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9. 20:17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미술감상 초보자가 읽기에 맞춤한 책이구만요.
옛 그림은 배경지식이 전혀 없으면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 쉽지 않다. 그림이 왜 그려졌는지, 누가 그렸는지, 무엇을 그렸는지를 이야기하며 옛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안내 지도를 차근차근 그려 나가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 미술 입문서이다. 그림 안에 숨겨진 다채로운 이야기를 하나둘 재미있게 풀어내며, 그것이 곧 옛 사람들이 말한 ‘그림을 보는 것을 넘어 읽는’ 것의 의미임을 깨달을 수 있다.
2014. 10.
저자 : 윤철규
저자 윤철규는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에 들어가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한국의 미》 전집 출판을 담당했고, 이후 중앙경제신문, 중앙일보에서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1999년에 일본으로 유학, 교토 불교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도쿄 학습원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일본의 17, 18세기 회화사이다. 귀국 후에는 (주)서울옥션의 대표 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사이트 koreanart21.com을 운영 중이다. 번역한 책으로 《한자의 기원》, 《절대지식 세계고전》, 《수묵, 인간과 자연을 그리다》, 《교양으로 읽어야 할 일본지식》, 《천지가 다정하니 풍월은 끝이 없네》, 《추사 김정희 연구: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공동) 등이 있다.
작가의 말_아빠가 읽어 주는 한국 미술
프롤로그_옛 그림은 왜 어렵게 느껴질까?
1. 옛 그림을 감상하기 전에
옛 그림은 무엇을 그렸을까?
옛 그림은 왜 그렸을까?
옛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2. 옛 그림을 읽는 법 / 산수화
마음속의 이상향을 그리다
산과 강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화는?
잘 그린 산수화란 어떤 그림일까?
산수화에도 유행과 취향이 있다!
산수화에는 왜 비슷한 그림이 많을까?
<몽유도원도>는 왜 명작일까?
금강산을 사랑한 화가, 겸재 정선
산수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 산수화에 있는 한문은 무엇일까?
★ 그림에 찍힌 도장은 무엇일까?
3. 옛 그림을 읽는 법 / 고사 인물도와 초상화
옛이야기를 화폭에 담다
눈 속 매화를 찾으러 간 사람은?
달마대사 그림은 왜 인기가 많았을까?
김홍도의 특기였던 신선 그림
우리 옛 그림에 초상화가 많은 이유
잘 그린 초상화는 어떤 그림일까?
★ 자화상은 언제부터 그려졌을까?
4. 옛 그림을 읽는 법 / 풍속화
궁중 행사도와 의궤는 어떻게 다를까?
왕이 거울처럼 걸어 두고 본 그림, 감계화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한 <화성능행도>
풍속화는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을까?
인생의 행복을 담은 그림, 평생도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풍속화
★ 김홍도는 왜 풍속화의 대가일까?
5. 옛 그림을 읽는 법 / 화조화와 민화
새와 꽃의 아름다움을 그리다
화조화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최 메추라기, 변 고양이, 남 나비의 의미는?
풀과 벌레 그림을 잘 그린 명수들
선비들은 왜 사군자를 좋아했을까?
까치호랑이 그림의 기구한 운명
옛 그림에 호랑이가 많은 이유는?
★ 민화의 또 다른 대표 그림, 문자도
에필로그_옛 그림을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성지학사 편집부 지음
第七冊 竹譜
第八冊 梅譜
第九冊 菊譜
第十冊 草蟲花卉譜 (上冊)
第十一冊 草蟲花卉譜 (下冊)
第十二冊 翎毛花卉譜 (上冊)
第十三冊 翎毛花卉譜 (下冊)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라고도 한다.
제1집은 전 5권으로 1679년에 간행되었으며 왕개가 단독으로 저술하였다.
제2집과 제3집은 왕개와 그 형제인 왕시(王蓍), 왕얼(王臬)이 함께 편찬하였으며 모두 1701년에 출시되었다.
‘개자원(芥子園)’이라는 이름은 난징(南京)에 있던 이어(李漁)의 별장 이름에서 따왔다.
중국화의 기본적인 이념이나 묘사 방법을 예시한 청나라 때의 초학자용 입문서이다.
그림을 배우는 데 꼭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 많은 독자들을 확보했다.
저자 왕개는 청나라 초기 강희(康熙) 황제 시대 때 화가로, 남경에 살면서 산수화를 잘 그렸다.
제1집 5권은 왕개가 단독으로 쓴 것이고, 제2집 8권과 제3집 4권은 왕개와 왕시, 왕얼의 공저이다.
중국 회화책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책으로, 간행본 외에도 수많은 판본이 있는데,
그러한 통행본(通行本)의 대부분은 후세 사람이 내용을 덧붙여 권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통행본 가운데는 원간본(原刊本)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제4집이라는 위서가 덧붙여진 것도 있다.
제1집 1권은 ‘청재당화학천설(靑在堂畵學淺說)’이라는 제목 아래
우선 ‘회화 18칙’이라는 부분에서 중국화의 근본 이념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어서 ‘설색각법(設色各法) 26칙’을 들어 물감의 종류와 성질, 제조법, 사용상의 주의점,
먹 · 맥반 · 비단 · 종이에 대한 해설에서 낙관까지 초학자에게 필요한 지식을 망라하고 있다.
제2권은 중국화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수목이나 잎을 그리는 방법을 예를 들어 보여 주고,
제3권은 돌과 바위, 봉우리, 폭포 등을 그리는 법,
제4권은 점경인물(點景人物)과 점경조수(點景鳥獸), 가옥 · 성곽 · 교량 · 사원을 그리는 방법을 그림으로 예시하면서 해설하고
있다.
제1집에 이어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이어의 사위인 심심우(沈心友)가 왕개에게 의뢰해서
심씨 가문에 전하던 이류방(李流芳)의 화보를 토대로 크게 손질을 가해 만들었다고 한다.
제1집이 완성되자 그것을 보고 문인들이 높이 평가했고, 속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그래서 왕개는 그의 동생 왕시를 불러 왕얼과 함께 매난국죽(梅蘭菊竹)을 그리는 방법을 예시하는 제2집을 편집했다.
제3집에서는 꽃을 그리는 다양한 방법을 예시하고 있다.
[Daum백과] 개자원화전 – 절대지식 중국고전, 다케우치 미노루, 이다미디어
조선시대 도화서(초기:도화원)에 소속된 화원은 20~30명이고, 화학생이라고 하는 그림 배우는 학생 15명 정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화원은 어릴 때부터 도화서에 들어가 선배화원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그림 공부를 했는데 이때 교과서로 쓰인 것이 화본이다.
도화서 뿐 아니라 대대로 화원이 나왔던 집안에서도 화본을 가지고 자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그림을 접하지 않거나 화원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마추어 문인 작가들은 이런 화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거나, 자신이 본 것을 수첩 같은 것에 그려 모아 자신 만의 화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가 되자 중국으로부터 많은 출판물들이 넘어오게 되었는데 그중에 유명한 책이『고씨화보』,『당시화보』가 있었고, 첨단기술을 활용해 컬러로 만들어진 컬러화보집으로『개자원화전』이 있었다.
2
곽희, <早春圖>, 견본수묵채색, 158.3×108.1㎝, 북송(1072년) 고궁박물원 소장
〈연사모종도〉 전 안견, 16세기, 비단에 수묵, 80.4x47.9cm, 일본대화문화관
3
예찬, <용슬재도(容膝齋圖)>, 원, 1372년, 종이에 먹, 74.7×35.5cm, 대북고궁박물원
적막한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예찬(倪瓚,1306~1374)이 그린 「용슬재도(容膝齋圖)」는 그에 대한 대답이다. 바스라질 것 같은 낮은 언덕. 메마른 나무 다섯 그루.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빈 정자. 오직 그것만이 전부다. 움직임이라고는 바람 한 점, 구름 한 조각 감지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볕조차 땅에 발을 뻗으려면 결심이 필요하다. 고요가 깨지는 쨍그렁 소리에 스스로가 놀라지 않으려면 말이다. 근경(近景)뿐 만이 아니다. 중경(中景)의 아득한 강과 원경(遠景)에 누워 있는 무심한 산도 마찬가지다. 침묵의 소리만이 요란할 뿐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적막 그 자체다.
예찬은 황공망과 함께 원말4대가를 대표하는 작가다. 「용슬재도」는 예찬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걸작이다. 용슬재는 무릎을 겨우 펼 수 있을 만큼 작은 정자라는 뜻이다. 그림 속 정자를 보니 그 제목이 이해된다. 「용슬재도」는 근경, 중경, 원경이 뚜렷한 삼단식(三段式) 구도다. 삼단식 구도는 예찬 그림의 특징이다. 물기 적은 갈필(渴筆)에 연한 먹을 묻혀 간결하게 그린 것도 그만의 특징이다. 그는 근경과 원경을 똑같은 농담(濃淡)으로 그렸다. 가까운 곳은 진하게, 먼 곳은 연하게 그리는 근농원담(近濃遠淡)의 구분도 거의 하지 않았다. 예찬은 언덕이나 바위를 그릴 때 절대준(折帶?)을 썼다. 절대준은 붓을 옆으로 뉘어 수평으로 긋다 갑자기 방향을 꺾어 수직으로 획을 그어 내리는 필법이다. 수평지층에 수직 단층이 보이는 바위산의 모습을 묘사할 때 예찬이 즐겨 쓴 필법이다. 절대준으로 그린 암석은 태호(太湖) 지역의 침적된 지층의 단면과 흡사하다. 언덕을 보고 바스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그 때문이다.
「용슬재도」는 평온하고 담담한 그림이다. 조용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예찬의 그림은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오는 칡뿌리 같다. 보면 볼수록 참맛이 느껴진다. 예찬의 그림은 크게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사물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오랫동안 관찰한 후에 붓을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나무를 모르는 사람 눈에는 모든 나무가 비슷하다. 그 나무가 그 나무 같다. 나무를 아는 사람 눈에는 수종(樹種)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수령과 발육 상태까지 보인다. 전경의 언덕에 서 있는 나무에는 예찬의 예리함이 감지된다. 얼핏 보면 모두 같은 필법으로 그린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세 종류의 나무가 뒤섞여 있다. 두 그루는 점엽법(點葉法)으로 농묵을 찍어 잎을 그렸다. 두 그루는 수직으로 쳐지듯 잎을 그렸고 마지막 한 그루는 고사(枯死)된 듯 잎이 다 떨어지고 없다. 같은 듯 다른 나무다. 점엽법으로 나무에 찍은 농묵은 바위 곳곳에도 찍었다. 다른 듯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함이다.
예찬은 강소성(江蘇省)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정(珽)이고 자는 원진(元鎭), 현영(玄瑛)이다. 호는 운림(雲林), 운림생(雲林生), 운림자(雲林子)인데 운림을 가장 즐겨 썼다. 별호는 풍월주인(風月主人), 소한선경(蕭閑仙卿), 주양관주(朱陽館主), 무주암주(無住庵主), 유마힐(維摩詰), 정명거사(淨名居士) 등 아주 많다. 호와 별호는 그의 집에 있던 운림당(雲林堂), 소한선정(逍閑仙亭), 주양빈관(朱陽賓館), 청비각(淸?閣)등의 전각에서 비롯되었다. 전각의 이름과 호를 보면 그가 추구한 세계가 불교와 도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부호의 아들(서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보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기가 원(元,1279~1368) 명(明, 1368~1644) 교체기였던 만큼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야 했다. 그는 35살 때 세금 독촉을 피해 전답을 팔아 가족과 함께 유랑을 떠났다. 처음에는 관아의 독촉을 피해 시작된 유랑이 나중에는 반란군 때문으로 대상이 바뀌었다.
유랑하는 동안 그의 관심은 오로지 서화뿐이었다. 예찬이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바는 일기(逸氣)였다. 그는 대나무를 그린 제시에서 “나의 대나무는 단지 가슴속의 일기를 그릴 뿐이니 어찌 다시 그 닮음과 닮지 않음, 잎의 무성함과 성김, 가지의 기움과 곧음을 비교하겠는가?”라고 했다. 형상을 닮게 그리는 것보다 세상을 벗어난 기운을 그리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그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한 일기는 무엇일까.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은 정신적인 풍모다. 소쇄(瀟灑)한 기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쇄한 기운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담양에 있는 소쇄원(潚灑園)에 가 보시기 바란다. 소쇄원 제월당(霽月堂)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대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된다.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도 좋다. 소쇄한 기운은 물소리 바람소리 같은 것이다. 그의 그림은 「용슬재도」처럼 평담하고 탈속한 경지를 담고 있다. 세속의 굴레를 벗어난 고일(高逸)한 경지를 드러냈다. 속세와 섞여 있으나 마음이 한가롭고 자유로운 선비가 빚어낸 경지였다.
그는 방랑생활을 계속하던 중 58세 때 아내를 잃었다. 상처한 지 5년 후,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명 왕조가 세워지고 천하는 평정을 되찾았다. 홀로 남겨진 예찬은 늙고 외로워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독하고 쓸쓸하게 지내다 6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용슬재도」 상단에는 ‘임자년(1372) 7월 7일 운림생이 그렸다’라고 적혀 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소장자의 요청에 의해 다시 제발을 썼다. 소장자가 의사였던 인중(仁仲)이란 사람에게 이 그림을 주고자 글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예찬은 1374년에 다시 제발을 써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였다.
그는 그림으로 알려진 화가이기 전에 후배 선비들이 닮고 싶은 선배의 표상이었다. 그는 인품이 고결하고 청고하여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생존시에 초상화를 그린 작자미상의 「예찬상(倪瓚像)」이 전한다. 청(淸)대의 나빙(羅聘)도 「정명거사상」을 그렸다. 두 작품 모두 초탈하면서도 고아함을 추구했던 예찬의 의취가 느껴지는 초상화다. 그는 결벽증이 심한 것으로 유명했다. ‘세수 한 번 하는데 물을 수십 번 바꾸었고, 갓과 옷을 수십 번 털었다’고 전한다. 생활공간은 물론 오동나무까지 닦게 했다는 그의 기행(奇行)은 「운림세동도(雲林洗桐圖)」라는 제목으로 많은 화가들의 화제(?題)가 되었다. 특히 명대의 최자충(崔子忠)과 조선의 장승업(張承業)이 그린 작품이 유명하다.
「용슬재도」는 강을 중심으로 근경의 언덕과 강 건너 대안(對岸)으로 나눠지는 일하양안(一河兩岸)의 구도다. 근경에서 뻗은 나무줄기의 끝부분을 기준선으로 가로로 잘라내면 두 개의 그림으로 독립된다. 근경과 원경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마치 두 개의 풍경을 조합해놓은 듯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다. 그렇다면 「용슬재도」를 두 개로 분리해서 독립시키면 현재와 같은 걸작이 될 수 있을까. 독립될 수는 있으나 현재와 같은 의취는 사라진다. 여백에 의해 연결되는 넓은 중경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경은 원경 때문에 돋보이고 원경은 근경 때문에 존재감이 드러난다. 근경과 원경은 한 몸이다.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선사는 법안종(法眼宗)의 3세 종조다. 법안종은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이 당말(唐末)에 세운 종파로 천태덕소(天台德韶)를 거쳐 영명연수에게 가르침이 전해졌다. 선종5가 중 가장 늦게 형성되었으나 송초(宋初)까지 운문종과 함께 중국 전역에 큰 위세를 떨쳤다. 영명연수선사는 법안문익과 천태덕소의 종풍을 이어받았다. 여기에 청량징관(淸凉澄觀,738~839),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을 비롯하여 천태지자, 담연, 제관, 승조 등 여러 사람의 사상을 흡수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 선정쌍수(禪淨雙修), 삼교일치(三敎一致)를 강조했다.
그는 『종경록(宗鏡錄)』 100권과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3권을 지어 선교일치론을 체계화했다. 그는 『종경록』 서문에서 ‘한마음(一心)을 들어 으뜸(宗)으로 삼고, 만법(萬法)을 비춤이 거울(鏡)과 같다’고 전재한 뒤 ‘옛 문헌의 깊을 뜻을 모아 보배로운 원교(圓敎)의 이치를 모두 모아 이를 함께 현양하는 것이 록(錄)’이라 했다. 여기에 인용된 전적은 화엄 전적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천태교 전적이다. 즉 화엄, 유식, 천태의 삼종을 소의로 하여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 일심위종(一心爲宗)의 입장에서 유심의 뜻을 밝히고자 엮은 것이 『종경록』 이다. 그는 ‘불법은 바다와 같은 것이어서 일체의 모든 것을 포용하며, 궁극의 진리는 허공과 같아서 어느 문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연수선사는 왜 일심(一心)이라 했을까? ‘참됨과 망령됨(眞妄), 물듦과 깨끗함(染淨), 일체의 만법이 둘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이름 한다’라고 했다. 즉 일심은 바로 일체의 유정이 모두 갖추고 있는 자성청정여래장(自性淸淨如來藏)의 각성(覺性)이다. 그래서 연수선사는 ‘일승법(一乘法)이 일심’이라고 단언하고 ‘일심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진여문’이라 했다. ‘일체법은 모자라거나 적지 않다. 일체의 법행이 자기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마음이 저절로 알고 다시 별다른 마음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곧바로 진심을 요달하면 자연히 진실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음을 일컬어 진원(眞源), 각해(覺海), 진심(眞心), 진여(眞如), 법성(法性), 여래청정심(如來淸淨心), 공성(空性), 심지(心地) 등이라고 한다.
『종경록』 서문에는 송나라 상서였던 양걸(楊傑)이 지은 명문이 적혀 있다.
“모든 부처님의 참 말씀(諸佛眞語)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以心爲宗), 중생이 믿는 도(衆生信道)는 근본을 거울로 삼는다(以宗爲鑑). 만약 사람이 부처로써 거울을 삼는다면 계율, 선정, 지혜(戒定慧)가 모든 선(善)의 근본(宗)이 되어 사람과 하늘, 성문 연각 보살 여래가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줄 알 것이므로 온갖 착한 무리들은 믿어 받지 않을 이 없고, 만약 중생으로써 거울을 삼는다면 탐냄 성냄 어리석음이 모든 악(惡)의 근본(宗)이 되어 수라 축생 지옥 아귀가 이로부터 나오는 줄 알 것이므로 온갖 나쁜 무리들은 두려워 꺼리지 않음이 없으리라. 그러나 선악이 비록 다르다하더라도 그 근본(宗)은 동일하다.”
이러한 연유로 『종경록』은 종감록(宗鑑錄) 또는 심감록(心鑑錄), 심경록(心鏡錄)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워낙 감동적인 문장이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음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서 만상(萬象)이 또렷하여 부처와 중생은 그 영상(影像)이며, 열반(涅槃)과 생사(生死)는 모두가 억지로 붙인 이름이다. 거울의 바탕은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비추고 거울의 빛은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하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돌이켜 그 마음을 비춰보건대 신령하고 밝고 깊고 고요하고 넓고 크고 막힘없이 통하며, 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닦음이 없고 증득함이 없으며, 더럽힐 수 있는 먼지가 없고 닦을 만한 때(垢)가 없어서 온갖 모든 법의 종(宗)임을 알겠다.”
이윽고 『종경록』을 요약할 만한 문장이 이어진다.
“중생계(衆生界)가 곧 모든 부처님의 세계(佛界)로되 미혹함 때문에 중생이 되었고,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나 깨침으로 인하여 부처님이 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 이후 선종의 조사들이나 염불선의 조사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부처와 우리가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것.
『만선동귀집』에서는 선과 염불을 함께 권장하여 선정일치를 강조했다. 평소에 그는 좌선 뿐만 아니라 염불과 송경(誦經)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이라 굳게 믿었다. 출가하기 전이었던 20세에도 그는 늘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신심을 키웠다. 출가 후에는 선과 염불을 겸하였다. 즉 낮에는 선의 종지를 밝히고 밤에는 ‘아미타불’을 염하였다. 그는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주장하여 선과 정토의 일치점을 강조했다. 그야말로 선정쌍수의 수행법이었다.
선의 황금기였던 당대가 지나고 송대가 되자 불교계는 여러 가지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선의 대중화와 함께 아미타불을 연불하는 염불선이 대중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영명연수선사가 있었다. 선도 중요하지만 돌아가신 분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염불도 중요하다는 것. 내 마음의 자성을 밝히는 염불이야 말로 진짜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수행이라는 것. 영명연수선사는 그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새가 높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양쪽 날개가 필요하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힘들다. 선과 염불은 수행의 양쪽 날개다. 근경과 원경이 각각 독립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서로 의존하고 예찬의 「용슬재도」처럼 선과 염불도 마찬가지다.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가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선과 염불은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을 내 것이 되게 하는 수행법이다.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실천법이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이 염불이라면 법장비구의 원력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는 선이다. 선과 염불은 둘이 아니다. 하나다. 여산혜원(慧遠, 334~416) 선사로부터 시작된 염불의 전통은 영명연수선사에 의해 송대에 크게 부흥했다. 그래서 영명연수선사는 송대 정토교의 원조로 추앙받는다.
(출처: 법보신문. 조정육)
〈죽수계정도〉 허련,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21.2×26.3cm, 서울대학교박물관
4
〈춘경산행도〉 마원, 13세기, 비단에 채색, 27.4x43.1cm,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어부도〉 장로, 16세기, 비단에 수묵, 69.2x138cm, 일본 도쿄 호국사
정선의 <‘단발령 망금강산도>’.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5
최북의 「공산무인도 空山無人圖」
글쓴이 ; 석야 신웅순
최북, 「공산무인도」종이에 엷은 색, 31 * 36.1 cm, 개인 소장
봄날이다. 아무도 없는 모옥 한 채, 그 옆에는 수북이 꽃망울 맺힌 두 그루 커다란 나무가 있고, 왼쪽에는 수풀 우거진 나지막한 계곡이 있다. 그리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가깝고도 먼 산등성이가 있다. 하늘에다 휘갈겨 쓴 듯한 큰 화제 글씨와 중앙에 쾅 찍은 듯한 낙관이 있다. 이것이 그림 전부이다.
정자 쪽은 담청에 약간의 농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고, 계곡에는 담청에 군데군데 농묵이 덧칠되어 있다. 모옥 아래 낮은 계곡에도 진한 묵점들이 찍혀있다. 농묵으로 숲이 울창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은 淡과 靜이요 왼쪽은 濃과 動이다. 서로 대구가 되어 있어 전체적인 균형감을 유지시켜주고 있다.
심심한 듯 적막한 봄산. 물소리만이 깊은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다.
빈 산에 아무도 없는데 空山無人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水流花開
소식의 시구절을 화제로 썼다. ‘空山’과 ‘無人’ 그리고 ‘水流’와 ‘花開’를 그대로 표현했다. 그림이야 시구에서 얻었지만 정신은 거기에 구속되지 않았다. 엉성하고 거칠게, 그러면서도 거침 없이 휘두른 최북만의 필치이다. 언제나 비어있는 산과 흐르는 물, 때가 되면 절로 피는 꽃. 무엇이 아쉬워 이 산에 사람이 찾아오고 물이 흐르고 꽃이 피겠는가. 유정, 무정인 듯 유정, 무정이 아닌 듯 자연 그대로 꾸밈이 없다.
최북은 이런 자연인으로 살았으리라. 아니 살고 싶었으리라. 아무도 없는 텅 빈 정자, 그처럼 일생을 비운 채로 살아온 최북이 아닌가. 그래서 『공산무인도』도 『풍설야귀인』처럼 가슴 한켠이 아리게도 젖어온다. 대담하면서도 솔직 담백, 그 외로움에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간다.
소식이 당나라 말기 화가 정현의 그림 「아라한상」을 구하게 되었다. ‘아라한’은 ‘나한’과 같은 말이며, 현생의 번뇌에서 해탈한 수행자를 말한다. 소식은 몹시 기뻐하며 그림을 새로 표구하고, 그림 속 열여덟 분 나한의 모습을 차례로 묘사한 게송 「십팔개아라한송」을 지었다.‘게송’이란 부 처의 덕을 기리는 노래로 마치 기독교의 찬송가처럼 부르기 좋게 지은 것이다.
-고연희, 『그림 문학에 취하다』에서
‘공산무인 수류화개’는 소식의 18수의 아라한송 가운데 9수의 한 구절이다.
아홉 번째 아라한님께서
식사를 마치신 후 바리떼를 옆어 놓으시고
염주를 헤아리며 앉아서 염불을 하시네
그 아래 한 동자 불붙여 차를 다리고
또 한 동자 연못에 물통 담궈 물 담고 있네
찬송하노라.
식사 이미 마쳤으니
바리떼 엎고 앉으셨네.
동자가 차 봉양하려고
대롱에 바람 불어 불 붙이네
내가 불사를 짓노니,
깊고도 미묘하구나!
빈산에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피네
-고연희, 『그림 문학에 취하다』에서
스님이 식사를 마치고 중얼중얼 염불을 하고, 동자승이 스님께 올릴 차를 다리는데 난데없이 한 구절이 떠올랐다.‘ 空山無人 水流花開’이다. 나와 사물과의 경계가 무너진 물아일체, 물아합일의 경지이다. 이는 훗날 선승들에 의해 깨달음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많은 시인들이 이를 차운하거나 재창작되어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 오늘날까지도 세상에 회자된 천하 명구이다.
조선의 추사 김정희도 이를 즐겨 썼으며, 현대에 와 법정스님도 이를 즐겨 인용해 썼다.
추사의 대련이다.
고요히 앉은 곳(處) 차 마시다 향 사르고 靜坐處茶半香初
묘한 작용이 일 때(時) 물 흐르고 꽃이 피네. 妙用時水流花開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화가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파격적인 기행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최북이다.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예술적 재능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짧은 삶을 살았던 조선화단의 이단아이다. 그래서 술과 그림으로 울분을 달래야만했던, 한쪽 눈을 잃어버렸음에도 그래도 기개만은 시퍼렀게 살았던 최북이다.
세인들에 의해 자주 거론된, 그의 기이한 행동, 일화 몇 점들이다.
최북의 자는 칠칠이니 세상 사람들은 그 가족이나 가계를 모른다.
그림을 그릴 때에 아득히 한 번 보고는 늘 안경을 쓰고 화첩에 임하여 그림을 그리더라.
술을 좋아하고 주유하는 걸 좋아하여 구룡연 폭포에 들어가 심하게 취하여 혹은 울다가 혹은 웃다가 또한 소리지르기를 "천하의 명인 최북이 마땅히 천하명산에서 죽으리라." 하고 마침내 몸 을 날려 뛰어들었으나 구해주는 자가 있어 죽지는 않았다
칠칠이 술을 마심에 늘 하루 대여섯되라 저자 거리에서 술을 가지고 지나가는 심부름꾼이 있으 면 칠칠이 대뜸 마셔버리니 집의 재산은 더욱 빈곤해졌다.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구하거늘 산은 그리되 물은 그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힐 책 하자 칠칠이 붓을 던지고 일어서며 말하기를,
"딱도 해라, 종이 밖이 다 물이다." 하더라.
평양과 동래 두 부에 나그네로 유람하니 사람들이 비단을 들고 문 앞에 줄을 지어 섰더라.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엿보이는 최북의 「표훈사도」
최북은 진경산수에 대해 “무릇 사람의 풍속도 중국 사람들의 풍속이 다르고 조선 사람들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의 형세도 중국과 조선이 서로 다른데, 사람들은 모두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좋아하고 숭상하면서 조선의 산수를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하지만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최북은 이렇게 제도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독자적인 예술관을 갖고 살았다. 권력층에서 소외된 남인, 소론계의 지식인들과 교유해 그의 정치적 성향도 남달랐던 그였다.
그는 김홍도·이인문·김득신 등과도 교유했으며 남종화풍 산수화에 능해, 심사정과 쌍벽을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이 엿보이는 표훈사를 비롯하여 한강조어도, 추경산수도, 조어도, 풍설야귀도, 공산무인도, 누각산수도, 송음관폭도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최북의 만년은 비참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그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동가식서가숙하다 어느 눈 오는 밤 성곽 아래에서 얼어죽었다. 비명횡사, 그이 나이 49세였다.
그의 묘비명이다.
아아,
몸은 얼어 죽었어도
이름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리로다
- 월간 서예,2017.9
6
이인상의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수묵 담채.
63.2 x 23.8 cm,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노한 폭포 홀연히 일어 메아리 밖에 떨치고,
운무 피어올라 해무리 곁에서 그림자로 어리네
怒瀑忽成告外響 浮雲欲結日邊陰)」
화제의 칠언절구는 읍취헌 박은의 시「유역암(遊瀝巖)』의 한 구절이다. 박은이 개성 만월대를 찾아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읊은 시이다. 그는 연산군 때 유자광의 전횡을 탄핵했다 갑자사화 때 효수형을 당한 인물이다.
후세 사람들은 ‘조선초 문장은 김일손이요 시는 박은이라’ 할 정도로 그는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당대에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행은 사후에 시를 모아 『읍취헌 유고』를 펴냄으로서 박은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시「복령사」의 셋째 구절, ‘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봄 날씨 흐리자 비 오려는 지 새들이 울어대는데, 오래된 나무는 무정하여 부는 바람이 절로 슬프구나’는 인구에 회자된 시구로 사람들은 박은이 26세의 요절을 예견했다는 시참이 된 시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중심으로 좌엔 너럭 바위, 우엔 절벽을 양쪽으로 배치시켰다. 그리고 장송 한 그루가 옆으로 가로질러 누워 있고 멀리 너럭 바위 위의 한 선비가 무심히 생각에 잠겨 있다.
이인상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 이런 그림을 그렸으며 그의 절친한 친구, 이윤영은 여기에 왜 이런 화제를 썼을까. 위암 이최중에게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려주었을까 자못 궁금하다.
박은이 시「유역암(遊瀝巖)』전문이다.
만월대 앞에는 이지러진 마음이요
광명사 뒤에는 다시 그윽한 심정이라
지나간 나라 땅속에 묻힌 지 천년
우리는 우연히 시 한 수 읊노라
노한 폭포 홀연히 허공 너머 메아리 되고
수심 깊은 구름은 해무리 곁 그림자로 어리고
우선 술잔 들어 가슴속 씻어 내리니
고금의 흥망이 마음 속에 끝이 없어라
滿月臺前從敗意
廣明寺後更幽心
地藏故國應千載
詩得吾曹偶一吟
怒瀑自成空外響
愁雲欲結日邊陰
且須盃酒洒胸臆
不盡興亡古今心
박은이 개성 만월대의 옛 역사를 돌아보며 마음 속의 울분을 읊은 시이다. 관폭도의 화제에는 원시의‘ 空’ 과 ‘愁’가 ‘告’와 ‘浮’ 로 바뀌었을 뿐 내용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시구 ‘노한 폭포 소리, 수심 깊은 구름’을 취했으니 이윤영이 쓴 화제는 친구 이인상의 목소리이며 가슴 속의 심사였으리라.
예로부터 소나무는 선비의 상징이었다. 온갖 풍상을 겪은 우람한 노송 한 그루가 밑둥에서부터 곧게 휘어져 있다. 용 한 마리가 꿈틀대며 비상하는 모습이다. 노송과 폭포에서 강직하고 꼿꼿한 선비의 기상을 보는 듯하다.
이윤영은 당시의 문인화가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와 더불어 평생을 보냈다. 이인상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화풍은 비슷하나 부드럽고 온화한 점이 좀 다르다.
옛 문인화가들은 좋은 시구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놓고 어울리는 시 한 수를 쓰기도 했다. 이윤영은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를 많이 썼다. 이 그림을 보며 두 사람은 무슨 생각과 대화를 나누었을까.
능호관은 영조 때의 화가로 서얼 출신임에도 명문가다운 후손의 자부심을 갖고 살았으며 시문과 회화로 문명을 떨쳤다. 시․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사람들은 그의 서체를 ‘원령체(元靈體)’라 불렀다.
종현에서 원령을 만나
함께 한묵으로 놀았다지만
각서나 종정문이야 알 도리가 없으니
붓일랑 내던지고 드러누워 가을비나 읊조리련다.
種峴逢元靈
共作翰墨戱
磨崖勤鐘不可得
擈筆飢臥吟秋(雨
-권헌의 「원령의 옛전서를 장난삼아 노래하다 戱作元靈篆籕歌」의 일부
종현은 지금의 명동이며 원령은 이인상의 자이다. 이인상의 학식과 명망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추사 김정희는 이인상의 원령체와 그림을 각별히 칭송했다고 한다. 어디 추사뿐이겠는가. 오늘날의 미술사학자들도 이인상의 그림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고 그 서늘한 기운에 감탄을 마지않고 있다. 여타 화가들과는 달리 문기가 가득하고, 그림의 제화 또한 운치가 높다. 그의 문학과 예술은 이렇게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이인상의 묘처는 기름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 데 있으며, 익은 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를 알리라.
凌壺妙處 不在濃而在乎淡 不在熟而在乎生 惟知者知之
- ‘능호필첩’ 발문
그의 시․서․화를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그림에는 그가 ‘가을날 소호로 남쪽 언덕에 올라 병든 위암의 부채에 그리다(秋日上小胡蘆南岡 寫病韋扇面)’ 라고 써있다.
서얼 출신의 이인상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던 이최중에게 왜 이런 그림을 그려준 것일까. 이인상의「강남춘의도」도 위암을 위해 그려준 부채 그림이다. 「송하관폭도」에 화제를 쓴 이윤영은 그들 사이에 또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고할 수 없어 상상만 할 뿐이다.
「송하관폭도」는 이백의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의 “飛流直下三千尺(물줄기 삼천 척이나 낭떠러지에 내리 쏟는다)”를 연상케할 정도로 장엄하다. 폭포 앞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용사비등하는 듯 노송 한 그루는 이인상이 지향하고 싶었던 자신의 이상 세계가 아니었을까.
그의 문인화에는 이렇게 문ㆍ사ㆍ철, 시ㆍ서ㆍ화,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있다.
- 월간 서예,2017.1.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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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
강세황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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