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17. 20:25ㆍ미술/서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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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낳은 미국 최고의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꽃 그림을 보다 보면 마치 여성의 가장 핵심적인 성징을 보는 것 같다. 이런 시선에 대해 오키프는 "만약 내 그림에서 성적 상징을 봤다면 그것은 감상자가 자신의 집착을 본 것일 뿐"이라고 응수한 바 있다.
오키프의 이와 같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꽃에서 성적 이미지를 보려는 비평가들의 입장이 완전히 소멸된 적은 없다. 물론 이런 프로이트적 접근에 대한 오키프의 반감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 같은 시각은 자칫 예술 감상에 있어 본질적인 측면은 간과하게 하고 주변적인 것에만 지나치게 매달리게끔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평면적이고 즉물적인 도상 분석을 넘어 오키프라는 작가의 예술세계 전체에 깊이 침잠해보아도 우리는 그의 꽃이 결국 일종의 여성성을 드러내보이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비록 그것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라 해도 말이다.
오키프는 평생 2백 점이 넘는 꽃 그림을 그렸다. 그의 꽃은 대부분 매우 가까이 다가가 그린 꽃이다. 마치 벌이 꽃에 접근하듯 그렇게 다가간 시선이다. 꽃을 그린 그림치고는 화면 사이즈가 큰 편이다. 그만큼 꽃도 확대되어 있다. 한 지인이 왜 그렇게 꽃을 크게 그리냐고 물으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강을 그릴 때 왜 그렇게 강을 실물처럼 크게 그리지 않고 작게 그리냐고 묻지 않잖아요?"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꽃과 접촉한다. 꽃을 만지거나, 앞으로 몸을 기울여 꽃 냄새를 맡거나, 아무 생각 없이 입술을 꽃에 갖다대거나, 남을 즐겁게 하려고 꽃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저 꽃을 바라만 보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하나하나의 꽃이 나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 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크게 꽃을 그려왔다.
대상이 꽤 확대된 탓에 꽃잎 하나하나의 디테일과 그것들이 어우러져내는 조화가 무엇보다 돋보이는 오키프의 꽃 그림. 오키프의 꽃이 왜 이전의 무수한 화가들이 그린 꽃과 그렇게 다른가에 우리는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양 미술사 속의 꽃 그림은, 꽃 자체가 잠시 피었다가 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대체로 무상함의 상징이었다. 금새 피었다 지는 인생이었다. 과거의 화가들은 바로 그 뉘앙스를 충실히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이것은 서양화의 오랜 알레고리였다)
오키프의 꽃 그림이 처음 그려진 해가 1924년. 바야흐로 여성들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인식이 한창 제고되던 시점에 오키프의 꽃 그림이 나온 것이다. 오늘날의 공격적 페미니즘 미술과는 성격이 무척 다르지만,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새삼 진지한 조형언어로 되돌아보고 그 자연법적 정당성과 위엄,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표현해낸 오키프의 꽃 그림은 마땅히 그런 역사적 맥락 위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오키프의 꽃은 '성적 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반성'위에 핀 꽃인 것이다. 오키프가 유명한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치와 결혼한 뒤에도 자신의 성을 그대로 사용한 데는 바로 이런 정신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에는 그 같은 행위가 무척이나 파격적이고 대담한 사회적 일탈이었다.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 11월 15일 위스콘신의 선 프래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부농이었으며 집에는 온갖 가축이 뛰놀았다. 옥수수밭, 야생화밭은 그의 감수성을 늘 자극하는 이미지였다. 호방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는 성격의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달리 오스트리아 지배를 무너뜨리려 했던 헝가리 저항민의 딸인 어머니는 지적인 성향에 내성적이며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일찍 미술에 대한 재능을 드러낸 오키프는 시카고 미술학교를 거쳐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 입학했다. 뉴욕에서 공부하면서도 오키프는 그 곳에 그다지 매력을 못 느꼈다. 첵사스, 뉴멕시코 등 광활한 들판을 그는 선호했다. "명료함, 그게 내가 이곳(뉴멕시코)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한 친지에게 그는 말한적이 있다.
오키프가 당대 최고의 사진작가이자 전위적인 미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남다른 안목과 영향력을 보였던 스티글리츠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오키프의 재능 때문이었다. 오키프의 재능을 우연히 발견한 스키글리츠는 오키프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꼈고 둘은 1918년부터 동거관계에 들어가 1924년에 결혼했다. 이때 둘의 나이는 37세와 61세. 스티글리츠가 24세 연상이었다.
둘은 워낙 개성이 강해 스티글리츠가 사망할 때까지 늘 '따로 또 같이' 식으로 살았다. 하지만 서로의 능력을 무척 존중했고, 스티글리츠는 처음부터 오키프의 모습을 자신의 앵글에 담는 일에 대단한 정열을 쏟았다. "이제껏 어느 여성도 겪어보지 못한 여성 형상화의 과정"을 드러내보인다는 스티글리츠의 오키프 사진에는, 그녀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 내적 지향이 잘 드러나 있다.
여성으로서의 은밀한 부분까지 포함해 오키프의 온몸을 때로 현미경적 시선으로까지 훑은 스티글리츠의 카메라는 오키프에게 "스티글리츠만큼 인물의 성격과 진실을 잡아낼 수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로 하여금 사람 그리기를 포기하게 하는 이유의 하나가 됐다. 또 꽃을 바라보는 오키프의 시선에는 사실 스티글리츠가 오키프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버랩되어 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오키프를 향한 스트글리츠의 눈은 그의 예술에 나름의 영향을 끼쳤다.
오키프의 꽃은 어쩌면 오키프 자신의 모습일지 모른다.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 꽃이란 늘 바라봄을 당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의식해 더욱 바라봄에 몸을 맡기는 존재이다.
어쩌면 여성에 대한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관념일지도 모르지만, 여성의 힘은 '밀어붙이는'데 있지 않고 '끌어당기는'데 있다는 점에서 그의 꽃 그림은 다시 여성성의 정수로 화한다. 감상자는 어쩌면 그 여성성의 훔쳐보기(핍핑)를 공개적으로 허용하는 오키프의 당당한 태도에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오키프는 꽃 이외에 동물의 해골 등 뼈, 평원 풍경 따위를 많이 그렸다. 이 가운데 특히 동물 뼈 그림은 남성성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꽃 그림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오키프 자신은 "위대한 미국 소설 등 '위대한' 미국을 외치나 '실제로 미국을 잘 모르는 남자'들이 싫어" 붉고 푸른 바탕 위에 해골 뼈를 넣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남성 중심의 가치에 조용히 저항하며 자기 정체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보여주는 그런 일화이다.
이런 오키프에 대해 문명 비평가 멈포드는 "미국에서 가장 오리지널한 작가"라는 찬사를 보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958년의 미국대가 14인전 카탈로그에서 "오늘날의 응용미술과 심지어 건축에까지 미친 그의 심대한 영향은 의심할 바가 없다"며 "오키프는 현존하는 최고의 여성화가"라는 헌사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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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추상적인 꽃그림과 미국 남서부의 풍경을 미니멀리즘적으로 표현한 그림을 선보여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다.
오키프의 추상화된 꽃그림들은, 에로틱하면서 도발적인 꽃의 이미지와 강렬한 색채와 과장된 크기가 특색이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활동을 하였고, 뉴욕과 텍사스를 오가는 동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부하고 평범한 소재들을 그렸다. 특별할 것 없는 소재들은 그녀의 붓끝에서 도발적인 색을 입고 강렬한 에너지를 뿜으며 거대한 크기로 개화한다. 그녀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진부한 대상들의 소소하고 작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시각장을 압도하는 크기로 관찰한 바의 핵심을 추상적으로 재현해 냄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아 놓는다.
그녀가 그린 꽃의 추상화는 그녀 자신의 본성이자 자연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삶과 예술이 완전한 통합을 이룬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삶에 대한 애착과 꽃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은 여인이다.
“I wish people were all trees and I think I could enjoy them then.” Georgia O’Keeffe
Erin B. Coe가 오키프에 대해서 쓴 주목할만한 에세이에서는 오키프의 초기 몇년을 정원사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오키프 여사의 흙에 대한 친밀감( 애정) “an intimacy with the soil”을 특히나 강조하고 있다. 뉴욕주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조지 호숫가의 스티글리츠 주택에 기거하던 시절, 그녀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주의를 쏟았으며 꽃의 접사와 나무와 나뭇잎들 그렸다. 스무 점이 넘는 칸나와 페투니아, 양귀비 칼라 릴리 등을 줌인하여 관찰하고 줌아웃하여 그렸다. 이후 남서부의 사막 한 가운데로 거쳐를 옮긴 이후에도 생명의 원초적 본질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정원을 일구고, 계속해서 꽃을 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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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프의 꽃들, 그녀의 자화상
36인치의 거대한 캔버스에서 개화한 아래의 칸나와 양귀비는 그녀가 24세 연상의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와 오랜 연애 끝에 법적으로 결혼을 하게 된 1924년에 그려졌다. 그녀의 개인적인 삶의 전후 사정을 모르고 보더라도 이 꽃은 만개한 사랑을, 그리고 사랑의 주체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캔버스에 투영된 것은 칸나의 본질인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꽃으로 표현된 그녀의 자아상은 그녀의 절대 지지자이자 남편이었던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인로서의 개화였고 미국의 예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세겨넣기 시작한 화가로서의 화려한 개화이었을 것이리라 짐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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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ental Poppy, 1928 Red Canna, 1924
오키프와 스티글리츠, 그들의 사랑
그녀가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 것은 1916년, 그녀가 스물 여덟살에 그린 나팔꽃을 닮은 보랏빛 페투니아와 코스모스를 그린 그림이 당시의 뉴욕 예술계를 이끌어가던 52세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눈에 들게 되면서 부터이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예술을 미국 순수 예술의 한가운데로 등단시킨 사진작가이자, 유럽의 피카소, 몬드리안, 마티스, 브라크의 미술을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 291를 통해 소개하며 현대 예술의 본거지를 파리로 부터 뉴욕으로 이끌어온 개척자였다.
렌즈를 3-4 분간 장시간 빛에 노출시켜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도록 찍은 뉴욕의 거리 사진들 역시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세련된 사진이다.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방대한 양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깊이를 더해 가고 다양하게 변모해 간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강력한 후견인으로 1916년 첫 전시와 1924년 두 번째 전시회이자 첫 개인전을 개최하도록 후원하였고, 이를 통해 조지아 오키프라는 이름이 현대 미국 예술계의 가장 중요하고도 성공적인 미술가라는 평을 듣도록 후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그녀의 애인이었으며, 결국에는 남편으로 입장을 바꾸어가며 정신적인 지지자로서 긴 세월을 함께 하였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게 오키프는 뮤즈였으며, 작품의 모델이었고, 애인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에 담은 오키프의 초상화와 누드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대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형태의 예술이었고, 이 일은 그의 작품 자체는 물론 세간으로부터의 오키프의 작품 해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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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손을 찍기를 즐겼는데, 그녀의 손을 찍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은 2006년 소더비에서 147만 2000달러(약 15억)로 사진 경매가 최고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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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도발했을 그녀의 솔직한 그림들과 그녀를 모델로 한 스티글리츠의 사진전, 그리고 둘의 사랑이야기는 1920년대라는 시대상에 비춰볼 때 센세이셔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같은 그녀의 삶의 행보와 그림들은 동시대를 이끌어가는 프로이트의 세계관에 딱 떨어지는 예를 비평가들과 대중에게 제시하였다. 그녀 자신은 프로이트적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부인하였으나,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그림과 삶의 모습은 고스란히 프로이트의 프레임에 꼭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후 노년에 이르러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내가 그리고 있었던 것은 나자신과 나의 삶이었단 사실을 내가 그 그림들을 그리고 있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이런 회고를 놓고 보면, 그녀가 그린 그림들은 무의식에 기저한 욕구를 충족키기고자 하는 의도가 한 개인의 일생을 움직이는 동인이라고 가정했던 프로이트의 전제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매우 솔직한 그림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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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멕시코의 민둥산. 붉고 노란 흙으로 이루어진 산과 산 아래의 수풀들을 그린 그림들
오키프 전기의 그림 -조지아 호수, 꽃과 정물과 뉴욕의 야경
1887년 북미의 위스콘신의 농가에서 태어나, 뉴욕과 텍사스 등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열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고 배우기 시작했으니 생의 초기 10년과 시력을 상실했던 말기의 15년을 제외하고는 일평생 그림을 그렸다.
시카고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피카소가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리던 그해에 스무 살이 된 그녀는 맨해튼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꽃과 정물들을 주로 그리며 동료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하고, 상업미술과 미술 선생님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그림을 잠시 중단하기도 한다. 한때, 노스 캐롤라이나와 텍사스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아서 웨슬리 도브를 만나게 그에게 배우면서 선과 색채와 색감의 잘 어우러진 조합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그림이라던 그의 추상미술에 대한 개념에 공감하며 그림으로 돌아온다. 이 같은 그녀의 초기 20년간 형성된 시각은 이후의 작품세계를 관장하며 객체의 본질적인 핵심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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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프 후기의 그림 - 사막의 고원, 산타페 뉴 멕시코.
1916년부터 텍사스와 뉴 멕시코를 왕래하며 그림의 모티프를 얻곤 했었던 그녀는 62세가되던 1949년, 스티글리츠가 작고한 시점으로부터 3년이 지난 해에, 뉴 멕시코 사막 위의 민둥산으로 완전히 은둔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햇살이 춤추는 땅’이라고 부르는 해발 2135m 산타 페의 고원지대의 은둔하며여 그곳을 영혼의 안식처로 삼고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남편과 사별 후 그린 뉴 멕시코의 메마른 고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다보면 그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다 걸어나온다. 동부의 푸른 숲으로 둘러쌓인 조지아 호숫가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 그녀는 "정원을 가꾸과 과일을 수확하는 일을 특히 관심이 있다"고 친구에게 쓰고 있으며 이 시절동안 가장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뉴 멕시코의 먼지 풀풀날리는 사막 한 가운데로 삶의 거처를 옮겨온 그녀는 돌산이 빚어내는 색채의 조합을 사랑했고, 오랜 시간을 들여 사막 한 가운데 자신의 정원을 만들어 내고 가꾸었다. 사막의 한 가운데 물길을 트고 자신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은 구도의 길에 다름이 아니지 않을까. 그녀는 사막 한 가운데 만든 자신의 정원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아침 저녁으로 그 곳을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그림을 통해 보게 된 사막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아도비로 지은 그녀의 거주지는 일체의 군더더기와 장식이 배제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구성된 미니멀리즘의 건축이며, 그녀의 침실과 작업실을 들여다 보면 과연 고요와 적막 속에서 영혼에 쌓인 먼지를 씻어줄 수 있을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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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푸른색 첼로를 옆으로 눕혀놓은 것으로도 보이는 1922년작 조지아 호수는 바라보고 있기에 한없이 좋다. 또한 1963년 작 Winter Road 와 이듬해에 그린 Road past the view 이 두 작품도 매우 좋아하는 미니멀리즘의 추상화인데, 재능 넘치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정념을 불태웠던 화가의 일생이, 탈속과 구도로 이어진 뉴 멕시코를 향한 한 줄기 길로 압축되어 표현된 것 같아 보인다.
어느 해 겨울, 로키 마운틴의 끝자락인 콜로라도를 향해 달리던 중 뉴 멕시코를 지나며 눈발이 흩날리던 민둥산의 옆모습을 몇 시간 눈으로 훑으며 지난 기억이 있다. 여름엔 사막이고 겨울엔 시도 때도 없이 눈보라가 시야를 가리는 그 혹한의 먼지 풀풀 날리는 지형 위에 하늘을 향해 솟구친 정수리 납작한 돌산은, 내게는 차갑거나 건조한 따거움으로 다가왔을 뿐,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산과는 다른 형상이었다. 북부의 프레이리에서 나고 자라 뉴욕의 번영과 화려함 속에서 화가로 명성을 날리던 조지아 오키프 여사가 노년에 이르러 영혼의 안식을 찾은 곳이 그 돌 산의 높은 고원에서였다니.... 동양의 언어로 번역해보면 뉴 멕시코의 황량한 사막과 돌산과 죽은 동물의 뼈와 꽃들을 그리다 눈이 멀어버린 화가로서의 그녀의 행보는 영혼의 안식을 찾기 위한 구도의 과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해 진다.
그러고보니 코네티컷의 부촌에서 일생을 보낸 친구의 시부모님도 은퇴후 뉴 멕시코의 타호로 거처를 옮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부모님을 방문하고 온 그 여름, 친구는 뉴 멕시코의 다른 공기를 내게 말로 전해 왔으나, 푸른 산 푸른 계곡만을 향해 있는 내 마음에 경험해 본적 없는 그 마르고 건조한 뜨거운 돌산의 색다른 공기가 와 닿았을리가 없다. 그러나 오키프 여사와 친해지고 싶은 지금, 멀지 않은 시기에 마음을 열고 사막 한 가운데의 돌산에 올라보아야 겠다고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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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오키프 여사와 노 사진작가 스티글리츠 선생의 다정한 한 때
참고
헌터 드로호조스카필드 (2008),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민음사
이미지와 작가에 대한 소개는 아래에 링크된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으로 부터 얻어왔습니다.
https://www.okeeffemuseum.org/
http://www.georgiaokeeffe.net/
© Yoon Hyunhee all right reserved
1918년(31세)
텍사스에서의 교편 생활을 접고 뉴욕으로 향했다. 스티글리츠의 스튜디오에서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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