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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안규철,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All but Nothing)

by 알래스카 Ⅱ 2017. 1. 18.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 안규철 

      | 2014.10.31




세상에 대한 골똘한 질문자, 안규철

미술의 잠재성 가운데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난 30여 년간 안규철만큼 그 작업을 성실히 수행해온 작가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술이 지닌 급진성 가운데 하나가, 시대를 향한 근본적인 성찰에 있다고 한다면 그 역시 안규철만큼 성실한 질문자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질문은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 선행되는 행위이다. 그는 말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끊임없이 '왜?'냐고 묻기 시작했던 아득한 어린 시절의 어느 날부터 세계가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면 그것은 의문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는 "생각하는 조각가", "사물들의 통역가"로 불려온 안규철이 지난 세월 던져온 질문들이 담겨 있다.
1977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80년부터 7년간 [계간미술] 기자로 일하며 학교에서 배운 미술이 아닌, 현실의 미술과 부딪힌 그는 1985년 무렵 한국 미술을 뜨겁게 달궜던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며 작가로서 자신의 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계열과 민중미술 계열이 첨예하게 부딪혔던 당시의 한국 미술계에서 급속도로 물신화되어가는 기념비적 조각에 대한 답변으로 '이야기 조각', '풍경 조각'이라 불리는 미니어처 작업을 선보이던 안규철은 1987년, 서른세 살의 나이에 불현듯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프랑스를 거쳐 도착한 독일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유럽과 우리나라 사이에 놓인 커다란 시차(時差)였다. 이미 20여 년 전에 68혁명을 겪은 그곳에서,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절정기에 건너간 이방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녀온 미술의 언어를 버려야 했다. [그 남자의 가방],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등은 그 과정에서 나온 산물들이다.
방 안에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적힌, 손잡이가 다섯 개인 문이고 다른 하나는 "삶"이라는 단어가 적힌, 손잡이가 없는 문이다. 손잡이가 없으니 삶의 문으로는 아예 나갈 수가 없고, 예술의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손잡이가 다섯 개나 되니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 상황. 방 한구석에는 화분 하나가 놓여 있는데 "화분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식물이 아니라 다리 하나가 터무니없이 길게 성장하여 줄기 역할을 하는 불안정하고 앉을 수 없는 나무 의자"(최태만)이다. 당시 그의 심정을 짐작하게 해주는 이 방 안에서 그는, 더 이상 무명작가가 아닌 지금까지도 여전히 화분에 물을 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2014. 8. 29 - 12. 13) 개인전 제목이기도 한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작은 잎(Flygblad)]이라는 시에서 가져온 말이다. 안규철은 이 말을 가져다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말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지 모른다.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미술평론가 우정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공들여 만들어내고, 도무지 쓸데없는 일들이 반복되기만 하는 무의미한 사건을 고안해내기 위해 매일 쉬지 않고 부지런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안규철에게서 소위 바틀비의 모습을 읽어낸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1853)의 주인공 이름이자 질 들뢰즈,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의 철학자들이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본 바틀비처럼, 안규철은 미술의 "외곽"에서 "더 이상 거대한 혁명을 소망하지 않고, 거룩한 구원을 기다리지 않으며,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우리를 둘러싼 초라한 일상을 성실히 필사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면서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선호하지 않는지를 제시하지 않은 채 다만 모든 행위의 (불)가능성을 유예의 상태로 남겨놓기만 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바틀비처럼, 안규철은 한쪽 벽에서 벽돌을 빼내어 묵묵히 다른 곳에 벽을 쌓고, 스웨터의 실을 풀어 또 다른 스웨터를 뜨고, 지워지기 쉬운 모래 위에 글을 쓰는 헛수고를 계속한다. 이윽고 그는 실패를 목표로 삼기에 이른다. 그 실패의 과정을 적나라한 모습으로 제시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안규철의 30년, 그러나 사냥은 계속된다.

1992년, 유학 도중 스페이스 샘터화랑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 도록에 안규철은 이렇게 썼다. "누군가 미술가의 삶을 사냥터의 토끼의 역할에 비교했던 것을 기억한다. 경제든 정치든 사회든 미술비평이든 저널리즘이든 온갖 가능한 미술의 사냥꾼들로부터 토끼는 달아나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토끼는 이내 붙들려버린다. 반대로 너무 깊은 굴속에 숨어버리면 사냥이 지속될 수가 없다고 그는 말했었다. (...) 그리하여 나는 달아난다. 외람되지만, 나를 잡아보라." 일견 그는 잡기에 그리 어려운 대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 작업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난지 교수의 다음 말을 들어보면 실상은 다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무려 여섯 시간을 인터뷰했다. 오직 작업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로 그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도 대화를 나눌수록 그 작가를 더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는데 그것에 이를 수 없다기보다 원래 없는 어떤 것 또는 꽁무니를 빼는 어떤 것을 추적하는 것 같았다."
달아날 테니 어디 한번 잡아보라는 호기로운 외침 이후 안규철은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반응과 해법에 안주하는 예술에 반대"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미술 지평을 넓혀왔으며, 미술 작품이라는 물고기를 키우는 "저수지에 계속 신선한 물과 양분을 공급하는 일에 한결같은 정성을" 들이며 한국 미술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그의 작품 세계를 망라해 묶은 이 책에는 새로 쓰인 평론들과 인터뷰뿐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 안규철에 대해 쓴 평론과 작가 본인의 글들이 엄선해 실렸다. 그동안 발표한 작품들과 일부 미발표 초기작도 정리해 실었다. 그러나 대개 이런 책에 바랄 법한 기대, 즉 어느 한 작가의 모습을 포착해 인쇄된 지면에 고정시킨다는 기대는 이루기 요원한 희망인 듯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안규철은 여전히 포위망을 좁힐 수는 있을지언정, 어느 한 굴에 몰아넣을 수 없는 작가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김성원이 말한 대로 "다른 많은 작가들과는 달리 안규철 작업에는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혹은 선호하는 이슈는 없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현실을 향한 직선 코스보다는 언제나 움직이며 재배치될 수 있는 또 우발적이며 다분히 혼돈스러운 샛길을 택"하는 그의 작업 성향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애초에 너무 많은 문들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치 2004년 로댕갤러리 개인전 때 선보였던 [112개의 문이 있는 방]처럼 그의 문들은 때로는 미로처럼, 때로는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의 입구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사냥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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