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齋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

2018. 2. 25. 10:45미술/한국화 옛그림

 

 

 

 

 

 

 

묘작도(猫雀圖) 비단에 설채 94.7 × 43.2 국립중앙미술관 소장

 


 

 화재 변상벽은 일생동안 고양이 그림을 하도 많이 그려서 '변 고양이' 라는 별명이 붙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고양이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것은 단지 그림의 대상으로 고양이를 택했다는 것이라기 보다도 오히려 그가 평생을 두고 고양이를 지극히 사랑하고 또 좋아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변상벽의 어진 눈은 항상 신변에서 고양이의 재롱과 습성을 벗삼아 지켜보면서 즐겼을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고양이들의 생태 표현이 사뭇 실감이 넘치는 것은 물론 그의 뛰어난 사실력에도 연유하겠지만, 고양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사랑과 이해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

 

 신록의 계절인 듯 새싹이 돋는 고목나무 가지 위에 참새떼가 놀라 지저귀고 장난꾸러기 고양이 한 쌍이 희롱하는 모습은 다시금 보아도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참새들은 다급하게 지저귀고 나무에 뛰어오른 고양이는 짐짓 땅 위에 앉은 고양이를 굽어보며 아옹대는 모양이 여간만한 사랑으로 감싸인 정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고양이의 묘사에는 박진하는 사실력을 다했고 참새떼의 표현도 이만저만한 솜씨가 아니지만 이 그림에 한층의 격을 붙여 준 것은 대범하게 점 찍어 표현한 연초록 나뭇잎새들의 운치가 아닐까 한다.

 

 고양이의 박진하는 사실 표현에 비하면 너무나 덤덤하고도 소략한 표현이지만 속되어지기 쉬운 이러한 애완동물화에 한층의 격조를 붙여 준 것은 바로 이러한 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이나 일본의 화조, 동물 그림이 대개는 농채를 써서 번거로워 보이는 것에 비하면 변상벽의 이 고양이 그림은 갓맑은 해학과 시정을 일깨워 준다고 할 수도 있어서 한국 그림의 특성이 이런 면에서도 짙게 풍겨진다고 말할 수 있을것 같다. 앳된 고양이들의 깔끔한 생태에 정을 쏟을 수 있었던 변상벽의 사람됨이 이 그림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고양이를 사랑 할 수 있는 사나이가 진실로 여자를 사랑할 줄 안다는 속담에도 수긍이 가는 것 같기도 해서 과연 변상벽은 멋쟁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 혜곡 최순우,『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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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추묘(菊庭秋猫) 지본담채 23.4 × 29.5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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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접도(猫蝶圖) 지본담채 24.5 × 31.2 국립중안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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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영자도(母鷄領子圖) 비단에 담채 94.4 × 44.3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군묘작작도(群描鵲雀圖) 지본담채 60 124.5 서울대박물관 소장

 

 

 

 

묘작도 견본채색 34.9 × 54.6 일본동경국립박물관소장

 

 

 

 

 

 

 

 

 

<암탉과 수탉>  종이에 채색  30 × 40  간송미술관소장

 

 

 

 

 

 

 

 

 

 

조선 후기 화조화 중에서도 가장 사실적이고 정밀한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


[어미닭과 병아리]는 조선후기 화원화가(畵員畵家) 변상벽(卞相璧, 생몰년 미상)의 그림이다. 고양이와 닭을 잘 그려서 ‘변고양이’, ‘변계(卞鷄)’ 라는 별명을 가졌던 화가의 작품답게 그림 속의 닭과 병아리는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조선후기 화조화 중에서도 가장 사실적이고 정밀한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작지만 분주한 병아리들의 삐약 소리, 그릇에 콕콕 부리를 찍는 소리, 가끔씩 파닥이는 어미닭의 날갯짓 소리. 따스한 봄날 한옥 방에 들어앉아 창을 열어젖히면 펼쳐질 것 같은 장면이다. 한 마리 어미닭과 열네 마리 노랑 까망 병아리들이 폭신해진 연둣빛 마당에서 모이 먹기가 한창이다. 어미닭은 병아리에게 벌을 물어주고 있는데, 따스하면서도 똘똘해 보이는 눈을 가졌다. 어미닭은 사실상 이 그림의 주인공인데, 똘똘한 눈뿐만 아니라 적당히 살이 오른 당당한 몸체, 가지런하고 윤기 흐르는 깃털을 가진 명민하고 믿음직한 어미의 모습이다. 열네 마리나 되는 병아리들을 건사하려면 이 정도의 위풍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미닭의 깃털은 하나하나 공들여 그려졌고, 또랑또랑한 눈, 야무진 부리, 당당하게 서 있는 다리 역시 그 모양새와 묘사가 매우 정밀하며 생생하다. 깃털 그린 것을 자세히 보면 깃털 하나하나 끝으로 갈수록 색을 진하게 해서 명암을 주었고, 이것이 윤기 흐르는 건강한 암탉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꽁무니 쪽의 긴 깃털은 몰골법으로 활달하게 그려서 공필과 활달한 필치가 공존하고 있다. 마치 도감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지만, 이 그림에는 도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어미와 새끼가 만드는 따뜻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병아리의 묘사 또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세밀하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솜털 같은 모습을 어찌나 잘 묘사를 했는지! 깃털과 형태의 묘사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자세와 새끼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귀엽고 다양한 모습의 묘사를 보면 변상벽이 단지 그림 솜씨만 좋은 화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미 뒤꽁무니에 숨어 얼굴도 안 보이는 놈, 어미 다리 사이 아늑한 공간에 앉아 있는 놈, 서로 먹겠다고 밀고 당기는 놈, 어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놈, 물마시고 하늘 보는 놈, 혼자 동떨어져 있는 놈... 여러 모습들이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림의 배경을 보면, 괴석과 나비, 벌, 꽃이 있다. 나비와 벌, 꽃은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괴석은 대담하게 몇 번의 붓질로 그렸다. 이 그림은 꽃과 새가 어우러진 화조화로 분류될 수 있지만 주인공인 닭과 병아리를 세밀하게 그리고 괴석과 배경은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그리는 특징을 보여준다. 화조화는 대개 같은 비중으로 꽃과 새, 괴석이나 나무를 그리는 것에 비해 동물화에서 동물을 세밀하게 그리거나 강조하여 그리고 나무와 같은 배경을 간략하게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그림은 후자의 특징을 보여준다. 사실적으로 자세하게 그린 병아리와 닭 뒤로 활달하게 몇 번의 붓질로 완성한 괴석, 상대적으로 담채를 사용하여 얌전하게 그린 꽃과 나비는 따뜻한 봄날의 분위기를 내며 훌륭한 배경이 된다.


변상벽, [어미닭과 병아리],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101×5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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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진을 그린 화가 변상벽

국립중앙박물관 화조영모화실에는 이 그림과 또 다른 그림인 [고양이와 참새(묘작도:猫雀圖)]가 명품으로 손꼽히며 자주 걸린다. 그러나 이 두 그림을 그린 변상벽은 그 생몰년조차 불분명하며 자세한 생애가 알려져 있지 않다. 어진(御眞, 왕의 초상)을 그린 기록 등을 통해 영조 연간(1725-1776)에 활동했던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화원화가는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변상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동시대 사람들이 남긴 화가들의 간략한 전기(傳記), 화평(畵評)을 통해 그의 화가로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변상벽의 자는 완보(完甫), 호는 화재(和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화원화가로 현감(縣監)까지 지냈다. 닭과 고양이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초상화도 잘 그려서 국수(國手)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백여 장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히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초상화는 거의 없다. 그러나 1763년과 1773년에 영조의 어진을 그렸고, 이 중 1773년의 어진 화사에서는 주관화사로 활동했으며,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영조대의 문인 윤급(尹汲, 1697-1770)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국립중앙박물에 매우 세밀하게 그려진 윤급의 전신관복본 초상화가 있는데 기록 속의 [윤급 초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초상화에서도 조선 최고로 인정받았던 화가 변상벽의 면모를 읽을 수 있으며, 남아 있는 화조화나 동물화, 이러한 초상화 관련 기록을 통해 보면 변상벽은 정밀하게 묘사하는 그림에 능한 화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본 변상벽의 그림

변상벽의 닭과 고양이 그림을 보고 읊은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시가 있다.

제변상벽모계영자도(題卞相璧母鷄領子圖)
: 변상벽이 그린 어미닭과 병아리 그림을 보고 쓰다
 
변상벽을 변고양이라고 부르듯이 고양이 그림으로 유명하네
이번에 다시 닭과 병아리의 그림을 보니 마리마다 살아있는 듯하네
어미닭은 괜스레 노해있고 안색이 사나운 표정
목덜미털 곤두서 고슴도치 닮았고 건드릴까봐 꼬꼬댁거리네
방앗간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땅바닥을 후벼 파면서
낟알을 찾아내면 또 쪼는 척하는데 배고픔을 참아내는 어미 마음이야
보이는 것도 없는데 놀라는 푸닥거리 숲 끝에 얼핏 올빼미가 지나가네
정말로 자애로운 그 모성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 누가 뺏으랴
옹기종기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들 황갈색 연한 털 주둥이는 이제 여물은 듯 닭벼슬은 아직도 제 색을 내지 못했고
그 중에 두 병아리는 쫓고 쫓기며 황급히도 어디를 가는지
앞선 놈이 주둥이에 물려 있는 것을 뒤선 놈이 따라가서 빼앗으려는구나
두 놈의 병아리 지렁이를 서로 물고 놓으려 하지 않네
한놈은 어미 뒤에서 가려운 곳을 비비고 한 놈은 혼자 떨어져 배추 싹을 쪼고 있네
형형의 세세 묘사가 핍진하고 도도한 기운이 생동하네
후문에 듣건데 처음 그릴 때 수탉이 오인할 정도였다네
역시 그가 고양이를 그렸을 때 쥐들도 마찬가지였을까
뛰어난 솜씨 그런 경지에 이르니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네
못된 화가들이 산수를 그리면서 거친 필치만 보여주네.

 

- 정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권 6.

 

 

이 시 한 편을 통해서 변상벽과 그가 그린 그림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그가 그린 닭과 병아리 그림을 보고 그 사실에 가까운 생생함에 감탄하며 수탉이 이 그림을 보고 진짜라고 오인할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시를 자세히 보면 이 그림과 동일한 그림을 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소재가 거의 동일하고 병아리들의 모습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변상벽은 닭과 병아리 그림을 즐겨 그렸던 듯 하며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같은 소재로 그린 소품이 전한다.

 

변상벽이 단지 닭과 병아리를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어미닭의 모정이나 어미와 새끼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정 또한 화폭에 담아냈다는 것을 그림을 자세히 보며 읽어낼 수 있었는데, 정약용 또한 같은 것을 감지하고 화평으로 남긴 것을 보니 그림 감상이 더욱 흥미롭다. 마지막에는 고양이도 잘 그렸다는데 쥐도 그것을 실제로 오인했을까 (…) 라고 물으며, 산수화가들이 거친 필치로 그리는 그림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물 그림보다는 산수화 그리는 것을 더 높게 보았다. 많은 화가들이 그런 분위기에 빠져 잘 그리지도 않고 개성 없는 그림들을 그리는 것에 비해 변상벽은 사실적이고 정밀하게 그림으로써 채색 화조화에서 새로운 전통을 만든 화가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김홍도(金弘道),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  지본채색, 30.1 x 46.1 cm, 간송미술관

 

 

고양이 그림은 초상에도 능한 변상벽(卞相壁, 1730~?)이 크게 명성을 얻었으나 이암(李巖,1499~1545 이후)과 정선(鄭敾, 1676~1759)으로부터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 이르기까지 문인화가들도 즐겨 그린 동물소재의 하나였다. 고양이와 나비를 함께 그리는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고양이의 묘(描)와 70노인을 상징하는 모(芼)와 나비의 접(蝶)과 80노인의 질(?)이 발음이 같기에 이 소재의 그림을 모질도(??圖)라고도 지칭한다.

고양이의 터럭이나 나비의 얼룩무늬 등 매우 섬세하며 사실적인 표현의 사생기법이 돋보이며, 좌측의 패랭이꽃과 제비꽃 등의 묘사에서는 청(淸) 궁정화가의 기법과도 상통되는 면이 감지된다. 현재는 족자로 되어 있으나 중앙의 접힌 자국 등 화첩에서 산락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 좌우에 적당한 비중 등 구정 및 구도에 있어서도 뛰어남을 읽을 수 있다. 나비를 향한 고양이의 시선, 전체적으로 화사하면서도 따사로운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자료: 허접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