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6. 20:50ㆍ미술/서양화
출처
- 이현애 지음, 『독일 미술가와걷다』에서 발췌 -
<베를린미술관>‥ 쾰른이 독일에서 가장 콜비츠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베를린은 소장품도 충분할 뿐 아니라 콜비츠가 나치 시대에도 다른 예술가들처럼 외국으로 망명을 떠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며 살았던 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오늘날 독일에서 콜비츠의 이름은 사방에서 들린다. 케테 콜비츠 학교는 독일 전지역에 백여 개가 넘고, 독일 대도시들 중 절반이 넘는 곳에 케테 콜비츠 거리가 있으며, 케테 콜비츠 미술관은 쾰른과 베를린에 이어서 모리츠부르크까지 세 군데에 이른다.
콜비츠의 삶과 예술에 관해서는 단행본이 여럿 출간되고 전시도 쉼 없이 열리는 가운데 텔레비젼 방송도 나왔다. 세상을 떠난지 70년이 지난 콜비츠는 독일에서 매우 유명한 예술가로 자리 잡았다. 특이한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세 가지 형태의 독일, 즉 분단시절의 동독 서독에 이어서 재통일된 독일연방공화국에서도 콜비츠를 국민영웅으로 치켜세우는데 적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동안의 콜비츠는 사회주의 예술가라거나 사회주의 선전가로 불렸다. 이 같은 꼬리표는 사후에도 냉전시대에 이용되어 타국에서 콜비츠 수용을 앞당기거나 늦추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야 그를 향한 지지가 표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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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즐거운 일도 있단다. 근데 왜 너는 이렇게 어두운 면만 그리니?
콜비츠는 이와 같은 부모님의 질문을 떠올리며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나는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나에게 아무런 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만큼은 다시 강조하고 싶다. 내가 처음 플로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한 것은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졸라나 다른 누군가가 한번은 이런 말을 했듯이. 아름다움, 그것은 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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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비츠는 판화 연작(連作)을 여럿 제작했다. <직조공 봉기>(1898)를 석판화와 동판화 각각 3점씩 완성했고, <농민전쟁>(1908)을 동판화 7점, <전쟁>(1923)를 목판화 7점으로, <플로레타리아>(1925)를 목판화 3점으로, 마지막으로 1937냔에 완성한 <죽음> 연작은 석판화 8점으로 이루어졌다.
콜비츠가 연작을 생산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으로서 맞춤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지닌 인류학적 예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콜비츠에게 예술은 사회와 분리되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거니와 단 하나의 작품에서 끝나지 않으며, 거듭 연결되는 가운데 영원히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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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빈곤은 콜비츠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관심을 두었던 문제이다. 누구보다 산업화시대 여성오동자가 처한 현실에 주목했음은 콜비츠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이다. 콜비츠는 베를린 북부 노동자 거주지역에 살면서 가난한 이웃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판화로 새겼다. 그는 특정한 순간을 사는 개인을 관찰했기에 어떤 사회과학이론보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형상화할 수 있었다. 예컨대 1912년 4월 16일 일기는 이런 현실을 전한다.
"노동자인 조스트는 매주 28마르크를 번다. 그중에 6마르크는 집세로 나가고, 21마르크는 부인한테 간다. 부인은 이 돈으로 이불과 침대를 사고, 나머지 14~15마르크로 살림을 한다. 조스트와 부인에게는 아이가 여섯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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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공 봉기
<빈곤>은 <직조봉 봉기> 연작을 시작하는 첫 장이다. 그림은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을 보여준다. 엄마는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속수무책이고, 할머니 품에는 손가락을 빠는 아이가 안겨 있다.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베틀은 멈춰서 있고, 창문은 닫혔으며, 방은 좁고 어둡다,. 정사각형 구도가 출구가 없음을 강조한다.
<빈곤>은 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에 실렸다. 곰브리치는 콜비츠의 <빈곤>을 뭉크가 그린 <절규>와 비교하여 표현주의 미술운동의 전개과정을 설명한다. 표현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상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국제적인 예술운동이다. 인상주의자가 망막에 비치는 외부 자연의 인상을 새긴다면 표현주의자는 마음에 새겨지는 인간 내면의 감정을 펼쳐낸다. 감정을 표현함은 근대화 산업화가 인간에게 던진 고통과 불안을 견디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현실에 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뭉크와 콜비츠를 표현주의에 같이 묶을 수는 있겠지만, 전자는 인간 보편의 실존에, 후자는 구체적인 개인의 생존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
.......
.......
북이 날고 베틀이 덜커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 하이네, 「직조공의 노래」 끝 부분
그녀의 연작들 중 '방직공의 봉기'는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켜 당시 베를린 예술전에서 금상을 수상(그러나 이것은 당시 정부의 반대로 수상할 수는 없었다.)한 것인데 단순히 하우프트만의 희곡 작품에 대한 삽화 정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 작품을 위해 1893~1897년까지 4년 동안 매달렸다. 처음에는 직조공 가족의 빈곤과 이들을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들을 보여주며 그 다음에는 앞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면들은 어둡고 깊은 밤이지만 이제는 행동에 옮기기 위한 '회의'를 나타낸다. 그 다음, 보다 단단한 에칭용 철침을 이용해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직조공의 행진과 돌격을 나타낸다. 그리고 연작의 마지막에는 총에 맞은 봉기자들의 시신이 직조공의 방으로 운반되고 슬픔이 화면을 지배한다. 그러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어둠을 강조하는 동시에 가느다란 희망을 나타낸다.
그녀의 이 연작이 하우프트만의 극과 다른 것은 그녀가 그들의 삶과 투쟁에 전적으로 집중되어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연작은 사회의 진보적 세력을 표현하고 여기에 맞는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주의적 형식을 발굴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실주의적'인 것은 주제와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그녀가 단순히 귀족들을 위한 그림이 아닌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자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에게 케테 콜비츠는 말한다.
“아틀리에 예술은 실패한 예술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 본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수 없는 슬픔에 고개숙인 <짓밟힌 사람들>, 떠나려는 아이의 영혼을 마지막까지 붙잡으려는 듯 죽을 힘을다해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배고파 <빵을!> 달라고 떼를 쓰며 달려드는 아이들의 눈길과 그 엄마의 넓은 등을 보면, 콜비츠가 간단한 선 몇 줄로 복잡한 인간 감정의 극점을 얼마나 순간적으로 잘 포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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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1903. 동판화 17*19cm
긴장과 이완이 번갈아 이어진다. 괴로움을 참는 힘이 무릎에서 시작하여 손과 팔꿈치와 발가락까지 전해진다. 아이 머리는 기운 없이 꺾였으며, 잔뜩 허리를 꺾은 엄마는 아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말 그대로 절절하다.
전쟁 · 기아 ·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와 비탄에 빠진 어머니라는 주제가 콜비츠의 많은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말해주듯, 1903년에 이미 콜비츠는 평생의 주제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게다가 후기의 목판화나 조각과는 달리, 표현의 단순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더욱 처절하다. 죽은 자식에게 달라붙어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이미지를 훨씬 뛰어넘어, 야차나 악귀처럼 보인다. 진정한 슬픔은 이런 것이다.
죽은 아이의 모델이 된 페터 콜비츠는 당시 여섯살, 케테 콜비츠는 36세였다. 11년 뒤인 1914년 8월, 페터는 지원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두 달 뒤에 벨기에에서 전사한다. 애국심에 사로잡힌 아들을 콜비츠는 말리지 못했다. 그 통한 때문에 그녀는 반전의 염원을 담은 페터 기념비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는 그런 자신의 운명을 일찍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듯한 작품이다.
나찌가 대두한 이래, 콜비츠는 온갖 압박을 받고 작품을 발표할 기회도 잃었다. 1942년에는 손자인 페터도 전쟁으로 잃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하는 만년을 보낸 뒤, 1945년 4월 22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8일 뒤 히틀러가 죽은 것도, 다시 일주일 뒤 나찌 독일이 항복한 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미술사가인 와까꾸와 미도리는 케테 콜비츠가 "아무리 비참한 장면을 묘사해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은 잃지 않는다"고 말했다.
- 서경식,『청춘의 死神』p 33-35
농민전쟁
그후 콜비츠는 독일의 혁명적 전통에서 한 계급이 전체적으로 혁명적 운동에 참여했던 농민전쟁에 관한 연작을 그려 나갔다. 이것은 직조공 봉기와 같은 구성으로 짜여져 진행 과정을 묘사하는 드라마와도 같다. 그리고 이때의 연작은 단지 몇 개의 판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주제의 감정 영역을 충분히 묘사하면서도 완결성을 유지한다. 이 연작으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녀의 아들 페터가 종군했으나 전사하고 만 사건은 그녀의 작품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죽음
확실히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주제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은 자신이든 주위의 상황이든 항상 죽음의 공포 - 사실 일상이었으므로 공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속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녀의 아들 페터를 잃는가 하면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손자 페터를 죽음의 사신에게 넘겨주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독일은 1천3백만명이 징집되었고 1백 7십만명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유럽에서는 한 세대가 전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거침없이 자행된 것이다.
그녀는 질병과 가난뿐만 아니라 전쟁을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반전화의 역사는 콜비츠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녀는 1922년 전쟁에 관한 연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사'라는 비보에 접한 가족들의 슬픔과 한을 '부모', '희생', '어머니들'등의 작품에서 잘 표현해내고 있다.
콜비츠는 1934-1935년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다. 백여 점이나 되는 그녀의 자화상들 중에서도 이 기간에 만들어진 '죽음에의 초대'는 그녀의 말기 작품가운데 유명하다. 아들을 전쟁에 잃은 후의 그녀의 작품들은 모델을 이용하기보다는 많은 드로잉을 통해서 단순하고 강렬한 선들을 구축했다. 그녀의 아들은 전쟁에 참가해 전사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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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비츠는 판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도 조각에 도전하여 자기 영역을 넓힌다. 피에타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성>과 <농민 전쟁>을 거쳐 조각으로 변형된다. 갱년기에 들어섰을 무렵 콜비츠는 다시 초심의 해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1904년 두 달간 파리에 체류하며 로댕도 만났고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잠시 수업도 받았지만 조각은 거의 독학으로 연마했다.
베를린은, ‘붉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맑스와 엥겔스의 이름을 딴 광장,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 광장과 역, 거리, 역시 칼 리프크네히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 구석구석, 꼼꼼히 지도를 들여다보면 베벨의 이름도 보이고, 레닌의 이름, 브레히트의 이름도 보인다.
‘캐테 콜비츠 박물관’보다, 더 가보고 싶었던 곳은, 운터 덴 린덴 거리의 노이에바헤였다. 국립 전몰자 추모기념관, 이라고 해야 할까.. 동독 시절 ‘파시즘과 군국주의 희생자 기념관’이었던 노이에바헤는, 통일 이후 일체의 번잡스러움을 걷어버리고, 오직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들을 감싼 어머니>, ‘피에타’ 하나에만 공간을 배려했다. 채우지 않고, 비움으로써, 극단의 정서적 효과를 일으키는 곳.
<노이에 바헤>의 외관 전경
피에타.. 비가 오는 날이면 천정의 구멍에서 흘러드는 물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콜비츠의 원작을 네 배로 확대한 것임.)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1942년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된다>는 콜비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판화다. 그림 제목은 괴테가 지은 책에 실린 말이며, 1941년 12월 일기가 밝히듯이 콜비츠의 유언이다. 전쟁이 또 다시 벌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똑같은 것을 그렸다. 베를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 망아지 같은 아이들이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한 여성에게 붙들려 있다. 나이 든 여성은 망토를 펼쳐 아이들이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양팔과 양손을 크게 벌려 감쌌다.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된다!'
1914년 10월 30일, 콜비츠는 그날 이후로 ‘나의 노년이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건 다시는 더 이상 똑바로 설 수 없을 정도의 단절이었다.. 이제부터는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1917년 10월 12일의 일기 중).. 그 단절이, 아래로 내려가는 슬픔의 시선이, 그리고 더 이상 슬퍼하지만은 않겠다(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의지까지, ‘피에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도하듯, 노이에바헤 안을 서성인 것은, 그 슬픔과 분명한 의지에, 깊이 감염되고 싶어서였다.. 슬픔과 연민으로부터 시작한 분노, 그 정직한 분노만이, 끝까지 갈 수 있다.. 콜비츠의 ‘피에타’는 아름다운, 끝이다..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나아져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이 가 닿아야 할, 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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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가는 사람]은 농민전쟁에 대한 여섯 개의 에칭 작품 중 첫번째로,
밭가는 연장을 몸에 매고 짐승처럼 일하는 농부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노동계급의 투쟁에 공감하는 콜비츠의 입장을 드러내는 어둡고 충격적인 장면이다.
이 작품은 세세한 묘사를 과감히 생략한 결과 다소 스케치하기는 하지만,
진하고 굵직한 선으로 인해 더욱 강렬하고 긴장된 인상을 받게 한다.
케테 콜비츠를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등 그녀를 일컫는 말은 너무나 많은데 나는 그녀를 가리킬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수없이 많은 어머니의 눈물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청년이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를 하다 이름도 모를 밀실에 갇혀 죽었고, 녹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군에 가 어이없이 죽어야 했고, 남의 민족의 식민지로 살아 그들의 용병으로 먼 이역 땅을 전전하며 죽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보인다.
케테 콜비츠.
강렬함과 애잔함이 함께 담긴 목소리로 역사는 그녀를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 예술가를 통해 역사가 드러나게 될 때 그 예술가는 행복할까 고통스러울까? 하루에 8백 명씩 굶어 죽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현실, '낳은 아이들의 반이 죽고 죽은 아이의 이름을 붙여 또 낳는' 그런 악몽 속에 방치된 인생들의 고통을 그녀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구립 도서관에 비치된 <라이프인간세계사>라는 책을 통해서 나는 오토 딕스와 케테 콜비츠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그림들은 무언가 갈증같은 것에 시달리던 내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술이란 것이 루벤스나 르느와르의 그림들처럼 늘상 아름다운 세계, 마치 TV의 광고CF처럼 아름답고 조화된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제 세계의 어두운 면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서도 우리에게 감동과 분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녀의 그림을 통해 처음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그림들은 무지한 자들의 미개한 열정이 어떻게 교양있는 자들의 세계를 부수고 더 나아가 새롭게 세계를 건설하는 지를 보여준다. 그 미개한 열정은 공장에서 무기생산을 멈추고 쟁기를 만들 것이며, 8시간 노동제와 남녀동일임금을 책정하게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 열정은 질서의 얼굴을 한 야만이 아니라 혼돈을 통해 아름다운 질서로 태어나고자 한 열정이었던 것이다.
대학살의 현장에 선 어머니
독일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는 1867년에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공부하던 오빠를 따라 그 곳에서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일생은 조부모이래 자유주의 전통의 가정분위기 속에 자유와 정의를 갈망했을 뿐만 아니라. 시달리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그들과 함께 연대하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가 추구했던 목표는 사회고발이나 선동에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태의 위급성'내지는 '긴급성'을 표현함으로써 '가난의 추방'이나 '질병의 퇴치'의 필연성, 사회개혁의 불가피성을 일깨우려는 데에 있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생명에 대한 경외를 불러일으키면서, 소외되고 학대받는 민중과 더불어 함께 하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 형성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그림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적인 자세를 허물고 남을 위한 존재로서 협력, 연대, 원조로 나서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이런 느낌은 그녀가 그래픽의 습작과 실험과정을 거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우연히 자연스럽게 영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 그녀는 유화작업을 하였으나 그녀의 교수인 칼 스타우퍼 베른을 통해 동판 부식법을 배운 것과 클링거의 상징주의 판화를 보면서 유화를 버리고 판화로 작업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그녀는 색채라는 것이 심미적인 유희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검정색, 회색, 백색을 통해 인간의 아픔과 슬픔, 어둠을 표출해 내는 판화야말로 대중적인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직공의 봉기 - 어둠 속의 빛
그녀의 연작들 중 '방직공의 봉기'는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켜 당시 베를린 예술전에서 금상을 수상(그러나 이것은 당시 정부의 반대로 수상할 수는 없었다.)한 것인데 단순히 하우프트만의 희곡 작품에 대한 삽화 정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 작품을 위해 1893~1897년까지 4년 동안 매달렸다. 처음에는 직조공 가족의 빈곤과 이들을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들을 보여주며 그 다음에는 앞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면들은 어둡고 깊은 밤이지만 이제는 행동에 옮기기 위한 '회의'를 나타낸다. 그 다음, 보다 단단한 에칭용 철침을 이용해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직조공의 행진과 돌격을 나타낸다. 그리고 연작의 마지막에는 총에 맞은 봉기자들의 시신이 직조공의 방으로 운반되고 슬픔이 화면을 지배한다. 그러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어둠을 강조하는 동시에 가느다란 희망을 나타낸다.
그녀의 이 연작이 하우프트만의 극과 다른 것은 그녀가 그들의 삶과 투쟁에 전적으로 집중되어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연작은 사회의 진보적 세력을 표현하고 여기에 맞는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주의적 형식을 발굴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실주의적'인 것은 주제와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그녀가 단순히 귀족들을 위한 그림이 아닌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자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에게 케테 콜비츠는 말한다.
“아틀리에 예술은 실패한 예술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 본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수 없는 슬픔에 고개숙인 <짓밟힌 사람들>, 떠나려는 아이의 영혼을 마지막까지 붙잡으려는 듯 죽을 힘을다해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배고파 <빵을!> 달라고 떼를 쓰며 달려드는 아이들의 눈길과 그 엄마의 넓은 등을 보면, 콜비츠가 간단한 선 몇 줄로 복잡한 인간 감정의 극점을 얼마나 순간적으로 잘 포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죽음의 그림자
그후 콜비츠는 독일의 혁명적 전통에서 한 계급이 전체적으로 혁명적 운동에 참여했던 농민전쟁에 관한 연작을 그려 나갔다. 이것은 직조공 봉기와 같은 구성으로 짜여져 진행 과정을 묘사하는 드라마와도 같다. 그리고 이때의 연작은 단지 몇 개의 판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주제의 감정 영역을 충분히 묘사하면서도 완결성을 유지한다. 이 연작으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녀의 아들 페터가 종군했으나 전사하고 만 사건은 그녀의 작품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확실히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주제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은 자신이든 주위의 상황이든 항상 죽음의 공포 - 사실 일상이었으므로 공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속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녀의 아들 페터를 잃는가 하면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손자 페터를 죽음의 사신에게 넘겨주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독일은 1천3백만명이 징집되었고 1백 7십만명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유럽에서는 한 세대가 전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거침없이 자행된 것이다.
그녀는 질병과 가난뿐만 아니라 전쟁을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반전화의 역사는 콜비츠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녀는 1922년 전쟁에 관한 연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사'라는 비보에 접한 가족들의 슬픔과 한을 '부모', '희생', '어머니들'등의 작품에서 잘 표현해내고 있다.
콜비츠는 1934-1935년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다. 백여 점이나 되는 그녀의 자화상들 중에서도 이 기간에 만들어진 '죽음에의 초대'는 그녀의 말기 작품가운데 유명하다. 아들을 전쟁에 잃은 후의 그녀의 작품들은 모델을 이용하기보다는 많은 드로잉을 통해서 단순하고 강렬한 선들을 구축했다. 그녀의 아들은 전쟁에 참가해 전사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을 멈추고, 망각한다면 우리는 또 언젠가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란 말을 듣게 될지 모른다.
출처 :로진스키..빠샤~ 원문보기▶ 글쓴이 : 로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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