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 소장전

2019. 12. 21. 08:45미술/한국화 현대그림



 




 







천경자 작품을 직접 이렇게 몰아서 보기는 처음이었는데,  

천경자는 너무도 과대평가 되었더라.

앙리 룻쏘와 고갱의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 나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뎃생이나 채색도 많이 부족해 보이고.......

어떻게 이런 과장된 평가가 이루어졌을까? ㅠㅠ








1979년 6월 23일자 조선일보 ‘천경자 중남미 원색(原色)기행’ 연재물에 실린 천 화백의 여행 풍물화 ‘아마존 이키토스’. 이국적 풍경을 배경으로 아마존의 생선 장수 여인을 그렸다.





 

사진촬영을 못하게 합디다. 이건 자료사진입니다.

<생태>는.... 밑그림 연필자국이 그대로 있더군요.










 

 

 



광주 자유미술인협회, 1979

현실과 발언, 1979


두령, 1982

1970년대 중반 탈춤 동인으로 등장하여 탈춤과 마당극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두령'을 창립했다. '삶에 기여하는 미술'을 목표로 공동작업을 통해 민중의 실상과 희로애락을 담아냈다. 전통적인 민족미술을 창조의 원천으로 여겼으며, 탱화, 민화의 색채와 主大從小法을 시도하여 서구미술을 극복하자 했다.


임술년 1982,

본래 명칭은 '임술년 98992에서'이며, '임술년'은 1982년이라는 시간성을, '98992'는 남한의 총면적인 장소성을, '에서'는 출발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서'라는 동시대성과 현장성을 강조하며 기존의 모더니즘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극사실주의의 기법으로 우리 문화의 병폐를 그려냈다.


미술공동체, 1983

서울미술공동체, 1985

민족미술협의회, 1985

그림마당《民》, 1986

<한국미술 20대의 힘>展 이후 전시장 대관이 불가능해지자 '민족미술협의회'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전시장이다. 작가와 평론가들이 중심이 되어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약 8년간 운영했다. 민중미술 담론 생성의 장이자 예술탄압에 대한 투쟁의 장이었다.

현장미술의 성장

유화정책이 강경정책으로 선회하고 민주화투쟁이 강력하게 가열되자, 화랑에서 소통되던 종래의 미술과는 다름 형태인 걸개그림, 깃발그림, 벽화 등 현장미술이 성장한다. 민족미술협의회와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현장미술운동 조직들이 서로 연대하며 민중미술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해나갔다.







 




 




 




 




 







 


 








 

 



 

 

황재형 작품 치고는 수준이 많이 쳐진다. 그래서 꽁짜로 기증한 게 아닐런지?






 

제목이 <하수구>든가? 작가가 홍성담인가 오윤인가, 임옥상인가?





 박흥순 <복서>





 

작가 이름이 누구였더라?

민중미술 그리다가 회화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났다는 공허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구상미술으로 돌아와서 그린 작품이라더군. <- 공감이 가네.





신학철 <밤길>


나는 이 작품이 참 맘에 든다.





홍성담 <고풀이>




 

김봉준 <농악>










 




 









민중미술을 재미로 한 사람이 누가 있으랴.

지금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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