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 여행 :혼슈』 교토편에서는 교토와 나라, 그리고 우지를 중심으로 오사카와 사카이 그리고 고베 등의 긴키지방 그리고 시코쿠 지방의 가마와 도자기를 다룬다.
에도편은 도쿄와 그 인근지방, 나고야와 세토, 미노아키와 가나자와 또 이시키와 현의 구타니야키, 일본 여섯 엣 가마에 해당하는 비젠과 도코나메를 다룬다.
2017. 11
일본 도자사 속에 조용히 몸을 숨긴 조선 사기장의 숨결을 ‘교토’에서 읽다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문인 마쓰오 바쇼는 교토에 머물렀을 때 ‘교토에 있어도 교토가 그립구나, 소쩍새 울음’이라는 하이쿠를 지었다. 교토가 가지고 있는 매력의 하나는 교토를 거닐고 있으면서도 교토가 그립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교토는 완전한 일본 색(色)으로 도배한 곳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교토만큼 조선인의 숨결을 많이 읽을 수 있는 곳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본도자기여행 시리즈의 저자 조용준은 『일본도자기여행 : 규슈의 7대 조선 가마』에 이어『일본도자기여행 : 교토의 향기』에서 조용히 몸을 숨기고 도자기를 빚은 조선 사기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일본의 다도와 다구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왜 발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일본 도자사에서 조선 자기 흔적을 파헤친 『일본도자기여행 : 규슈의 7대 조선 가마』를 출간하면서 국내 처음으로 조선 자기 문화사를 종합하고 개괄한 저자 조용준은 교토에서도 그 여력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 번 교토의 조선 자기 흔적을 탐구했다. 이는 매우 힘든 작업임과 동시에 희소성을 가진 문화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조용준
「시사저널」과 「동아일보」를 거쳐 「주간동아」 편집장을 지냈다. 1992년 중편소설 『에이전트 오렌지』로 「국민일보」 국민문예상을 통해 등단했고, 1994년 장편소설『활은 날아가지 않는다』를 출간하였다. 오로지 ‘내 책’을 쓰기 위해 45살이 되기 전에 기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해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이후 7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주제가 있는 문화 탐구에 중심을 두고 글쓰기를 지속하며 ‘창조적 컬처투어’를 지향하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소망을 실현해가는 중이다.
대표 저서인 『유럽도자기여행 : 동유럽』을 시작으로『유럽도자기여행 : 북유럽』과 『유럽도자기여행 : 서유럽』의 출간하며 유럽 도자문화사 전반을 국내 최초로 완결을 지어 독자들과 평단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유럽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 도자사에서 조선 자기 흔적을 파헤친 『일본도자기여행 : 규슈의 7대 조선 가마』를 출간하면서 국내 처음으로 조선자기 문화사를 종합하고 개괄함으로써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도자기 시리즈는 『일본도자기여행 : 교토의 향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에도 편도 출간될 예정이다. 그 밖의 저서로는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와 『프로방스 라벤더 로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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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奈良, Nara)는 우리에게 매우 감회가 깊은 땅이다. 한반도 渡來人들이 미개의 땅에 선진 문물과 기술을 전수하고 나라의 기틀을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백제 王仁 박사와 혜총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학술과 문필, 군사, 기악을 전해주어 중세 왜구들을 깨우쳤고, 글자와 변변한 의복이 없던 그들에게 馬 사육과 양잠, 토목, 관개사업, 금속 등의 각종 선진 기술을 전파했다.
일본인들은 백제를 ‘구다라くだら’라고 읽는다. 고대 일본인들에게 백제는 ‘큰 나라’였다. 이 말이 변용돼 ‘구다라’라고 음독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높다. 도래인들이 국가의 기초를 세웠기에 도읍지를 ‘나라’라고 부른 명칭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상징은 누가 뭐라 해도 일본 불교 화엄종 대본산인 도다이지(東大寺)다.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축조 건물이고, 또 그 안에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대불상인 ‘비로자나불 좌상’이 있어서 나라를 들르는 한국인 관광객이 꼭 찾는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도다이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곳을 가는 것일까? 도다이지의 설립과 청동대불 건립은 전적으로 한반도 도래인 승려인 교기(668~749)의 힘에 의존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기 스님은 백제에서 건너간 코시, 혹은 코시노 사이치의 첫째 아들로 가와치 국 오오토리 군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현재 오사카 부 사카이 시에 해당한다. 그러니 요즘 말로 하자면 재일교포 2세다.
-본문 017~0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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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가 센노 리큐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할복자살을 명령한 것은 화려한 다도를 추구하는 히데요시에게 센노 리큐가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라거나 딸을 바칠 것을 거부했기 때문, 혹은 다이토쿠지 三門에 자신의 목상을 세우는 불경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등 많은 가설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조선 출병 반대가 가장 결정적 이유로 굳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에는 여전히 이를 역사의 수수께끼의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센노 리큐가 히데나가의 독살을 꾀했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자결을 명령했다고 하면 쉽게 납득된다는 것이다.
이런 음모설의 근거로서 히데나가의 병은 위장 계통의 비소 중독 때문이라는 점, 센노 리큐 茶室은 협소한 공간으로 다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누구든 입구에서 칼을 풀어놓아야 했기에 독살하기에 매우 적합한 공간이며, 설마 센노 리큐가 차에 독을 넣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센노 리큐의 救命과 자손들의 상속권 보장 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 특히 히데나가가 사망하고 이틀 후에 센노 리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단둘이 다회를 가졌다는 사실 등도 이런 음모
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음모설은 다분히 센노 리큐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본문 0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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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김시습의 초암차는 일본 다도의 거성 센노 리큐의 와비차의 뿌리다,
일본의 다도는 두 명의 한국계 도래인, 잇큐가 시작하고 리큐가 완성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었던 센노 리큐의 극도로 절제하면서 청빈한 초연함은
매월당 김시습 초암차의 자연주의를 일본식으로 절묘하게 변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큐는 고려다완을 사랑했고, 조선 도공에게 다도에 쓸 찻사발을 굽게 했다.
이것이 일본의 명물 라쿠야키의 시초다.
센노 리큐에게 조선은 그가 동경하는 문화를 낳은 나라였으며 결코 침략할 수 없는 신성한 땅이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땅을 쳐들어간다니 이를 막아야 했다. 설령 할복을 명 받을지라도.
결국 센노 리큐는 자결하고 조선 땅은 왜구에 유린당해 도자기와 사기장 약탈이 이루어졌다.
교토는 조선 다구를 기반 삼아 다도 문화를 성숙시킨 도시다.
다도 문화와 도자기에 얽힌 그 치열한 연관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일본의 밑바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도와 도자기는 '국화와 칼'로 대표되는 일본문화의 뿌리에 해당한다.
일본 찻사발의 으뜸은 라쿠, 둘째는 하기, 셋째는 가라쓰다,
이것 모두 조선 사기장이 빚은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조선 사기장들은 줄곧 서늘한 칼날 위에 서 있었다
일본 도자기는 '국화와 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도의 화경청적의 철학 속에 감춰진 숨 막히는 무사들의 도자기 쟁탈전을 밝힌 이 책은
일본 다도의 정의부터 발전 상황 그리고 변질까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도의 완성은 무형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한적하고 고담한 일본 다도 경지에 조선 사기장이 빚은 도자기가 있었다.
이것은 일본 다도의 아이러니이자 한국 다도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조선의 자기를 발전해 그들만의 다도 문화를 잘 가꿔왔는데
한국은 초암차를 발전시키기는커녕 그것이 있었는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일본 다도에 숨은 조선 자기의 흔적을 파헤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되묻기도 한다.
“그렇게 좋은 문화를 너희는 왜 소중하게 여기면서 지켜내지 못했니?”
일제강점기의 탄압 탓으로 돌리기엔 그동안 우리들의 관심은 너무나 다른 곳에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갖고 이 책을 통해 한국의 도자기와 다도 문화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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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일본 도자기는 ‘국화와 칼’이다 / 04
Chapter 1
나라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이 가마를 만들다, 아카하다야키 / 16
Chapter 2
교토 1 천하제일의 찻사발을 만들다, 라쿠야키 / 76
Chapter 3
교토 2 다도, 사카이 상인과 하카타 상인이 맞서다 / 194
Chapter 4
교토 3 벚꽃을 닮은 절정의 화려함, 교야키 / 266
Chapter 5
교토 4 교토, 어디까지 보았니? -숨어 있는 그러나 사람을 홀리는- / 356
Chapter 6
우지, 오사카 교토 옆이라서 슬픈 우지와 오사카 / 418
Chapter 7
시코쿠 우동은 다카마쓰, 그릇은 마쓰야마 / 458
EPILOGUE
도자기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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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잇쇼켄메이(一生懸命)' - '목숨을 걸어 사명을 완수한다.'
필자는 일본 도자기를 취재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잇쇼켄메이'를 만났다. '잇쇼켄메이'는 도자기를 굽는 현장이나 역사 속 어디에나 있었다. 잇쇼켄메이는 목숨을 걸기 때문에 늘 시퍼런 긴장의 날이 서 있다.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사기장들은 서늘한 칼날 위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도자기는 '국화와 칼'이다. 칼날의 긴장을 담고 있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2
"不審花開,今日春 (불심화개,금일춘)" : '찾지 않아도 꽃이 피니 오늘은 봄날'이다.
"교토에 있어도 교토가 그립구나, 소쩍새 울음" <-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 (1685년무렵)
─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로 국내 시인의 복제
3
화경청적(和敬淸寂) : 화합과 공경, 맑음과 고요의 선정(禪定)상태를 이루는 마음.
와비사비 : 정적인 외로움과 고독의 미학
4
교토(京都)에는 사찰과 신사가 5,000개가 넘고 100년 이상 된 상점만 3,000여대다. 눈길을 주는 곳마다 헤아릴 수없는 문화재와 보물이 넘쳐난다. 이곳저곳 가는 데마다 풍광이 빼어나고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이 도시가 갖고 있는 특유의 냄새, 고전과 문학의 향취다.
혼슈의 중앙에 위치한 교토(京都)는 794년부터 1867년까지 무려 1073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단행되면서 수도를 에도로 옮겼다. 전국시대가 종식되고 바쿠후(幕府)체제가 들어선 다음부터 교토는 王(천황)의 도시, 도쿄는 쇼군의 도시였다.
바쿠후의 쇼군들이 에도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휘두르는 동안 허수아비 왕들은 교토에서 숨죽이며 지냈다. 그러다보니 교토에서는 왕과 귀족들의 우아한 삶을 위한 내면적인 예술과 문화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교토가 현재 다도의 성지, 메카가 돼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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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반 이후 중국을 중시하면서 한반도 출신들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이런 맥락에서 신라계 진씨들이 엉뚱하게도 진시황의 후예라고 秦氏를 붙여 족보조차 진시황 후예인 것처럼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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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廣隆寺)에는 국보 12개, 보물 48개를 소유하고 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⑪ 교토의 명찰 '고류지' 세운 진하승 장관
세계일보 : 2006.10.10 (화) 17:23
신라공예 극치 미륵불 봉안… '日국보 1호' 우뚝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왜로 온 진씨 가문의 발자취는 오늘의 교토땅과 밀착되어 있다. 그 상징적인 명소가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이다. 사찰 고류지는 교토시의 서부 지역 우스마사(太秦) 거리에 있다. 교토역 앞의 종합버스터미널에서 완행버스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찾아가기도 쉽다. 고류지에는 신라 적송으로 만들어진 일본 국보 제1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고, 역시 국보(지정번호는 없음)인 백제 녹나무로 만든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어 매우 유명하다.
보관 미륵불상은 서기 616년 신라 왕실이 왜나라 왕실로 보내준 불상(‘부상략기’)이다. 이 신라 불상은 1951년 6월9일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됐다.(廣隆寺, 1970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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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명찰 고류지는 스이코여왕(592∼628) 시대의 재무장관 진하승(秦河勝, 6∼7C)이 서기 603년 11월 몸소 세운 사찰이다. 그 당시 진하승 장관은 백제 왕실에서 왜 왕실로 보내준 백제 미륵불상을 모셔 사찰을 세웠다. 그런데 이를 신라에서 보내주었다며 ‘신라 불상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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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태자는 만조백관에게 ‘우리의 존귀한 불상을 누가 모셔 가겠소’라고 했을 때, 진하승 장관이 ‘신이 모셔가겠나이다’라고 진언해 불상을 모셔다 호코지를 세웠다”(‘부상략기’). 처음 명칭이 호코지였던 지금의 고류지에 전하는 ‘고류지연기’(緣起)에는 불상은 “미륵상이로다”라고 전한다. 이 미륵상은 현재 고류지에 봉안돼 있는 또 하나의 일본 국보로 백제 미륵상인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며 애칭은 ‘우는 미륵상’이다. 백제 유래라는 가장 오래된 근거는 15세기 문헌([山城州葛野郡楓野大堰鄕廣隆寺由來記])이다.
고류지의 본존불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본래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재위)이 보내준 미륵상이다. 일본 역사책은 “스이코여왕 24년(서기 616년) 7월 신라에서 나말죽세사(奈末竹世士)를 파견하여 불상을 가져다 바쳤다”(‘일본서기’)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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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오랜 세월 탓에 몸체에 도금됐던 금빛이 퇴화 박락하여 지금은 붉은 적송의 빛깔이다. 진평왕의 큰 따님은 슬기로웠다는 덕만공주로, 뒷날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제27대 선덕여왕(632∼647 재위)이다. 이웃 왜나라의 첫 여왕인 스이코여왕의 신병을 불력으로 치유토록 돕느라 미륵불상을 보내준 진평왕은 신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 왕위 승계를 고려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선덕여왕은 스이코여왕이 서거한 지 4년 뒤 옥좌에 앉았다. 고대 교토에 고류지를 세운 진하승은 당시 이 고장 최고의 부호이며 호족 진씨 가문의 지도자였다. 막강한 재력으로 스이코여왕(592∼628 재위) 왕실 재정을 돕는 장경(藏卿)인 재무장관도 지냈다. 쇼토쿠 태자 역시 진하승 장관을 존중하며 서로 절친했기 때문에 진평왕이 친히 보내준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고류지에 봉안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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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류지 경내에 세워져 있는 사찰 연혁 비석(1971년 건립)에는 ‘신라 미륵상’이라는 표시가 전혀 없다. 이 사찰 발행의 유래 책자 등도 신라 미륵상임을 밝히고 있지 않다. 더구나 연혁비는 “진하승은 진시황제의 후손이다”며 터무니없게도 중국인설을 내세우고 있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성씨는 진씨(秦氏)가 아니고 영씨(瀛氏)이며 이름은 정(政)이다. 진씨 가문 연구의 권위인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는 “진씨는 신라에서 도래한 사람들이다”(井上滿郞 ‘渡來人’)고 단정했다. 비석도, 유래책자도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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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로도 지정된 '이도(井戶)다완(茶宛)'의 '이도'라는 명칭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경상도 지방 '위등'이라는 설, 소유자가 '이도'였다는 설, 조선시대 관요의 광주분원에서 유약을 '衣土'라고 칭했다는 설 등등이 분분하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놀란다."
"양손에 들어오는 크기지만 우주를 삼켜버릴 것 같은 당당함이 있고, 그러면서도 어떤 권위나 의도마저도 없어 보여 무한한 모성의 포용력을 닮았다"
이도다완은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등장한 찻사발로, 분청사ㅣ기의 일종인 회청사기 계열이다. 회청사기는 백토로 꾸미지 않은 분청사기 재질이다. 분청사기의 백가쟁명 시기가 피원낸 걸작으로, 이도다완은 이처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굽 주위의 梅花皮와 아기 피부 같은 촉감, 비파색, 당당한 그릇 모양이 일품이어서 日本 茶道 성립기의 중심 茶器로 활용됐다.
* 매화피, 일본말로 '카이라기'는 거칠게 손질한 굽 주변과 밑의 유약이 소성할 때 불균일하게 뭉쳐서 오돌토돌하게 맺힌 매화꽃 모양의 유방울을 말한다. 흙과 유약, 불의 만남을 통해 생긴 우연의 산물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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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도자기의 귀신'으로 통하는 친구 아사카와 노리타카와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와 함께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 미술관'도 개설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런 미술관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숱한 난관이 있었을지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야나기는 조선민족의 창조하는 마음을 억압하고 정신ㅇ르 빼앗는 것에 대해 참기 어려운 고통이며 인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의 위대함을 알고 있던 미술사가에게 이는 바로 '인류의 손실'이었던 것이다. '세계 에술에서 훌륭한 위치를 차지하는 조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일본이해야 할 마땅한 人道임에도 불구하고 ........
"그 예술이 위대하다는 것은 곧 조선민족은 美에 대한 놀랄 만ㄹ한 직관의 소유자임을 뜻한다. 나는 그 예술을 통해 조선에 바치는 깊은 존경의마음을 금할 길 없다. 한 나라의 예술, 또는 예술을 낳은 마음을 파괴하고 억압하는것은 죄악 중의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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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요리집 가운데 하나인 '깃쵸'의 정신은 '일기일회'다. 다도에서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바로 그 정신이다. 일생에 한번 만나는 인연(기회)이니 정성껏 잘 대접하라는 다도의 행다 정신을 요리 서비스에 접목한 것이다.
일본 최고의 요리집 가운데 하나인 '깃쵸'의 정신은 '일기일회'다. 다도에서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바로 그 정신이다. 일생에 한번 만나는 인연(기회)이니 정성껏 잘 대접하라는 다도의 행다 정신을 요리 서비스에 접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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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를 대표하는 교야키는 도자기의 여러 효용 가운데 장식성을 극대화한 제품이 대부분이다. 화려하거나 우아하고, 세련되거나 매끄럽다. 그래서 그릇인데도 황홀하다. 때론 지나치지만 그 지나침도 나름대로 '과한 멋'이 있다. 애호가 모두에게 달항아리 같은 유유자적한 순백의 미를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교야키는 교야키대로, 라쿠야키는 라쿠야키대로 다도의 즐거움, 끽다의 즐거움을 충분히 담아낸다. 일본 찻사발의 으뜸은 라쿠요, 둘째는 하기, 셋째는 가라쓰라고 하는 '이치 리쿠, 니 하기, 산 가라쓰'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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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오사카 도심부 나카노시마 공원에 있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은 세계 제일의 동양도자 컬렉션이다. '아타카 컬렉션'을 기반으로 1982년에 문을 연 뒤 이병창씨의 기증품 363점을 포함해 한국 도자기 1,200여점, 중국 도자기 800여점 등 약 6,000여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고려청자인 '청자상감동자해석류화문수주'등 12점이 일본 중요 문화재, 남송 작품인 '유적천목다완' 등 2점의 중국 도자기는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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