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7. 20:39ㆍ미술/서양화
프랑스 에두아르 베르나르 드바 퐁상 (Edouard Bernard Debat-Ponsan / 1847~1913)
연애하기 Flirting / 80cm x 115.5cm / oil on canvas / 1896
참 달콤한 장면입니다. 남자는 턱을 괴고 여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인에게로 향한 그 시선이 그윽합니다.
뜨개질을 하던 여인도 잠시 손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양 그림 속에는 남자가 엎드려 여인을 올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더 낭만적으로 보이기 때문일까요?
두 사람 사이에 울렁거리는 감정들이 오고 가는데 남자 뒤편에 있는 소의 자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풀을 뜯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남자를 향해 달려 올 준비를 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저도 남자의 눈매가 너무 노골적이다 싶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소도 그런 느낌이었나 봅니다.
벌떡 일어나는 남자의 다음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퐁상은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태어 났습니다.
열 네 살부터 툴루즈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화가로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파리에 있는 에콜드 보자르에서 공부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자리를 옮겨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합니다.
당대 가장 성공한 아카데미즘 화가였던 카바넬이 그의 스승이 됩니다.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열어 가기에는 어린 나이인 것 같은데 당차다는 생각이 듭니다.
입다의 딸 The Daughter of Jephthah / 241cm x 305cm / oil on canvas / 1876
'입다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화가들의 좋은 주제였습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11장에는 이스라엘 장군 입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돌아 올 때 가장 먼저 자기를 환영하는 사람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오는 입다를 제일 먼저 마중 나온 것은 그의 딸이었습니다.
이미 신과 한 약속은 돌이킬 수 없었고 딸은 제물이 되기 전 친구들과 산에서 머물겠다며
두 달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림 속 장면은 두 달이 끝난 날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제 제물이 되어 떠나야 할 입다의 딸의 눈에는 만감이 서려 있습니다.
분노도 보이고 한편으로는 체념도 있습니다.
약속은 그래서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스물 세 살이 되던 1870년, 퐁상은 파리 살롱전에 데뷔합니다.
그러나 수상에는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해 보불 전쟁이 일어납니다. 프랑스 전체가 혼란 속에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퐁상은 에콜드 보자르의 전통인 신화 속 장면, 종교적인 주제, 역사적인 사건들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합니다.
세부 묘사와 이상적인 구성도 물론 학교의 전통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퐁상은 그 후 4년간 살롱전과는 거리를 둡니다.
루브르 궁전 입구의 어떤 날 One morning at the gates of the Louvre / oil on canvas / 1880
루브르 궁전 문 앞에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합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당시 프랑스 왕 찰스 9세의 어머니 캐더린입니다.
그리고 학살당한 사람들은 위그노파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건은 1572년 8월 24일 상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일어났습니다.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캐더린이 지목되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와 세속이 뒤섞이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죽은 어린 아이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묘한 것이어서 되풀이 되곤 합니다.
1871년 파리에는 시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자치정부 파리코뮌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피의 1주일’ 간 3~4만명이 파리코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합니다.
퐁상은 이 사실을 그리고자 예전의 학살을 주제로 가져 왔습니다.
이 역사가 앞으로는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고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퐁상이 살롱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로마 대상을 받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로마 대상을 수상한 사람은 4년 간 로마에 머물면서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할 수 있었고
귀국 후에는 성공이 보장 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1873년 로마 대상을 목표로 했지만 퐁상은 2등상에 머물고 맙니다. 실망이 컸겠지요.
그리고 퐁상은 다시 살롱전 출품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꽃꽂이를 준비하며 Preparing the Flower Arrangement / 71.1cm x 52.1cm / oil on canvas / 1886
이미 자신의 키를 넘어설 만큼 꽃을 꽂았지만 아직도 화병에 담아야 할 꽃이 한아름입니다.
꽃을 꽂기 위해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여인은 전체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제가 알고 있는 꽃꽂이는 자신의 보고 싶은 꽃들의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꽃들로 조화를 이루어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여인의 머리 속에는 어떤 그림이 자리를 잡고 있을까요?
혹시 ‘하늘까지 오르는 꽃들의 이야기’ 같은 것일까요?
들꽃을 꺾어 소박하게 만들어 놓은 아내의 꽃꽂이가 생각납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파리를 주름 잡기 시작했지만 퐁상은 아카데믹 화법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이 무렵 이제까지 쓰던 퐁상이라는 이름을 ‘드바 퐁상’으로 바꿉니다.
퐁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화가가 등장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1874년 살롱전에서 2등 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투루이용 상 (Prix Troyon)을 수상합니다.
투루이용은 네덜란드의 동물화 기법을 익힌 프랑스 화가였습니다.
퐁상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 묘사가 뛰어 났기 때문에 받은 상이었고
퐁상은 동물과 풍경 전문 화가라는 평을 얻게 됩니다.
길가에서의 휴식 A Rest along the Way / 90.2cm x 129.5cm / oil on canvas / 1890
쇠스랑을 들고 밭으로 나가던 여인이 길가에서 쉬고 있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앉아 있는 여인은 새참을 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참을 주러 가는 길이라면 저렇게 느긋하게 앉아 있기 어렵거든요.
여인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밭으로 따라 나가던 소도 급할 것이 없다는 듯 풀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삶은 항상 고단한 것 같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번의 살롱전에 출품을 한 퐁상의 이름은 파리 미술계에 알려졌고
힘있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의 이름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마가렛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 퐁상은 세 아이를 낳습니다.
첫째 아이는 나중에 의사가 되었고 아들 중 한 명은 1912년 로마대상을 수상해서 아버지의 한을 풀게 됩니다.
퐁상의 작품 주제는 다양하게 변화합니다.
동물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는데
다른 화가들은 동물에만 포커스를 맞췄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목동의 휴식 Herdsman's Repose / 153cm x 226cm / oil on canvas / 1893
맨 처음 그림 속 연인들보다 훨씬 보기 좋습니다.
맨발인 두 사람 사이에 말보다 몇 십 배는 더 강한 이야기가 흐르는 듯 합니다.
마주 보고 시작한 사랑은 같은 곳을 보는 것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같은 곳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나 상대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함께’ 본다는 것이지요.
비록 나이는 어려 보여도 두 사람의 표정에서 서로를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소, 두 사람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입니다.
참 행복한 순간입니다.
또한 퐁상은 밀레처럼 농촌의 일상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은 그가 추구한 또 다른 주제였습니다.
이전 세대의 문학가들이 묘사한 중동은 이국적인 소재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1882년, 당대 많은 화가들이 그랬듯이 퐁상도 그런 중동의 모습을 찾아 터키 여행을 떠납니다.
그의 대표작은 마사지 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1883년 이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합니다.
할렘에서의 마사지 The Message in the Harem / 127cm x 210cm / oil on canvas / 1883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방, 마사지를 받고 있는 여인의 몸이 눈부십니다.
마사지를 하는 검은 여인 때문에 더욱 하얗게 보입니다.
타일 위에 새겨진 푸른색 무늬와 어울려 두 여인이 만들어 내고 있는 광경은 더욱 이국적입니다.
그림 속 늙고 검은 피부, 젊고 하얀 피부의 대비가 묘한 슬픔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할렘에서 마사지 하는 모습을 작품에 담기는 했지만
퐁상은 중동에서 볼 수 있었던 다른 소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이 끝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종교와 역사, 애국적인 주제에 집중했던 퐁상은 초상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냅니다.
1881년 살롱전에 초상화를 출품했고 그 해 레종 드 뇌르 작위를 받게 됩니다.
다음 해부터 퐁상에게는 초상화 제작 의뢰가 밀려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곳이나 이 곳이나 별 차이가 없군요.
포도 수확 The wine harvest / oil on canvas / 1886
모두들 포도 수확에 정신이 없습니다.
수확한 포도를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오는 여인도 보입니다.
큰 통에 포도를 담기 위해 온 여인이 무엇을 본 것일까요? 눈매가 차가워졌습니다.
따라 나온 아이는 통 안의 포도를 장난감 삼아 노는 재미에 빠져 있어서 엄마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마차 위에 서 있는 남자는 긴 장대를 들고 여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이 남자, 좀 웃기는군요. 저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같이 포도를 따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마차는 적당히 소를 묶어 놓으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혹시 여인과 남자 사이에 이런 말이 오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포도 좀 빨리 빨리 따. 어두워지고 있어."
"와서 같이 하면 안돼? "
"난 마차 지키고 있어야지."
여인의 마음 속에서 어떤 대답이 꿈틀거리는 지는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퐁상의 자세는 - 제가 그렇게 본 것일 수도 있지만 - 좀 특이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관료들과 맞선 적도 있었습니다.
1889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퐁상은 작품을 출품했는데 상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1등이 아니라 3등상이었고 그는 수상을 거절합니다.
1등이 아닌 것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었지만
사전에 상이 전해지는 것에 대한 것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우물가에서 At the Well / 90.2cm x 129.5cm / oil on canvas / 1888
우물가에서의 ‘섬씽’은 동양과 서양이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소 떼를 잔뜩 몰고 온 청년이 물을 퍼 올리고 있습니다.
줄을 지어 가축들이 물을 마시고 있는데 작은 물 주머니를 들고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청년에게는 다시 없는 기회가 왔습니다.
물 한 바가지면 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바가지를 잡고 청년의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인도 싫지 않은 듯 웃음이 입가에 살짝 걸렸습니다.
날은 어두워가는데 언제 가축들 물을 다 먹일 셈인지 궁금합니다.
맨발의 여인, 참 매력적이군요.
1898년, 퐁상은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자유주의자로서 이 사건을 보게 됩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당시 참보부 장교였던 드레퓌스가 간첩죄로 체포되고
그 이후의 과정에서 보여준 군부와 정부의 탄압과 억압에 대해 양식 있는 지성인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었지요.
진범이 있음을 알면서도 유태인이었던 드레퓌스를 끝까지 범인으로 몰았고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한 전모를 밝혔습니다.
퐁상 역시 이 사건에서 재심을 요구하는 편에 서서 활동합니다.
집시의 화장대 Gipsy at her Toilette / 88cm x 116cm / oil on canvas / 1896
한적한 길에 세워 놓은 마차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시 출발 준비를 앞두고 길을 따라 흐르는 작은 개울가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손바닥만한 거울을 올려 놓았습니다.
머리를 감은 여인은 그녀만의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양이 그것이라면 그것을 즐기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요.
‘남루한 화장대’를 탓한다고 좋아 지는 것은 없습니다.
‘양’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질’은 자신에게 달린 일입니다.
집시 여인의 화장대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아가씨, 고맙습니다!
퐁상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들은 돈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자유주의자인 퐁상에게는 거북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퐁상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화가로서의 생활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그에게 확실히 있었던 것일까요?
정부가 주도하는 살롱전 역시,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살롱전에는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예술은 예술이고 생활은 생활이다 – 혹시 퐁상의 좌우명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들판에서의 휴식 Rest in The Fields / 71.1cm x 98.5cm / oil on canvas
일하는 아빠를 위해 어린 딸이 새참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밭을 갈 던 소를 잠시 쉬게 하고 아빠는 들꽃이 핀 밭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밀집 모자를 목에 건 것을 보니 오는 동안 힘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듬직한 보디가드로 따라 온 검둥이도 의젓하게 소녀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에는 흐뭇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세상이 변하다 보니 이제 더 이상 이런 풍경은 없어졌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서 멀지 않은 아버지 회사에 우산을 전해드리러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 업무가 끝날 때까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예쁜 사무실 누나’들이 사 준 ‘아주 맛있는 과자’를 먹었죠.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 오는 길, 아버지가 무척 커 보였습니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초상화로 두각을 나타내고 난 뒤 퐁상은 전원 풍경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참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보여 준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작품의 화풍은 흔들리지 않고 아카데미즘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순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퐁상의 이야기를 읽다가 ‘아주 단단한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간의 평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기준을 끝까지 유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화가가 아니었으면 투사가 되었어도 잘 하지 않았을까요?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꼭 그에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이 분은 글을, 일반인들이 읽기 쉽도록 요령있게 잘 씁니다. 미술책도 몇 권 냈어요.
네이버 블로그인데도!, 복사해 와도 자료 그림이 지워지지 않아서 좋습니다.
자료수집도 많이 했고, 미술사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미술감상에 관심 있는 분은 <레스카페> 찾아가보세요.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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