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3. 12:19ㆍ미술/사진·조각·건축
18 세기부터 19 세기 중반까지 암흑기로 들어섰던 조각이라는 장르를 19 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술사의 한가운데로 끌어올린 오귀스트 로댕... 시대를 초월해 조각의 역사를 다시 쓴 로댕의 작품 뒤에는 진심을 다 하여 그를 사랑했고, 자신이 갖고 있던 천재성으로 로댕을 일깨웠던 한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바로 '카미유 클로델'이다.
카미유 클로델(1884 년 19 세 때)
'카미유 클로델' (1864. 12. 8 ~ 1943. 10. 19)은 프랑스 페레에서 등기소 소장인 아버지 루이 프로스퍼 클로델과 타르드누아 출신의 어머니 루이즈 아타나이즈 세실 세보르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2주 만에 사망한 첫아들(?)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카미유라는 중성적 이름을 부쳐주었는데 아들만을 기다리다가 태어난 카미유는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 루이즈만을 평생토록 편애했다.
2살, 4살 터울의 여동생 루이즈와 남동생 폴 클로델과 함께 프랑스 타르드 누아의 빌뇌브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카미유가 13살 때 가정교사로 젊은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1850-1934)를 만나게 되는데 카미유는 이때 조각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카미유는 어릴 때부터 마을 숲속의 괴물같은 바위 '제앵'에 매료되어 흙반죽으로 제앵을 만들거나 놀라운 상상력과 영감을 바탕으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여러가지 작품들을 밤을 새우며 완성하곤 했다. 사랑스런 외모와 달리 조각에 대한 뜨겁고도 격정적인 열정이 그녀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16 세의 내동생 루이즈 클로델의 초상
카미유는 조각가로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그 시대의 가장 권위있는 미술학교였던 '에콜 데 보자르'의 문을 두드리지만 여학생은 받지 않는 학교의 방침 때문에 거절 당한다. 19세기 후반의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의 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미유는 이에 낙담하지 않고 여학생들만 다니는 고루하고 폐쇄적인 사랍학교 아카데미 콜라로 시에서 수업을 받으며 그곳에서 사귄 여자친구들과 함께 '노트르담 데 샹'에 공동 작업실을 마련한다.
1883년 카미유는 로댕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카미유의 나이, 열 아홉살의 생일이 되기 전이었고 로댕은 그 당시 마흔 셋의 나이로 조각가로서 정상의 위치에 서 있었다. 조각가 알프레드 뷰셰가 로마로 떠나면서 자신의 친구인 로댕에게 카미유를 맡기고 간 것이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카미유의 작업실을 찾아와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부셰가 로댕에게 자신의 제자 들을 대신 맡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여인
일 년 뒤인 1885년 카미유는 로댕의 정식 조수가 되어 - 하루라도 카미유를 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로댕이 그녀를 '지옥의 문’ 제작을 위한 조수로 고용했다 - 지옥의 문 작업을 함께 하게 된다.
로댕의 작업실에 젊은 여자 조각가가 조수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엔 분명히 파격적인 사건이었으리라.
이 사건을 계기로 까미유는 로댕에게 가장 필요한 공동작업자가 되었고,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 두 사람이 맡은 각각의 부분들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한 탓에 많은 비평가들을 논란의 중심으로 빠져들게 했다.
젊고 재능이 있으며 아름답고 열정적인 카미유를 보고 한눈에 반한 로댕은, 동거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4 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카미유와 연인이 된다. 그 때 로댕의 곁에는 로댕의 아이까지 낳은 동거녀 '로즈 뵈레'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내동생 폴
그 당시 로댕이 카미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로댕이 얼마나 질풍노도같은 사랑에 빠져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나의 광폭한 연인이여
나의 불쌍한 머리가 아프다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다오.
오늘 저녁에 나는 당신을 찾기 위해 우리가 다니던 장소들을 찾아 헤맸다오.
죽음조차 나에게는 부드럽게 여겨지오!
나의 최후는 어찌나 길던지...
어찌하여 당신은 작업실에서 나를 기다리지 않았단 말이요?
어디에 있었소?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꼈는지...
나는 가끔 고통이 덜할 때에는 빈혈 같은 것을 느낄때가 있다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너무도 큰 고통이 남아 있다오.
카미유, 나의 사랑이여,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기가 다가옴을 느끼오.
내겐 이렇듯 고통이 계속되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는단 말이요?
나는 조각을 포기하오.
내가 만약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더라면, 내가 잊을 수만 있다면,
그렇지만 그런 곳은 없다오.
간혹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때도 없지 않다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나는 당신의 강한 힘을 느낀다오.
나를 가련하게 보아주오 , 나는 더 이상 어쩔수가 없다오,
나는 당신을 보지 않고서는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다오.
당신을 만날 수 없다면 끔찍한 광란이 있을 뿐이오.
파도
이제 끝이라오 나는 더 이상 작업하지 않는다오.
나의 못된 연인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한다오.
나의 카미유여,
나는 우정을 가지고 다른 어느 여인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오.
나의 모든 영혼은 당신에게 속해 있으니, 믿어주오.
나는 당신을 설득 할 수가 없고,
나의 말들은 무력하고, 나의 고통을 당신은 믿지 않으니...
내가 물어도 당신은 그마저 의심하는구려.
나는 오래전 부터 더 이상 웃지 않으며, 더 이상 울지 않으며,
더 이상 노래 할 수도 없다오...
모든 것이 따분하게 느껴지고,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오.
나는 내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더 이상 이해가 안 갈 정도라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무관하게 보여지기 때문이오.
나를 마음 아프게 했던 것들까지도 말이오.
당신 모습을 매일 볼 수 있게 해주오.
오직 당신의 너그러움만이 나를 구해줄 수 있다오
나의 당신에 대한 불타는 사랑은 너무도 순결하오,
당신이 나에게 동정을 가져준다면 그대 자신도 보상받게 될 것이오.'
왈츠
사십 대 중반의 중후한 남자 로댕에게 미모와 재능까지 겸비한 앳된 카미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만큼 매혹적인 상대였을 것이다. 허지만 이십 년 동안이나 로댕에게 모든 것을 받쳐 희생해 온 로즈 뵈레를 생각하면 로댕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몰염치한 인간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이면서 또한 작가와 모델, 조각작품의 공동 제작자가 되어 예술에 대한 창작세계를 더욱 풍요롭고 견고하게 만든다. 그들이 함께 하는 동안 카미유의 예술에 대한 천재성은 로댕을 자극했고 로댕은 카미유로부터 끊임없이 영감을 얻어, 두 사람은 많은 작품을 공동으로 제작한다.
(실제로 로댕의 작품 중에는 클로델의 작품과 흡사한 형태의 작품이 많다)
사쿤달라
로댕의 <키스>
1886년에 로댕은 카미유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만난지 3 년만의 일이었다. '6 개월 간의 이번 이탈리아 여행이 끝나면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소.' - 사랑의 약속을 담은 편지, 카미유가 그토록 기다리던 내용이였다. 뭇 여성들과 숱한 연문을 뿌려대며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던 로댕이 이 다재다능하고 사랑스러운 제자와 결혼약속까지 했으니 그 당시의 로댕이 얼마나 깊이 카미유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댕의 명작 ‘키스’(1886)와 카미유의 '사쿤달라(1888)가 프랑스 <예술인 상>을 수상한 이 시기는 두 사람의 사랑과 예술적 작업이 최상의 경지에 올랐던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 사이는 1892년을 전후해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로댕은 이 드세고 독점욕이 강한 여인에게 차츰 부담을 느꼈고, 카미유 또한 결혼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로댕에게 점차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결혼의 맹세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계속 로즈 뵈레를 자신의 옆에 두고 있었으니 카미유는 격분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로댕이 결코 로즈 뷔레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카미유를 끝없이
절망하게 했고, 카미유의 질투심은 결국 로댕에 대한 미움으로 변해갔다.
시편
로댕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커질 수록 카미유는 증오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그 감정들을 몽땅 자신의 작품에 쏟아 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로댕은 점차 이 여인에게 두려움을 느꼈으며 그 뜨겁던 사랑의 열기도 서서이 식어갔다. 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 작업하지 않았다.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로댕의 배신감에 이를 갈았던 카미유는 자신 만의 작품셰계를 구현하여 로댕에게서 독립하고자 마음 먹는다.
그런 카미유를 도우고자 로댕은 소리없이 후원자를 물색해 카미유에게 주문하도록 유도했으나 로댕의 이런 선의의 마음은 '카미유는 로댕의 판박이다'라는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 내리게 되면서 오히려 카미유의 분노에 기름을 뿌린 격이 되었다. 카미유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담아'중년'이라는 작품을 제작한다.
중년
나이 들어 어깨가 구부정한 한 남자가 무릎 꿇고 애원하는 젊은 여인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등 뒤론 늙고 추레해 마치 마귀를 연상시키는 한 여자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이 남자를 이끌고 있다. 젊은 여자는 절규하는 몸짓으로 이 남자를 붙잡으려 애쓰고 있다. 누가 봐도 로댕과 뵈레를 풍자한 것이 분명했다. 정부는 이미 거물이 된 로댕을 의식, 카미유의 이 작품의 구매를 거절한다.
허지만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아르튀르 드 매그레' 백작부인 같은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 독립의 기반도 마련하고 작품도 제작하며 다시금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 온다. 그런 그녀에게 행운의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그녀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던 남동생 폴이 결혼과 함께 외교관이 되어 중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또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카미유가 사랑했던 고향 숲속에 있는 괴물 같은 바위 '제앵'을 로댕이 제작하여 전시회에 출품하자 카미유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몽땅 부숴버린 채 작업실에서 칩거한다. 옛 연인이며, 영광속에 살고 있는 로댕이 자신의 작품을 훔쳐갔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그녀의 이성과 영감을 마비시켜 카미유의 정신세계를 망가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델이 모델이었던 로댕의 <다나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카미유는의 어머니에 의해 1912년 3월10일 빌르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외교관이었던 동생 폴 클로델 조차도 누이의 감금을 반대하지 않았다. 로댕은 카미유의 감금 소식을 알지 못하다가 아마도 대서특필했던 신문의 사설에 의해 그 사실을 알게됐을 것이다. 이 소식은 로댕을 혼란에 빠뜨렸고, 그는 마지막으로 모르하르트를 앞세워 카미유를 도와주려 했지만 1914 년 제1차 셰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로즈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버린다.
가을이 되자 다시 로마로 들어온 로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신의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빌르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감금돼 있던 카미유는 앙김으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몽드베르그 수용소로 이송된다. 이곳에서 그녀는 1943년 10월19일 사망하기 전까지의 30년 세월을 홀로 갇혀 지낸다. 그녀가 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 루이즈는 단 한번도 그녀를 방문하지 않았다. 카미유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여동생과 남동생까지도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환자의 가족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느 때든지 카미유를 자유롭게 퇴원시킬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애원
1942 년 여름이 끝나갈 때부터 카미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됐고, 1943년 10월 19일 오후 2시 카미유 끌로델은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서 79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녀의 애절한 사랑은 더없이 비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그녀의 작품은 1980년대 이후 재평가 받는다. 그녀의 바램처럼 그녀의 작품이, 많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것이다.
플륫 연주자
- 카미유가 동생 폴에게 보낸 편지
이제 나는 몸을 빼려 한다
사랑으로부터, 세상의 비웃음으로부터
사랑하는 폴,
일찌기 너를 따라 중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내겐 건너지지 않는 바다 하나 너무 깊었다
이제 혼자서 노를 저을 수 있겠다
로댕이란 바다를 건널 수 있겠다
폴, 나를 재촉하는 인어의 금빛 풀루트 소리 들리는가
저 황홀한 빛,
꿈 하나를 깨는 데 일생이 걸렸구나
지지 않는 햇살 같은 바다의 쪽빛 명성을 위해서
나는 죽어서도 더 불행해야 한다
로즈는 내 삶의 터전이오 그..녀..를..외..면..할.. 수..는..
로댕의 목소리는 나를 할퀴며 자라는 겁없는 손톱이었다
밤마다 깨어지며 덮치는 조각상들,
초인종은 울리지 않고 작업실 거미들은 탄성좋은 타액으로 나를 엮었다
그의 등을 향한 날들의 혼미한 정신
찢긴 팔다리 타고 올라 나의 뇌수를 뽑아내던 잔혹한 그리움의 대롱
맨발의 거리를 헤매도 바다는 끝내 내 발바닥 적셔주지 않았다
아, 일몰에 젖은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찢어발기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폴 네가 맞은편에 서 있기도 했던가
배에 올라야 할 시간이다,
사랑하는 폴,
파도 위 바람처럼 가벼워지는구나 너무 무거웠던 짐,
때가 되면 스스로 떠나지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다른 사랑,
이제서야 고모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 있었다, 라고 말 할 조카들의 병아리 같은 입
훗날이 미한할 뿐이다
Gold - 카미유 클로델 / Linda Eder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누군가 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는지 궁금해요
시작부터 우리에겐 선택은 없었어요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됐죠
내가 옳았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예요
충분히 열심히 노력했는지
싸움이 격해질 때 내가 포기했어야 했는지
하지만 나는 여기 서서 당신에게 맹세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내 목소리가 속삭임 뿐이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가 들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저 위의 흔들리는 달이 내게 붙잡을 수
있을만큼 가까이 다가 온 밤들이 있었답니다
나의 손은 그 금빛을 만질 수 있었어요
나의 마음은 끝까지 몰아치고
꿈으로 환하게 밝혀지고, 공포로 죄어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신이 아시기에
나는 살아있었죠
그래서 나는 지금 과거를 놓아주려 합니다
결국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주어진 삶은 살아나가야 하죠
눈은 감지 마세요
굳건하게 서서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추위에 맞서서 뜨겁게 불타올라요
어느 순간에서든... 금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기쁨이 있었죠
그 모든 것을 지나
나는 당당히 서 있답니다
내 목소리가 작은 속삭임일 뿐이었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가 들었을지도 모르잖아요
나의 삶은 저 위의 흔들린 달을 붙들었죠
그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날았어요
나는 금빛을 만질 수 있었어요
여기 나의 두 손으로...
나는 금빛을 붙들었어요
퍼온 곳. blog.daum.net/2004lhjj/7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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