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5. 19:02ㆍ미술/서양화
저자 이네스 야넷 잉겔만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면서 프랑스 미술 전문가이자 전시 기획자로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있다. 저서로는 『잭슨 폴록과 리 크래스너(Jackson Pollock and Lee Krasner)』(Prestel, 2007)가 있다.
인상주의에 대하여
글 양이 많아서 옮기지를 못하겠는데 인상주의에 대해서 정리를 아주 잘했군요.
1 풀밭 위의 점심 | 에두아르 마네
1863년 살롱에서는 3분의 2에 해당하는 총 3,000명 이상의 화가가 탈락했다. 심사위원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거절당한 작품들을 추려서 소위 《낙선전》을 열도록 지시했다. 살롱에서 낙선한 화가 중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전시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황제의 속셈은 심사위원단이 공정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지만, 살롱에서 거절을 당한 화가들은 이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심사위원단의 편협함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황제희 교묘한 전략에 넘어갔다. 그들은 즐겁게 전시를 관람했고 심사위원단이 옳았다는 데 동의 했다. 그러는 사이 살롱의 '본전'에서는 알렉상드르 카바넬「비너스의 탄생」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던 이 그림을 즉시 구입하여 개인적인 공간에 걸어 두었다.「비너스의 탄생」에는 관능적인 모습으로 누워 있는 여인의 나신이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비너스는 전라로 살롱에 입장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같은 시기에 그려진 마네의「풀밭 위의 점심」(츨품 당시 제목은「목욕」) 속 이름 모를 나체의 여인은 퇴짜를 맞았다. 비록 마네가 그린 여인들은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선정성에 있어서는 이 비너스에 비할 바가 전혀 아니었지만, 황제는 '음란하다'라는 이유로 마네의 그림을 살롱에서 탈락시켰다. 그리고 관람객들에게 야유나 당하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콩나물시루처럼 그림이 빽빽하게 들어찬 《낙선전》에 처박아 버렸다. 이 '음란하다'는 평가는 《낙선전》을 찾은 수많은 관람객들의 입에서도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2 정원의 여인들 | 클로드 모네
모네는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쳐야 했는데(이 도주는 향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자기 그림이 채권자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200여 점의 작품을 난도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그림 조각들은 50개 한 세트당 약 30프랑을 받고 팔려나갔다. 그때 모네는 그림 그릴 새 캔버스를 못 사서 몇 번이나 완성된 그림의 물감을 벗겨내고 다시 그렸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네의 야심작이었던 「정원의 여인들」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는 1867년 살롱에 이 작품을 전시하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낙선!이라는 결과는 그를 좌절시켰다. 하지만 1921년경 모네가 유명 화가가 되자 프랑스 정부가 이 그림을 사들이고 싶어 했다. 모네는 20만 프랑을 제시했다.
모네, <카미유(초록 드레스의 여인)>, 1866, 캔버스에 유채, 231x151cm, 브레멘 쿤스트할레
모네가 카미유를 만난 이듬해에 그린 그림이다. 카미유는 리옹에서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다가 바티뇰(Batignolles)에 정착하게 되면서 10대 때부터 화가들의 모델을 서게 되었다. 당시 바티뇰에는 화가들의 작업실이 많았다. 모네는 작업실을 나눠 쓰던 동료 화가 바지유(Fréderic Bazille)의 소개로 카미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 카미유는 18살, 모네는 25살이었다. 모네는 카미유의 매혹적인 눈에 특히 반했다고 한다.
카미유에게 검은 줄이 있는 초록 드레스를 입혀 그린 이 작품은, 살롱 전에 출품되어 비평가들과 관객들에게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런 만큼 젊은 화가 모네에게는 이름을 알릴 수 있는 훌륭한 제자가 되어준 그림이다. 당시 무명화가의 그림 값으로는 고가인 80프랑에 팔려 재정적으로 쪼들리던 두 연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빛과 대기에 집중하는 인상파의 특징은 아직 그다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세련된 대상 묘사와 감각적인 색 처리에서 화가의 탁월한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카미유는 모네뿐 아니라 르누아르와 마네를 위해서도 모델을 서주었다.
3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 클로드 모네
4 발코니 | 에두아르 마네
5 라 그르누예르 | 클로드 모네
6 다림질하는 여인 | 에드가 드가
다리미가 식지 않도록 계속 달구어대는 오븐이 으르렁거리는 작업 공간 탓에 다림질하는 여인들은 목이 훤히 드러나고 뺨이 타오르듯 붉었다. 이들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는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드가가 즐겨 그렸던 무용수들이나 캬바레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다림질하는 여인들은 남자들에게 손쉬운 매춘 상대로 여겨졌다.당시 사람들은 이 같은 주제의 회화들에서 외설적이고 선정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19세기 중반 파리 여성의 5분의 1 정도가 자신들은 절대로 사 입을 수 없는 옷들을 빨고 다리미질하는 일에 종사했다.ㅡ이 그림에서 드가의 모델이 된 도비나는 열예닐곱 정도의 직업 모델이었다.
7 롱샹의 경주마들 | 에드가 드가
드가,
마네의 <롱샹의 경마 Courses a Longchamp>, 1867?, 유화, 43.9-84.5cm.
에드가 드가의 <경마장의 좁은 길 Le Defile (Chevaux de Course Devant les Tribunes)>, 1866-68, 유화, 46-61cm.
마네, <불로뉴 숲의 경마競馬>, 1872년, 캔버스 유채, 72.5×92.5cm, 뉴욕 개인 소장
8 무용 수업 | 에드가 드가
에드가 드가, <무용실>, 판지에 유채, 19×27cm, 1872,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9 빌뇌브라가렌의 다리 | 알프레드 시슬레
Oil on canvas 46 x 62 cm (18 1/4 x 24 5/16") Museum of Fine Arts, Montreal
Oil on canvas 46 x 62 cm (18 1/4 x 24 5/16") Museum of Fine Arts, Montreal
Museum of Fine Arts, Montreal
시슬레의 '장식적인 감각'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정적인 풍경 작업을 추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불전쟁으로 인해 파산한 아버지로부터 아무 것도 물려받지 못한 시슬레는 부인과 두 아들을 힘겹게 부양해야했다. 그와 함께 어울렸던 화가들이 명성을 쌓은 후에도 시슬레는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와 마찬가지 신세였던 피사로는 이렇게 적기도 했다. "시슬레와 나는 인상주의 꼴찌 부대다."
10 해돋이 인상 | 클로드 모네
1874, 인상 해돋이, 모네
모네는 1870년 보불전쟁에 징병되는 것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쳐 머물던 당시, 카미유 피사로와 함께 정기적으로 미술관을 찾았다. 그들은 존 컨스터블과 윌리암 터너의 작품, 특히 터너가 18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빛과 물, 그리고 연기와 대기 사이의 상호작용을 묘사했던 작품에 열광했다.
프랑스의 경우에 볼 수 있듯이 명료성을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는데 익숙해져 있던 미술 비평계는,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비롯하여 이러한 그림들에 대해서 평가를 내릴 것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11 아르장퇴유 근처 양귀비 들판 | 클로드 모네
모네 가족이 아르장퇴유에 정착한 이후로 궁핍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생활은 한결 평화로워졌다. 모네는 아르장튀유에 머무는 동안 2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는 가히 "인상주의 회화의 황금기"가 시작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12 뱃놀이 | 에두아르 마네
13 정원에 있는 모네 가족 | 에두아르 마네
마네 作
르누아르 作
14 오베르쉬르우아즈 발레르메이의 소들 | 카미유 피사로
Banks of Marne River at Chennevières, 1864- 65
Jallais Coast, Pontoise, 1867
Boulevard Montmarte, 1897
The Hermitage at Pontoise, 1867
Hyde Park, London, 1890
Garden of Les Mathurins at Pontoise,1876
La Maison dans le Bois, 1872
Apple Picking at Eragny-sur-Epte, 1888
The Artist's Garden at Eragny, 1898
The Chestnut Trees at Osny
Calèche postale après des Ennery, 1877
Landscape at Chaponval, 1880
View of l'Hermitage, Jallais Hills, Pontoise, 1867
The Road to Louveciennes, at the Outskirts of the Forest, 1871
The Red Roofs, 1877
Landscape in the Vicinity of Louveciennes (Autumn),1870
15 관람석 |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관람석〉 1874, 캔버스에 유채, 80×63.5cm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 생각에 연극은 관람석에서도 벌어진다. 관객들은 무대 위의 배우만큼이나 중요하다." 당시에는 공연 중에 무대만이 아니라 관객석도 환하게 조명이 밝혀졌다. 관객들은 스스로가 극장을 장식하는 배우이자 동시에 타인에 의해 관찰되는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멋진 외출복과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극장을 찾은 여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이것은 함께 온 남편이나 애인에게 보람을 주었다. 오페라를 관람하는 하룻저녁에 소요되는 비용은 이들 남성들이 자신의 위신을 위해 하는 일종의 투자였던 셈이다.
16 몸단장하는 여인 | 베르트 모리조
17 압생트 | 에드가 드가
18 햇빛 아래 누드 | 오귀스트 르누아르
19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 오귀스트 르누아르
<믈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31 ×175 오르세 미술관
르누아르가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에는 거의 반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는 사람들의 포즈와 개개인의 특징을 유심히 관찰했으며 현장에서 여러 차례 스케치 작업을 했다. 그리고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서 스케치했던 것들을 변형시켜 일요일 무도회의 소박한 즐거움과 조화로움, 원기왕성한 분위기에 바치는 하나의 오마주를 만들었다.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이 그림은 역사의 일부이며 파리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념물이다. 르누아르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일상생활의 한 장면을 이렇게 큰 캔버스에 옮겨 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20 나나 | 에두아르 마네
마네의 「나나」가 가퓌신 거리의 한 골동품 상점 진열장에 걸린 사건은 희대의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이 그림을 떼어달라는 소위 점잖은 시민들의 민원이 경찰에 접수되었다. 이 그림의 모델이었던 앙리에트 오제는 세상이 다 아는 오랑주 公의 몸종이자 정부였다.
마네는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에 나오는 어린 소녀 '나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 그림의 제목을 결정할 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졸라는 후에 나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또 다른 소설 <나나>(1880년)를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그림은 화가가 죽는 날까지 그곳에 있었다. 마네가 사망한 후 그의 유산의 일부로서 333프랑에 경매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9,000프랑에 팔렸다가 1910년에는 20만 프랑의 가격으로 시장에 나왔다.
21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 구스타브 카유보트
카유보트,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캔버스 유채, 212.1X276.2cm, 1877
"카유보트는 이름만 인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조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은 1853년에서 1870년 사이 파리의 경찰국장을 지내면서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아 도시의 외관을 개조하는 사업을 진행했다.길이가 약 50키로미터에 달하는 새로 생긴 대로변을 따라 공공건물과 사유 저택들, 그리고 아파트형 주거단지를 포함하여 4만여 채의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재건사업을 위해 25억 프랑이라는 비용이 소요되었는데, 이것은 원래 잡혀 있던 예산의 50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카유보트는 이로하 도시계획 사업에 매료되어 현대적으로 변한 파리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의 배경은 모스코 거리와 튀랭 거리가 만나는 지점으로 생라자르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22 생라자르 기차역 | 클로드 모네
23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 오귀스트 르누아르
르누아르, <샤르팡티에르 부인과 아이들>, 캔버스에 유채, 153.7x190.2cm, 187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출판업자인 조르주 샤르팡티는 작가 에밀졸라와 화가 마네의 친구로서 가장 먼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던 컬렉터 중 하나였다. 그는 갤러리도 운영했는데 1879년 첫 전시는 르누아르에게 헌정되었다. 샤르팡티는 갤러리를 개관하기 불과 몇 해 전에 르누아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과 두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르누아르로서는 정말이지 기대하지도 못했던 행운이었다.
샤르팡티 가족의 영향력 덕에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은 1879년 파리 살롱에 전시될 수 있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초상화를 의뢰하는 고객이 늘면서 이제 이 화가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은 지나간 옛일이 되었다.
24 1878년 6월 30일, 생드니 가 | 클로드 모네
1978년 6월 30일. 제3회 파리 세계 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도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프랑스는 마침내 보불전쟁과 파리 코뮈의 공포를 말끔히 씻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파리시민들의 장터였던 레알 구역은 수많은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 구역은 원래 원단 거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천으로 깃발을 만들어 건물을 장식하는데 열심이었다.
1920년에 모네는 이 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나는 그 깃발을 좋아했다. 나는 그림도구를 챙겨서 몽트르괴이 거리로 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걸어가다가 발코니를 발견하고는 주인에게 부탁하고 허락을 받았다." 이날 하루 모네는 몽토르괴이 거리와 생드니 거리에서 거의 똑같은 그림을 그렸다.
마네의 <모니에 가의 깃발 La Rue Mosnier Pavoisee>, 1878, 유화, 65-80cm.
25 겨울 정원에서 | 에두아르 마네
26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 | 베르트 모리
27 한 잔의 차 | 메리 커샛
28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0년. 130 x175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29 해바라기 | 클로드 모네
30 시골의 무도회 / 도시의 무도회 | 오귀스트 르누아르
르누아르, <부지발의 무도회>
「도시의 무도회」에서의 여인은 발라동('수잔'이라고도 불렸다)이다.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 열일곱 살 소녀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 앙리 드 틀루즈 로트레크를 포함하여 다양한 화풍의 화가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이들 모두의 모델이었으며 이들 모두의 애인이기도 했다. 이 그림의 모델을 섰을 때 그녀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녀와 르누아르의 연인관계는 1883년에 끝났다. 르누아르는 자신과 교제했던 애인들에게 작별 선물로 초상화 한 점씩 주는 습관이 있었는데 수잔은 당시에 그려진 춤추는 그림 중에서 세 번째 그림인 「부지발의 무도회」를 원했다. 여기서 그녀는 「시골 무도회」의 알린 샤리고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발라동은 이후 화가가 되었다. 그녀의 드로잉은 심지어 무뚝뚝한 드가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그녀가 낳은 아들도 화가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 화가인 모리스 위트릴로이다.
31 폴리베르제르의 바 | 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는 그야말로 극장이 아닌 극장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앙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2,000명의 남자들과 근사한 몸짓으로 가볍게 말을 걸어오는 700~800명의 여자들이 펼치는 한 편의 연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부유했던 마네는 이 유흥의 전당을 자주 드나들었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마네가 1883년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롱에 출품한 그림이 되었다.
32 뮌헨의 비어 가든 | 막스 리베르만
(95 x 69 cm, Neue Pinakothek, 뮌헨)
막스 리베르만(1847-1935)은 부유한 유태계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법률 공부를 하다 미술에 뜻을 두고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에는 프랑스 인상주의와 네덜란드의 견실한 사실주의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인상주의 그림을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은 인상주의가 뒤늦게 이입되었고 이입되자마자 모더니즘으로 넘어갑니다. 로비스 코린트나 막스 슬레보그트는 인상주의에서 출발하지만 표현주의 선구자가 됩니다. 리베르만 자신은 인상주의 화풍에 충실했지만 클림트를 위시한 젊은 화가들이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며 분리파를 구성할 때 거기 힘을 실어줌으로써 모더니즘 형성에 공헌합니다.
1935년 노대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미 나치가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리베르만의 장례식에는 공식 화단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고 케테 콜비츠를 비롯한 몇몇 후배 예술가들만이 게슈타포의 감시를 무릅쓰고 나타나 그를 애도했습니다.
33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 조르주 쇠라
34 에스타크에서 바라본 마르세유 만 | 폴 세잔
35 만포르트 | 클로드 모네
36 브르타뉴의 시골 아낙네들 | 폴 고갱
Four Breton Women, 1886, oil on canvas, Neue Pinakothek, Munich. 132KB
37 밤의 테라스 | 빈센트 반 고흐
38 붉은 옷을 입은 오르탕스 피케 | 폴 세잔
39 사이프러스 | 빈센트 반 고흐
40 데이지 꽃을 든 소녀 | 오귀스트 르누아르
41 사과와 앵초 화분이 있는 정물 | 폴 세잔
42 저녁에 본 루앙 대성당 | 클로드 모네
43 소파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사절단:아리스티드 브뤼앙
물랭 루즈의 연기자
화장
관객에게 인사하는 이베트 길베르
춤추는 잔 아브릴
코메디 프랑세즈의 앙리 사마리
머리빗는 여인
침대
물랭 루즈에서의 춤
'라 미'에서
페르난도 서커스의 곡마사
'물랭 루즈'에서의 무도회
유곽의 여인
물랭 루즈
소파
안락의자
셀레이랑의 젊은 루티
물랭 가의 살롱
바
아침을 먹고 있는 화가의 어머니, 아델 드 툴루즈 로트렉 백작 부인
디방 자포내
말 한 필이 끄는 마차
잔 아브릴
[출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작성자 sophia porcelain
44 몽마르트 거리, 겨울 아침 | 카미유 피사로
45 수련 연못의 다리 | 클로드 모네
46 아비뇽의 교황청 | 폴 시냐크
47 사육사와 앵무새들 | 막스 리베르만
48 흰옷을 입은 단드라데 | 막스 슬레포크트
자화상
49 국회의사당(안개의 효과) | 클로드 모네
50 목욕을 마치고 | 로비스 코린트
인상주의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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