea> 162.2 x 130.3 cm 1983



서울에서 작업했던 경향들은 이른바 비원파, 혹은 고궁파로 불리워지는 자연의 실상을 리얼하게 묘사했던 아카데미즘의 화풍이었다. ‘경회루’와 ‘애련정’, ‘향온정’, ‘반도지(半島池)’, ‘미용정’등의 고궁을 극사실, 극세필, 극채색으로 집중적인 묘사를 했다. 이 시기에 동료작가로서는 손응성, 장리석, 등 훗날 한국 화단을 빛낸 구상계열의 엘리트들이었다.인물화 가운데서도 특히 좌상을 연작으로 발표했던 그는 47년작 <여인>, 48년에 완성한 <베레모의 여인>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상> 그리고 중반에 그린 <네모의 상> <여인> <여인과 연인> <남자> <K씨의 상> 등이 있었다. 당시 그의 귀국전을 보고 쓴 평문에서 시인 조병화氏는 ‘소박하면서 단조로운 통일 가운데 고요히 가라앉은 윤택한 시심과 탁하지 않은 맑은 빛과 색이 러프한 화면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깊은 뉘앙스의 폭은 먼 거리를 타고 비쳐 오르는 아름다움을 우리들 앞에 보여주고 있다’ 라고 평한 것은 문인의 눈에 비친 그의 예술의 특징과 세련미를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