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타고난 운명 짝퉁시비
판 메이헤런의 페르메이르 위작 <엠마오의 식사>, 1937, 유화, 117x129㎝, 보이만스 미술관
르네상스 이전 ‘베끼기’는 배움의 방편 “노략질” 저주속 관대한 시각도 있지만 큰돈 오가는 시장에선 어림도 없는 일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져온다.
“(19세기 프랑스 풍경화의 대가) 코로는 평생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 가운데 5천여 점이 미국에 있다.”
코로의 경우 진품보다 위작이 훨씬 더 많다는 이야기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나온 것이라면 의심부터 하고 보아야 한다는 충고다. 꼭 코로뿐이랴, 피카소, 달리, 샤갈, 미로, 반 고흐 등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미술가치고 위작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을 지낸 토머스 호빙은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미술품의 40% 가까이가 위작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야스다 화재가 1987년 4천만달러에 구입한 반 고흐의 <해바라기>.
출처 추적 결과 위작으로 의심받고 있다.
위작은 생각 밖으로 많이 제작되고 거래된다. 그리고 위작의 역사 또한 매우 오래됐다. 우리에게는 위작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시장을 꿈꿀 권리가 있지만, 미술시장이 형성된 이래 그런 ‘태평성대’가 온 적은 아직 없다.
위작이 따라붙는 것은 어쩌면 미술이라는 예술의 타고난 운명인지 모른다. 모든 미술은 모방에서 출발했다. 세계를 모방하는 것, 곧 베끼기가 미술의 한 본령이다 보니 위작이라는 모방이 그 본령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원작의 개념이 없었던 옛날에는 이런 베끼기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방작(倣作)이라 하여 옛 대가의 그림을 임모하는 게 존경의 표시이자 창작의 한 방식이었다. 서양에서도 거장과 선생의 그림을 모사하는 게 중요한 배움이었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조각을 수도 없이 베꼈다. 오늘날 실제 그리스 조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그리스 조각의 성격과 특징을 깊고 광범위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상당 부분 이 모작들 덕분이다. 로마인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조각가로 하여금 이를 베끼게 해 그걸로 자신들의 빌라를 꾸몄다. 동일한 작품이 워낙 많이 베껴지다 보니 원작이 망실되고 모작이 다수 파괴되어도 끝내 살아남은 게 있어 그리스 조각의 특징을 오늘날까지 전하게 된 것이다.
앨마 태디마의 <행운을!>, 유화, 25.4x12.7㎝, 왕립 컬렉션.
그림 하단에 사인과 함께 위작 방지를 위한 전작번호(CCCXXII)를 써 넣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가가 도제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때 자신의 그림을 베껴 스타일과 기법을 익히도록 했다. 잘 베낀 그림은 스승이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렇게 해서 번 돈은 가르침의 대가, 그러니까 수업료로 갈음됐다.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이런 모작들이 화가의 진작으로 전승되어 본의 아니게 위작이 되어버리곤 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스승의 그림을 베끼는 전통이 뿌리내린 한편으로, 진품에 대한 존중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 또한 르네상스 무렵이다. 르네상스 들어 고전 부흥의 바람을 타고 로마시대의 조각이 열정적으로 발굴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진품의 가치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미켈란젤로가 몰래 가짜 로마 조각(<잠자는 큐피드>)을 만들어 팔았다는 일화는 당시 시장에 위작이 얼마나 많이 떠돌았는가 하는 사실과, 그에 반해 애호가들이 얼마나 진품에 목말라 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특히 예술가를 공방의 장인이 아니라 천재로 보는 관념이 생겨남에 따라 작품의 고유성과 원작성은 갈수록 중요해졌다.
후에 작가 사인의 원조가 되는 표지가 이때부터 나오게 되는데, 이름의 이니셜 A와 D를 이용해 모노그램을 만든 알브레히트 뒤러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자신의 작품을 베낀 위작이 시장에 워낙 많이 떠돌자 뒤러는 성모를 그린 한 판화에 “남의 작품과 재능을 노략질하고 모방하는 자들이여, 저주를 받으라”라는 명문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표지와 사인마저 모방의 대상이 되자 미술가들 가운데는 나름대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17세기의 거장 클로드 로랭은 유화를 하나 완성하면 이를 그대로 스케치해 따로 보관했다.
위작임에도 진품 행세를 하는 작품이 나올 경우 자신의 스케치 모음과 대조해 시시비비를 가렸다. 영국 화가 앨마 태디마는 1871년부터 작품에 전작번호(Opus)를 도입해 위작의 유통을 막았다. 물론 이 이전에 만들어 판 작품에는 번호를 써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1851년에 제작된 <누이의 초상>을 1번으로 해서 그동안 만든 작품 전체에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뒤 1871년부터는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사인 아래에 반드시 로마숫자로 전작번호를 써 넣었다. 1912년, 죽기 두 달 전에 제작한 유작의 전작번호는 ‘CCCCVIII(408)’이었다.
그러나 화가에 따라서는 이렇게 애써 작품의 진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인이나 괴짜가 많은 미술 분야의 특성상 위작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피카소는 “훌륭한 위작이라면 거기에 얼마든지 내 사인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코로는 자신의 작품이 많이 모사되는 것은 그만큼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해 실제로 가짜에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태도를 결코 용인하기 어렵다. 시장에서는 미술작품도 하나의 상품인 이상 ‘짝퉁’이 횡행할 경우 커다란 신뢰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고, 신뢰의 위기는 시장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를 돌아보면 워낙 다양하고 다채로운 위작 사건들이 발생해 그 사례를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다. 그에 비해 미술시장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는 아직 그처럼 다사다난한 위작 시도는 겪어보지 않은 상태다. 다만 우리 미술시장이 최근 급성장하고 있어 더 커진 보상에 대한 기대로 앞으로 일층 정교하고 교묘한 위작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서양미술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위작 미술가 몇몇을 언급해 보면, 오슨 웰스의 영화 <진실과 거짓>의 소재가 된 엘미르 드 호리는 전세계의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에 평생 1천 점이 넘는 위작을 팔아넘겼으며,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자 그것 또한 속임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위조자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위작임에도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위작 사건의 주인공인 한 판 메이헤런(페르메이르의 국보급 그림을 나치에 판 죄로 중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그 작품과 보이만스 미술관 소장품 등이 자신의 위작이라고 밝히고 이를 믿지 못하는 전문가들에게 감옥에서 직접 위작을 제작해 보여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인기 작가 카렐 아펠을 전문적으로 위조한 헤이르트 얀 얀선(위조 솜씨가 워낙 탁월해 경매회사 등에서 아펠에게 진위 여부를 물었을 때 아펠이 두 차례나 진품 판정을 내렸다), 도나텔로, 베로키오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위작을 제작해 루브르, 빅토리아 앤 앨버트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판 조반니 바스티아니니(중개상과의 불화가 없었다면 위작이라는 사실이 끝내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등이 있다.
최근 탁월한 진위 판별력을 갖춘 디지털시스템이 개발되는 등 위작에 대한 미술계의 대응 노력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예술을 오로지 돈으로만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한 이 모든 수고는 언제라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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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전설적 위조꾼의 걸작 전시회
기사승인 2013.04.17 14:23:03
엘미르 드 호리(Elmyr de Hory, 1906-1976)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짜 그림을 남긴 화가라고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는데, 단순히 유명 화가의 그림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그 화가의 화풍과 정신을 빌려서 자신의 그림을 창작하였기 때문에 전문가들조차도 쉽게 속일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 예술의 본질과 창조성, 진위 판별의 기준 등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미술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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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 호리, 어빙, 오송 월스의 생전의 사진 모습 |
그는 평생에 걸쳐 1,000점 이상에 달하는 위작을 판매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자신은 위조 행위를 철저히 부인하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모네 등의 화가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악마적인 재능으로' 그림을 창작하였다고 반박하였으며, 그의 (가짜?)그림이 개인 수집가는 물론 세계 각지의 화랑 및 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지만 일일이 진위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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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명 딜리아니 스타일 |
2013년 5월12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에는 "다른 화가들의 스타일"로 그린 가짜 그림 28점, 그를 다룬 신문, 잡지 기사 등 관련 자료와 함께 "엘미르 드 호리 스타일"의 진짜 그림 6점도 전시되었다.
전시회를 주관한 측에서는 그의 좋은 그림은 거의 모두가 세계 각지의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다른 유명 화가의 걸작으로 가면을 쓰고 걸려있기 때문에, 전시된 작품은 그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의 사인과 함께 기증한 개인 소장품이라고 출처를 밝히며 양해를 구했다.
또 이번 전시회의 목적은 예술품을 자체의 가치인 아름다움과 창조성으로 대하지 않고 작가의 명성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되는 세태를 꼬집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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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명 마티스 스타일 |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으로 알려진 드 호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무명의 화가로 근근이 생활을 하던 중, 1946년 어느 날 그가 그린 그림을 한 영국인이 피카소의 작품으로 오해하여 좋은 가격에 사가는 경험을 하자, 피카소의 화풍을 빌려서 그린 소묘를 가까운 화랑을 통해 팔기 시작하면서 수채화, 유화로 영역을 넓혔고 다른 유명 화가의 가짜 그림도 그리는 등 본격적으로 위작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짜 그림이 프랑스에서 잘 팔리자 그는 미국에서도 운을 시험해 보려고 3개월 비자를 받아 뉴욕으로 향한다. 미국을 좋아하게 된 그는 1950년대 미국 각지를 전전하며 위조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으나, 팔리는 가짜 그림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들통 날 위험이 커지고 법망을 피해서 불안한 생활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어딘가에 안주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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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이비사에서 오손 웰스와 엘미르 드호리 |
미국 생활 11년을 청산하고 유럽으로 돌아온 드 호리는 1960년대 초에 스페인의 휴양지인 지중해의 이비사 섬에 정착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같은 섬에 거주해 그와 친분을 맺은 미국 작가 클리포드 어빙(Clifford Irving)이 집필한 전기 '짝퉁!(Fake!)' 이 1969년 발간되면서 그의 정체와 삶이 공개되었다.
그 후에 어빙은 은둔하여 생활하는 백만장자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의 자서전 발간을 1971년에 출판사와 거액에 계약하였지만 원고를 날조한 것이 출판 직전에 발각되면서 세기의 사기 스캔들로 번지게 되고 결국은 실형을 선고 받아 14개월을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범죄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이들의 엽기적 행각을 오손 웰스(Orson Welles)는 '거짓과 진실(원제: F for Fake)´ 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1974년에 제작하여 예술의 본질을 묻는 어려운 질문을 드 호리의 입장에서 제기했는데 , 영화 자체가 실존 인물을 등장시키는 다큐멘터리와 편집된 영상을 교묘하게 배합하는 페이크 다큐를 처음 시도한 문제작이기도 하다.
전기의 출판을 계기로 드 호리는 유명해지면서 늦게나마 진정한 화가로서의 대접과 함께 진짜그림도 고가에 팔리는 행운이 찾아왔지만 1976년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하기에 이르는데, 자살한 이유는 그 해에 체결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범인인도협정에 따라 프랑스가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비사 섬에서 지중해 식의 여유 있는 삶을 아주 만족해 하던 드 호리는 교도소에서 여생을 보낼 바에야 차라리 자살을 택하겠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유해는 이비사 섬에 묻혀 그가 진심으로 좋아했고, 또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섬사람들 곁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스페인 김정현 기자 통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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