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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 국내여행

(인제) 박인환 문학관



 







저 안에 들어앉으면 세월이 가면 노래가 나온다지?






 

박인환 (1926-1956)


1926년 강원도 인제 상동리에서 출생하였고, 11세에 서울로 이사하여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에서 서점을 경영하였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미국을 시찰하였다.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년 페노바르비탈을 과량 섭취하고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향년 29세).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부친이 인제면사무소 근무한 걸 보면 가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을텐데,

어떻게 서울 복판에다 서점을 내며, 한량으로 지낼 수가 있었을까?









 




 



영화제작자였던 남편이 일찍 죽자 이명숙 여사는 외동아들 최불암을 데리고 1950~60년대 명동에 대폿집 <은성>을 운영하였습니다. 김수영, 오상순,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천상병 등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세월이 가면(박인환 작시, 이진섭 작곡, 박인희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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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詩가 노래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
      9·28 수복 후, 피란 갔던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朴寅煥 등 문인들은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폐허가 된 명동에도 하나 둘 술집이 들어서고, 식당이 들어서서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게 되었다.
        당시 탤런트 崔佛岩(최불암)의 모친은「銀星(은성)」이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인환 등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않은 채 계속 술을 주문하자 술값부터 먼저 갚으라고 요구했다.
      이때 박인환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펜을 들고 종이에다 황급히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은성」주인의 슬픈 과거에 관한 시적 표현이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朴寅煥은 즉시 옆에 있던 작곡가 李眞燮(이진섭)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玄仁(현인)을 불러다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모든 것이 바로 그 술집 안에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노래를 듣던「은성」주인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도리어 애원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일화는「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의 단편「명동」에 나오는 이야기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
      박인환의「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연인을 잃고,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우리들의 아픈 가슴을 다시 한 번 울게 만들었던 화제작이었다.


      2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 성당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간 명동길을 걷다 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 세월의 쓸쓸함을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銀星(은성)으로 향했다.
      동석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자 끝내 빼는 바람에
      역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박인환의 친구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인환이 니가 시를 쓰면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
      그리고 시가 나오자 이진섭은 즉석에서 샹송풍의 곡을 붙여 흥얼겨렸다.
      이렇게「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지만 미처 명확한 단어로 표현 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 이란 시어을 발굴해냈다.


      3
      한편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1956년 이른 봄 저녁 명동 술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자,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 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 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 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 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4
      詩,「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詩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청년기에 그의 아름다운 사랑이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어떤 고통에도 퇴색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이 시를 쓰고 일주일 만에 31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지금, 구리시 망우산 공동묘지 사색의 공원에 잠들어 있다.

        (펌)





         




         



        물자가 귀하던 때라 닥치는 대로 걸치고 살던 시대인데, 박인환만은 달랐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외제 고급 천에 일류 양복점 라벨이 붙은 초콜릿색 싱글, 단정히 깎은 상고머리, 홍시빛 단색 넥타이, 커피색 양말, 초콜릿색 구두, 검정 박쥐 우산, ...... 박인환은 또한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었는데, 봄 가을에는 아이보리 레인코트, 겨울에는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쥐색빛 롱코트를 입었습니다. 심지어 계절마다 마시는 양주의 종류도 달랐습니다.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조니워커......





         



         1955년 겨울에 명동에 3층 건물에 <동방싸롱>이 문을 열었습니다. 사업가 김동근씨가 예술인을 위해 지어준 당시로서는 최신식 건물이었습니다. 1층은 차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팔고,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로 구성된 종합문화회관이었습니다.




         

         


         박인환이 모딜리아니를 좋아했답니다.

        저 당시 사람이 모딜리아니를 어찌 알고서 좋아할 정도가 됐을까?




         

         



        김수영의 모친은 충무로4가에서 <유명옥>이라는 빈대떡집을 운영하였습니다. 이곳은 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김수영, 박인환, 김경린, 등이 모여 . . . . .





         


        이곳은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뒤 값싼 양주를 공급해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포엠>입니다.





         



        해방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 시인 오장환이 운영하던 스무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하여 <마리서사>를 열었습니다. 마리서사에는 앙드레 보르통, 장 콕도 등 여러 문인들의 작품과 문예지, 화집들이 갖추어져 여러 시인과 소설가들이 자주 찾는 명소이자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발상지였습니다,. <마리서사>는 영리를 위한 사업이 아니라 청년 박인환이 문단에 데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정신적 의지처 역할을 했습니다. (1945~1948년 운영)





         


         


         

        (현인, 박인희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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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환 문학관과 붙어 있길래 들려봤는데, 허허허허

        인제군은 돈이 많은갑다.







         

         




         




         




         




         




         




         


        사진을 보니 풍경이 눈에 익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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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원도 들렸었다는 ‘인제 짜박두부집’ ─ 나는 합강리에 있다는 걸로 알았는데,

        버스터미널 근처인, <박인환 문학관> 바로 앞에 있구만요.




         

         


         

         








         




        백종원이 먹던 그 두부가 아닌 모양인갑다.


        콩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슈퍼에서 파는 1000원짜리 두부와도 차이를 못 느끼겠습디다.

        진동계곡《○○집》의 두부 맛도 좀 변하긴 했더구만은, 그래도 그 집은 그럭저럭 옛맛을 간직하고 있는 편인데,

        이 집 두부는…… 영 아닙디다. (나 혼자만의 입맛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요. 두부가 그렇단 것이지 짜박두부는 맛이 괜찮습니다.

        누구나 집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도 있어요.

        1000원짜리 야들야들한 두부를 사다가,, 끓는 물에 들기름 붓고, 두부 넣고, 고추가루 파 썰어 넣으면 끝.





        제 어머니가 하는 방식은 저 ‘짜박두부’란 것과 ‘두부전골’이라는 것의 중간쯤 방식인 것 같습니다.

        보기엔 간단하니 쉬운데, 아무도 똑같은 맛을 내지 못하는 ─

        물론 어머니가 만드셨던 두부는 비교불가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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