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로마노’를 나는 얄궂게도 ‘로마 포르노’로 암기가 되는데, ‘포로 로마노’는 이런 뜻이랍니다.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이탈리아어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하는데,
‘로마 공회장(公會場)’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국가 경제라고는 농사밖에 모르던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제5대 왕은 기원전 616년부터 장장 38년 동안 집권하면서 에트루리아에서 건축가, 공학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도로와 배수시설과 같은 도시의 인프라를 먼저 구축하고 움막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던 달동네 같은 로마를 정돈된 도시로 바꾸어놓았다. 특히 그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물이 고이고 테베레 강이 넘치면 완전히 물에 잠겨버리는 포룸에 배수시설과 하수시설을 구축하고 돌로 포장하여 널찍한 시장터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건설의 시초가 된다.
저 건축물은 네로 황제가 살던 저택입니다.
콜로세움을 굽어 내려다 보는 위치인데,
그러니까 저 집의 연못 자리에다 콜로세움을 지은 것입죠.
이 자리에서 벤츠택시를 탑니다.
오전에 바티칸 성당을 보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로마시내 투어를 하는 것인데,,
콜로세움,
대전차경기장,
포로로마노,
미켈란젤로 광장(언덕)
트레비분수,
전망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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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
여기를 이렇게 보고 온 것을 생각하면 환장하겠어요.
이태리 관광의 하일라이트가 여기 아닙니까.
미치겠네 진짜!
대전차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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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룸 로마눔
동의어 진흙탕 위에 세워진 로마 최고의 번화가
‘공개토론회’라는 뜻으로 쓰이는 영어 ‘포럼(Forum)’은 따지고 보면 로마의 특정한 장소에서 유래된 말이다. 먼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나폴레옹 시대의 화가 쟈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사비니 여인들(Les Sabines)〉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한번 보자. 그림을 보면 어떤 여인들은 서로 싸우려고 대치한 두 군대 사이에 서서 싸움을 말리고 있고, 또 어떤 여인들은 아기를 번쩍 들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팔라티노 언덕 위에 ‘로마’라고 하는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는 인구가 너무 적은 것이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캄피돌리오 언덕 위에 아실룸(Asylum)이라는 성역을 만들어 외부에서 피신해온 도망자들이나 범죄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인구를 늘리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로물루스의 추종자들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기가 막힌 묘수를 생각해냈다.
로물루스는 축제를 열어 로마 주변에 사는 사비니 부족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여동생이나 딸들을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가 베푼 축제에 자기 백성을 데리고 참석했다. 축제가 절정에 이를 때쯤 사비니 사람들은 술에 완전히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바로 이때 로물루스의 ‘작전’대로 로마의 장정들은 사비니 여인들을 모조리 납치해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사비니 남자들은 모두 쫓겨나고, 납치된 사비니 여인들은 거칠기 짝이 없는 로마 장정들에게 강제로 ‘집단 결혼’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후, 사비니 남자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납치된 여인들을 구하러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군과 사비니군이 일전을 벌이려고 서로 대치하자, 이미 로마 장정들의 아내가 되어 자식까지 낳은 사비니 여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왜냐하면 로마군이 지게 되면 과부가 되고, 사비니군이 지게 되면 고아가 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로마군과 사비니군 사이에 뛰어들어 태어난 아기들을 번쩍 들고 싸움을 말렸다. 로마군과 사비니군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손을 잡고 평화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사비니인들이 민족적 자존심을 조장하기 위해 후세에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캄피돌리오 언덕의 아실룸 이야기는 타민족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사실이고, 따라서 로마인들은 관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또 사비니 왕 타티우스도 전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실존했던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공화정 때는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통치했는데, 왜 집정관이 둘이었는지를 암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결합만큼은 기정사실이다. 이리하여 로마는 다민족 국가로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며, 적당한 인구를 확보한 다음부터는 팔라티노 언덕의 조그만 부락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나라로 서서히 떠오르게 되었다.
무질서한 부락에서 세련된 도시로
납치당한 여인들을 구하러온 사비니군과 로마군이 대치했던 곳은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그리고 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이 서로 마주치는 습한 저지대였는데, 이 주변은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인 기원전 9세기부터 주변 언덕에 살던 사람들의 묘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로물루스는 이곳을 흙으로 메워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고 ‘바깥에 있는 곳’이란 뜻의 ‘포룸(Forum)’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언덕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종교행사를 함께 치르기에 매우 이상적인 장소였다.
로마는 건국된 후 약 250년 동안 로물루스를 포함하여 일곱 명의 전설적인 왕들이 다스렸는데, 3대 왕까지는 라틴계와 사비니계였으나 4대 왕부터 7대 왕까지는 에트루리아계였다. 당시 최고의 선진국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처럼 무질서한 부락이 아니라 방어용 성벽과 포장도로와 하수도망도 갖춘 그야말로 당시의 기준으로는 ‘초현대식 계획도시’였다.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Tarquinius Priscus)가 통치하는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아 도시다운 도시로 발전하게 되고 그들의 앞선 기술과 문화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습득하여 짧은 시간 안에 ‘촌놈’에서 ‘세련된 신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히려 선진국 에트루리아를 압도할 수 있는 힘도 갖추게 되었다.
국가 경제라고는 농사밖에 모르던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제5대 왕은 기원전 616년부터 장장 38년 동안 집권하면서 에트루리아에서 건축가, 공학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도로와 배수시설과 같은 도시의 인프라를 먼저 구축하고 움막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던 달동네 같은 로마를 정돈된 도시로 바꾸어놓았다. 특히 그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물이 고이고 테베레 강이 넘치면 완전히 물에 잠겨버리는 포룸에 배수시설과 하수시설을 구축하고 돌로 포장하여 널찍한 시장터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건설의 시초가 된다. 포룸 로마눔은 이탈리아어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하는데, ‘로마 공회장(公會場)’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포룸 로마눔은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히 열린 시장터가 아니라 도심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기원전 534~510년)는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라고 하는 커다란 하수도를 만들었는데, 그 높이와 폭이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한 대 지날 수 있을 정도였으며,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후 공공건물, 이어서 상점과 신전들이 이곳에 세워지면서 로마 중심가로서의 면모가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는 날씨가 나쁠 때를 대비하여 옥외 공간의 기능을 일부 흡수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다목적 공공건물 바실리카(basilica)가 군데군데 세워졌다. 그리하여 포룸 로마눔은 로마의 종교, 경제, 정치, 행정, 사법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중심가가 되었다.
로마 최고의 번화가
오늘날 대도시의 중심가처럼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포룸 로마눔은 한마디로 소통의 장(場)이었다. 이곳에서 정치인은 장외연설을 했고, 법관은 법을 집행했으며, 사제는 종교행사에 전념했고, 시민들은 ‘쇼핑’을 즐기기도 했으며, 또 정가에 떠도는 소문, 새로 제정된 법이나 전투 현황 등에 귀 기울이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문제를 주제로 공개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종종 시민들을 위한 축제가 밤늦게까지 열기기도 했는데, 특히 시민들의 눈길을 많이 끌었던 것은 개선행렬, 장례행렬, 종교행렬 등이었다. 이 행렬들은 포룸 로마눔 안에서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길 비아 사크라(Via Sacra, 신성한 길)를 따라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 위를 향해 지나갔다.
공화정 말기 로마의 인구는 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로마를 찾는 외국인들도 수없이 많았는데, 이들은 이 포룸을 보고 로마의 위대함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의 국력이 점점 커져가자 기존의 시설만으로는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딴 포룸 율리움을 따로 세웠고,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후세의 황제들도 포룸 로마눔 동쪽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포룸을 따로 건설했다.
로마의 중심지에 새로운 포룸들이 계속 만들어지자 포룸 로마눔의 기능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 문화, 종교기능이 새로 세워진 포룸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기 80년 콜로세움이 완공된 다음부터는 포룸 로마눔에서 이루어지던 행사도 급격히 줄어들어서,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수용하는 도시 공간으로서 별로 사용되는 일이 없었다. 그 후 이곳은 주로 역사적인 일을 기념하는 곳으로만 사용되었다. 후세의 황제들은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기념비들을 포룸 로마눔 안에 세우게 했다. 그래서 이미 중요한 건물들이 꽉 들어찬 이곳에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티투스 개선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황비 파우스티나 신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등이 기존 건물들 사이의 비좁은 틈이나 포룸 로마눔 변방에 세워졌다. 그리고 서기 608년에는 포룸 로마눔에 마침표를 찍듯이 동로마제국 황제 포카스를 기념하는 원기둥이 마지막으로 세워졌다. 물론 이때는 포룸 로마눔의 기능이 내리막길에 들어선 지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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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
동의어 로마인들의 삶의 중심지 다른 표기 언어 Foro Romano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로마인들이 모여 생활하고 살던 중심이며 계속 발굴이 되고 있는 곳으로 사법, 정치, 종교 등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다. 원로원, 로물루스 신전, 2개의 개선문 등 과거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기둥이나 초석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는 원로원, 에트루리아 왕에게 대항한 로마 반역을 추모하기 위한 사원, 로마의 중심부로 쓰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외 많은 건물들의 잔해가 있다.
포로(Foro)라는 말은 ‘포럼(Forum)’, 즉 ‘아고라’와 같은 공공장소를 지칭한다. 주변으로 고대 로마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으나 4세기 말에 서고트 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
* 로마인들의 생활 중심지
〈로마인 이야기〉를 통독한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이지만 현재 잔해들이 거의 원형을 잃어버린 것이 많아서, 단순히 여행하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아주 지겨울 수도 있는 곳이다. 따라서,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답게 ‘예전 로마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살았구나’, ‘아, 이곳이 예전 우리나라의 종로였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보면 된다.
포로 로마노를 재미있게 둘러보는 순서
1. 포로 로마노 입구
콜로세오 쪽에서 걸어 올라오면 표지판이보인다.
2. 티투스의 개선문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티투스는 콜로세오를 완공한 인물이다. 이 문은 71년도에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유대인들을 복속시킨 개선문으로 81년에 만들었다. 벽 장식은 티투스의 개선 행렬을 부조한 것이다.
3.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
티투스의 개선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있다. 현재 잔해만 남아 있지만 그 규모는 엄청났다고 추정이 된다. 약 4세기경의 작품이다.
4. 성스러운 길
막센티우스 바실리카를 나와 걷게 되는 길이다. 비아 사크라(Via Sacra, 성스러운 길)이다.
5. 로물르스 신전
보존이 양호하다. 4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 이 로물루스의 신전은 막센티우스 황제의 아들이 지었다고 하는 설도 있으며, 로물루스의 신전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6. 파우스티나 신전
로물루스 신전 바로 옆에 있다. 안토니누스 황제가 자신의 아내인 파우스티나를 위해 지은 신전이다. 기원후 141년에 세워졌고 안토니누스가 죽은 이 곳에서 그의 제사를 지냈다. 이 부부는 캄피돌리오 언덕 가운데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부모다.
7. 에밀리아의 바실리카
이 건물은 기원전 79년에 세워졌고 그리스 건축 양식을 답습했다. 당시 이곳에서 상업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다.
8. 베스타신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선문 앞에 있다. 이 신전은 로마 귀족 가문에서 뽑힌 처녀들이 순결을 지키면서 성화(불)를 보존하던 곳이었다. 이들은 30년 동안 이곳에 봉사하고 나와서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는데 만약 순결을 더럽히면 생매장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신전에는 케사르의 유언장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누구나 의심하지 않던 케사르의 2인자는 안토니우스였는데 케사르의 후계자로 누나의 손자인 18살짜리 옥타비아누스가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9.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선문
딱 3개의 기둥만 남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케사르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의 칭호다. ‘존경할 만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원로원에서 붙여준 칭호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도 케사르와 같이 잔인한 면이 있어 자신에게 권력을 준 케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난 아들, 케사리온을 죽였을 정도이며 또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철저히 궤멸시켰다.
10. 사투르노의 신전
현재 기둥만 여덟 개 남아 있는데 기원전 497년에 세운 것이다.
11. 율리아의 공회당
영어식으로는 줄리아 공회당. 이곳은 재판소로 주로 사용되었다. 케사르 때 만들기 시작한 건물이다.
12. 원로원 건물
모든 정치적 암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 원로원 건물은 기원전 670년에 세워졌고 이후 계속 증개축되다가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테르미니 역 앞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을 만든 황제이기도 하다. 이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 시기, 즉 기원전 510년~29년까지 가장 중요한 정치 의결 기구였다. 그 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시대에 이르러 그 권한을 많이 축소했다.
13.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
2세기의 것이다. 이 황제의 아들이 카라칼라이다. 이 개선문은 기원후 203년에 만든 것으로 카라칼라가 상당히 잔혹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자신의 형제인 제타와 같이 만든 것이었지만 카라칼라는 황제에 오르기 위해 제타를 죽이고 그의 이름을 이 개선문에서 빼버렸다. 카라칼라는 잘 알다시피 카라칼라 공중 목욕탕을 만든 황제이다. 이 개선문 근처에 마메르틴 감옥소가 있는데 이곳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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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동의어 고대 로마의 민주정치, 상업, 법률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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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오에서 성스러운 길이라는 의미의 ‘Via Sacra’ 거리를 따라가면 포로 로마노를 만날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과 연결되어 있는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 시대의 민주 정치와 상업, 법률의 중심지였다. 포로 로마노는 여러 황제를 거쳐 오면서 발전했지만, 5세기경 로마가 분열되면서 이곳 대부분의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여러 시대를 거쳐 온 다양한 시대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얼핏 보면 폐허와 같은 모습이지만 지금까지도 발굴 작업과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고, 예전의 번성했던 로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소로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로마인들의 생활 중심지
〈로마인 이야기〉를 통독한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이지만 현재 잔해들이 거의 원형을 잃어버린 것이 많아서, 단순히 여행하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지루할 수도 있는 곳이다. 따라서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처럼 ‘예전 로마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살았구나’, ‘아, 이곳이 예전 우리나라의 종로쯤 되겠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둘러보면 된다.
1. 티투스의 개선문(Arco di Tito)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개선문으로,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81년에 세운 것이다. 아치 안쪽에는 예루살렘 신전에서 로마군이 약탈품을 운반하는 장면을 묘사해 놓은 부조를 볼 수 있다.
2.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di Massenzio)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306년에 지어진 것으로, 3개의 거대한 아치형 천장만이 남아 있지만, 당시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가로 100m, 세로 65m, 높이 35m에 달하는 크기다. 원래 이 바실리카의 천장은 도금된 타일로 꾸며져 있었는데, 7세기경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지붕을 만들기 위해 떼어 냈다고 한다.
3.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이 신전은 불의 여신 베스타를 위한 신전이다.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스무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어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이었다고 한다. 이 신전에서 6명의 처녀 사제인 베스탈들이 성화가 꺼지지 않도록 지켰다. 로마의 안위를 위해 성화를 지키는 일인 만큼 베스탈은 엄격한 자격을 통해 선발하여 30년 동안 불을 지키는 일만 담당했다고 한다.
4. 로물루스 신전(Tempio del Romolo)
막센티우스 황제의 아들 로물루스를 위해 4세기경 세워진 신전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누구에게 바쳐진 신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신전은 청동문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아직도 고대 열쇠로 잠길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다.
5.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Tempio di Antonino e Faustina)
이 건물은 141년 안토니누스 황제가 아내 파우스티나를 위해 세운 사원이다. 이후 사람들이 로렌초 성인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생각하여 11세기 초 산 로렌초 인 미란다 성당으로 바꾸게 된다.
6. 에밀리아의 바실리카(Basilica Aemilia)
기원전 179년에 건축한 이 건물은 사법, 금융, 상업 등이 이루어지던 공공 건물로,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였다. 바닥에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할 때, 불에 타서 주화가 녹아 있는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7. 쿠리아(Curia)
고대 로마 원로원들이 모임 장소로 사용하던 곳인데, 공화제 시절에는 정치의 최고 기관이었다. 원로원들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지붕을 높이 올린 것이 특징이다.
8.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
로물루스의 묘 앞에 세워져 있는 높이 23m, 폭 25m의 이 개선문은 세베루스 황제가 동방 원정에서 전승을 거둔 것을 기념해서 세워진 것이다. 이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를 발굴할 당시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포로 로마노를 바라보면 가장 눈에 띄고,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적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원래 이 개선문 꼭대기에는 셉티미우스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를 기념하는 조각이 있었지만, 셉티미우스가 죽은 후 동생 제타를 죽인 카라칼라가 동생 이름을 조각에서 지웠다고 한다.
9. 포카스의 기둥(Col. Phocas)
13.5m 높이의 이 기둥 역시 포로 로마노에서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유물 중 하나이다. 이 기둥은 608년 비잔티움의 황제 포카스가 판테온을 성당으로 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로 교황 보니파티우스 4세가 만든 것으로, 포로 로마노에 있는 기념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10. 사투르누스의 신전(Tempio di Saturno)
농업의 신인 사투르누스를 모시는 신전으로 기원전 5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당시에는 가장 중요시되던 신전이었다. 매년 12월 17일~23일 사투르누스를 기리는 축제 때 많은 노예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축제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신전 위에는 ‘Senatus Popolvs Qve Romanvs’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다. ‘로마의 원로원과 서민들’, 즉 로마 시민이라는 뜻으로 로마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문장 첫 글자를 딴 S.P.Q.R은 지금도 로마 시청을 상징하는 단어로, 하수도 뚜껑 등에서 볼 수 있다.
11. 로스트라(Rostra)
원로원 앞의 광장, 개선문 정면 왼쪽에는 시민들이 연설을 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로마의 지도자와 시민들이 올라가 연설을 하던 단이 놓여 있었다. 키케로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이 이곳에서 연설을 했었다고 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 당하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12. 바실리카 율리아(Basilica Julia)
카이사르가 기원전 54년 건축한 2층짜리 대형 법정 건물이다. 이 바실리카는 한때 민사 소송을 담당하던 180여 명의 치안, 행정 판사들의 사무실이었다.
13. 카이사르의 신전(Tempio del Divo Giulio)
암살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해를 화장한 장소에 세운 신전으로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14.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Temple Castor e Pollux)
세 개의 기둥만 남아 있는 이 신전은 제우스와 스파르타 왕비 레다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카스토르와 플록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496년 로마의 독재자 포스투미우스가 추방된 전 국왕 타르퀴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카이토르와 플록스를 위한 신전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는데, 레길루스 호수에서의 전투에 쌍둥이가 나타나 로마군을 도움으로써 결국 전투가 로마의 승리로 이어져 포로 로마노에 세워진 것이다.
대전차 경기장 Circo Massimo
로마에서 가장 큰 경기장 터
지금은 비록 황량한 공터와 같지만, 한때 이곳은 로마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 있던 곳이다. 특히 영화 〈벤허〉의 촬영 장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곳에 있던 경기장은 4세기에 세워졌는데, 수용 인원만 25만 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 경기장에서는 4륜 마차 경기와 경마, 맹수와의 검투 시합 등이 열렸고, 기독교 수난 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차 경주가 열리던 경기장이다. 길이가 약 700m에 가까운 거대한 운동장으로 지금은 주로 집회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 2006년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우리나라의 서울 시청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밤새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치르코 마시모에서는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현재는 로마 시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오벨리스크들이 발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2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이 치르코 마시모가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죽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있는 카타콤베에 시신이 묻혔다. 지금은 한적한 풀밭으로 남아 앉아서 쉬어 가기에 적당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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