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1. 16:19ㆍ여행/이태리
로마로 들어오면서 저런 소나무들이......
로마도 구시가지 신시가지가 따로 있는데,
구시가지 부동산 거래량가 어떠냐 물어보니, 무지 비싼데, 팔겠다고 내놓는 사람이 없다는.
*
콜로세움이 로마 관광의 베이스캠프더군요 - 관광버스가 콜로세움 근처까지만 진입 가능합니다.
하여, 콜로세움 길 건너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콜로세움 외관만 구경하고서,
본격적으로 ''벤츠(6인승)택시 투어'' 시작 ─
로얄 아트 카페
- 벽면 인테리어를 전부 이 사람 작품으로 -
- 이번 여행 중 음식 맛은 이 집이 제일 낫던 듯 -
이곳 사람들은 수돗물을 그냥 먹더구만
하지만 우리는 아니되오이다.
▒
↓ 식당 옆에 이런 발굴 터가 있더군요.
로마는 어디든지 땅을 파면 이런 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부동산 권리행사에 제한을 받게 되죠. 개발 끝!
그래서 아예 건들이지를 않는. 신고를 안하거나......
로마에 지하철이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
소나무 종자가 원래 저렇다 해도 로마 시내의 소나무들은 전정을해서 가꾼 걸 겁니다.
이름이 “우산소나무”
(이태리에 자생하는 소나무 종류가 4종류인가 있답니다.)
한국에 가져와 심어봤다는데 ─
‘江南種橘江北爲枳’ :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니 탱자가 되더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로마에 300여개의 개선문 중에서 보존상태가 괜찮은 것이 3개인데 그 중 제일 나은 거랍니다.
자세히 딜다보면 여기 저기서 돌 쪼가리 줘다가 짜 맞췄다눈.
▒
콜롯세움이 누더기가 된 이유도,
거의 천 년간 방치된 데다가 바티칸 성당을 지을 때 막 뜯어가서리.....
총탄 자국 같은 구멍도 주물(鐵) 부은 것을 빼가서리.....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지 않은 데도 내부 관람을 못하는 것은
입장료 몇 푼 아끼자는 것이 아니라 당일 관광할 곳이 많아서 입니다.
택시투어를 하지 않고 개인으로 다니겠다면야 들어가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것 하나 보잔다고 많은 관광지를 놓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관광은 하루일정 뿐입니다.
* 이태리 관광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런지는 연구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1) 힘 덜 들이고, 2) 많이, 3) 자세히, 볼 수 있는 방법이 뭔지.
↑ 요 쌈빡한 부분은 근래에 보수를 한 것이라네요.
이참에 그냥 확~!!! 전부다 수리를 해버려서, 콜로세움 취지를 살리는 컨셉으로다가,
K-1, 프라이드, UFC, M-1 경기장으로 쓰면 어떨까.
Colosseum in Rome, Italia
(출처. 세계불가의 여행)
“콜로세움이 있는 한 로마도 서 있으리라. 콜로세움이 무너지는 날에는 로마도 멸망하리라. 로마가 멸망하는 날에는 이 세상도 멸망하리라”
2000년 7월 19일 그리스 국립극장은 ‘콜로세움 2000 프로젝트’의 하나로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을 공연했고 7월 27일에는 테헤란 드라마 아트센터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슬람 판을 공연했다.
523년 마지막으로 공연이 있었던 콜로세움은 이로써 1500년 만에 처음으로 원형극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평한 이 문화행사가 열린 이유는 콜로세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서다.
로마를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갖는 콜로세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검투사들을 동원한 살육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2001년 아카데미 다섯 개 부분에서 수상한 〈글래디에이터〉는 검투사가 되어 돌아온 영웅의 드라마틱한 복수담을 줄거리로 삼았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로마제국의 황제(39~81)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유대인의 반란을 제압하며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의 즉위 기간 중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켜 폼페이시를 땅속에 묻어버렸고,
80년에는 대화재가 일어나 로마가 불타는가 하면, 페스트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재건과 구제 사업에 힘쓰는 등 선정으로 로마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인류의 총아’로 경모되기도 했다.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건설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처음 몇 백 년간은 특별한 예술이나 건축물이 없었다.
이런 양상은 기원전 1세기부터 변하게 된다. 로마 장군 술라는 기원전 86년 그리스의 아테네를 정복하고 수백 개의 그리스 조각상을 로마로 끌고 왔다. 이 약탈된 조각상들은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최초의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로마는 세련된 예술의 시대로 접어들어 궁정 건축을 비롯하여 대형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68년 네로(37~68)의 자살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끝나자 후계 자리를 놓고 벌어진 투쟁에서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39~81)가 승리했다. 그는 원로원 출신이 아니라 평민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의도적으로 선대 황제 시대의 궁정예술과 결별했다.
그의 시대의 초상들은 남자답지만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고 건축물 대부분은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평민’을 강조했다.
이런 목적으로 건설된 건축물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콜로세움이다.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 중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하고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경기장 옆에 네로황제가 세운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금도금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가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72년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질서를 회복한 뒤 네로의 황금궁전(Domus Aurea) 옆에 있던 인공호수 자리에 세울 것을 명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콜로세움은 그의 아들 티투스(39~81)황제가 80년에 완공했다.
콜로세움 건설은 한편에서 네로가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제거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콜로세움 완공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때 5000 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아치와 볼트를 사용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거대한 바위 축대 위에 축조되었다.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 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다.
콘크리트와 돌로 세운 콜로세움은 가로 · 세로가 각각 190미터 · 155미터에 이르며,
4층으로 된 관람석은 4만 5000개의 좌석과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석을 갖추었는데, 최대 8만 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물로 만든 벨라리움(velarium)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했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 채광시설과 환기구 역할을 했다.
관람객은 오늘날처럼 입구에서 번호표를 받아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서 지정된 좌석에 앉았고,
5만에서 8만 명의 관람객이 단시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 188미터, 최소 지름 156미터, 둘레 527미터, 높이 57미터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4층을 제외하고,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원기둥이 80개의 아치를 끼고 이어져 있다.
그리고 2층과 3층에는 조각상, 4층의 막힌 벽면에는 청동 방패들을 세웠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양식이 반영되긴 했지만 건축 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콜로세움은 철저히 로마 건축이다.
받침 기둥 · 지하층 · 받침벽 · 정면부 등만 값비싼 자연석을 이용했고, 내부의 토대와 담은 저렴하고 가벼운 콘크리트와 기와를 이용했다.
콜로세움 건설에 사용된 석회석은 10만㎥, 철은 330톤이다.
대리석은 특별석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콜로세움
고고학자들과 건축가들에 따르면 콘크리트와 바위로 된 거대한 타원형의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콜로세움을 세웠는데 건물의 엄청난 무게와 지진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70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티투스는 10만 명가량의 포로를 로마로 데리고 와 그중 4만 명을 콜로세움 공사에 투입했다고 한다. 로마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유적으로 꼽힌다.
콜로세움이 로마식이라는 것은 ‘아치’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그리스 사람들도 아치의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대규모 건축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에서는 아치와 아치 통로의 체계가 세 개 층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정면부에서는 그리스의 건축 원칙도 보인다.
그리스에서 중요한 건축물이었던 신전을 보면 ‘받치는 기둥과 누르는 가로대’라는 건축 원칙이 준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콜로세움에선 이러한 구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로마식 아치들에 의해 가려졌다.
그리스의 신전에서와 달리 기둥과 가로대가 아치에 의해 눈에 띄지 않도록 한 것이다.
콜로세움에서처럼 그리스식과 로마식을 혼합해 기둥과 가로대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후 유럽 건축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모티프가 된다.
경기장은 긴 쪽이 80미터, 짧은 쪽이 50미터인데,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하에는 칸칸이 나눠진 맹수들의 우리와 여러 방들이 있었는데,
천장을 나무 바닥으로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다.
지하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콜로세움의 지하 모습
검투사와 맹수들이 미로와 같은 이곳 지하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경기에 필요한 무기들을 보관하기도 했다.
원래 지하 위에 나무 마루가 깔려서 지상과 지하가 분리되었다.
그 나무 마루 위에는 다시 모래를 깔았다.
원형 경기장을 이탈리아어로 아레나(Arena)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에서 비롯된 것이다.
맹수 사냥 시합을 할 때는 숲과 나무와 언덕을 장치해 무대 효과를 살리기도 했다.
네 개의 중요한 출입구는 황제 · 고관 · 사제 등의 특별손님용이다.
나머지 관람객은 76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진 지층의 아치문을 이용했다.
관객석에서 발견된 명판은 로마 사회가 엄격한 계급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경기장과 경계를 이룬 여러 줄은 원로원 의원과 그 수행원들의 자리였다.
이어서 군인과 나머지 계층의 자리가 확보되었고 가장 나쁜 다섯 번째 객석은 여자들 차지였다.
검투사와 야수 간의 싸움이 처음으로 벌어진 곳으로 알려진 콜로세움에서는 놀랍게도 장내에 물을 채워 모의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먼저 투기장을 물로 채운 다음 물속에서도 육지에서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된 말과 소들을 물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검투사들은 배에서 배로 옮겨 다니며 접전을 벌였고 최후의 한 사람이 남으면 경기가 종료되었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로마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콜로세움 장내에 물을 채웠는지 아직 정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우마키아(naumachia)는 고대 로마에서 있었던 대규모 모의해전(模擬海戰)를 일컫는다.
콜로세움에서도 경기장에 물을 채우고 이러한 모의해전을 벌였다고 한다.
나우마키아는 이후에도 이어져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종류의 수상 스펙터클이 상연되었다.
그림은 콜로세움이 세워지기 전 그 터에 있었던 인공호수에서 네로황제가 즐기던 모의해전 놀이 모습으로 17세기에 제작되었다
콜로세움은 기독교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희생된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네로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것은 아니다. 콜로세움은 네로가 사망한 이후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이래 그 무대에선 300여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이어졌다.
그 처참한 역사는, 405년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384~423)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콜로세움은 1084년 노르만의 약탈로 파괴된 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이후에도 지진의 피해를 입는가 하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선 궁전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재료를 갖다 쓰는 바람에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 1744년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봉헌물이 되면서 콜로세움은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지하의 천장, 즉 경기장 나무 바닥 부분은 근래 발견되었다.
콜로세움하면 생사를 건 검투사들의 결투, 맹수들의 잔혹한 싸움, 맹수와 인간의 싸움, 사형수나 무고한 기독교인들의 끔찍한 처형 같은,
으스스한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그 사실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검투사들에 대한 잔인한 묘사의 이면에는 로마의 퇴폐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콜로세움을 퇴폐와 악행이 만연했던 곳으로 기억하지만 당시 로마인들의 콜로세움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와 대결을 펼쳤던 로마제국의 황제 코모두스의 흉상
사자 머리를 뒤집어쓰고 헤라클레스와 같은 폼을 잡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의 아들인 그는 제정(帝政) 때 5현제(賢帝)의 전성기 다음에 즉위한 황제(재위 180~192)이다.
그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내외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해 쇠퇴기에 접어든다.
온갖 잡기를 탐닉했던 그는 특히 검투장에 직접 나서서 싸우기를 즐겼다.
대부분의 검투사들은 포로 · 노예 · 죄인으로 구성되었고 훈련소에서 철저히 단련되었다. 검투사들을 양성하는 전문기관도 있었다.
그러나 검투사가 모든 경기에서 ‘도’ 아니면 ‘모’ 식으로 죽음의 결투를 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검투사들의 싸움에서 패배자가 죽임을 당할 때는 패배자가 비겁한 행동을 했을 경우이다.
그리고 상류층 자제들이 직접 경기에 참가하는 일도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 기원전 10~기원후 54)의 황비 메살리나(Valerius Messalina, 22~48)도 검투사 출신이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코모두스황제는 로마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로 인정받기 위해 1,000회 이상 검투장에서 싸웠다.
그중 355회는 아버지가 황제로 있을 때였고, 735회는 자신이 황제일 때였다.
코모두스의 진짜 목적은 돈이었다.
그는 결투에 나설 때마다 검투사들의 공동기금에서 50만 세스테르츠를 송금하도록 시켰다.
코모두스는 그리스의 ‘헤라클레스’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시 유명한 검투사였던 파울루스의 이름을 자신의 동상 밑에 새기기도 했다.
검투는 로마인들에게 일상적인 오락거리였고 일종의 익스트림스포츠였다.
검투사는 오늘날의 프로스포츠 선수처럼 인기가 많았고 사람들은 유명한 검투사에 돈을 걸었다.
유능한 검투사는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인기 좋은 직업이었다.
검투사들은 검투의 수익금 일부를 나누어 가졌는데 검투 초보자의 경우 관리가 받는 돈의 3배를 받았다.
검투사들의 훈련지에는 성공한 검투사를 부러워하는 낙서도 남아 있다.
폼페이의 건물들 벽에 있는 낙서에는 셀라두스라는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가 로마의 여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적혀 있는데
그들은 검투사의 몸을 만지기만 해도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콜로세움의 벽에는 로마시대의 누군가가 적은 낙서가 있다. 인기 있는 검투사에게 보내는 ‘팬레터’였다.
“모든 결투에서 당신은 승리했습니다.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검투사들의 격투장면이 묘사된 모자이크
모자이크 그림을 보면 같은 팀에 속한 검투사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로마시민들은 인기가 높은 검투사들의 이름을 외우고 환호하며 그들에게 팬레터를 보내기도 했다.
보르게세박물관에 있는 검투사 조각상
콜로세움 공식 개장일에 한 로마인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찢긴 사지는 살아 있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의 몸에는 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현대의 스포츠 이벤트처럼 검투장에서도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광대들이 나와 흥을 돋우었고 동물들이 쇼를 벌였다.
그리고 죄수들의 공개처형도 있었다. 죄수들의 공개처형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게 할 목적으로 단골 행사로 치러졌다.
이때 말뚝에 묶인 사형수들은 곰이나 호랑이에게 살해되었고, 후대에는 기독교인들도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런 흥을 돋우는 쇼나 긴장감을 돌게 하는 공개처형이 있은 후 검투가 벌어졌다.
검투사들이 화려한 검투 장비를 착용하고 여러 번 검투장 안을 돌면 검투 규칙이 낭독되었다.
사회자가 검투사의 경력을 소개하며 흥을 돋우면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검투사에게 돈을 걸었다.
유명한 검투사의 이름은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알고 있었다.
유명한 검투사끼리는 맞붙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맞붙었다가 한쪽이 희생되면 시민들의 볼거리를 빼앗기 때문이다.
유명한 검투사인 경우 1년에 한 번에서 다섯 번 정도 검투에 나갔다.
검투가 위험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결투 중 죽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검투사는 항상 죽음을 감수하고 결투에 임했다.
하지만 검투가 로마인들에게 구경거리였고 익스트림스포츠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네카는 검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이 시작되었다.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구경꾼은 적을 죽인 사람에게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그 역시 다음 경기에서 다른 상대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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