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목사의 딸이었던 일엽은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3·1운동 후 일본 東京英和학교에 다니다 이내 귀국하여 잡지 『新女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 新文化運動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도덕률에 도전하는 대담한 글과 처신으로 숱한 화제에 올라 신여성 나혜석 만큼이나 소문난 여자였다.
으셔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뒷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 일엽스님,「그대여 웃어주소서」
뜨거운 정열을 소진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허망을 이렇게 노래한 38세의 일엽은 수덕사 만공스님을 만나 발심하여 견성암에서 머리를 깎았다. 지금 수덕사 대웅전 아래쪽에 환희대(歡喜臺)라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여기가 곧 그 엣날의 견성암이다.
누가 어떤 사유로 堂號를 이렇게 바꾸었는지 내 자세한 내력은 알지 못하나 "모험적인 연애 끝에" 훗날 자신이 쓴 인생 회고록의 책 제목처럼 "청춘을 불사르고" 기거하다 열반한 곳이니 그 개명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일엽스님은 1971년 세수 76세, 법랍 38년으로 생을 마쳤다.
(※ 만공(滿空)은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라는 말이 생겼다. 스님의 이런 파격적인 행위는 그의 은사 스님인 경허스님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 많은 일화 가운데 女色과 관계되는 것만 인용하면 오해가 있을까 걱정된다.)
개심사
나더러 가장 사랑스러운 절을 꼽으라면 나는 무조건 영주 浮石寺, 청도 雲門寺, 서산 開心寺부터 생각할 것 같다.
개심사에 간 사람들은 흔히 경내의 고요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山神閣에까지 오르지 않는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거기서 경내를 굽어보는 맛이 개심사 답사의 절정이다.
산신각으로 가는 길목에는 허름한 스님방이 한 채 있다. 문 앞에는 얌전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이제 그만. →" 저쪽으로 멀리 가라는 뜻이다. 이 집이 그 유명한 경허스님이 거처하던 곳이란다. 우연히 주지스님을 만났다. 주지스님이 조용히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어디 가서 좋다고 소문내지 말아요. 사람들 몰려들면 개심사도 끝이에요. 사람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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