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0. 13:59ㆍ책 · 펌글 · 자료/역사
백제와 일본 왕실 혈연 실체 발굴
● 아키히토 일왕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무령왕 후손” |
지난해(2007) 5월, 필자는 일본 교토에 살고 있는 우에다 마사키 박사를 찾았다. 우에다 박사는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로 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로 불린다.
30여 년 전 “백제왕이 백제의 식민지였던 왜의 후왕(侯王)에게 ‘백제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했다”고 밝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우에다 박사는 당시 집으로 몰려든 일본 국수주의 청년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우에다 박사가 자택에서 필자에게 보여준 것은 훨씬 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조상 대대로 고이 간직 해온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30대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입니다.”
서기 815년 일본 왕실이 편찬한 ‘신찬성씨록’은 일본 고대의 왕도(王都)였던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의 왕족과 귀족 1182개 가문의 신분을 기록한, 일종의 일본 고대 왕족 및 귀족 족보다.
우에다 박사는 일본 왕족 30개 가문이 나열되어 있는 대목을 펼쳐놓고, 그중 12번째에 씌어진 ‘大原眞人’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大原眞人’ 이라는 일본 왕족이 누구인지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씌어 있었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비타쓰(敏達)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풀이하면, ‘대원진인의 조상이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이며, 비타쓰왕은 본래 백제 왕족이다.’ 또한 이 내용이 ‘속일본기’라는 왕실 편찬 역사서 (서기 797년)에도 부합한다.
우에다 박사는 이 대목이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말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일본서기’(서기 720년)에 보면, “제30대 비타쓰 천황(敏達·572~585 재위)은 나라(奈良)에 ‘구다라오이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대목이 있다. 비타쓰왕이 나라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 ‘구다라오이(百濟大井)’에 왕궁을 지었다는 얘기다.
이 기록 또한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방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나라의 ‘구다라강(百濟川) 옆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노데라(百濟寺) 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 는 내용도 있다. ‘백제대빈(百濟大殯)’ 이란 백제 왕실에서 행한 3년상(喪)을 가리킨다.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은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됐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왜에서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 땅을 지배한 백제 왕가의 세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찰케 한다.
한편 일본 고대 사학자인 세이조대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 교수는 “조메이 천황은 생전에 ‘구다라 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렸을 것이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서기 572년에 등극한 비타쓰왕이 ‘백제대정궁’을 세운 오이(大井)는 어디인가. 지금의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라는 게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이곳에는 2007년 11월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도 영업 중이다. ‘고료초 구다라(百濟)’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두 곳 중 하나다.
성왕 [聖王, ?~554]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지방통치조직 및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휘(諱)는 명농(明襛)이며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英主)라 일컬어진다. 523년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고조로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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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예봉(銳峯)을 꺾고 승리를 쟁취한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공동의 강적을 막기 위하여 연합전선을 펼쳤지만 두 나라의 속셈은 애초부터 감추어진 채 이루 어진 오월동주(吳越同舟)였고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서 위태로운 밀월(蜜月) 이었다.
밀월이 끝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성왕 31년(553)이었다. 신라가 돌연 감추어진 야욕을 들어내어 백제가 회복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주위의 6군을 재빨리 탈취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일대를 신주(新州)라 일컬 었다.
이로써 백제의 비유왕(毗有王)과 신라의 눌지왕(訥祗王)이 서기433에 와옹성 (瓦瓮城: 계족산)에 회맹단(會盟壇)을 쌓고 피를 마셔 동맹을 맺은 이래 각기의 국력과 정세에 따라 다소의 기복은 있었지만 그래도 면면히 이어 오던 동맹관계가 이제는 완전히 끝나고 삼국은 각각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바로 신라의 진흥왕 때로서 신라는 이를 계기로 하여 중흥의 길을 걸었고, 고구려는 쇠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 했으며, 당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백제였다. 70여 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되 찾은 땅이요, 총력을 기우려 백제중흥의 기틀을 기필코 마련코자 했던 성왕의 좌절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거대한 고구려를 꺾기에 온 힘을 다 쏟은 백제로서는 신라를 바로 보복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못했다. 그래서 성급한 보복보다는 시간을 벌어서 재기의 꿈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한 성왕은 배신 당한 분노와 뼈 아픈 굴욕을 무릅쓰고 그 해 11월에 자기 딸을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에게 시집 보내어 소비 (少妃)로 삼게 하였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1년간 묵묵히 전비(戰備)를 가다듬은 성왕은 다음해 (554) 7월 에 진군하여 12월에는 신라의 접경 요새인 관산성(管山城: 옥천)을 함락하고 계속 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을까? 한강유역의 신주(新州)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군대가 남하하여 공격해 옴으로서 앞 뒤에서의 협공을 받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진퇴양난에 빠진 백제군은 여기에서 대패하여 성왕은 三年山郡(報恩)에서 포로가 되고 경주로 잡혀 가서 목이 잘린 채 몸만 백제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후 백제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며 100여 년을 버티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하여 패망(660)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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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성왕의 사망년도는 554년이다.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전사한 것은 현존하는 기록들 모두가 증언하고 있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이 모두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권26 백제본기4에 "32년(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고 하고,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551년)조 기사에 "백제왕 명농이 가량 (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主兵)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 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 急擊殺百濟王]."고 하여 성왕이 밤에 몰래 신라를 기습하려다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왕이 데리고 갔던 군사가 불과 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볼 때 내용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태자 여창이 직접 참여한 관산성 전투는 오히려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니혼쇼키》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여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 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신라의 고도 (古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혔다.
고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하고, 성왕은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고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해버렸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北廳) 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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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威德王, ?~598]
백제 제27대 왕(재위 554∼598). 웅천성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고 신라와 자주 싸웠으며 중국의 진(陳) ·북제(北齊) 등과 친선을 유지했다. 일본 쇼토쿠태자의 스승 아좌태자는 그의 아들이다.
휘(諱) 창(昌). 성왕의 맏아들. 554년 즉위하자 웅천성(熊川城: 公州)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561년부터 부왕의 패사(敗死)를 분풀이하기 위하여 신라와 자주 싸웠다. 중국의 진(陳) ·북제(北齊) ·수(隋)와 외교관계를 수립, 친선을 유지했다.
595년 10월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陵山里)에서 부여 능산리 창왕십삼년명사리감(昌王十三年銘舍利龕)의 발견으로 새롭게 각광을 받았다. 그는 한국 역사서에보다 일본의 역사서에 더 자세히 알려진 인물로, 부왕(父王)인 성왕(聖王)을 위해 출가하려 하였으며, 일본의 쇼토쿠태자의 스승 아좌태자(阿佐太子)는 그의 아들로 597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 부여에서 출토된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백제 위덕왕이 새겨진 명문 기록 .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 "百濟王 昌"이란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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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국정을 이어받았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국정에 같이 참여하였고, 신라가 동맹을 어기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을 때는, 신라 정벌론을 펼쳤다. 그의 강경론에 따라 성왕이 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에 자신이 선봉을 서서 관산성(管山城)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창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어코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는데, 창은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자, 창은 뜻을 굽히고 왕위를 승계했다.
그는 성왕의 삼년상을 치르고 557년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자기 탓으로 부왕이 죽은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보인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불안한 가운데 태자로서 왕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국정을 맡자마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554년 음력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熊津城)까지 달려와 백제를 위협하였다.
백제의 옛 도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사비성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백제의 폐와 같은 곳인데, 고구려가 한걸음에 달려왔으니, 백제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패퇴시켰지만, 고구려의 재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고구려의 침략은 신라가 길을 터준 결과였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위덕왕은 오랜 동맹국인 가야 쪽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빼앗긴 가야 땅을 되찾아 가야를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것은 562년 음력 7월에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사이, 가야는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군 을 물리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를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며, 침공의 명분을 찾고 있던 신라로서는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군은 장군 사다함을 앞세워 순식간에 가야 전역을 휩쓸어버렸고, 그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가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위덕왕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 주고, 선물까지 가득 함께 돌려보냈다. 양견은 이 일로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 한다는 계획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에 그런 의지를 의지를 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덕왕은 596년에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위덕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도록 충동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노략질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그런 상황에서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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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武寧王, 462~523]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 웅진으로 천도 후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름은 사마(斯摩)·융(隆),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로왕 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501년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502년(무령왕 2) 가림성(加林城)에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벌하였다. 그래서 무령왕은 구귀족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또, 22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유민들을 귀농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민을 정착시키고 농업 노동력을 확보하여 조세 기반을 마련 하였다.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했다. 며, 같은 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가불(加弗)·원산(圓山)의 두 성을 빼앗겼다. 521년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523년 인우 (因友)·사오(沙烏) 등에게 명하여 한북주(漢北州)의 장정을 동원시켜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1971년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陵)이 충남 공주(公州)에서 발굴되었다.
[사진] 무령왕의 평상복과 무령왕릉의 내부
무령왕릉 [武寧王陵]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錦城洞)에 있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圓形) 플랜을 가지며 널방 [墓室]의 바닥면에서 분정(墳頂)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蓮華文塼)·문자전(文字塼)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單室墓)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과 그 아래에 연자창(連子窓)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 (燈盞)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鉢)·시(匙)·오주전(五銖錢)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被葬者)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刻字石板) 2장이 나왔다. 品]와 금·은의 식금구(飾金具)가 달린 흑칠(黑漆)이 칠해진 목관(木棺)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 에 매치(埋置)되어 있었다. 화염형관식(火焰形冠飾)·수식(首飾)·이식(耳飾)·과대(銙帶)·식리(飾履)·팔찌[釧] 등의 꾸미개[裝身具]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第三大臼齒)가 출토되었다.
무령왕릉 왕비금관식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관꾸미개. 국보 155호.
금귀걸이 금제뒤꽂이
무령왕릉
무령왕릉(복원 전시물)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무령왕릉 입구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의 복원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수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수저의 복원도.
동탁은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은잔의 복원도 오수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오수전의 복원도.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때의 동전이다. 무령왕릉 왕비의 관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의 관을 복원한 복원도. 발견당시 왕비의 관은 나무가 부식되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무령왕의 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의 관을 복원한 복원도. 지석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의 복원도. 지석에는 무령왕(사마왕)이 사망하여 묘에 안장하고 매지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무령왕릉 매지권 [武寧王陵買地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왕비의 묘지 매매계약서.
연도부 중앙에 있는 진묘수(鎭墓獸) 앞에서 왕·왕비의 것이 함께 발견되었다. 왕의 것은 겉면에 왕호와 향년, 사망과 장례에 관한 일자 등 52자의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뒷면에는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글자가 음각되어 일종의 방위도 겸 능역도(陵域圖)라고 생각된다. 진묘수 무령왕릉의 연도부에서 발견된 진묘수의 복원도. 진묘수는 무덤입구에서 무덤의 침입자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발견 당시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져있었다. 청자 육이호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자 육이호의 복원도. 청자 육이호는 중국식 도자기로 무령왕릉에서 총 9점의 중국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홍윤기 교수님이 2008년 4월 신동아에 발표한, 백제왕실과 일본천황가의 계보표는 좀 이상 합니다. 저렇게 되면 응신천왕이 백제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뜻 인데.
사실 응신천왕은 개로왕보다 선시대 사람 입니다. 물론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응신천황조가 실제보다 120년 앞당겨 써져 있습니다. 따라서, 연대를 120년 뒤로 옮겨야 우리 삼국사기와 연대가 맞아 떨어지는데, 일본서기의 응신천왕 시대+120년을 하더라도, 응신천왕은 개로왕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따라서 개로왕의 아들이 될 수 없지요.',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CyV&articleno=8597747&admin=&refequery=%E8%AB%9B%EA%B9%86%EF%BF%BD%EF%BF%BD%EF%BF%BD+%EF%BF%BD%EC%87%B0%EB%82%AF#">신고
홍윤기 교수님이 2008년 4월 신동아에 발표한, 백제왕실과 일본천황가의 계보표는 좀 이상 합니다. 저렇게 되면 응신천왕이 백제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뜻 인데.
사실 응신천왕은 개로왕보다 선시대 사람 입니다. 물론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응신천황조가 실제보다 120년 앞당겨 써져 있습니다. 따라서, 연대를 120년 뒤로 옮겨야 우리 삼국사기와 연대가 맞아 떨어지는데, 일본서기의 응신천왕 시대+120년을 하더라도, 응신천왕은 개로왕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따라서 개로왕의 아들이 될 수 없지요.
- 감사
- 2011.10.05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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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신천왕의 재위기간의 백제 왕은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재위 375-384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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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신천왕의 재위기간의 백제 왕은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재위 375-384년) 입니다.
- 감사
- 2011.10.05 00:51
- 수정 | 답글 | 삭제 |
그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왕실 계보가 약간 다릅니다.
백제본기 : 개로왕의 장자 문주왕, 차자 곤지왕자,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 곤지왕자의 아들 동성왕, 동성왕의 아들 무령왕... 이렇게 되지요.
일본서기 : 개로왕, 문주왕, 곤지왕자는 형제관계, 곤지왕자의 아들 동성왕, 무령왕은 본래 개로왕의 아들이나, 곤지왕자에게 양자갔다 이렇게 됩니다.
즉,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이나, 일본서기에는 아들로 되어 있지요.
물론, 어느쪽이 맞는지 알수 없으나, 삼국사기는 백제 멸망하고 600년이 흘러 만들어 졌고, 일본서기는 백제 망하고 불과 100년 만에 쓰여 졌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한반도의 망국이라 사서도 소멸되었을 텐데요.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관료들은 백제본기, 백제기, 백제신찬, 고사기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이 백제사기들을 바탕으로 일본서기가 쓰여졌지요...
그런데 홍윤기 교수님은 백제왕실과 일본황실의 동일 핏줄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계보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계보를 따라. 일본 천왕과 연결하다 보니... 저런 실수가 생긴 것이지요.
',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CyV&articleno=8597747&admin=&refequery=%E8%AB%9B%EA%B9%86%EF%BF%BD%EF%BF%BD%EF%BF%BD+%EF%BF%BD%EC%87%B0%EB%82%AF#">신고
그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왕실 계보가 약간 다릅니다.
백제본기 : 개로왕의 장자 문주왕, 차자 곤지왕자,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 곤지왕자의 아들 동성왕, 동성왕의 아들 무령왕... 이렇게 되지요.
일본서기 : 개로왕, 문주왕, 곤지왕자는 형제관계, 곤지왕자의 아들 동성왕, 무령왕은 본래 개로왕의 아들이나, 곤지왕자에게 양자갔다 이렇게 됩니다.
즉,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이나, 일본서기에는 아들로 되어 있지요.
물론, 어느쪽이 맞는지 알수 없으나, 삼국사기는 백제 멸망하고 600년이 흘러 만들어 졌고, 일본서기는 백제 망하고 불과 100년 만에 쓰여 졌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한반도의 망국이라 사서도 소멸되었을 텐데요.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관료들은 백제본기, 백제기, 백제신찬, 고사기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이 백제사기들을 바탕으로 일본서기가 쓰여졌지요...
그런데 홍윤기 교수님은 백제왕실과 일본황실의 동일 핏줄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계보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계보를 따라. 일본 천왕과 연결하다 보니... 저런 실수가 생긴 것이지요.
- 감사
- 2011.10.05 01:10
- 수정 | 답글 | 삭제 |
특히 중국 송서 열전 왜국편을 보면, 476년에 왜왕 무가 중국 송나라 황실에 조서를 올리는데, <자주 조공을 하고자 하나, 북방의 고구려가 방해하여... 우리 선왕 제가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으나, 저의 부형이 갑작스레 죽어... 그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이제 제가 그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위 조서의 왜 무왕이 웅략천왕이라 주장 했습니다. 그런데 웅략천왕은 그 부친와 형이 20년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도 상황이 맞지 않지요. 그런데 백제에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백제 서울이 초토화 되고, 국왕 개로왕과 태자 융이 전사하는 사건이 있었지요. 물론 우리 삼국사기 대로 한다면... 개로왕은 무령왕의 증조부 이므로 맞지 않으나, 일본서기 대로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고, 곤지왕자에게 양자를 갔다면... 왜 무왕의 조서는 백제 무령왕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한편 위 조서 이후 왜는 단 한차례도 고구려와 전쟁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무령왕 사후 (무령왕은 40세에 즉위하나 일찍 사망하여 재위기간이 짧았음) 왕위를 받은 성왕이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로 부터 서울과 한강 이남을 빼앗는 전쟁을 하지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476년 왜 무왕이 중국 송에 보낸 조서는 일본 보다는 백제의 상황에 맞습니다. 한편 무령왕은 중국으로 부터 안동대장군과 령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받는데, 일본에 있었던 이름 (무)+ 령동대장군의 (령)이 결합하여 무령왕이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CyV&articleno=8597747&admin=&refequery=%E8%AB%9B%EA%B9%86%EF%BF%BD%EF%BF%BD%EF%BF%BD+%EF%BF%BD%EC%87%B0%EB%82%AF#">신고
특히 중국 송서 열전 왜국편을 보면, 476년에 왜왕 무가 중국 송나라 황실에 조서를 올리는데, <자주 조공을 하고자 하나, 북방의 고구려가 방해하여... 우리 선왕 제가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으나, 저의 부형이 갑작스레 죽어... 그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이제 제가 그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위 조서의 왜 무왕이 웅략천왕이라 주장 했습니다. 그런데 웅략천왕은 그 부친와 형이 20년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도 상황이 맞지 않지요. 그런데 백제에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백제 서울이 초토화 되고, 국왕 개로왕과 태자 융이 전사하는 사건이 있었지요. 물론 우리 삼국사기 대로 한다면... 개로왕은 무령왕의 증조부 이므로 맞지 않으나, 일본서기 대로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고, 곤지왕자에게 양자를 갔다면... 왜 무왕의 조서는 백제 무령왕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한편 위 조서 이후 왜는 단 한차례도 고구려와 전쟁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무령왕 사후 (무령왕은 40세에 즉위하나 일찍 사망하여 재위기간이 짧았음) 왕위를 받은 성왕이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로 부터 서울과 한강 이남을 빼앗는 전쟁을 하지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476년 왜 무왕이 중국 송에 보낸 조서는 일본 보다는 백제의 상황에 맞습니다. 한편 무령왕은 중국으로 부터 안동대장군과 령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받는데, 일본에 있었던 이름 (무)+ 령동대장군의 (령)이 결합하여 무령왕이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 가람
- 2011.10.05 01:32
- 수정 | 답글 | 삭제 |
백제무령왕릉에서 환두대로가 출토 되었는데, 일본 닌토쿠 천왕릉에서 출토된 칼과 모양이 똑 같이지요...
그런데 일본서기의 닌토쿠 천황은 재위년도가 313-399년이고, 삼국사기의 무령왕의 재위년도는 501-523년 입니다. 시대 차이가 많은데 똑 같은 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닌토쿠 천왕의 재위년도에 +120년을 하면 453-519년으로 무령왕의 재위기간과 겹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백제왕과 일본천왕이 서로 교차하며 왕위에 오르거나, 동일한 혈통이 2개 왕실을 이어가지 않았냐라는 가설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만약 위 가설이 맞다면...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 이다는 우리 삼국사기 백제 왕실 계보가 잘못 된 것입니다. 일본서기 대로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되어야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 위에 응신천왕은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과 형제가 되어야 하지요... 개로왕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부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지석에 <사마>라는 글짜가 쓰여 있어서, 왕은 아니고, 왕실 방계귀족의 무덤 일것이다 추측했지요. 그런데 <사마>라고 쓰여진 지석이 있다고 발표하자, 우리 보다도 일본에서 더 난리가 났습니다. 이유는 일본서기에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인데, 섬에서 태어낳기 때문에 사마이다.. 라고 하였지요...
처음에 우리는 무령왕릉이 한낱 오래된 왕실 귀족 무덤인 줄 알았는데, 일본서기와 일본 재야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엄청한 가능성과 추리력을 갖게 된 것이지요.
<<일본 천황가는 백제 왕실의 후손이다.>> ',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CyV&articleno=8597747&admin=&refequery=%E8%AB%9B%EA%B9%86%EF%BF%BD%EF%BF%BD%EF%BF%BD+%EF%BF%BD%EC%87%B0%EB%82%AF#">신고
백제무령왕릉에서 환두대로가 출토 되었는데, 일본 닌토쿠 천왕릉에서 출토된 칼과 모양이 똑 같이지요...
그런데 일본서기의 닌토쿠 천황은 재위년도가 313-399년이고, 삼국사기의 무령왕의 재위년도는 501-523년 입니다. 시대 차이가 많은데 똑 같은 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닌토쿠 천왕의 재위년도에 +120년을 하면 453-519년으로 무령왕의 재위기간과 겹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백제왕과 일본천왕이 서로 교차하며 왕위에 오르거나, 동일한 혈통이 2개 왕실을 이어가지 않았냐라는 가설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만약 위 가설이 맞다면...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 이다는 우리 삼국사기 백제 왕실 계보가 잘못 된 것입니다. 일본서기 대로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되어야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 위에 응신천왕은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과 형제가 되어야 하지요... 개로왕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부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지석에 <사마>라는 글짜가 쓰여 있어서, 왕은 아니고, 왕실 방계귀족의 무덤 일것이다 추측했지요. 그런데 <사마>라고 쓰여진 지석이 있다고 발표하자, 우리 보다도 일본에서 더 난리가 났습니다. 이유는 일본서기에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인데, 섬에서 태어낳기 때문에 사마이다.. 라고 하였지요...
처음에 우리는 무령왕릉이 한낱 오래된 왕실 귀족 무덤인 줄 알았는데, 일본서기와 일본 재야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엄청한 가능성과 추리력을 갖게 된 것이지요.
<< 일본 천황가는 백제 왕실의 후손이다.>>
- 감사
- 2011.10.05 02:25
- 수정 | 답글 | 삭제 | 제왕기에는 정시 4년 (243년) 왜국에 남편도 아들도 없이 혼자 사는 히미코라는 여자가 왕이 되었는데, 사신을 보내어 조공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진구황후가 허위 인물이 아니라. 중국측 사서에 보이는 히미코 이며 실존 인물 이라고 주장 했지요.
서기 243년 이면 백제 고이왕 시절 입니다... 그런데, 진구왕후 55년(서기 253년) 백제 초고왕이 죽었다. 64년 (서기 262년) 귀수왕이 죽었다. 65년 침류왕 (서기 263년)이 죽었다라고 나옵니다... 여기 침류왕 덕분에 일본서기의 연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지요. 한편 백제의 초고왕과 귀수왕은 서기 166-234년 사이 백제왕으로 일본서기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백제왕 중에는 초고왕이 귀수왕이 2분 이지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바로 뒤 이은 분이 침류왕 입니다. 그런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서기 346-384년에 재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구왕후와 히미코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고, 진구왕후와 응신천왕 기사는 120년 앞당겨 졌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지요. 즉 일본서기의 진구황후는 삼국지 제왕기편에 보이는 120년 전의 히미코 라는 여왕을 끌어다 기록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120년 앞 당겨져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CyV&articleno=8597747&admin=&refequery=%E8%AB%9B%EA%B9%86%EF%BF%BD%EF%BF%BD%EF%BF%BD+%EF%BF%BD%EC%87%B0%EB%82%AF#">신고
서기 243년 이면 백제 고이왕 시절 입니다... 그런데, 진구왕후 55년(서기 253년) 백제 초고왕이 죽었다. 64년 (서기 262년) 귀수왕이 죽었다. 65년 침류왕 (서기 263년)이 죽었다라고 나옵니다... 여기 침류왕 덕분에 일본서기의 연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지요. 한편 백제의 초고왕과 귀수왕은 서기 166-234년 사이 백제왕으로 일본서기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백제왕 중에는 초고왕이 귀수왕이 2분 이지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바로 뒤 이은 분이 침류왕 입니다. 그런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서기 346-384년에 재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구왕후와 히미코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고, 진구왕후와 응신천왕 기사는 120년 앞당겨 졌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지요. 즉 일본서기의 진구황후는 삼국지 제왕기편에 보이는 120년 전의 히미코 라는 여왕을 끌어다 기록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120년 앞 당겨져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 감사
- 2011.10.05 03:29
- 수정 | 답글 | 삭제 | 라는 글자가 나왔는데. 위 분의 사망날짜와 사망 연대도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무령은 사마이다. 섬에서 태어나 사마라고 하였다... 그 부친은 백제 왕자 곤지 인데,,, 곤지는 개로왕의 아우이다... 개로왕이 임신한 왕비를 동생 곤지의 처로 삼아 일본에 보냈는데...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섬에서 아이를 낳았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 무령왕릉의 지석 사마= 일본서기 사마=백제왕 무령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었지요... 이 분의 연대를 기준으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 연기를 비교하여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일본서기 진구왕후 기사에 실려있는 침류왕의 사망연대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진구왕후는 히미코 보다 120년 늦은 사람 인데, 동일 일물로 일본서기가 기록 하다보니 일본서기에 120년 이라는 오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구왕후의 한반도 삼한 정벌론은 허구이고, 백제 근초고왕이 한반도 남부를 제압한 후... 일본 규슈지방까지 진출한 내용을... 일본서기가 진구왕후의 업적이다며 기술하였고, 이것은 근초고왕 이후에 백제왕실과 일본왕실은 본래 하나 이다 보니... 일본서기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뒤집어 기록하지 않았냐 라는 가설이 생긴 것 입니다...
끝으로 만약 일본 천황가가 백제왕실의 후손이 맞다면... 일본서기 처럼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되어야 맞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처럼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가 된다면 두 왕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이다라는 삼국사기 계보로 계산하면 응신천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되는데... 일본서기의 응신천왕 재위년도+120년을 하더라도... 응신천왕은 개로왕보다 앞시대 사람 입니다... 그래서 응신천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될수 없으며 이것은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라는 계보가 틀리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대로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 되면... 응신천왕은 근초고왕의 아들 근수구왕의 형제가 됩니다... ',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CyV&articleno=8597747&admin=&refequery=%E8%AB%9B%EA%B9%86%EF%BF%BD%EF%BF%BD%EF%BF%BD+%EF%BF%BD%EC%87%B0%EB%82%AF#">신고
끝으로 만약 일본 천황가가 백제왕실의 후손이 맞다면... 일본서기 처럼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되어야 맞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처럼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가 된다면 두 왕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이다라는 삼국사기 계보로 계산하면 응신천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되는데... 일본서기의 응신천왕 재위년도+120년을 하더라도... 응신천왕은 개로왕보다 앞시대 사람 입니다... 그래서 응신천왕은 개로왕의 아들이 될수 없으며 이것은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자라는 계보가 틀리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대로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 되면... 응신천왕은 근초고왕의 아들 근수구왕의 형제가 됩니다...
- gokimgarci
- 2012.11.15 13:52
- 수정 | 답글 | 삭제 |
1. 천황이란
왜 감히 천황이라 불렀을까요 ?, 천황은 황제보다도 상위의 개념입니다, 즉 모든 제후국 왕중의왕인 황제보다도 높은 개념입니다, 이는 즉 한국역사의 천부님(하늘 같은 아버님)을 복사한 행위입니다, 즉 자신들이 역사조작의 장본인중의 하나이니까요, 즉 천황이라는 호칭은 천부당만부당 한 것이며, 발끝에 티끌도 못되니 왕이라는 호칭도 감사한 것이지요. 자고로 왜인이 사는땅을 일본이라 칭했습니다, 일본식 변발을한 민족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 현재의 일본은 역사속의 일본이 아닙니다, 즉 현재의 일본은 우리와 같은 민족인 조선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 일본이 현재의 일본으로 이입될까요 ?
일본의 해군성은 1870년 중국 복건성에서 시작됩니다, 관동군은 여순에서 시작되고요 군인수가 200만이 넘네요, 그럼 이 모든 숫자가 일본열도에서 왔다는 얘기입니까 ?
동경의 역사는 1912년 부터 시작됩니다. 일본 해군성은 1943년 현 일본열도로 이전됩니다.
2. 일본의 위치 지명
역사속의 일본은 현재의 일본 열도가 아닙니다, 그것부터 시작하시면 왜 일본놈들이 백제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금방 알수있습니다, 역사속 백제는 페르시아가 기원입니다, 그 밑에있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찾는것이 답을여는 열쇠가 될것같습니다.
3. 중국이라는 지명
본시 중국이라는 지명은 조선 제후국중 한양을 점유한 세력의 중앙정부가 있는 천산남북동서로의 중심지역을 일컬음입니다, 즉 현재의 중국이라는 명칭은 손문이 이놈이 그것을 복사해 현 중국본토에 박아놓은것이구요.
역사적인 사료는 조작된것이 많지 않습니다, 단 모든 지명의 이입 조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쉽게 진실을 볼수없도록 만들어 버린데있으니 그것이 함정입니다, 아라비아반도에 유독 한나만 왕조국가가 있어왔네요, 그것이 진실입니다. 히로히또의 얼굴사진을 본적이있습니까 ?,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얼굴인가요 ?
참고로 한반도에는 백제와 관련된 유물은 전무한편입니다, 무녕왕릉은 중국의 양나라와 대동소이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백제의 유적이 아닌 신라의 유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라) 이니까요, 역사이래로 한반도 및 일본열도는 고구려계열의 영토였으며 잠시 신라의 영토가된 적도있지만, 현 서안의 장안성(고구려, 조선 치성) 등으로 보았을떄 양자강 이북은 전체가 고구려 강역으로 들어갑니다, 신라는 고구려에서 나왔습니다, 왜 한이고구려이니까요, 이것이 조대명입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CyV&articleno=8597747&admin=&refequery=%E8%AB%9B%EA%B9%86%EF%BF%BD%EF%BF%BD%EF%BF%BD+%EF%BF%BD%EC%87%B0%EB%82%AF#">신고
1. 천황이란
왜 감히 천황이라 불렀을까요 ?, 천황은 황제보다도 상위의 개념입니다, 즉 모든 제후국 왕중의왕인 황제보다도 높은 개념입니다, 이는 즉 한국역사의 천부님(하늘 같은 아버님)을 복사한 행위입니다, 즉 자신들이 역사조작의 장본인중의 하나이니까요, 즉 천황이라는 호칭은 천부당만부당 한 것이며, 발끝에 티끌도 못되니 왕이라는 호칭도 감사한 것이지요. 자고로 왜인이 사는땅을 일본이라 칭했습니다, 일본식 변발을한 민족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 현재의 일본은 역사속의 일본이 아닙니다, 즉 현재의 일본은 우리와 같은 민족인 조선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 일본이 현재의 일본으로 이입될까요 ?
일본의 해군성은 1870년 중국 복건성에서 시작됩니다, 관동군은 여순에서 시작되고요 군인수가 200만이 넘네요, 그럼 이 모든 숫자가 일본열도에서 왔다는 얘기입니까 ?
동경의 역사는 1912년 부터 시작됩니다. 일본 해군성은 1943년 현 일본열도로 이전됩니다.
2. 일본의 위치 지명
역사속의 일본은 현재의 일본 열도가 아닙니다, 그것부터 시작하시면 왜 일본놈들이 백제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금방 알수있습니다, 역사속 백제는 페르시아가 기원입니다, 그 밑에있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찾는것이 답을여는 열쇠가 될것같습니다.
3. 중국이라는 지명
본시 중국이라는 지명은 조선 제후국중 한양을 점유한 세력의 중앙정부가 있는 천산남북동서로의 중심지역을 일컬음입니다, 즉 현재의 중국이라는 명칭은 손문이 이놈이 그것을 복사해 현 중국본토에 박아놓은것이구요.
역사적인 사료는 조작된것이 많지 않습니다, 단 모든 지명의 이입 조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쉽게 진실을 볼수없도록 만들어 버린데있으니 그것이 함정입니다, 아라비아반도에 유독 한나만 왕조국가가 있어왔네요, 그것이 진실입니다. 히로히또의 얼굴사진을 본적이있습니까 ?,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얼굴인가요 ?
참고로 한반도에는 백제와 관련된 유물은 전무한편입니다, 무녕왕릉은 중국의 양나라와 대동소이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백제의 유적이 아닌 신라의 유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라) 이니까요, 역사이래로 한반도 및 일본열도는 고구려계열의 영토였으며 잠시 신라의 영토가된 적도있지만, 현 서안의 장안성(고구려, 조선 치성) 등으로 보았을떄 양자강 이북은 전체가 고구려 강역으로 들어갑니다, 신라는 고구려에서 나왔습니다, 왜 한이고구려이니까요, 이것이 조대명입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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