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티니

2015. 10. 6. 18:40미술/서양화

 

 

 

작품이 맘에 든다기보다도, 세간티니라는 화가, 어떻게 이렇게까지도 불우한 유·소년기를 보낸 사람이 있답니까?

이 포스팅은 화가 세간티니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 세간티니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 감상도 실물로 해야지, 이런 모니터 사진으로 보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89년 봄으로 기억한다. 스위스 산간마을 엥엘베르그에서 국제산악연맹(UIAA) 회원국 이사회가 열렸는데 부회장에 세간티니(Segantini)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이름이 무척 귀에 익어서 알아보니 역시 알프스의 화가로 유명했던 지오반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의 손자였다. 

 지오반니 세간티니는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1858년에 태어나 1899년에 죽었는데, 세간티니가 살아서 활동한 것이 20세기 전 이야기니 지금 21세기를 맞고 있는 우리 사회가 아직 그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그리고 암담하게 만든다. 비록 1세기 전 인물이지만 산악 화가로 세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이기 때문이다.

 

 세간티니는 이탈리아 북부 아르코(Arco)에서 태어나 길지 않은 그의 인생을 스위스 엔가딘(Engadin) 지방에 파묻혀 오로지 산과 고원을 배경으로 인간을 그리다가 그곳에서 운명했다. 결국 그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던 말로야(Maloja)의 한 교회 묘지에 묻혔고, 그 뒤 엔가딘의 중심지 쌍트 모릿츠(St. Moritz)에 세간티니 미술관이 섰다. 일본의 한 등산가가 1922년에 <스위스 일기>라는 책을 냈는데, 그 속에서 저자는 "쌍트 모릿츠에서 가장 기쁜 것은 세간티니 미술관과 그곳을 둘러싼 낙엽송 숲뿐"이라고 했다.

 

 오늘날 쌍트 모릿츠는 세계적 관광 도시로 지난날 동계올림픽이 두 번이나 열렸던 곳이지만, 알프스의 화가 지오반니 세간티니가 그 세계적 명소를 금상첨화 격으로 빛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세간티니가 그곳으로 생의 근거지를 옮기고 알프스 등산의 황금기가 지나갈 무렵에도 만년설에 덮인 고산은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그 지방의 가난한 인간상을 그려나간 그의 인생 항로는 일찍이 운명적으로 예비된 듯 하다.

 

 1905년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이 "이탈리아의 세간티니 같은 사람은 밀레처럼 평생 알프스 산속을 그리다가 끝내 그 산에서 죽었지만, 그의 그림은 한결같이 일종의 설교였다." 고 평한 어느 조각가의 글을 싣고 세간티니를 처음 일본에 소개했다. 100년 전 이야기다.

 

 세간티니로 하여금 알프스에서도 풍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스위스 엔가딘 지방으로 가게 하고 그곳에서 산악 화가로 생애를 마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초상화를 보면 마치 철인이나 시인같은 인상이 짙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는 선천적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세간티니는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은 처음부터 불행의 연속이었다. 형은 불에 타죽고 그도 익사 직전에 지나가던 사냥꾼이 살려 주었다.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가며 세간티니를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밀라노의 친척에게 떠맡겼는데, 그는 누추한 지붕 밑 어두운 골방에서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 세간티니는 누나와 둘이서 롬바드(lomvard) 광야를 가로지르고 밀라노 가까운 심플론(Simplon) 시골길에 쓰러지기도 했다. 그는 몇 차례 소년 감화원에 끌려갔는데 그때마다 뛰쳐나와 거지처럼 방랑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며그는 끝내 학교를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평생 제대로 글을 익히지 못했다고 한다.

 

 세간티니는 17세에 결혼하고 한때 코머 호수 지방(Comer See)에서 돼지 여물을 주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1881년에서 1886년 사이에 그는 시골 풍경이며 가축, 특히 어두워가는 저녁을 그렸는데, 1883년 암스텔담 전시회에 내놓은 그림들이 금상을 받으면서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간티니는 군대에 들어가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 그라우뷘덴(Graubunden)으로 피신했는데, 그 지방에서 그의 예술적 소질을 보고 이 불명예 도망자를 보호해 주었다. 세간티니는 끝내 가난 탓에 정상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그의 평생의 교실은 스위스 엔가딘 지방의 사보민(Savogmino)과 말로야 고원이었으며, 교사는 어려서 잃은 어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이었다.

 

 그가 제대로 그림을 그리기 전 일로, 마을에서 죽은 아이를 놓고 통곡하는 한 어머니의 모습에 감동하여 그린 그림이 온 마을에 알려졌다. 여기에 화가로서의 자질 뿐만 아니라 풍부한 인간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세간티니는 알프스 고원에 있으면서 만년설에 빛나는 고산을 그리거나 그러한 산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활동 무대는 고작해서 표고 1200미터에서 1800미터 되는 고소로, 그 속에서 말없이 생을 이어나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가축, 그리고 야생초를 지켜보며 살았다.

 

 세간티니의 예술을 밀레에 비하기도 하지만, 밀레는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의 품에 안겨 순종하는 엄숙한 인생을 그린데 비해, 세간티니에게는 그 대지에 뿌리를 박고 숙명적으로 겪고 있는 인간들의 우울한 무료함과 그들을 둘러싼 죽을듯한 침묵과 적막감이 강하다.

 

 오늘날 세간티니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들 가운데 대표적인 그림 하나가 베를린에 있는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Ruckkehr ins Heimatland'(귀향길)이다. 초라한 살림을 실은 달구지 뒤를 개가 꼬리를 늘어뜨리고 따라가며 오렌지 빛 하늘에 초승달이 매달리고 멀리 눈을 쓴 산이 보인다. 또한 <Die beiden Mutter>(두 어머니)에서는 인간의 어머니가 양들을 끌고 가는데, 그 무리에 엄마 양과 새끼 양이 있다.

 

 세간티니가 일찍이 부모를 잃은 뒤 고향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연모의 정이 유난히 강하다.

그러한 세간티니의 인생 역정이 필경 언제나 그의 그림으로 압축되고 결정(結晶)했으리라. 그러나 한편 세간티니는 맑은 샘물과 찬란한 태양과 같은 고원의 자연도 놓치지 않았고 태고의 적막 같은 것을 즐겨 그렸다. 그렇다고 그의 생애가 흔히 있는 도피나 은둔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그가 도시를 등지고 깊은 산 속에 살며 끝내 버리지 않고 간직한 것은 원시성과 인간애며, 그것들이 그이 생활 터전 알프스 고원에서 승화한 셈이다.

 

 오늘날 스위스를 찾는 사람은 많아도 쌍트 모릿츠까지 발을 뻗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러는 가운데 유독 쌍트 모릿츠와 다보스 그리고 인스브룩 등지에 스위스의 매력을 느끼는 무리 또한 적지 않으리라.  그토록 이 일대는 세계적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여기를 찾는 이들은 고작해서 스키장과 호화 호텔 레스토랑에 관심이 갈 뿐, 세간티니 미술관을 알려고는 않는다.

 

 필경 세간티니는 부유층과 무관해 보인다. 세간티니는 1899년 9월 하순, 엔가딘 샤프베르그(Schafberg, 2733m)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목이 말라 눈을 녹여 마신 것이 맹장염으로 번져,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정상 가까운 작은 객사에서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제자들이 산길 따라 밑으로 옮겨 안장했다. 그가 영면하는 말로야 교회 묘지는 세간티니가 생전에 작업하던 화실에서 가까운 곳이며, 한때 묘비에 엎드린 여인을 그린 적이 있는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멀리 눈을 쓴 알프스 연봉이 묘지에서 바라다 보인다.

 

 지오반니 세간티니는 일찍이 위대한 화가에 사사하거나 호구지책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시종 알프스라는 자연을 무대로 인간의 삶만을 추구했다. 그의 사상과 인간 감정은 그이기에 그릴 수 있는 산악 풍경 속에 밝으면서 어둡고, 비애와 우울 속에 광채를 발하는 독특한 화법으로 남았다.  그의 작품 가운데 'Werden-Sein-Vergehen'(생존-존재-소멸)이나 'Fruhlings Weide'(봄의 초원)과 'Kuhen der Tranke'(물 먹는 소) 등은 모두 인간과 자연의 끊을 수 없는 관계의 표현인 셈이다.

 

 세간티니는 단순한 산악 화가가 아니다. 산의 아름다움과 뜻은 그 속에 인간이 들어 있을 때, 그러나 그 인간은 등산가가 아닌 어디까지나 알프스 고소의 거친 조건하에 말없이 살아가는 인간일 때 비로소 찾게 된다. 그래서 세간티니의 그림에는 웅대하고 장엄한 산악미가 없다. 산은 그의 그림에서 가난하고 애쓰는 인간의 생존 조건으로 표현될 뿐이었다.

 

 크리스토프 슈티이블러의 <베르겔의 산들>(Christof Stiebler : Bergeller Berge, Munchen, 1982) 속에 「낙원의 화가」라는 장이 있다. 세간티니가 엔가딘에서도 베르겔 일대를 사랑했다 해서 그의 생애를 간추려 소개한 글인데 오늘날 세간티니에 관한 자료가 별로 없는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다.

 

 

 

 

 

펌) 전광식, 『세상의 모든 풍경』

 

 

스위스의 생 모리츠에 가면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고독한 영혼’ 니체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프스의 화가 세간티니를 만날 수 있다. 생 모리츠의 도르프에는 목가적인 풍경을 그리다가 41세에 요절한 조바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 1858~1899)를 기념하기 위한 세간티니 미술관이 있다. 그곳에 화가 세간티니의 3부작 <생성, 존재, 소멸>이 미완성인 상태로 보존돼 있다. 지난 1999년 새롭게 문을 연 세간티니 박물관은 개관을 기념해 2001년부터 3년 동안 독일의 외르그 트래거(Jorg Traeger) 교수를 비롯해 8명의 미술사 학자들이 세간티니의 작품들을 하나씩 다루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시도했다. 그로 인해 세간티니의 존재를 다시금 유럽 화단에 부각시켰다.



산다는 것 - 덧없이 쓸쓸한 세간티니의 삶


사후에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생전에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던 화가들이 더러 있다. 이를 테면 당대의 부유했던 화가 루벤스에 비해, 죽었을 때 남긴 것이라곤 옷 몇 가지와 낡은 그림 도구뿐이었던 렘브란트, 어릴 적에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보고 평생 죽음과 절망의 그늘 아래서 살다간 뭉크, 마약과 결핵에 찌든 모딜리아니, 이상향이라고 생각한 남국에서 가난과 질병 그리고 고독 속에서 죽어간 고갱이 있다.
하지만 그들보다 어쩌면 더욱 비참한 삶을 살다간 화가로 고흐와 세간티니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생의 길이를 살았지만, 고흐(1853~1890)는 자살로 끝낸 말년이 참혹했고, 세간티니는 홀로 버려진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
세간티니는 1858년 1월 15일 이탈리아의 트리엔트 주 아르코에서 목공인 아고스티노 세간티니(Agostino Segantini)와 시에서 보조하는 빈민 지원금으로 가정을 꾸렸던 마거리타 데 지라르디(Margherita de Girardi)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세간티니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겨우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숨을 거뒀다. 홀로 된 세간티니는 밀라노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전처 소생이던 이복 누나의 집에서 머물렀다. 누나의 홀대와 무관심 속에 집을 나와야 했고, 하루하루 막일을 하면서 걸인으로 지내다가 결국 천연두에 걸리게 되었다.
1870년 그가 열두 살 때 경찰에 붙잡혀 밀라노의 소년 재활원에서 보호 대상으로 지내면서 구두공의 기술을 익혔다. 그곳에서 3년을 지낸 후 홀로 밀라노로 돌아왔다. 그러다 우연히 약방 주인이던 베르토니 형제를 만나 그들의 소개로 장식 화가 루이기 테타만치(Tettamanzi)의 조수가 되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브레라 아카데미의 야간반에서 수학하며 비로소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878년 세간티니는 스무 살에 대작 <성 안토니오스의 합창>(Coro di Sant’Antonioll)으로 등단해 큰 갈채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의 남은 반생은 성공가도를 달린 것처럼 보인다. 1881년 세간티니는 아름다운 루이기아 부가티(Luigia Bugatti)와 결혼해 밀라노와 코머 호수 사이의 언덕 마을 브리안차에 안착해 그때부터 주변의 여러 풍경을 배경으로 밀레처럼 농민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그 후 사보그닌으로, 말로야로 그리고 겨울에 소글리오로 거처를 옮겨 가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 했고 슬하에 맞아들 고타르도(Gottardo)를 비롯해 세 아들과 딸 비앙카(Bianca)를 두었다.
1882년 <호수를 건너는 성가족> 첫 작품이 암스테르담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은 이후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1900년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 전람회를 앞두고 스위스 알프스의 엔가딘의 웅장한 파노라마를 그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무려 20m 높이와 220m 길이로 계획한 이 대작은 지원에서 차질을 빚어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그 결과로 그의 마지막 작품인 3부작 <생성, 존재, 소멸>(Werden, Sein, Vergehen)이 나오게 되었다.
3부작에서 <존재>를 그리던 1899년 9월 18일, 그는 샤프베르그에 있는 석조 오두막집에서 작업을 했는데, 그때 복막염에 걸려 병상에 누워 지내다 열흘 뒤인 1899년 9월 28일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호수를 건너는 성가족

 

File:Ave Maria bei der Überfahrt 1886.jpg

Ave Maria in the passage 1886

 

 
세간티니가 세상에 남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가장 사랑받는 작품은 <호수를 건너는 성가족>(Ave Maria a trasbordo)이다. 이 그림은 얼마나 유명했던지 그의 죽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초등학생들까지 이 그림을 알고 심지어 품에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다. 대중들의 반향뿐 아니라 작가도 이 그림을 자신의 최고작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1882년도에 이 그림을 처음 그린 후 4년 뒤인 1886년에 보다 완성된 형태로 그림의 두 번째 작품을 남겼는데, 이 달에 소개하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세간티니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회화 기법에 따라서 쇠라(Seurat)와 더불어 분할주의(Divisionismus)를, 주제에 따라서 상징주의(Symbolism)를 표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미세한 필촉에 의해 색을 분할해 표현하는 분할주의는 형태의 테두리를 불분명하게 처리함으로써 감정과 기억을 추상적으로 연상시키도록 하는 기법인데, 세간티니는 주로 말년의 작품에서 선보이고 있다. 초기 그림에 해당하는 우리의 작품에는 본래적인 분할주의 기법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양들과 어머니의 의상을 묘사할 때는 점으로 가기 이전의 짧고 섬세한 묘선들로 처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냥 보면 평범하고 소박한 한촌의 농부들을 주제로 한 것 같지만, 그 범상치 않은 제목이 그림의 강한 상징성을 보여준다.


세간티니의 그림들을 모티브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알프스의 자연을 배경으로 그 가운데서 전개된 농부들의 일상적인 삶이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알프스 풍경을 그린 스위스의 다른 화가로 페르디난드 호들러(F. Hodler)도 있지만 그의 자연 그림에는 아예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세간티니의 그림에는 대개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은 한결같이 알프스의 일하는 촌부들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흙 묻은 주인공들의 등장은 마치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세간티니는 밀레를 좋아했고 어떤 점에서 밀레를 모방했다고 볼 수 있다.


소개하는 그림도 배경으로 호수가 들녘이고 앉아 있는 부부가 서 있다면, 밀레의 <만종>과 비슷한 구도를 갖는다. 그림을 직선으로 가로 지르는 먼 지평선이나 그 지평선 위로 솟은 예배당, 작은 농촌 마을, 눈을 지그시 감고 기도하듯 조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 새벽의 여명 또는 황혼의 설정 등이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그림의 소실점에 해당하는 정중앙의 환한 태양은 아침에 동이 터오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 세간티니는 영하 25도의 겨울에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바위에 걸터앉아 작업했으므로 아침 풍경에 익숙하다 - 어쩌면 사람들에게서 비치는 노동의 피곤함은 아무래도 일과를 끝낸 황혼을 배경으로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이 그림에는 밀레의 <만종>에서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가 나온다. 그 아기는 엄마에게 달라붙어 얼굴을 붙이고 있다. 모자간에 생겨나는 모정의 깊음과 아이의 애착은 어미 양들과 더불어 그들 앞에 있는 두 마리의 어린 양들에게도 잘 반영되고 있다. 배의 후미에서 열심히 노를 젓는 아버지도 있다. 태양에서 뿜어 나오는 환한 빛은 지평선에서부터 작은 원을 그리다가 하늘에도 큰 원형을 그리고, 이 가족을 둘러싸며 둥근 물결의 반영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세간티니는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내적 그리움을 표현하고 그 가족을 인간의 영원한 고향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가난하고 고된 노동의 일상이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그는 따스한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가족에 대한 동심적 향수가 그리웠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림은 화가 자신의 이야기요, 자기 삶의 이상이었다.


이 그림에서 세간티니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가족 중에서 아무래도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림을 볼 때도 간파할 수 있지만 그가 원제에서 ‘아베 마리아’(Ave Maria)라고 함으로써 어머니를 부각시킨 것을 보면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세간티니의 그리움은 매우 강렬했다. 그가 인도의 전설을 따라 <악한 어머니>(Le Cattive Madri)를 그린 것도 어린 자신을 홀로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었다. 그리고 소와 사람의 모자를 나란히 그린 <두 어머니>(Die Zwei Mutter)도 모친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지니는 지평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그가 이 작품을 ‘호수를 건너는 아베 마리아, 또는 성가족’이라고 부른 데서 잘 암시하고 있다. 세간티니는 이 가족의 삶을 그리면서 양떼 같은 인류를 인도하여 세상이라는 호수를 건너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세간티니는 이탈리아라는 가톨릭적 배경에서 ‘아베 마리아’라고 했지만, 자신은 가톨릭 교회와 담을 쌓고 지냈고 도리어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세간티니 학술 회의에서 개신교 트래거 교수는 이 그림을 두고 한마디로 “세속화된 우주의 열린 지평선으로 하나님이 통과하시는 모습의 상징”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림 자체를 두고 보면 마치 시편 23편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데리시고 세상을 그냥 건너시는 게 아니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건너시는 것이다. 세간티니는 자기 삶의 어두운 일면에도 불구하고 매우 서정적이며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그의 그림에 깊은 철학과 삶의 관조가 있고 신앙이 있다.



**전광식 - 독일 레겐스부르그대학(Ph.D.)에서 철학 및 신학사상사를 전공했으며 지금은 고신대학교 교수로 있다.

 

 

 

 

Giovanni Segantini

[Italian Pointillist/Symbolist Painter, 1858-1899]

 

 

 

File:Alpweiden 1895.jpg

Alps landscape with woman at the well, around 1893

 

 

 

 

File:Das Pflügen 1890.jpg


The plowing, 1890, 116x227cm, new Pinakothek Munich

 

 

 

 

File:Ebene beim Eindunkeln 1885.jpg


Plain in the  dark, 1885, 80x100cm, collection Beat Curti 

 

 

 

 

File:Engel des Lebens 1894.jpg


Angel of life, 1894, 276x217cm, Galeria d' type Moderna, Milano 

 

 

 

 

File:Fabbro Segantini Museum Winter.jpg

U. dal Fabbro: Segantini Museum um 1910, Privatbesitz

 

 

 

 

 

File:Frühlingsweide 1896.jpg

 

Grazing in Springtime, 1896, 95x155cm, Pinacoteca di Brera, Milano

 

 

 

 

File:Giovanni Segantini 001.jpg

Nature

 

 

 

 

File:Giovanni Segantini 004.jpg

The Evil Mothers

 

 

 

 

 

File:Giovanni Segantini 005.jpg


Fruit of the love

 

 

 

 

File:Giovanni Segantini 006.jpg

 

Life angel

 

 

 

 

 

File:Giovanni Segantini-Die Heuernte 1890-1898.jpg

 

The hay harvest (1890-1898) 

 

 

 

 

File:Liebe an der Quelle des Lebens.jpg

 

The Fountain of Youth , 1896, 70X98 cm, Galleria d' moderna, Milan resembles

 

 

 

 

File:Mittag in den Alpen 1891.jpg

 

Afternoon in the Alps, 1891, 77.5x71.5cm, Segantini museum, St. Moritz 

 

 

 

 

File:Mittag in den Alpen.jpg

 

Afternoon in the Alps, 1892, 85.5x79.5cm, Ohara museum of type, Kurashiki, Japan 

 

 

 

 

File:Segantini Allastanga.jpg

 

At the pole, 169x389,5cm, Romany, Galleria Nazionale d' type Moderna

 

 

 

 

File:Segantini Auf dem Balkon.jpg

 

On the balcony (cut), 1892, Depositum of the Gottfried cellar foundation, Bündner art museum, Chur

 

 

 

 

File:Segantini Bagno.jpg

 

The bath of the child - Il bagno del bambino, 1886 - 87, 65 xs 49.5 cm, oil on linen

 

 

 

 

File:Segantini Bagpipers of Brianza.jpg

 

Bagpipers of Brianza

 

 

 

 

File:Segantini Bildnis eines Toten 1886.jpg

Likeness_one_dead, 1884 - 86, 41 xs 59 cm, oil on linen

 

 

 

 


File:Segantini Bünderin am Brunnen 1887.jpg.jpg

 

Bündnerin at the well, 1887, oil on linen, 54X79 cm, Otto fish streams Segantini foundation, Depositum art museum St. gall 

 

 

 

 

File:Segantini Coro di St.Antonio.jpg

 

 Coro_di_St. Antonio, 1879, 119X85 cm, oil on linen, private collection

 

 

 

 

File:Segantini Die beiden Mütter.jpg

 

The Two Mothers, 1889, Galleria d' moderna, Milan resembles 

 

 

 

 

File:Segantini Eitelkeit 1897.jpg

 

Vanity, 1897, oil on linen, 78X126 cm, art house Zurich 

 

 

 

 

File:Segantini Falconiera.jpg

 

The Falknerin', 1881

 

 

 

 

File:Segantini Frühmesse.jpg

 

Early fair, 1885/86, 108x211cm, oil on linen, Otto fish streams Segantini foundation, Depositum art museum St. gall 

 

 

 

 

File:Segantini Kühe an der Tränke 1888.jpg

 

Cows at the drinking trough, 1888, 83X139 cm, Eidg.  Gottfried cellar foundation, public art collection Basel

 

 

 

 

File:Segantini Landschaft mit Frau im Baum.jpg

 

 Landscape with woman in the tree, around 1881, unfinished, 68.5x104.5cm

Sturzenegger foundation, museum Allerheiligen, create houses

 

 

 

 

File:Segantini Le due Madri.jpg

 

Le due madri (both mothers), 1899/1900, 69X125 cm, art museum Chur

 

 

 

 

File:Segantini Meine Modelle 1888.jpg

 

My models, 1888, art house Zurich 

 

 

 

 

File:Segantini Portatricedacqua.jpg

 

 The water carrier, 74x45,5cm, 1886 - 87, private possession

 

 

 

 

File:Segantini Signora Torelli.jpg

 

Portrait of the Signora Torelli, 1885/86, 101x74.5cm, private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